|
|
출처: 한국 네티즌본부 원문보기 글쓴이: 청평
[역경의 열매] 김석태 (1-24) 평생의 약속 된 죽음 앞 기도 “이 목숨, 주님을 위해”
https://v.daum.net/v/20260306032144828
***간증: 1656. [역경의 열매] 김석태 (1) 평생의 약속 된 죽음 앞 기도 “이 목숨, 주님을 위해”
가족과 생이별은 생애 가장 큰 아픔
인민군 포로로 잡혀 죽을 고비 넘겨
국군 복무 거쳐 구세군 사관의 길로
50세에 지금의 아내 만나 전도의 삶
지난 23일 만 100세를 맞이한 구세군 한국군국 김석태(오른쪽) 사관과 부인 임정선 사관이 구세군 정복을 입고 나란히 서 있다. 구세군 제공
백수(白壽·99세)를 넘어 100년을 살고 보니 비로소 고백하게 된다. 내가 백 년을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대로 살아진 것이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마치 예레미야 선지자의 기도처럼 말이다.
내 삶을 돌아보면 내 의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시대의 비극이 나를 덮쳤다. 1926년 평안남도 영원에서 태어나 일제 치하 20년, 북한 공산 치하 5년, 거제도 포로수용소 3년,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70여년을 살았다. 그 모진 세월 속에서도 가장 시린 아픔은 인민군 징집으로 생이별한 아내와 갓난쟁이 딸 ‘숙이’였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100년의 세월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 가시가 됐다. 통일되면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기다림으로, 나는 50세가 다 되도록 홀로 지냈다.
그 절망 속에서도 나를 버틸 수 있게 한 건 50년 9월 서울 마포구 양화진 앞 모래사장 구덩이에서 하나님께 바친 서원이었다. 당시 나는 인민군 징집병으로 끌려왔다가 포로가 된 신세였다. 그해 7월 20일 고향 평남 영원에서 징집된 뒤 미군 폭격기를 피해 밤마다 걷고 또 걸어 40여일 만에 서울에 도착한 직후였다. 미군들은 우리를 속옷 차림으로 만든 뒤 미리 파놓은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죽음의 공포가 눈앞에 다가왔다.
“주님, 살려만 주신다면 이 목숨, 주님을 위해 온전히 바치겠습니다.” 그때 온 힘을 다해 기도했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나도 모르게 입술에서 찬송이 흘러나왔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평남 성천 유학 시절, 하숙집 장로님 댁에서 익혔던 노래였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 한복판, 그 좁은 흙구덩이 속에서 나는 있는 힘껏 찬양했다. 그 경험은 나를 온전히 하나님 앞으로 이끌었다.
그때의 기도는 내 평생의 약속이 됐다. 기적처럼 살아난 나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와 국군 복무를 거쳐 56년 구세군 사관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35년을 목회자로 살면서 사관학교 교장을 맡고 사령관이 돼 교단을 이끌 때도 내 마음은 하나였다. “마음은 하나님께, 손은 이웃에게.” 나는 이 가치를 붙들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곁을 지키며 덤으로 얻은 생명을 갚으려 애썼다.
은퇴 후에도 50세 늦은 나이에 만나 내 삶의 빈 곳을 채워준 아내 임정선 사관과 함께 서울 압구정 거리에서 노방전도를 했다. 우리는 앰프를 들고 나가 힘껏 찬양을 불렀다. 75년 전 절두산 흙구덩이 속에서 죽음의 공포에 떨며 불렀던 그 찬송을, 살아남은 자의 의무로 세상에 다시 전하고 싶었다.
지금도 100세의 육신은 쇠약하나 영혼은 또렷하다. 이제 떨리는 손으로 지난 한 세기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긴다. 이것은 김석태 한 개인의 회고록이 아니라 죽음의 자리에서도 찬양하게 하시고 끝내 살려내신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에 대한 증언이다.
* [역경의 열매] 김석태 (1) 평생의 약속 된 죽음 앞 기도 "이 목숨, 주님을 위해"
* [역경의 열매] 김석태 (2) 교회 멍석 위에서 배운 정체성 "나는 한국 사람이구나"
* [역경의 열매] 김석태 (3) 성육신의 진리 깨닫고 노동당원증 대신 신앙 선택
* [역경의 열매] 김석태 (4) 총알받이 투입 전 담배 한 모금은 하나님의 역사였다
* [역경의 열매] 김석태 (5) 죽음의 공포 앞 터져나온 찬송가가 만든 기적
* [역경의 열매] 김석태 (6) 처참한 포로 생활 중 신학적 스승 된 임 목사와 만나다
* [역경의 열매] 김석태 (7) '편한 자리'보다 '남을 살리는 자리'로 예비하신 하나님
* [역경의 열매] 김석태 (8) "환자만 두고 갈 수 없다" 자유의 문 앞에서 돌린 발길
* [역경의 열매] 김석태 (9) 갈 곳 없는 빈손의 전역병… 구세군 사관 만든 '전우애'
* [역경의 열매] 김석태 (10)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현장 부대끼며 목회자로 성장
* [역경의 열매] 김석태 (11) 전쟁 중에도 꿈꾸던 소년, 사관학교 강단에 서다
* [역경의 열매] 김석태 (12) 낮에는 교관, 밤에는 학생으로… 주경야독의 삶
* [역경의 열매] 김석태 (13) 영국서 배운 '청빈 정신'… 안락한 삶의 유혹 뿌리쳐
* [역경의 열매] 김석태 (14) 23년 만에 닿은 고향 소식… 평생 '침묵의 기도'로 승화
* [역경의 열매] 김석태 (15) 제자로 만난 임정선 사관, 동료에서 부부의 연으로
* [역경의 열매] 김석태 (16) 교회 문턱 밖에 길 잃은 양 찾아 복음 들고 거리 전도
* [역경의 열매] 김석태 (17) "차라리 무능할지언정 온유한 지도자가 되게 하소서"
* [역경의 열매] 김석태 (18) "사역의 참된 열매는 복음 심긴 사람"… 빈손의 은퇴식
* [역경의 열매] 김석태 (19) 은퇴 후에도 계속 이어진 압구정 한복판 노방 전도
* [역경의 열매] 김석태 (20) 삶의 터전이 곧 전도 현장이자 우리의 새로운 예배당
* [역경의 열매] 김석태 (21) 진정한 정의와 자유는 오직 하나님 앞에 설 때
* [역경의 열매] 김석태 (22) 진짜 정의와 자유는? 기독교적 가치관에 바탕 둬야
* [역경의 열매] 김석태 (23) 전택부 선생과 에밀 브루너의 소망 담은 300권의 책
* [역경의 열매] 김석태 (24·끝) 산 것이 아니라 살아진 삶… 매 순간이 하나님의 섭리
<약력>△1926년 평남 영원 출생 △50년 인민군 강제 징집 후 남하 △56년 육군 병장 전역 △56년 구세군사관학교 입학 및 사관 임관 △영국 국제사관대학(ICO) 수료 △구세군사관학교 교장, 제17대 구세군 한국군국 사령관, 서초종합사회복지관장 역임
정리=김용현 기자 face@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석태 (2) 교회 멍석 위에서 배운 정체성 “나는 한국 사람이구나”
장판값보다 배움을 더 귀하게 여긴
하숙집 할머니 꾸중에 정신이 번쩍
광복 되자마자 장로님과 교회 출석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정체성 배워
1937년부터 시작된 이성봉 목사의 평양 사경회 중 38년 동대원교회 집회 현장을 혜촌 김학수 화백이 85년에 재현한 그림이다. 인파가 몰려와 창문 밖에서까지 말씀을 경청하는 당시 부흥회의 뜨거운 열기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성봉선교회 제공
나는 1926년 평안남도 영원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마을에서 깐깐하기로 소문난 유학자였고, 내게 기독교는 그저 ‘가까이해선 안 될 곳’이었다. 일제 말기, 학생이 교회에 나가는 건 퇴학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내 인생이 바뀐 건 14살 무렵, 국민학교 우리 반에서 유일하게 평남 성천으로 중학교 유학을 떠나면서다. 나는 읍내의 한 장로님 댁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나와 친구는 냉기를 견디다 못해 아궁이에 장작을 쑤셔 넣었다. “따뜻하게 자보자”라며 욕심을 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방바닥 장판이 새카맣게 타 있었다.
남의 집 귀한 방을 태웠으니 쫓겨날 게 뻔했다. 친구는 학교도 못 간 채 이불 속에서 벌벌 떨고 있었고, 내가 학교를 다녀오니 하숙집 주인 할머니가 이를 알아챘다. 우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쏟아진 호통은 단순한 꾸중이 아니었다. “야, 이놈들아! 방바닥 태워 먹었다고 학교 안 간다는 게 말이 되냐? 너희들이 앞으로 나라를 세울 사람들인데!”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학교에서는 ‘황국신민이 되라’고 가르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 집 어른들은 장판값보다 조선 아이들의 배움이 끊기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마자 장로님 내외는 교회로 달려갔다. 나는 그 뒤를 따랐다. 당시 시골 교회에는 의자가 없었고, 바닥에 거친 멍석만 깔려 있었다. 어른들은 그 멍석 위에 무릎을 꿇고 하염없이 울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독립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아, 나는 일본 사람이 아니구나. 나는 한국 사람이구나.’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내 정체성을, 멍석 위에 엎드린 기독교인들의 등을 보며 배운 것이다. 그날부터 교회를 나갔다. 예수가 누군지, 믿음이 뭔지는 몰랐지만 내게 신앙의 시작은 곧 애국이었다.
얼마 후 방학을 맞아 고향 영원에 내려갔다. 나는 할아버지께 하숙집에서 겪은 ‘장판 사건’과 해방 날의 모습을 말씀드렸다. 묵묵히 듣던 유학자 조부님의 반응은 단호했다. “석태야, 딴생각 말고 그 집으로 돌아가라. 졸업할 때까지 그 집에 꼭 붙어 있어라. 방바닥 태운 것보다 너희 장래를 걱정하는 그분들이야말로 진짜 애국자다.”
다시 성천 하숙집에 돌아간 나는 그해 겨울방학, 인근 강동에서 열린 부흥회에 참석했다. 강사는 ‘한국의 무디’라 불리던 이성봉 목사였다. 강단에 선 그는 자신의 치부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젊은 시절 방탕하게 살다 골막염으로 다리를 절단할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을 만났다는 고백이었다. “썩어가는 다리를 붙들고 회개했을 때 하나님이 살려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죄를 토해내야 삽니다.”
일주일간 이어진 집회 후, 가슴속에 설명할 수 없는 뜨거운 불덩이가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내 안에 기름을 부어주신 분은 따로 있었다. 어머니가 4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신 뒤 우리 집에 신약성경과 찬송가를 가지고 시집오신 새어머니였다.
***[역경의 열매] 김석태 (3) 성육신의 진리 깨닫고 노동당원증 대신 신앙 선택
농업학교 졸업 후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
노동당 가입하란 교장 압박 심해졌지만
성육신의 신비 믿어지자 미련 없이 사표
고향 내려와 낮엔 농사 밤엔 침술 익혀
1916년 촬영된 평남 영원군 영원읍 전경으로 김석태 사관의 고향이자 신앙의 터전이었던 마을의 옛 풍경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중학교를 졸업하고 성천 농업고등학교 1학년 때 새어머니를 맞았다. 유교 집안이었지만, 신약성경과 찬송가집을 들고 온 어머니는 묵묵히 신앙을 지켰다. 영하 20도의 혹한에도 어린 동생을 업고 교회를 찾는 며느리의 지극정성에 할아버지마저 마음을 여셨다.
평생을 유학자로 살아온 할아버지에게 개종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굿이나 제사가 예사였던 마을 분위기 속에서도 1년에 한 번 오시는 순회 목사님을 기꺼이 안방으로 모셨다. “우리 집은 일 년에 한 번 목사님과 드리는 예배가 곧 안택이다.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
할아버지의 선언은 기적이었고 내게는 응답이었다. 내심 새어머니가 신자였기를 바랐던 나는 어머니의 짐 속에서 낡은 성경을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뻤다. 나는 어머니가 가져온 성경을 펴들고 말씀을 받아들였고, 진리가 내 영혼을 채우는 것을 느꼈다.
1946년, 나는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그토록 꿈꾸던 국민학교 교사가 됐다. 성적이 우수해 곧바로 교단에 설 수 있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공산 정권은 학교를 사상 교육장으로 만들었고 교장은 내게 북조선노동당 입당을 강요했다. “김 선생, 당에 가입하고 예수를 관두시오. 싫다면 나가주시오.” 선택의 기로에서 나는 밤마다 기도하며 ‘과연 예수가 내 꿈을 포기할 만큼 실존하는 진리인가’를 묻고 또 물었다.
아무런 응답이 없다고 느낄 때쯤 하숙집 할머니가 기뻐하며 내 방으로 들어왔다. 장판을 태웠을 때 나를 감싸주셨던 분이셨다. 그가 내게 건넨 책은 인도의 사도로 불리는 썬다 싱의 ‘도성인성’이었다.
“목자가 양을 안심시키려 양가죽을 쓰고 다가갔듯, 하나님도 인간을 사랑해 사람의 옷을 입고 오셨다.” 책 속 예화는 내 마음을 꿰뚫은 듯했다. 성육신의 신비가 가슴으로 믿어지자 나는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교사직은 잃었지만 노동당원증 대신 신앙 양심을 택한 나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크리스천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평남 영원에서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침술을 익히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분필 대신 호미를 잡는 게 처음엔 어색했지만 흙을 만지는 삶에는 거짓이 없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사범학교가 아닌 농업학교로 보내셨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훗날 신앙을 위해 빈 들에 섰을 때 가족을 먹여 살릴 ‘생존의 기술’을 예비하신 섭리였다. 밤에는 병원 없는 마을 이웃들에게 무료로 침을 놓으며 나는 농부로, 의생으로, 신앙인으로 단단해져 갔다.
무엇보다 나를 지탱해준 건 가족이었다. 한 살 연상의 아내 방영련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살배기 딸 숙이. 흙투성이가 된 나를 반기는 가족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평화였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소식이 고요하던 마을을 흔들었고 곧이어 청년들을 향한 인민군의 소집 명령이 우리 집 대문 앞까지 들이닥쳤다.
***[역경의 열매] 김석태 (4) 총알받이 투입 전 담배 한 모금은 하나님의 역사였다
신체검사서 ‘성분 불량’으로 쫓겨났지만
인민군 전세 기울자 ‘총알받이’로 재징집
팔공산 전투 목전 “가서 죽으라” 명령에
“제 손에 피 묻히지 않게 해 주소서” 기도
1950년 6월 28일 서울 함락 직후, 나뭇가지로 위장한 북한군 병사들이 중화기를 어깨에 메고 대열을 이루어 서울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 국민일보DB
전운은 6·25가 터지기 전부터 감돌았다. 1950년 3월 19일 마을 민청 회의실. 인민군 장교가 청년들을 모아놓고 서슬 퍼렇게 외쳤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청년들은 손을 들라!” 좌중의 19명 중 18명이 번쩍 손을 들었지만 나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이 시키지 않는데 손을 드는 건 비겁한 행동입니다.” 내 대답에 장교는 비웃으며 나갔다. 이는 다가올 폭풍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6월 25일 새벽, 전쟁이 터지자 북한 정권은 이를 ‘정의의 전쟁’이라고 포장했다. 거짓 선전이었지만 외부와 차단된 우리에겐 강요된 진실이기도 했다. 개전 초기인지라 징집 신체검사를 받았지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당성이 투철한 핵심 당원만 선발하던 시기였다. 기독교인이자 지주 계급으로 분류된 나는 소위 ‘성분 불량’으로 쫓겨났다. 하지만 그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전세가 기울자 ‘총알받이’가 필요했는지 7월 20일 결국 재징집됐다. 가족과의 작별은 짧고 비통했다. 빈손으로 끌려가던 내 가슴 주머니에는 꼬깃꼬깃한 소책자 한 권이 들어 있었다. 교사 시절 하숙집에서 받은 썬다 싱의 ‘도성인성’이었다. 성경을 가져갈 수 없는 상황에서 ‘말씀이 육신이 됐다’는 진리를 담은 그 책은 내게 유일한 성경이자, 교회였다.
평양에서 서울까지의 행군은 생지옥이었다. 미군 폭격기가 두려워 낮에는 숲속에서 숨죽여야 했다. 나는 품속 책을 꺼내 읽으며 미치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하지만 정작 끔찍한 건 내 손에 들린 소총이었다. 나는 행군 내내 울부짖듯 기도했다. “하나님, 제 손에 피 묻히지 않게 해주소서. 사람을 죽이지 않게 해주소서.”
9월 초, 격전지였던 대구 팔공산 전투 투입을 목전에 두고 “가서 죽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사지로 떠나기 직전, 트럭 위에서 누군가 내게 담배 한 개비를 툭 던져줬다. “동무, 마지막 가는 길인데 이거라도 피워보라우.”
평생 술 담배는 입에 댄 적도 없었다. 하지만 곧 생의 마지막 순간이 온다고 생각하니 묘한 심정이 들었다. 불을 붙여 딱 한 모금 깊게 빨았다. 독한 연기가 목을 넘어가는 순간, 머리가 도끼로 찍힌 듯 아파오더니 고열과 오한이 동시에 덮쳤다. 잠복해 있던 학질(말라리아)이 담배 연기에 반응해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그날 밤, 장교가 소리쳤다. “진짜 아픈 놈 있으면 나와라. 꾀병이면 즉결 처분이다!” 머리가 터질 듯한 고통에 비틀거리며 대열 밖으로 나갔다. 700여명의 부대원 중 열외가 된 건 극소수였다. 나머지 동료들은 그 길로 팔공산 전선으로 떠났고 대부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멀어져 가는 트럭을 보며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피 묻히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들어주기 위해 하나님은 하필 담배 한 모금이 부른 질병으로 역사했다. 죽음의 골짜기로 향하는 동료의 뒷모습 앞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는 서늘한 부채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역경의 열매] 김석태 (5) 죽음의 공포 앞 터져나온 찬송가가 만든 기적
서울 수복 후 친구와 민가에 숨었다가
국군 치안대 통해 미군 위생부대 인계
양화진 모래사장 구덩이에서 죽기 직전
찬송 부르며 주의 종으로 살리라 다짐
1926년 선교사관으로 한국에 들어와 고아 돌봄과 구제 사업에 헌신하다 위암으로 생을 마감한 마리 위도선(Mary Widdowson) 선교사관의 안장식이 56년 5월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서 구세군 관계자와 조문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되고 있다. 구세군역사박물관 제공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과 함께 거리엔 국군의 군화 소리가 깔렸다. 인민군 복장을 한 나는 친구 김태섭과 함께 혜화동 인근의 한 빈집으로 숨어들었다. 피란을 떠난 어느 교회 장로의 댁이었다.
얼마 후 주인인 장로가 돌아왔다. 바지저고리 차림의 그를 보자마자 대뜸 “예수 믿는 분 아니냐”고 물었다. 장로는 인민군복을 입은 우리를 경계하며 뒷걸음질쳤다. 그는 “불안하니 가지고 있는 총과 실탄을 다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나는 주저 없이 함께 숨어든 인민군들을 모두 설득해 소총과 탄환을 모아 건넸다.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느껴졌다. 그러자 장로는 우리를 방공호에 숨겨주고 기도해줬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국군 치안대를 통해 곧바로 서울 문리대 옆 미군 위생부대로 인계됐다. 미군들은 포로들의 옷을 모두 벗겼지만 내 팔에 채워진 적십자 완장을 보더니 제지했다. 한 미군 병사가 내 러닝셔츠 가슴팍에 매직으로 굵은 글씨를 써넣었다. ‘적십자 요원(Red Cross Man)’. 그 글귀 덕분에 나는 옷을 입은 채 군화까지 신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안도는 잠시였다. 오후가 되자 트럭이 우리를 싣고 양화진으로 향했다. 미군은 모래사장 위에 구덩이를 파게 했다. “해 떨어지면 죽인다.” 포로들 사이에서 절망적인 소문이 돌았다. 친구 태섭은 “부모님 얼굴이 떠올라 눈물만 난다”며 떨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자 미군 지프차 한 대가 다가왔다. 미군 대령이 내리자 나는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구덩이 밖으로 기어나갔다. 대령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짧게 배운 영어를 울부짖었다.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I’m a christian, not communist!)”
애절한 눈빛을 보냈지만 대령은 무심하게 지나쳤다. 그 순간 옆에 있던 미군 병사가 개머리판으로 내 어깨를 후려쳐 다시 구덩이 속으로 처박았다. 처절한 절망의 밑바닥, 나는 흙구덩이 속에서 떨리는 입술로 하나님께 서원했다. “하나님, 이 죽음의 골짜기에서 저를 살려만 주신다면 남은 생은 오직 주를 위해 바치겠습니다.” 나는 불현듯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죽음의 공포가 찬송 소리에 묻혀 희미해질 때쯤, 해는 완전히 저물었다.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타라!”는 고함과 함께 우리는 마포형무소로 이송됐다. 형무소에 도착하자마자 미군들이 우리 몸에 하얀 가루를 뿌렸다. 공포에 질린 우리는 독가스인 줄 알고 “이제 진짜 죽는구나” 하며 비명을 질렀다. 단지 살충제였다는 걸 설명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형무소 환경은 열악했다. 모두가 갈증이 극에 달해 옆 사람의 오줌이라도 받아 마시고 싶을 때였다. 가슴의 ‘적십자 마크’를 본 미군 병사가 내게만 수통을 건네며 혼자 마시라고 눈짓했다. 하지만 갈라진 입술을 내민 채 나를 쳐다보는 동료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미군 몰래 수통을 옆 사람에게 건넸다. 물통은 포로들의 떨리는 손을 타고 조용히 돌았다.
***[역경의 열매] 김석태 (6) 처참한 포로 생활 중 신학적 스승 된 임 목사와 만나다
형무소 연대장으로 있던 친구 도움으로
채석장 노동에서 빠져 연대 행정서기로
시체 더미서 임한상 목사 구해 병간호
밤마다 예배드리며 제자로서 세례받아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 구세군 사관들이 빈민 구호를 위해 시민들에게 쌀과 의류 등 긴급 물자를 배급하고 있다. 구세군역사박물관 제공
마포형무소를 거쳐 인천 소년형무소로 옮겨진 뒤 생활은 더 처참해졌다. 포로들은 매일 산꼭대기 채석장까지 돌을 지어 날라야 했다. 밥이라고 나오는 건 훅 불면 날아갈 듯한 안남미(베트남 쌀) 한 공기가 전부였다. 씹으면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는 밥알은 고된 노동을 견디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 모진 시간을 버티게 해준 건 정부가 교화용으로 넣어준 신약성서 한 권이었다. 나는 휴식 시간마다 흙바닥에 앉아 성경을 읽었다. 양화진에서의 생존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채석장 바닥에서 다시 한번 다짐했다. “이곳을 살아서 나간다면 평생 주의 종이 되겠습니다.”
기회는 뜻밖의 순간에 찾아왔다. 형무소 연대장으로 있던 고향 친구 방응규를 만난 것이다. 그가 내게 영어를 할 줄 아냐고 물었다. 나는 중학교 때 배운 “아이, 마이, 미, 마인(I, my, me, mine)” 정도를 더듬더듬 읊었다. 당시엔 그 정도만으로도 행정 업무를 볼 수 있었다. 친구 덕분에 나는 채석장 노동에서 빠져 연대 행정서기가 됐다. 미군이 적어준 ‘적십자 요원’ 표식에 행정 완장을 다시 찬 것이다. 십여명이 함께 지내 발 뻗기도 힘든 좁은 수용자방에서 행정실 구석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느 날 “수용소 안에 아직 살아있는 목사가 한 명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시신을 임시로 모아둔 천막을 찾아갔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그곳, 싸늘한 주검들 사이에 뼈만 앙상한 노인 한 명이 누워 있었다. 임한상 목사였다. 그는 인민군에게 잡혀 있다가 인천상륙작전 때 미처 처형되지 않고 방치된 상태였다.
나는 그를 업어 행정실로 데려와 병간호를 하면서 함께 지냈다. 좁은 방이었지만 밤마다 둘만의 예배를 드렸다. 임 목사는 쇠약해진 몸을 일으켜 로마서 8장을 펴고 설교했다. 주제는 ‘세 가지 탄식’이었다. “첫째는 전쟁으로 망가진 ‘피조물의 탄식’이고, 둘째는 구원을 기다리는 ‘우리 성도들의 탄식’일세. 지금 배고픔과 죽음의 공포에 떠는 자네와 나의 신음이 바로 이것이지.”
임 목사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내 손을 잡고 말했다. “하지만 절망하지 말게. 셋째는 ‘성령의 탄식’이야. 우리가 너무 힘들어서 기도조차 못 할 때,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해 하나님께 빌어주신다는 뜻일세.” 극한의 상황에서 듣는 그 말씀은 설명할 수 없는 위로였다. 임 목사는 내게 신학적 스승이 되었고, 나는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1951년 1·4 후퇴가 시작되자 우리는 부산으로 향하는 상륙함에 실렸다. 배 안은 콩나물시루 같았다. 발 디딜 틈이 없어 사람들은 선실 벽 못에 밧줄을 걸고 몸을 매단 채 쪽잠을 잤다. 위생 상태는 최악이었다. 오줌통으로 갈 수가 없어 제자리에서 용변을 보는 이들이 많았다. 위층 침상 틈새로 오물이 뚝뚝 떨어져 아래층 사람들이 뒤집어쓰는 일이 다반사였다.
3일간의 지옥 같은 항해 끝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부산 가야 수용소를 거쳐, 우리는 다시 배를 타고 최종 목적지인 거제도로 향했다. 황량한 천막촌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훗날 ‘광야 신학교’라 불리게 될 현장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석태 (7) ‘편한 자리’보다 ‘남을 살리는 자리’로 예비하신 하나님
‘광야 신학교’ 이끄는 임 목사 설교로
지옥 같은 수용소 생활 근근이 버텨
부패한 행정관들 피해 병원 근무 지원
며칠 뒤 폭동으로 전 동료들 거의 사망
1952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미군 군목 옥호열 선교사가 포로들을 대상으로 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 제공
1951년 2월, 거제도 제81포로수용소. 17만명의 포로가 뒤엉킨 그곳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또 하나의 전쟁터였다. 밤이면 ‘해방대(친공 포로)’가 죽창을 들고 설치며 인민재판을 열었다. 살기가 감도는 그곳에서 유일한 숨구멍은 임한상 목사 등이 이끄는 천막 교회였다.
우리는 그곳을 ‘광야 신학교’라 불렀다. 번듯한 건물도, 종이도 없었다. 버려진 시멘트 포대 종이나 담뱃갑 은박지를 펴서 성경 구절을 받아 적었다. 인천 형무소 시체실에서 내가 업어왔던 임 목사는 그곳에서 ‘포로들의 영적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그는 뼈만 남은 앙상한 몸으로 강단에 서서 “이 죽음의 골짜기에도 하나님은 계신다”고 외쳤다.
그 사역의 뒤에는 미군 군목 옥호열(Harold Voelkel) 선교사가 있었다. 그는 수용소를 제집 드나들듯 하며 우리에게 찬송가를 가르치고 어렵게 구한 신학 서적들을 공급해 주었다. 옥 선교사는 포로들을 적군이 아닌 형제로 대했다. 그의 헌신 덕분에 50년 성탄절에는 눈보라가 치는 허허벌판에서 4000명의 포로가 모여 눈물의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나는 그 덕분에 말씀을 얻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당시 나는 수용소 내 급식 담당관을 맡고 있었다. 배고픈 시절, 음식을 나누는 권한은 컸지만 동시에 부패의 온상이기도 했다. 포로 간부들은 힘없는 자들의 식량을 빼돌렸고, 나는 그 죄악의 사슬을 두고 보기 힘들어 괴로워했다. “하나님, 저를 이 죄짓는 자리에서 옮겨주십시오.” 내 고민을 눈치챈 임 목사가 어느 날 넌지시 길을 열어주었다. “김 선생, 미 64야전병원에서 위생병을 모집한다네. 자네가 가면 딱 맞을 걸세.”
편한 자리를 버리고 피고름 만지는 병원 일을 택하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스승의 권유를 하나님의 응답이라 믿고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그렇게 행정실을 떠나 미 64야전병원으로 소속을 옮겼다.
야전병원은 총칼 대신 붕대를 드는 곳이었다. 옥 선교사의 지도 아래, 우리는 친공 포로들까지 치료해야 했다. 어제까지 “반동분자”라며 죽창을 겨누던 자들의 찢어진 살을 꿰매고 고름을 짰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몸으로 배운 현장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좌우 이념을 넘어 생명을 살리는 법을 배웠다.
병원으로 옮긴 지 딱 한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내가 떠나온 81수용소 행정실에서 피비린내 나는 폭동이 터졌다. 소식은 참혹했다. 공산 포로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불과 한 달 전까지 나와 함께 근무했던 행정실 동료 17명 중 16명이 살해당했다. 그들은 죽창과 몽둥이에 맞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훼손됐다.
사망자 명단을 확인하며 나는 숨이 턱 막혀왔다. 만약 내가 편한 급식 담당관 일에 안주했다면, 혹은 원수를 치료하기 싫어 수용소에 남았다면, 내 이름도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임 목사를 통해 나를 미리 빼내셨고 ‘남을 살리는 자리’로 옮기심으로써 내 목숨을 건져주셨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뒤로, 먼저 간 동료들에 대한 무거운 부채감이 또 한 번 밀려왔다.
***[역경의 열매] 김석태 (8) “환자만 두고 갈 수 없다” 자유의 문 앞에서 돌린 발길
반공포로 석방 조치로 포로들 자유 찾아
떠났지만 중환자들만 두고 나갈 수 없어
수용소 지켜… 휴전협정 후 판문점 이송
북측의 설득·회유 견디고 90일 만에 석방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풀려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반공포로들이 1953년 6월 18일 태극기와 유엔기를 앞세우고 환호하고 있다. 거제시 제공
거제 포로수용소 제64야전병원으로 보직을 옮긴 뒤 몸은 고달팠지만 마음은 평안을 찾았다. 낮에는 썩어가는 환부를 소독하고, 밤에는 고통에 신음하는 환자들의 손을 잡아주는 일에 매진했다. 눈앞에 실려 온 사람을 하나라도 더 살려내는 일이 내게 주어진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뒤인 1953년 6월, 휴전 회담이 포로 송환 문제로 난항을 겪자 수용소 내부는 다시 술렁거렸다. 반공포로들 사이에서는 “이대로 있다간 북으로 끌려간다”는 공포가 퍼져나갔다. 불안감은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입원하게 된 인민군 장교 김 소위를 향한 적개심으로 번졌다.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리던 그가 “죽더라도 고향의 부모님을 뵙겠다”며 끝내 북송을 택했기 때문이다. 격분한 반공포로들은 “배신자를 살려 보낼 수 없다”며 그를 노끈으로 목 졸라 죽이려는 끔찍한 모의까지 꾸몄다.
그때마다 기독교인 군의관이 나섰다. 그는 흥분한 포로들을 가로막으며 “신앙인인 우리가 저항 못 하는 환자를 해쳐서야 되겠느냐”고 호소했다. 그의 신앙 고백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여기고 나 역시 그를 거들며 김 소위 곁을 지켰다. 눈앞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밤을 새웠다.
6월 18일 새벽 2시, 억수같은 빗소리 사이로 함성이 터졌다. 이승만 대통령의 조치로 ‘반공포로 석방’이 단행된 것이다. 철조망이 뚫렸다는 소식에 병원 막사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다.
“김 선생! 문 열렸다! 빨리 짐 싸!” 동료들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환자복을 입은 포로들도 성한 다리를 절뚝이며 빗속으로 뛰쳐나갔다. 따라나서기만 하면 자유였고, 지긋지긋한 수용소 생활도 끝이었다. 하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거동조차 할 수 없는 중환자들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누군가 돌보지 않으면 꼼짝없이 죽어야 하는 목숨들이었다. “누워있는 환자들은 못 나가는데, 간호하던 내가 어떻게 혼자 나가겠나.”
탈출하지 못하고 남은 이들은 휴전협정 체결 후, 판문점 인근 중립지대로 이송됐다. 그곳에서 90일간의 설득 기간을 견뎌야 했다. 북측 포로 설득관들이 매일 찾아와 “공화국으로 돌아가자”며 회유하는, 피 말리는 심리전의 시간이었다. 반공포로들의 저항은 처절했다. 북측 설득관이 마이크를 잡고 선전 방송을 시작하면, 포로들은 받은 양철 식기를 숟가락으로 미친 듯이 두드렸다. “챙, 챙, 챙, 챙!” 수천명이 동시에 두드리는 쇳소리에 설득관의 목소리는 완전히 묻혀버렸다. 어떤 이들은 설득관이 악수를 청하면 손에 숨겨둔 면도칼로 상처를 내며 저항하기도 했다.
나는 묵묵히 달력의 날짜를 지워나갔다. 마침내 54년 1월 20일, 석방이 결정됐다. 중립지대를 벗어나 대한민국으로 돌아오면서 내게는 또 다른 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징집 대상자들은 자동으로 국군에 편입된 것이다. 나는 한 달간의 특별 휴가를 받아 처음으로 서울 구경도 하고 자유를 만끽했다. 이후 훈련소로 들어가 정식으로 군번을 받고 강원도 춘천의 부대로 배치받았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이라도 하신 듯 그 춘천에서, 구세군과 처음 만나게 된다.
***[역경의 열매] 김석태 (9) 갈 곳 없는 빈손의 전역병… 구세군 사관 만든 ‘전우애’
군에서 도움 준 안정묵 사관 추천으로
신학교 입학하려는데 수중엔 무일푼
근무했던 군 부대장 찾아가 사정 호소
옛 전우들 십시일반 모아 입학비 마련
김석태(뒷줄 오른쪽 네 번째) 사관이 수학했던 구세군사관학교 제38기 졸업 기념사진. 사관후보생들이 1957년 서울 중구 덕수궁 중화전 앞에서 예복을 입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구세군역사박물관 제공
1954년 1월,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떠나 강원도 춘천 공병대대에 배치됐다. 어느 날 동료가 “시내에 구세군 교회가 새로 생겼다는데 가보자”며 내 소매를 끌었다. 호기심에 이끌려 따라나선 그 길은 내 인생을 바꾸는 첫걸음이 됐다. 교회는 고단한 군 생활 중 내 영혼이 쉴 유일한 안식처가 됐다.
나는 3년 내내 주일 예배는 물론 수요일 저녁 예배까지 빠짐없이 교회를 지켰다. 그곳에서 만난 안정묵 사관은 타향살이하는 나를 깊은 신앙의 길로 이끌어줬다. 나는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함께 아이들을 돌보며 따뜻한 밥을 챙겨준 할머니 전도사도 내게 큰 귀감이 됐다.
56년 8월 마침내 의무 복무를 마치고 위병소를 나섰지만, 해방감보다는 막막함이 앞섰다. 포로수용소 시절 은인인 임한상 목사를 찾아가 서울 남대문 인근 ‘대동 한약국’ 실습생 자리를 추천받았다. 교회 장로가 운영하는 그 약방에서 약초 써는 법을 익혔다. 하지만 밤마다 돈 통을 쏟아놓고 늦게까지 돈을 세는 장로의 모습에서 깊은 회의를 느꼈다. ‘돈의 노예가 되지 말자.’ 나는 미련 없이 약국을 나왔다.
춘천 구세군 교회를 다시 찾았지만 안 사관은 자리에 없었다. 대신 전보 한 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세군 사관학교 입학. 급상경. 안정묵.’ 전보를 보고 급히 서울로 올라가 청량리역에서 안 사관을 만났다. 그는 “마침 신입생 한 명이 유고가 생겨 자리가 비었으니 사관학교에 가라”고 권했다. 운명적 부르심이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입학 비용으로 제복비 2만9000원이 필요했지만 수중엔 한 푼도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 문득 제대하던 날 임춘식 부대장의 당부가 떠올랐다. “김 병장, 갈 곳이 없으면 언제든지 나를 찾아오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는 춘천행 기차에 다시 올랐다.
부대장실을 찾자 임춘식 중령은 나를 반겼다. “부대장님, 주의 종이 되려고 신학교에 가는데 빈손입니다.” 사정을 들은 그는 흔쾌히 후생 담당관을 불렀다. “김 선생에게 1만원을 내주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옛 전우들도 십시일반 마음을 보탰다. 모두 군 생활 동안 기도로 맺어진 인연들이었다. 정보과에 자주 들르던 정 중위는 쌀 두 가마를 내줬다. 그는 과거 식당 반장이 시계 오작동을 이유로 나를 장작으로 구타할 때 “왜 사람을 때리냐”며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다.
자대 배치 첫날 내게 교회 출석을 허락해 주고 정보과 서기로 발탁해 준 정진하 선임하사관은 군용 담요 두 장을 챙겨줬다. 그의 아들 용석이가 열병으로 위독할 때 나의 합심 기도로 아이가 살아난 뒤로는 신앙 동지로 지내던 터였다.
쌀과 담요, 1만원을 실은 부대차가 춘천 시내로 내달렸다. 시장에서 쌀 두 가마를 판 돈과 1만원을 합치니 정확히 3만원이 됐다. 이불도 없이 입교해야 하는 처지를 딱하게 여긴 안 사관의 부인은 닭털 침낭 하나를 구해 정성껏 세탁하고 손질해줬다.
56년 9월, 나는 부대장과 전우들이 만들어준 기적을 배낭에 넣고 구세군사관학교 제38기생으로 입교했다. 하나님은 벼랑 끝에서 가장 정확한 방법으로 길을 예비해 두고 계셨다.
***[역경의 열매] 김석태 (10)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현장 부대끼며 목회자로 성장
구세군 병원 경리로 부임해 일하던 중
경영난으로 낙태 수술한단 사실 알게돼
신앙 양심으로 참을 수 없어 강력 반대
가난한 환자들 진료비도 애써 모른 척
김석태 사관이 1959년 부임해 경리로 사역했던 충북 영동 구세군병원 전경.구세군역사박물관 제공
1959년 사관학교 졸업 후 2년간의 교관 생활을 마치고 충북 영동의 구세군병원 경리로 부임했다. 어느 날 원무과 장부를 정리하던 내 눈에 ‘소파 수술비’라는 낯선 항목이 들어왔다.
의학 용어를 잘 몰랐던 나는 지나가는 의사를 붙잡고 물었다. “선생님, 이 소파 수술이라는 게 도대체 뭡니까?” 의사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아, 그건 태아 낙태 수술입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기독교 병원이 운영난 타개를 위해 생명을 지운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원장과 선배 사관들이 모인 조회 시간, 나는 장부를 내려치면서 말했다. “다시는 우리 병원에서 소파 수술을 하지 마십시오. 만일 또다시 생명을 지우는 일을 한다면 제가 이 병원을 불살라 버리겠습니다.”
좌중이 얼어붙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사령관에게 ‘나를 파송한 이유인 줄 알고 병원을 태워버렸다’고 보고하겠습니다.” 나의 완강한 태도에 그날 이후 병원에서 낙태 수술은 자취를 감췄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살리기 위해 세워진 병원이 돈 몇 푼 때문에 가장 연약한 생명을 해치는 도살장이 되는 것을 내 신앙 양심으로는 도저히 용인할 수 없었다.
나의 기질은 3년 전 사관학교 시절 스승인 권경찬 교장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56년 입교 당시 만난 그는 양반 가문의 한학자 출신이었으나 강단에서는 세상 지식이나 규율보다 성경의 본질을 강조했다. 규정상 구세군 사관생도는 검은 구두를 신어야 했지만 나는 돈이 없어 제대할 때 신고 나온 갈색 군화를 졸업 때까지 신었다. 복장 검열 시간, 권 교장은 내 낡은 갈색 군화를 보고도 침묵했다. 가난한 제자의 형편을 헤아린 배려였다. 규율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했던 스승의 가르침은 내 사역의 기준이 되었다.
영동 구세군병원에서 경리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병원은 가난한 환자들로 붐볐다. 규정대로라면 진료비를 받아야 했지만 돈이 없어 쭈뼛거리는 이들을 차마 독촉하지 못했다. “다음에 달라”고 말하고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다. 당시 병원에는 가망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 온 중증 결핵 환자가 유독 많았다. 하루가 멀다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들의 손을 잡고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비록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이었지만 그들과 부대끼며 나는 비로소 목회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별은 갑작스레 찾아왔다. 61년 6월 서울 구세군 청학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전국에서 유학 온 똑똑한 사관 자녀들을 돌보는 자리였다. 정든 구세군 영동교회 교우들이 손에 쥐여준 삶은 달걀을 받아 들고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차창 밖 풍경이 빠르게 흘러갔지만 내 머릿속은 한 가지 걱정으로 꽉 차 있었다. 나는 북한에서 농업고등학교를 나와 구세군 사관학교를 마친 것이 학력의 전부였다. 내가 맡을 학생들은 서울 명문대로 유학 온 사관 자녀 수재들이었다. ‘대학 문턱도 못 가본 내가 저 엘리트 학생들을 영적으로 지도할 수 있을까.’ 서울이 가까워질수록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다.
***[역경의 열매] 김석태 (11) 전쟁 중에도 꿈꾸던 소년, 사관학교 강단에 서다
농고 졸업에도 청학관 사감으로 부임
지식 대신 성경 강해로 학생들 가르쳐
62년 구세군사관학교 교관 임명 받아
후배 사관 기르는 새로운 소명 발견
1976년 1월 9일 열린 ‘승리자 학기 사관 5년 평가 강습회’의 기념사진. 앞줄 오른쪽이 김석태 사관, 왼쪽 세 번째가 훗날 국제 구세군 총사령관이 된 폴 레이더 사관이다. 구세군역사박물관 제공
1961년 6월 구세군 청학관 사감으로 부임했다. 이곳은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 온 구세군 사관 자녀 50여명이 머무는 대학생 기숙사였다. 부임 첫날 나는 기대감에 부풀기보다 부담감을 느꼈다. 당시 내 학력은 북한에서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전부였지만 내가 지도해야 할 학생들은 내로라하는 명문대생들이었기 때문이다.
지식으로는 그들을 가르칠 수 없었다. 나는 매일 새벽 5시 강단에 서서 성경 본문을 한 절씩 읽고 풀이하는 강해 설교를 택했다. 철학적 논리나 미사여구 대신 성경 원문 그 자체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어느 날 밤 한 학생이 내 방문을 두드렸다. 긴장된 마음으로 문을 열자 학생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사관님, 철학적인 이야기보다 성경 그대로를 담백하게 전해주셔서 힘이 됩니다. 매일 아침 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학생의 고백을 듣고서야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학생들의 학구열은 내게 신선한 자극이 됐다. 의대생과 법대생들이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배움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가르치는 자리에 있으려면 내가 먼저 배워야 한다.’ 나는 당시 청학관장이었던 이의순 사관의 배려로 중앙신학교(현 강남대 전신) 야간 과정에 입학했다. 낮에는 기숙사 사감으로 사역하고 밤에는 학교로 달려가 김재준 안병무 박사 등 당대 석학들의 강의를 들었다.
62년 본부로부터 구세군사관학교 교관 임명장을 받았다. 평안남도 영원군에서 국민학교 선생님을 꿈꾸던 소년이 전쟁과 포로 생활을 거쳐 사관학교 강단에 서게 된 것이다. 칠판 앞이 아닌 강단 위에서 후배 사관들을 기르는 일, 그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새로운 소명이었다.
모교로 돌아온 나는 미국인 폴 레이더 사관과 한 사무실을 썼다. 훗날 전 세계 구세군을 이끄는 국제 구세군 총사령관에 오른 그는 내 목회의 교과서였다. 그의 사택 불은 밤늦도록 꺼지지 않았다. 그는 늘 “1시간 강의를 위해 20시간을 준비한다”고 말했다. 그의 성실함은 내 교관 생활의 기준이 됐다.
그와 대화하며 구세군의 정체성도 재확인했다. “레이더 사관님, 저는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눠주라’는 이사야 58장 말씀이야말로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반색하며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구세군 창시자 윌리엄 부스께서도 이사야 58장을 ‘구세군 헌장’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내 가슴 속에서 구세군의 정체성이 확고해졌다. ‘마음은 하나님께, 손은 이웃에게’ 나는 이 표어를 가슴에 새기고 제자들에게 실천하는 신앙을 가르쳤다. 강단에 서며 깨달은 사실은 하나였다.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치열하게 배워야 한다는 것. 교관 임명은 꿈의 완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평생 공부하는 학생’으로서의 새로운 입학식이었다. 나의 배움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석태 (12) 낮에는 교관, 밤에는 학생으로… 주경야독의 삶
해가 갈수록 학생들 수준 높아져 고민
지식 한계 절감하고 배움의 열망 커져
교장 허락받고 단국대 사학과에 편입
졸업 후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 진학
1973년 2월,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주경야독했던 김석태(왼쪽 두 번째) 사관의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 졸업식 모습. 왼쪽부터 동료 김종원 사관, 김 사관, 양풍원 구세군사관학교 교장, 강영자 교관이 참석해 그의 학위 취득을 축하하고 있다. 구세군 제공
1962년부터 구세군사관학교 교관으로 봉직하며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해가 갈수록 입학하는 사관후보생들의 지적 수준은 높아지는데, 정작 가르치는 나는 지식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자는 멈추지 않고 배워야 한다’는 열망이 나를 이끌었다.
나는 권경찬 교장의 허락을 받아 단국대 사학과 야간 과정에 편입했다. 낮에는 교관으로 생도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대학생이 되어 칠판을 바라보는 주경야독의 삶이었다. 역사를 공부하며 나는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고 기록된 전도서 1장 9절 말씀을 깊이 묵상하게 됐다. 성경이 기록된 시대적 배경과 인류의 역사를 함께 이해하자 설교의 깊이가 달라졌고, 강단에서 생도들을 가르치는 데도 큰 자신감이 생겼다.
이 시절, 하나님은 내게 귀한 ‘학문의 동지’를 붙여 주셨다. 구세군 조명화 정교(장로)였다. 이북 출신인 그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배움의 열정을 불태우며 나와 함께 편입했다. 학교 일과가 끝나면 정문 앞에는 어김없이 그의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차 안은 우리만의 이동식 강의실이었다. 우리는 광화문에서 한남동 캠퍼스까지 쉬지 않고 토론을 벌였다. 넉넉지 못한 형편의 나를 위해 그는 등록금과 졸업 앨범비까지 남몰래 지원해 주었고, 68년 9월 우리는 나란히 졸업장에 입을 맞췄다.
배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구세군 사회사업의 학문적 체계를 세우기 위해 70년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에 진학했다. 단순한 구호 활동을 넘어, 체계적인 복지 이론으로 소외된 이웃을 더 실질적으로 섬겨야 한다는 사명감이 나를 다시 책상 앞으로 이끌었다. 문제는 학비였다. 빠듯한 사관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하나님은 빈 주머니를 채워주셨다. 동료 폴 레이더 사관은 주한 미군 내 성도들을 통해 장학금을 연결해 주었다.
마지막 관문은 졸업 논문 인쇄비였다. 당장 논문을 찍어낼 5만원이 없어 며칠 밤을 설치던 어느 날, 레슬리 코트릴 사령관이 나를 불렀다. “김 사관, 논문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지? 이거 필요한 데 쓰게.” 봉투 안에는 딱 5만원이 들어있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호주에서 빵집을 하며 수익금을 보내던 덕종 은퇴 사관의 후원금이었다. 하나님은 지구 반대편의 손길을 통해서라도 내 필요를 정확히 채워주시는 분이었다.
73년 여름,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영국 런던에 있는 국제사관대학(ICO) 초청장이 날아온 것이다. 전 세계 사관 중 선발된 인원만 가는 영광스러운 자리였지만, 40대 중반인 내게 영어는 큰 장벽이었다. 하나님은 이번에도 ‘돕는 천사’를 예비해 두셨다. 영문과 출신의 탁종수 정위(대위)가 나와 함께 선발된 것이다. “김 사관님, 제가 통역관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든든한 아론을 얻은 모세처럼, 나는 탁 정위와 함께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더 넓은 세상이, 더 큰 배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석태 (13) 영국서 배운 ‘청빈 정신’… 안락한 삶의 유혹 뿌리쳐
역사 존중·보존하는 영국인 문화와
100년 전 구세군 역사의 현장 체험
런던 청년대회에서 만난 마야 사관
스위스 집 초대… 정착 제안에 거절
1973년 영국 런던 국제사관대학(ICO) 강의실에서 전 세계 사관들과 함께 교육을 받는 김석태 사관(오른쪽 네 번째). 바로 옆에는 통역과 동료로서 여정을 함께했던 탁종수(오른쪽 세 번째) 사관이 앉아 있다. 구세군 제공
1973년 7월, 영국 런던 히스로 공항에 내렸다. 국제사관대학(ICO) 훈련생으로 선발된 내게 영국은 단순한 타국이 아닌 ‘신앙의 고향’이었다. 짐을 풀자마자 나는 타임머신을 탄 듯 100년 전 구세군 역사의 현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창립자 윌리엄 부스와 윈스턴 처칠 수상의 묘소였다. 세계를 움직인 거인들의 무덤치곤 너무도 소박했다. 죽음 앞에서도 검소함을 잃지 않는 그들의 청빈 정신은 겉치레에 익숙해져 가던 나를 부끄럽게 했다. 틈틈이 2층 버스를 타고 돌아본 런던의 박물관들 역시 과거를 박제해 놓은 곳이 아니었다. 역사를 존중하고 보존하는 그들의 문화를 나는 부러운 마음으로 깊이 새겼다.
ICO 훈련의 백미는 현장이었다. 런던 외곽 선버리 코트 영성 집회에서 전 세계 사관들과 자비석에 무릎 꿇고 기도했고, 휴양도시 본머스에서는 1911년 한국으로 와서 구세군 사관으로 복무하며 청춘을 바쳤던 만톤 부령 부부를 만나 깊은 감사를 전했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버니언의 고향 베드포드 감옥을 방문했을 땐 교도소장의 부탁으로 재소자들 앞에 섰다. “나도 전쟁 포로로 3년간 죄수복을 입었습니다.” 투박한 영어였지만 같은 아픔을 공유한 내 간증에 재소자들은 고개를 숙였다.
이어진 런던 청년대회는 내 인생의 항로를 시험하는 계기가 됐다. 영어에도 서툴렀던 내가 강단에서 원고를 잃어버리는 실수를 했지만, “지식보다 용기가 필요하다”던 조언을 붙들고 성령에 의지해 설교를 마쳤다. 집회 후 스위스 출신의 마야 스웨글러 사관이 찾아왔다. “간증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저희 스위스 집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마야 사관의 안내로 방문한 알프스는 내 고향 평안남도 영원을 빼닮아 있었다. 일주일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마야 사관의 가족들과 친구들을 만났다. 눈 덮인 산장 벽난로 앞에서 내 전쟁 포로 시절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북한 포로 출신이신데, 가족도 없는 남한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요? 중립국 스위스에 남으세요. 우리가 정착을 돕겠습니다.”
전쟁의 상처도, 가난한 조국의 현실도 잊을 수 있는 평화로운 삶. 솔직히 마음이 흔들렸다. 이곳에 주저앉고 싶다는 인간적인 고뇌가 스쳤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살려 보내신 곳은 알프스의 별장이 아니었다. 긴장한 채 마야 사관에게 말을 건넸다. “I have to go(나는 돌아가야 합니다).”
스위스에서의 만남을 뒤로하고,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직 구세군사관학교에서의 3개월 심화 교육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기숙사에 짐을 푼 나는 훈련 틈틈이 우편함만 바라봤다. 영국 도착 직후, 북한 고향 집으로 편지를 띄웠다. ‘아버지, 어머니… 살아만 계셔주십시오.’ 23년을 가슴에 묻고 산 그리움이 닿을 수 있을까. 나는 매일 아침 오지 않는 그 편지를 기다리면서 우편함을 서성였다.
***[역경의 열매] 김석태 (14) 23년 만에 닿은 고향 소식… 평생 ‘침묵의 기도’로 승화
유학 중 인편 통해 북한 고향에 편지
6개월 만에 온 답신은 아버지 부고
“위험하니 연락하지 마시오” 경고도
북에 남은 그리운 가족 찾는 대신
그리움을 하루 세 번 기도로 바꿔
2014년 3월 평안남도 영원군 일대 도로 주변 부락을 촬영한 사진이다. 외부인의 사진 촬영이 엄격히 제한된 상황에서 이동 중 차량 내부에서 포착한 기록물이다. 김석태 사관이 평생 가슴에 묻어둔 고향 땅의 실제 모습이다. 비외른 크리스티안 퇴리센(bjornfree.com/kim) 제공
1973년 가을, 영국 런던 구세군사관학교. 유학 생활 중 간절한 마음으로 인편을 통해 북한 고향 집에 소식을 띄웠던 나는 6개월 만에 답신을 받았다. 제3국을 통한 간접적 소통이었지만 23년 만에 닿은 고향의 소식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확인한 내용은 비보였다. “당신의 아버지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임종도 지키지 못한 불효자는 먼 이국땅에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다른 가족들은 살아 있다는 소식도 있었지만 그 안도감 뒤로 서늘한 현실이 밀려왔다. 편지 말미에 적힌 우체국 직원의 경고 때문이었다. “남조선에서 온 편지는 위험하니, 앞으로는 직접 연락하지 마시오.”
그 순간 깨달았다. 나의 그리움이 도리어 북에 남은 가족들에게는 칼날이 될 수 있음을. 내가 그들을 찾으려 할수록, 내가 남한에서 유명해질수록, 그들은 ‘월남자의 가족’이라는 멍에를 쓰고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내와 딸, 동생들의 이름이 목구멍까지 차올라도 꾹 눌러 삼켰다. 통일부나 이산가족찾기본부에서 연락이 와도 나는 일절 응하지 않았다. 남들은 무심하다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만 여기서 편안하면 그만인가. 나 때문에 그들이 고통받아서는 안 된다.’
지금 내 나이 100세. 강산이 열 번은 변했을 세월이다. 이제 북에 두고 온 가족들도 대부분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70년 넘는 세월은 생사의 경계마저 희미하게 만들었다. 이제 와서 그들을 찾는다는 건 욕심일지 모른다. 대신 나는 그리움을 기도로 바꿨다. 매일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 번, 나는 북한을 위해 무릎을 꿇는다. 하지만 나의 기도는 북한 정권의 멸망이나 저주가 아니다.
“하나님, 기독교를 가장 핍박했던 사울이 변하여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저 북녘의 지도자들, 김일성 일가가 회개하게 하옵소서. 그들이 사울처럼 변화되어 오히려 북한 땅에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쓰이게 하옵소서.”
이것이 내 평생의 기도 제목이다. 미움과 원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오직 회개와 용서만이 그 척박한 땅을 녹일 수 있다고 믿는다. 나의 육신은 고향에 갈 수 없게 되었지만, 기도로 쌓은 길은 언젠가 휴전선을 넘으리라 확신한다.
영국 훈련을 마치고 귀국한 나는 구세군사관학교 교관으로 복귀했다. 북한에 대한 미련을 ‘침묵의 기도’로 승화시킨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사명뿐이었다. 6·25전쟁 때 절두산에서 살아남으며 드렸던 “평생을 주님께 바치겠다”는 서원.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더욱 일과 후배 양성에만 몰두했다.
그렇게 건조하지만 치열하게 사명을 감당하던 어느 날, 강의실 한구석에 유난히 눈에 띄는 한 학생이 있었다. 임정선 사관 후보생. 서울대 음대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그녀가 구세군 사관이 되겠다며 내 수업을 듣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석태 (15) 제자로 만난 임정선 사관, 동료에서 부부의 연으로
안락 버리고 가난 찾아온 영적 도피자
서울대 음대 출신의 엘리트 임 후보생
폐 수술 후 병약한 모습 늘 마음 쓰여
그림자처럼 도와주다 주변 권유로 결혼
1975년 11월 29일 서울 구세군사관학교에서 열린 김석태 임정선 사관의 결혼식 장면. 구세군 제복을 입은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환하게 웃고 있다. 구세군 제공
1974년 영국 유학을 마치고 구세군사관학교 교관으로 복귀했다. 강의실에 유독 눈에 띄는 학생이 있었다. 임정선 사관후보생. 당시로선 드문 서울대 음대 출신의 엘리트였다.
임 후보생이 험한 사관의 길을 택한 사연은 기구했다. 대학 졸업 후 그녀는 오빠로부터 결혼 압박을 거세게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평생 독신으로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확고한 서원이 있었다. 결국 그녀는 집을 뛰쳐 나왔다. 세상의 안락함을 버리고 스스로 가난한 사관학교를 찾아온 ‘영적 도피자’였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북에 가족을 두고 죄책감 속에 독신을 고집하던 나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이유로 이곳에 온 동병상련의 처지였다.
하지만 이내 그녀에게 시련이 닥쳤다. 입교 직후 폐결핵 3기 판정을 받아 폐 일부를 절단하는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졸업 후 동료 교관이 된 후로도 그녀는 위태로워 보였다. 수술 후유증으로 늘 숨이 찼고,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렸다.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던 그 강철 같은 의지가 육체의 연약함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쓰였다. 나는 그녀가 당직을 서는 날이면 슬그머니 대신 서주기도 하고, 무거운 짐을 말없이 들어주며 병약한 동료의 곁을 지켰다. 남녀 간의 설렘이라기보다 깊은 인간적 연민이었다.
우리를 결정적으로 묶어준 건 주변의 권유였다. 당시 케언스 정령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 “김 교장, 현실을 보시오. 구세군 교인의 70%가 여성인데 혼자서 어떻게 다 지도하겠소. 임 사관과 결혼하는 게 사역을 완성하는 길입니다.” 반박할 수 없는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임 사관 역시 건강 문제로 사역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터였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딱 6개월만 기도해보자”고 약속했다.
기도가 깊어질수록 내 안의 고집보다 동역의 확신이 더 크게 다가왔다. 음악에 문외한인 내게 음대 출신의 그녀는 목회의 빈 곳을 채워줄 완벽한 파트너였다. 병약한 그녀에게 나는 든든한 보호자가 돼줄 수 있었다.
서로 살아온 배경도, 성격도 정반대였지만 그 다름이 오히려 축복이었다. 투박한 내게 없던 섬세함을 그녀가 채워줬고, 그녀의 연약함을 내 강인함으로 감싸 안을 수 있었다.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길’임을 깨달았다.
75년 11월 마침내 우리는 부부의 연을 맺었다. 구세군은 부부가 동등한 자격으로 사역하는 ‘동부인 제도’를 택하고 있다. 결혼식 날, 나는 아내의 손을 잡으며 속으로 다짐했다. ‘하나님, 제 독신의 서약을 거두는 대신, 이 사람과 둘이서 하나 돼 갑절로 충성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결단에 큰 선물을 더해줬다. 이듬해 태어난 아들은 우리 부부에게 찾아온 기적 같은 축복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석태 (16) 교회 문턱 밖에 길 잃은 양 찾아 복음 들고 거리 전도
50가정마다 1교회 세울 방법 고민 중
한 세미나서 복음 전도 성령 역사 체험
‘천장 없는 교회’ 거리 전도 생각해 내
전장 서기관 맡아 인재 양성의 문 확장
김석태 사관이 1981년 1월 대전 헬몬수양관에서 열린 ‘구세군 성장전략회 및 대회’에서 한반도 지도를 짚고 있는 모습이다. 지도 상단에는 ‘구세군 의식화 구세군 대형화’라는 표어가 적혀 있고, 전국 곳곳에 붉은 점들이 표시돼 있다. 구세군 제공
찬바람이 쌩쌩 불던 1970년대 후반 어느 겨울날 새벽. 묵상에 잠겨 있던 내 머릿속을 번쩍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가로 전도다. 천장 없는 교회를 세우면 되겠다.’ 이 넓은 서울 하늘 아래 50가구마다 교회를 세울 수 없을까 고민하던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건물이라는 물리적 한계에 갇히지 않고 복음을 들고 거리로 나가면 그곳이 곧 예배 처소가 된다는 깨달음이었다.
내가 구세군 서울지방장관(노회장 격)으로 부임했던 1976년 무렵, 한국 교회는 유례없는 폭발적 성장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구세군 역시 ‘2000년까지 500개 영문(교회) 개척’이라는 도전적인 목표를 세웠다. 성결교단의 이명직 목사가 “농촌에서 50가구가 우물 하나를 나누어 마시듯, 50가정마다 하나의 교회를 세워 영생수를 마시게 해야 한다”고 외치던 시대적 열망과 결이 같았다. 그해 대전 헬몬산에서 열린 성장 세미나는 내 목회 여정에 불을 지폈다. 나는 그곳에서 복음 전도에 대한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고, 그 열기를 ‘천장 없는 교회’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길을 걸을 때마다 거리 전도에 적합한 장소를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은퇴 후 우리 부부가 지내던 곳이 강남 한복판이든 관악산 자락이든 구세군 정복을 입고 거리에 서서 전도지를 나누었던 사역의 뿌리가 바로 이때 형성됐다. “죄가 많아 교회에 못 가겠다”며 울먹이던 길 잃은 청년과 아스팔트 위에서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을 때, 비로소 교회 건물의 문턱을 넘지 못하던 이들의 진짜 마음을 만날 수 있었다.
81년 1월, 나는 부정령(중령급)으로 진급하며 구세군 내에서 가장 고된 직책으로 꼽히는 전장 서기관(전도부장)을 맡았다. 나는 무엇보다 꽉 막혀 있던 인재 양성의 문을 열었다. 애써 키운 사관의 이탈을 우려해 타 교단 신학교 진학을 엄격히 금지하던 관행을 깨고 외부 진학을 전면 허용한 것이다.
중국의 덩샤오핑이 “유학생 100명 중 10명만 돌아와도 파송을 멈추지 않겠다”고 했던 개방 정책의 철학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당장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국제적 안목을 갖춘 인재를 키우는 것이 우선이라 판단했다. 나는 지방 순회를 다닐 때마다 젊은 사관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대들은 하늘나라의 대사이니 두려워 말고 밖으로 나가 끊임없이 공부하라”고 독려했다.
인사 행정 역시 철저히 헌신과 성과를 기준으로 삼았다. 누구나 더 편하고 좋은 임지를 바라기 쉽다. 그러나 나는 사관회에 설 때마다 “임지는 내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의 인내와 땀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내 핏줄이라도 자격이 없다면 요직을 맡길 수 없다는 원칙을 세우고 지켰다.
원하던 임지로 발령을 받은 뒤 내게 찾아와 감사 인사를 전하는 사관들에게 나는 늘 같은 대답을 돌려줬다. “나에게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그 자리는 당신의 땀과 성실함이 만든 것입니다.” 이 대답은 단순한 행정가의 인사가 아니라, 오지와 개척 영문이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십자가를 져 준 수많은 무명 사관들을 향한 진심 어린 경의였다.
***[역경의 열매] 김석태 (17) “차라리 무능할지언정 온유한 지도자가 되게 하소서”
임관 29년 만에 한국사령관에 임명
어릴 때 독단적 기질 나올까 두려워
“지도자라 칭함 받지 말라”성경 말씀
좌우명으로 삼고 흔들릴 때마다 다짐
1986년 6월 열린 구세군 한국사령관 이·취임식에서 제17대 사령관으로 취임한 김석태 사관이 단상에 올라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구세군 제공
1986년 6월 10일 밤. 사관으로 임관된 지 꼭 29년이 되는 그날, 나는 제17대 구세군 한국사령관에 임명됐다. 나뭇잎이 달빛에 반짝이는 사택 뜰로 홀로 걸어 나갔다. 어깨를 짓누르는 중압감 속에서 내 안을 채운 감정은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나의 성정은 온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국민학교 3학년부터 내리 반장을 하던 시절, 선생님들은 고집 세고 저돌적인 나를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라 불렀다. 중학교 때는 맹렬하게 나아간다는 뜻의 ‘용왕매진(勇往邁進)’이 내 별명이었다. 예수를 믿고 난 후 모난 성격이 많이 깎이고 변했지만 내 깊은 곳에 여전히 그 독단적인 기질이 남아 조직을 병들게 할까 두려웠다.
격동의 현대사를 겪으면서 나는 참된 지도자상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당시 사회 일각에서는 목적을 위해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카리스마를 유능함으로 평가하고 선하고 온유한 방식은 무능한 것으로 오해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밤하늘을 보며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주님, 저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을지언정 모세처럼 온유하고 선한 지도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사령관 시절 내내 마태복음 23장의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는 말씀을 뼈아픈 좌우명으로 삼았다.
취임식 강단에 선 나의 첫 메시지는 여호수아 3장을 본문으로 한 “스스로 성결케 하자”였다. 거창한 사업 계획이나 외형적 성장이 아니라 구세군이 하나님 앞에서의 깨끗함을 잃으면 생명력도 잃는다는 절박한 호소였다. 나에겐 솔선수범이 권위를 만든다는 확신이 있었다. 영적 지도자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덕목은 화려한 사업 추진력이 아니라 세상의 물욕에 흔들리지 않는 소박하고 깨끗한 삶이었다. 불확실한 시대에 교회가 세상의 신뢰를 얻으려면 우리부터 투명해져야 했다. 나는 이를 바탕으로 구세군이 사회의 온전한 믿음을 회복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사령관실 내 방에는 50년 사관 학생 시절 종로 길거리에서 산 ‘엘리야 성화’가 걸려 있었다. 까마귀가 기근에 지친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물어다 주는 그림이다. 사령관이라는 거대한 직책이 주는 권력과 명예, 경제적 유혹이 고개를 들 때마다 나는 그 낡은 그림 앞에 섰다. 그리고 묵묵히 다짐을 되새겼다. “사관은 배가 고파 흰 조약돌을 씹을지언정 검은 돈은 결코 먹어서는 안 된다.”
재직 4년 반 동안 전국 구세군 영문(교회)을 순회하며 내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구원에 대한 확신이었다. 기독교는 인간이 공을 들여 절대자를 찾아가는 종교가 아니라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보잘것없는 우리를 먼저 찾아와 주신 구원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내 힘을 앞세우던 과거의 ‘무솔리니’ 같은 기질은 내려놓았다. 그리고 “나를 본받으라”고 감히 말했던 사도 바울처럼, 내 삶의 궤적이 어떤 이에게 본이 됐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역경의 열매] 김석태 (18) “사역의 참된 열매는 복음 심긴 사람”… 빈손의 은퇴식
백수 축하연 찾아온 앤서니 전 사령관
50여년 전 내가 읽어준 성경 한 구절이
평생 사관의 길 걷게 만들었다고 고백
사관 생활 마무리하며 입교할 때처럼
빈손으로 강단 내려올 수 있음에 감사
김석태 사관이 지난해 10월 30일 경기도 과천 구세군사관대학원대에서 열린 김 사관 백수 기념행사에서 앤서니 코터릴 전 구세군 영국군국 사령관과 50여년 만에 재회해 인사를 나누고 있다. 구세군 제공
지난해 10월 열린 나의 백수(白壽·99세) 기념 축하 자리. 뜻밖의 귀한 손님이 단상에 올랐다. 전 구세군 영국·아일랜드 군국 사령관 앤서니 코터릴 부장이었다. 나를 축하하기 위해 영국에서 5500마일을 날아온 그는 마이크를 잡고선 50여년 전 자신이 소년이었을 때 영국 남부 보머스의 사택에서 나와 보냈던 몇 주간의 기억을 꺼내 놓았다.
1970년대 중반, 나는 영어를 배우고 영국 구세군의 사역 현장을 경험하기 위해 보스콤 영문(교회)의 담임사관 사택에 머물렀다. 당시 나는 해변에서 물구나무를 서고 공중제비를 돌며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청소년 클럽에서는 자칭 탁구 챔피언이었던 소년 앤서니와 시합을 해 완승을 거두기도 했다. 하루는 사택 정원의 나무를 손질하겠다고 나섰다. 톱과 사다리를 들고 곁가지를 잘라내자 나무는 앙상해졌고, 앤서니의 어머니는 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이듬해 봄, 그 나무는 이전보다 훨씬 아름답고 균형 잡힌 모습으로 싱그럽게 자라났다고 앤서니가 전했다. 때론 불필요한 가지를 쳐내야 새 생명이 자란다.
사택을 떠나기 전 어느 밤, 나는 잠자리에 들려던 앤서니의 방문을 두드렸다. 침대 머리맡에 앉아 서툰 영어로 신약성경 요한복음 2장을 펼쳐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를 읽어 주었다. 예수님이 평범한 맹물을 가장 좋은 포도주로 바꾸셨듯, 보잘것없는 우리의 삶도 복음을 만나면 완전히 새롭고 값지게 변화될 수 있다는 의미를 설명해줬다. 기도를 마친 뒤 나는 소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앤서니, 언젠가 너는 구세군 사관이 될 거야.”
백발이 성성한 노사령관이 돼 나의 백수 축하 자리에 찾아온 앤서니는 단상에 올라 50년 전의 그 밤을 추억했다. 머나먼 타국에서 온 사관이 서툰 영어로 읽어준 요한복음 구절이, 한 소년이 평생 사관의 길을 걷게 만든 작은 씨앗이 됐다는 고백이었다. 나의 능력이 아니라 그저 마음을 다해 전한 말씀이 한 사람의 삶을 다시 이끌었다는 건 하나님이 주신 기적이었다. 목회자로서 평생을 바친다면 남겨야 할 열매는 교회 건물보다는 복음이 심긴 사람이라는 걸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은퇴를 1년 앞둔 90년 성지순례에서도 본질은 같았다. 로마 황제의 권력을 상징하던 원형극장과 환락의 도시 폼페이는 화산재와 세월에 덮여 폐허로 변해 있었다. 반면 극심한 핍박을 피해 지하 공동묘지 카타콤에 숨어 예배하던 이름 없는 성도들의 흔적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생명력이 살아 있었다. 권력자의 칼은 부러졌지만, 십자가의 사랑은 살아남았다.
이듬해 나는 만 65세의 나이로 구세군 한국사령관을 끝으로 현역 사관 생활을 마무리했다. 은퇴식 강단에 서서 구약성경의 선지자 사무엘이 백성들 앞에서 했던 고별사를 떠올렸다. “내가 누구의 소나 나귀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취하였느냐.” 50년 사관 학교에 입교하며 빈손으로 시작한 사역이었다. 은퇴 후 우리 부부에게 주어진 거처는 15평 남짓한 임대주택 전세가 전부였지만 나는 처음처럼 빈손으로 강단을 내려올 수 있음에 그저 감사했다.
***[역경의 열매] 김석태 (19) 은퇴 후에도 계속 이어진 압구정 한복판 노방 전도
여생 편안히 즐기라는 권유 있었지만
신앙인으로 복음 전할 사명 남아있어
아내와 함께 휴대용 마이크 들고나와
나의 설교와 아내의 찬양 번갈아 진행
김석태(오른쪽) 사관과 부인 임정선 사관이 2005년 12월 1일 구세군 사관학교 성탄축하회에서 나란히 앉아 찬양을 부르고 있다. 구세군 제공
1991년 사령관직에서 은퇴한 뒤 우리 부부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15평 남짓한 전셋집에 거처를 마련했다. 현역 사관으로서 행정을 돌보고 교단을 이끄는 공식적인 임무는 모두 끝이 났다. 매일같이 울리던 전화벨도, 결재해야 할 서류도 사라진 고요한 일상이었다. 평생을 쉴 틈 없이 달려왔으니 이제는 여생을 편안히 즐기라는 권유도 있었다. 하지만 구세군 사관의 군복을 벗었다고 해서 신앙인으로서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까지 은퇴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밥이나 먹으며 소일거리로 남은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다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성경에서 찾았다. 이사야 62장 10절의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 큰 길을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는 말씀이었다. 구세군의 창립자 윌리엄 부스는 1865년 영국 런던의 번듯한 예배당을 떠나, 빈민과 술주정뱅이들이 거리를 헤매는 런던 동부의 빈민가 빈터에서 천막을 치고 복음을 전했다. 구세군의 출발점은 닫힌 성전 안이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들이 오가는 척박한 길거리였다.
나는 아내 임정선 사관과 함께 휴대용 마이크와 소형 앰프를 챙겨 집을 나섰다. 우리가 향한 곳은 집 인근의 강남 압구정동 거리였다. 1990년대 초반 압구정은 세속적이고 화려한 소비와 유행의 중심지였고 복음이 가장 절실히 필요한 현장이었다. 은퇴한 우리는 화려한 상점들이 늘어선 아스팔트 길 한복판에 섰다. 불신자들을 향한 가로 전도, 이른바 우리 부부만의 ‘천장 없는 교회’가 그곳에 세워졌다.
거리 전도의 현장은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다. 현역 시절 사관학교 교장과 교관을 지내며 단련된 나의 기질은 거리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나는 마이크를 쥐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회개와 구원의 메시지를 외쳤다. 나의 설교에 사람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바쁘게 걷던 행인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길을 돌아갔고 인근 상점의 상인들은 장사에 방해가 된다며 시끄럽다고 항의했다. 종종 경찰이 출동해 소음을 줄여달라며 제지를 당하는 소동도 벌어졌다.
그럴 때면 내 곁에 선 동역자인 임 사관이 조용히 나섰다. 음악을 전공한 아내가 마이크를 건네받아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로 찬양을 부르기 시작하면 거리의 공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온화한 부인의 목소리와 찬양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의 설교와 아내의 찬양이 길거리에서 번갈아 이어졌다. 부부가 동등하게 사역을 감당하는 구세군 고유의 ‘동부인’ 제도가 거리 전도 현장에서 실천되고 있었다. 교회는 예배당 안에서 신자들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곳이 아니다. 복음을 들고 세상의 한가운데, 불신자들이 생활하는 삶의 현장으로 직접 들어가야 한다. 현역의 자리를 떠나 다시 길거리로 나선 우리 부부의 노방 전도는 은퇴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역경의 열매] 김석태 (20) 삶의 터전이 곧 전도 현장이자 우리의 새로운 예배당
사령관으로서 임무는 내려놓았지만
구세군의 임무는 내려놓을 수 없어
시골, 요양원 등 사는 곳 바뀌어도
아내와 함께 복음과 찬양으로 전도
김석태(오른쪽 두 번째) 사관이 1990년 7월 독일에서 열린 구세군 브라스 밴드의 거리 전도에 참여한 모습. 구세군 제공
1991년 은퇴 후 거리로 나선 것은 그저 남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우리 부부는 은퇴 직후부터 서로 다짐했다. “우리가 교단에서 주는 은퇴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으니, 마땅히 밥값은 해야 한다.” 사령관으로서 행정 업무는 내려놓았지만 영혼을 구원하는 구세군 사관의 진짜 임무는 죽을 때까지 끝날 수 없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시작한 길거리 전도는 우리가 사는 곳이 바뀔 때마다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복잡한 도심을 떠나 강원도 철원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는 5일마다 서는 시골 장터가 전도 현장이었다. 장날이면 마이크와 소형 앰프를 챙겨 장터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구세군 군복을 입은 노부부가 마이크를 잡으니 처음에는 장터 사람들이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장날마다 어김없이 나타나 전도지를 나누고 아내가 찬양을 부르자 차츰 동네 사람들도 마음을 열고 우리 목소리를 들었다.
시간이 지나 나이가 더 들자 우리는 경기도 과천에 있는 구세군 승리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요양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전도하는 장소도 요양원 근처로 바뀌었다. 마침 근처에 관악산 등산로 입구가 있었다. 주말이면 등산객이 몰려드는 그 길목이 우리의 새로운 예배당이었다. 매주 주일마다 우리는 산 입구에 서서 땀 흘려 산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던 어느 주일이었다. 여느 때처럼 관악산 입구에서 전도하고 있는데 아내 임정선 사관이 산길에서 크게 넘어졌다. 다리뼈가 부러지는 심각한 부상이었다. 고통스러워하는 아내를 부축해 황급히 근처 병원 응급실로 갔다. 곧바로 수술이 결정됐고 나는 수술실 밖에서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런데 그 병원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났다. 아내의 수술을 맡은 의사가 우리 부부를 먼저 알아본 것이다. 그는 주일마다 관악산 입구에서 전도하는 우리 부부를 평소 유심히 지켜보던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그냥 병원에만 있는 의사가 아니었다. 휴가 때면 쉬지 않고 자기 돈을 들여 병원이 없는 오지나 불신자 마을로 의료 선교를 떠나는 신실한 사람이었다.
구세군 창립자 윌리엄 부스는 “영혼을 찾아가라, 그리고 가장 악한 자를 찾아가라”고 했다. 교회 건물 안에 가만히 앉아 사람들이 오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길거리로 직접 들어가라는 뜻이다.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외치는 일은 가끔 허공에 소리치는 것처럼 막막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관악산에서 만난 의사를 보며 깨달았다. 우리가 길 위에서 뿌린 씨앗이 헛되지 않았다. 아내가 다친 사고는 불운처럼 보였지만, 그 속에는 길거리에서 헌신하는 동역자를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숨어 있었다. 압구정 거리에서, 철원 오일장에서, 그리고 관악산 등산로에서 마이크를 잡았던 은퇴 후의 시간은 그렇게 예상치 못한 열매를 맺으며 우리 부부의 남은 삶을 이끌어갔다.
***[역경의 열매] 김석태 (21) 진정한 정의와 자유는 오직 하나님 앞에 설 때
에밀 브루너의 책 ‘정의와 자유’에서
무신론 주장 마르크스 철학 이념 깨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자유·책임만이
이념 한계 넘어 세상 변화시킬 수 있어
인간이 만든 이념의 한계를 비판하고 기독교적 가치를 역설했던 스위스의 신학자 에밀 브루너(1889~1966). 김석태 사관에게 깊은 철학적 통찰을 안겨준 책 ‘정의와 자유’의 저자다. 국민일보DB
가만히 지난 삶을 돌아보면 일제강점기 20년, 이북 공산 치하 5년, 거제도 포로수용소 3년의 시간이 조용히 지나간다. 그중 해방 직후 이북에서 보낸 5년의 공산 치하와 인민군 징집 경험은 내게 잊지 못할 교훈을 남겼다. 공산주의라는 체제가 개인의 자유를 어떻게 거두어가는지 곁에서 지켜보고 겪어야 했다.
남한에 내려와 보니 지식인 중에서도 공산주의가 내세우는 평등이라는 구호에 마음을 기대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그 본질을 미처 보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 안타까움 속에서 내게 길잡이가 되어준 책이 하나 있다.
스위스 신학자 에밀 브루너의 강의를 정리해 대한기독교서회에서 펴낸 ‘정의와 자유’다. 이 책은 그가 1949년 일본 국제기독교대학에 초빙교수로 머물 때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주제로 진행한 14번의 공개 강의 속기록이다. 이 귀한 강의록을 우리말로 옮긴 전택부 선생은 광복 후 서울 기독교청년회(YMCA) 재건을 이끌고 평생을 한글 사랑 운동에 헌신한 분이다.
브루너는 카를 마르크스의 철학을 찬찬히 해부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사유재산을 없애면 완전한 자유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브루너는 그 이론이 현실에서 어떻게 빗나가는지 다음과 같이 짚어낸다. “자본주의는 ‘정의 없는 자유’로 인도하고, 공산주의는 ‘자유 없는 정의’로 인도한다.”
마르크스는 사유재산을 없애고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면 국가 권력도 차츰 사라질 것이라 예언했다. 하지만 브루너의 통찰은 매섭다. “공산주의 사회에 있어서도 자본은 중요한 경제요인입니다. 다만 다른 점은 이 자본이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국가의 소유라는 것뿐입니다.”
공산주의는 자본을 없앤 것이 아니었다. 국가가 유일한 자본가가 돼 개인의 경제와 사상, 생활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전체주의를 낳았다는 것이다. 나아가 브루너는 그 근본적인 한계가 무신론에 있다고 지적한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신은 인간의 꿈’이라는 것입니다. 신은 실재적인 존재가 아니고 다만 인간의 꿈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그는 무신론을 자유의 기본원리로 선포했습니다.”
신을 부정하고 인간을 거대한 국가의 부속품으로 여긴 결과, 인간의 인격과 도덕은 자리를 잃고 말았다. 내가 이북에서 숨죽여 겪어야 했던 사상 통제와 강제 징집이 바로 브루너가 말한 ‘자유 없는 정의’의 민낯이었다. 현장에서 몸으로 겪은 사실이 학자의 분석과 이토록 정확히 맞아떨어질 수 있을까 싶다.
브루너의 강의는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서방의 자본주의는 왜 진정한 정의와 자유를 지켜내지 못했는가. 브루너는 그 근본적인 해답을 오직 기독교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에서 찾는다.
카를 바르트와 함께 당대 신학계를 이끌었던 그는 인간이 만든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자유와 책임만이 이념의 한계를 넘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백년의 세월을 살아온 나의 굳은 고백이기도 하다. 그의 강의는 이데올로기 논쟁을 넘어, 우리가 지켜야 할 더 깊은 신앙의 자리로 안내한다.
***[역경의 열매] 김석태 (22) 진짜 정의와 자유는? 기독교적 가치관에 바탕 둬야
‘정의 없는 자유’ 초래한 자본주의
사람을 수단 삼았고 불평등 낳아
세상을 바꾸는 힘은 자신을 꺾고
이웃 섬기는 ‘변화된 인격’에 있어
오리 전택부 선생이 지난 2008년 6월 자택에서 보행기에 몸을 의지한 채 서 있다. 뒤에는 ‘낙도안덕(樂道安德)’이라고 적힌 액자가 걸려 있다. 국민일보DB
공산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이 뒤따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유로운 자본주의 사회는 과연 온전하고 정의로운가. 에밀 브루너의 강의록 ‘정의와 자유’는 공산주의의 모순을 짚어내는 데서 문제의식을 끝내지 않는다. 그의 시선은 서방 세계를 이끌어 온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철학의 한계로 향한다.
브루너는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자유주의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 철학이 인간을 철저히 자유로운 존재로 보았지만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고 부연한다. 브루너는 이렇게 말했다. “이 자유주의 철학의 잘못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악의 요소에 대한 무시’였습니다.”
인간 내면에 있는 탐욕을 간과한 채 제한 없는 자유 방임에 맡겨둔 결과 자본주의는 이익을 내기 위해 사람을 수단으로 삼았고 불평등을 낳고 말았다. 공산주의가 자유를 빼앗았다면 자본주의는 ‘정의 없는 자유’를 초래했다는 매서운 통찰이다. 북한의 공산 체제와 남한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겪었던 경험들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진짜 정의와 자유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브루너는 그 해답을 오직 기독교적 가치관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에서 찾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되게끔 요구되고 있으며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점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고 자유로우면서 동시에 책임을 다해야 하는 피조물이다. 이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브루너는 훌륭한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를 머리로 아는 것만으로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어떤 사람이 민주주의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영악스러운 두목 노릇을 할 수가 있습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는 폭군 노릇을 한다면 그는 멀쩡한 위선자입니다.”
어떤 훌륭한 제도나 이념도 인간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린 악을 스스로 뽑아내지 못한다. 브루너는 강의 후반부에서 당시 세계적으로 일어나던 도덕재무장(MRA) 운동을 예로 든다. 세상을 바꾸려면 제도가 아니라 사람의 인격부터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가도 노동자도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마음이 새롭게 변화될 때 비로소 대립이 끝나고 형제애가 싹튼다고 믿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거창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꺾고 이웃을 섬기는 ‘변화된 인격’에 있다. 이념만으로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평생을 구세군 사관으로 살며 얻은 흔들림 없는 결론이기도 하다.
나는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지식인들이 이 뼈아픈 일침을 반드시 읽기를 바랐다. 이 귀한 강의록은 오리 전택부 선생(1915~2008)의 정성 어린 번역 덕분에 우리말로 빛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출판사가 문을 닫았고 책은 시중에서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절판 상태가 됐다. 나는 전 선생이 살아 계셨던 2007년 어떻게든 이 책이 다시 세상에 나오도록 역할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역경의 열매] 김석태 (23) 전택부 선생과 에밀 브루너의 소망 담은 300권의 책
브루너의 강의록 ‘정의와 자유’
출판사 문 닫으며 절판 상태
귀한 강의가 잊히는 것 아쉬워
전 선생에게 한글판 출판 요청
한국교회·청년들 꼭 읽기 소망
오리 전택부 선생이 김석태 사관과 이종우 목사의 도움으로 복간한 에밀 브루너의 저서 ‘정의와 자유’ 표지. 오른쪽 사진은 청년 시절 태극기를 배경으로 열정적으로 강연하고 있는 전 선생. 대한기독교서회, 청소년과놀이문화연구소 제공
2008년 가을,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평생을 한글 사랑 운동과 기독교청년회(YMCA) 재건에 바쳤던 오리 전택부 선생의 빈소는 조문을 온 지식인과 교계 인사들로 붐볐다. 향년 93세. 한국 기독교계 거목이 영면에 든 자리에 오랜 지기인 신애교회 이종우 목사와 함께 조문을 위해 참석했다. 우리는 빈소를 나서는 사람들에게 책을 한 권씩 나눠줬다. 고인이 생전에 우리말로 번역했던 스위스 신학자 에밀 브루너의 강의록 ‘정의와 자유’ 복간본 300권이었다.
장례식장에서 이 책을 나눌 기회가 생긴 것은 1년 전 일 덕분이었다. 책은 1956년과 74년에 출간되었다가 출판사가 문을 닫으며 절판된 상태였다. 나는 귀한 강의가 그대로 잊히는 것이 아쉬웠다. 국한문 혼용으로 된 낡은 초판을 다시 읽다 보니, 혼란스러운 시대에 이 땅의 지식인들이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곧장 전 선생에게 순 한글로 이 책을 새로 출판하자고 요청했다. 내 뜻에 깊이 공감한 이 목사는 출판 비용 300만원을 헌금했고 마침내 책을 새로 찍어낼 수 있었다.
자신이 번역했던 책이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을 보고 전 선생은 기뻐했다. 2007년 11월 쓰인 복간본 서문에는 잊혀가던 책을 펴낼 수 있도록 뜻을 모은 나와 이 목사에게 전하는 과분한 인사도 담겨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로부터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
새로 나온 책 300권을 챙겨 들고 장례식장으로 달려간 이유는 이 책이 품고 있는 묵직한 메시지와 에밀 브루너가 한국을 향해 남긴 각별한 당부 때문이었다. 브루너는 이 책에서 공산주의를 ‘자유 없는 정의’로, 자본주의를 ‘정의 없는 자유’로 비판하며 두 이념의 맹점을 극복할 참된 길은 오직 기독교적 인격의 변화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56년 저자 서문에서 49년 한국을 방문했던 경험을 회상하며 이렇게 썼다.
“이 책이 한국 실정에 매우 잘 맞는 내용이란 것을 느낍니다. 만약 이 책으로 인해서 진리와 비진리에 대한 분별력이 생겨나서 한국의 모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일에 도움이 된다면, 나는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극단적인 이념 대립으로 처절한 환난을 겪은 우리에게 이 책의 내용은 뼈아픈 통찰이었다. 브루너는 “한국이 역사상 그 어떤 나라보다도 정의와 자유의 결여로 고통받았기에,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소망이 불타고 있는 나라”라는 말을 남겼다.
전 선생 역시 복간본 서문에서 브루너의 이 말을 인용하며 “한국교회와 청년들이 이 책을 많이 읽음으로써 우리나라가 국제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구실을 다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는 소원을 남겼다.
우리는 고인의 이 소원이 빈소를 찾은 이들의 가슴에 심어지기를 바랐다. 이데올로기의 빈 껍데기가 아니라, 사리사욕 없이 기독교 신앙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이 땅의 상처를 치유할 힘을 가졌다고 믿는다. 장례식장에서 건네진 300권의 책은 혼란스러운 시대를 향해 고인과 내가 남기는 기도였다.
***[역경의 열매] 김석태 (24·끝) 산 것이 아니라 살아진 삶… 매 순간이 하나님의 섭리
인민군·포로 수용소에서 살아남고
동역자 아내와 만남 모두 주님의 뜻
무력은 결코 세상을 구원하지 못해
세상 바꾸는 진짜 힘은 찬양과 기도
1990년 3월 호주의 한 사회사업시설을 방문한 김석태 사관(왼쪽)과 아내 임정선 사관. 김 사관이 세 번째 군복이라 회고한 구세군 정복을 부부가 나란히 갖춰 입은 모습이다. 구세군 제공
내 인생이었지만 내 계획과 내 마음대로 흘러온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백년의 삶을 돌아보면서 내가 낼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다. 나는 내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진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가 내 삶의 매 순간을 이끌었다.
평생을 곁에서 지켜본 아내 임정선 사관은 내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당신은 참, 평생을 군인으로 살았네요. 인민군, 국군, 그리고 구세군까지요.”
아내 말대로 나의 백년은 세 벌의 군복으로 엮여 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북한 인민군에 강제 징집됐다. 낙동강 전투에 투입될 위기 앞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귀순을 결심한 뒤 유엔군을 만나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진 뒤 국군의 군복을 입었다. 앞선 두 군복이 이념에 휩쓸려 입어야 했던 옷이었다면 마지막으로 입은 세 번째 옷은 사람을 살리는 구세군 사관의 군복이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맨몸으로 겪어내면서 뼈저리게 깨달은 게 있다. 무력은 결코 세상을 구원하지 못한다. 세상을 바꾸는 진짜 힘은 무기가 아니라 찬양에 있다. 주일마다 교회에 모인 수만 명의 찬양 소리가 전쟁터의 전차보다 더 강하다. 나는 교회가 찬양으로 온전히 뜨거워질 때 하나님께서 이 땅에 피 흘림 없는 무혈통일을 허락하실 것이라 굳게 믿는다. 백 세가 된 지금도 내가 매일 하루 세 번씩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이유다.
100년의 세월을 건너온 신앙인으로서 오늘날 한국교회에 남기고 싶은 당부가 있다. 교회가 정치의 바람에 너무 쉽게 휩쓸리거나 겉치레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표를 얻으려는 정치인들의 발걸음이 이어질 때일수록 교회는 흔들림 없이 본연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으리으리한 예배당을 짓고 교세를 자랑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은 성도들이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굳게 뭉쳐 기쁘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위기라고 말하는 교회가 진정으로 살길이다.
내 책상 위에는 늘 성경책이 놓여 있다. 돋보기를 쓰지 않고도 성경의 조그만 글씨를 거뜬히 읽어 내려간다. 50대 초반 노안이 심하게 와서 안경이 없으면 글을 한 줄도 읽지 못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60대가 넘어가며 흐릿했던 활자가 다시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의학적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일이었다. 남은 삶 동안 눈을 밝혀 말씀을 더 깊이 읽고 깨어 기도하라는 주님의 소박하지만 벅찬 은혜였다.
인민군에서 탈출해 목숨을 건진 것도,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것도, 평생의 동역자인 아내를 만난 것도, 잃어버렸던 시력을 기적처럼 되찾은 것도 내 능력이 아니었다.
내 인생 내 마음대로 되던가. 세상을 구원하는 힘은 오직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십자가 신앙에 있다. 이제 백세가 된 내게 남은 역할은 하나뿐이다. 매일 말씀을 읽고 찬양하며 이 땅에 평화통일이 임하기를 묵묵히 기도하는 일이다. 내가 살아온 백 년, 참으로 모든 것이 은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