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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09
12월14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대림 제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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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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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aHAWCj8bR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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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금 여러분은 대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서 즐거움을 찾고 있습니까?>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재확산 속에 강추위까지 기승을 부리는 대림시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백소를 찾는 교우들의 얼굴 마다에 짙게 드리운 그림자에서, 큰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을 동시에 느낍니다. 그간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특별한 재앙과 맞물려 다가온 이런저런 삶의 십자가 앞에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이웃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이런 오늘 우리에게 존재 자체로 큰 위로요 선물로 다가오는 분이 계시니, 오늘 기념일을 맞이하는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1542~1591)이십니다. 그는 독특하게도 십자가를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를 자신의 생애 전체의 주제요 모토로 삼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름인 요한 앞에 ‘십자가’를 추가했습니다.
놀랍게도 십자가의 요한은 십자가가 자신에게 다가오기 전에, 먼저 십자가를 향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십자가 뒤에 아로새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발견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여는 열쇠요, 천국과 구원에 이르는 문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예수님은 진귀한 광맥들을 엄청나게 매장하고 있는 광산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물을 캐기 위해서 먼저 통과해야 하는 작은 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문의 이름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요한이 살아가던 중세 시대는 외적으로는 수도생활의 부흥기처럼 보였습니다. 수많은 입회자들이 수도원 문을 두드렸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대수도원들 안에는 당대 잘 나가던 선남선녀들이 우글우글했습니다.
당시 수도원들은 신앙 뿐이 아니라, 학문이나 문화의 중심센터 역할을 톡톡해 해내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부작용도 뒤따랐습니다. 복음삼덕의 실천이나 깊이 있는 영적 생활, 형제적인 봉사와도 같은 수도생활의 본질적인 측면은 안중에도 없이, 그저 생계나 출세의 방편으로 수도원 문을 두드린 사람도 없지 않았습니다. 일부 몰지각한 수도자들은 권력욕에 눈이 멀어 영성생활은 완전 뒷전이었습니다.
이토록 어려운 순간에 봉착한 교회를 위해 하느님께서 보내신 청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십자가의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가르멜 수도자로서 살아가겠다고 서원을 합니다. 그러나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진 기강과 영성의 결핍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십가가의 요한은 결심합니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로구나.’ 평생 후회하며 사느니 더 늦게 전데 다른 것을 찾습니다. 그래서 사제서품은 1년 앞둔 그는 당시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카르투시안회’로 말을 갈아타기로 결심합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십자가의 요한에게 다가온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바로 그 유명한 아빌라의 데레사였습니다. 십자가의 요한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데레사는 가르멜 남녀 수도회의 개혁을 위한 구상을 펼쳐 보이며 그를 설득했습니다. 그때 당시 십자가의 요한은 25세 데레사는 52세였습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남자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 데레사는 여자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에 몸 바치기로 약속했습니다.
십자가의 요한이 동료 수도자들에게 개혁의 청사진을 펼쳐 보이며 쇄신작업에 동참을 요청하자 즉시 와 닿는 것이 기득권자들의 극렬한 반대였습니다. 이미 나태해진 수도자들의 펄펄 끓는 분노였습니다. 십가가의 요한을 향한 동료 수도자들의 박해는 끝이 없었습니다. 유괴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동료들은 그의 눈을 가린 채 햇빛도 들지 않는 수도원 독방에 감금시키기도 했습니다.
십자가의 요한은 몇 달 동안 죽음이 공포를 느끼며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짐승 같은 세월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수시로 폭력에 시달렸습니다. 개혁 반대파 수사들 앞으로 끌려 나가 무릎 꿇린 채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개혁을 향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인내하고 또 인내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한 십자가의 요한의 노력 때문인지 드디어 결실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당대 교황은 자치권이 있는 지부를 형성하도록 ‘개혁 가르멜 수도회’를 승인하였습니다. 그후 그는 가르멜 수도회 중앙 지도부에 머물면서 수많은 수도회들이 쇄신되고 개혁되는데 큰 힘을 보탰습니다.
십자가의 요한은 늘 이 시대 수도회 쇄신을 위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고민했고 과감하게 추진해나갔습니다. 그러다보니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적’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하느님을 향한 강한 신뢰와 용기, 겸손으로 무장한 채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 영적인 삶의 가치는 뒷전인체 세상의 허황된 것들에 눈이 멀었던 당대 일부 몰지각한 수도자들을 향한 십자가의 요한의 호소가 마치 오늘 우리 수도자들에게 들려오는 듯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으며 위대한 대상을 찾기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불림 받은 동료 수도자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대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서 즐거움을 찾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목숨 걸고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한 것인지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영혼은 눈이 멀었습니다. 정말 찾아야 할 것은 찾지도 않으면서 엉뚱한 것을 찾아다니는 여러분, 참으로 안타깝고 가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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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떠한 사람을 봉사자로 뽑을 것인가?>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E5Pkbnd1E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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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것에 대해 사제들과 원로들이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예수님은 성전에서 정식적으로 교육받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상인들을 쫓아내고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신 것에 열이 받은 것입니다.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교회에서 어떠한 공식적 교육도 받지 않은 신자가 본당 신부가 하는 일에 반대하여 자신이 본당 신부처럼 가르치는 격입니다. 당연히 사제가 좋아하겠습니까? “어디 신학교 나왔습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때 그들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유다 지도자들은 자신들끼리 상의합니다. 만약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말하면 왜 요한이 증거하는 당신을 믿지 안히느냐고 할 것이고, 그렇다고 군중이 그를 예언자로 여기기에 사람에게서 온다고 말하기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들 대답은 “모르겠소”입니다. 예수님도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하십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소위 가식적인 사람들입니다. 상황에 따라 아는 것도 모른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도 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학벌이나 전통을 중요시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가식적으로 , 이유는 세상에서는 인정받았을지 몰라도 하느님께는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인정을 받는 방법은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은 또 다른 말로 ‘인정’입니다. 성령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학교에서는 인정받지만, 집에 들어와서 부모에게는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와 같습니다. 그런 아이는 집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밖에서 들통날까 봐 두려워 가식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밝은 면’이라는 유튜브 채널에 ‘가식적인 사람의 12가지 징후’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 어떠한 모습을 보이는지 여러 가지 나타나는 행동으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1.가식적인 사람은 타인의 사회적 지위에 관심을 둡니다. 오늘 유다 지도자들이 그랬던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은 이들은 세상이 인정해주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2.가식적인 사람은 남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는 것을 그들이 막은 이유가 이것입니다. 강요하는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성령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3.가식적인 사람은 타인들의 평가에 민감합니다. 그들의 인정은 외부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인정받은 이는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4.가식적인 사람은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습니다. 자신이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지 남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틀린 것을 깨닫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5.가식적인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성령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인정에 대한 무한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6.가식적인 사람은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도 하나의 거짓말입니다.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7.가식적인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 관계를 맺습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관계도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것이라 여깁니다.
8.가식적인 사람은 타인을 무시하는 발언을 합니다.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열등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끌어올리려 다른 사람을 무시합니다.
9.가식적인 사람은 작은 문제를 큰 것처럼 과장합니다. 그래야 그것을 해결하려는 자신의 업적이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는 것이 큰일이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10.가식적인 사람은 남을 험담합니다. 반면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타인의 단점을 덮어줍니다. 성령은 또한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11.가식적인 사람은 행동이 일관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감정에 휩쓸립니다. 성령은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사랑과 기쁨과 평화, 절제와 친절의 행동을 합니다.
12.가식적인 사람은 꼭 필요할 때 사라집니다.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회피합니다. 자신은 전혀 피해 보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경우에서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교회에서 봉사자를 뽑을 때 그 사람이 진정 성령으로 사는 사람인지, 가식적으로 자신의 성취를 위해 봉사를 하려는 것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100% 가식적이거나 진실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칫 가식적인 사람들로 봉사자 대부분이 꾸려진다면 그 공동체는 매우 힘든 상황을 겪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유다 지도자들처럼 외적인 인정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라면 될 수 있는 대로 뽑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은 남이 알아주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 인정받은 것에 감사해서 그 보답으로 조금이라도 봉사하려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을수록 좋은 공동체가 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가 성령강림을 통해 세워진 예수님 제자들의 공동체에 가까운지, 아니면 당시 가식적인 유다인 공동체에 가까운지 항상 살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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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23-27 :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아 세례를 베풀었느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따져 묻는다. 그들은 위대한 기적들을 많이 보았다. 그 기적들은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예수님께 누구의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아마 그 기적들의 결과가 미래에 어떠한 결과로 나타날지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릴 것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이 사건들 안에서 모든 위험을 보았기 때문이다.
구제하기 어려운 그들의 사악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그들이 질문의 뜻을 이해하고 답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더 이상 당신께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엑세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24-25절)
그들은 이제 자기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인다. 요한이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그 답은 하늘이 보낸 증인을 믿지 않은 결과를 인정하는 것이 될 터였고, 또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군중에게 돌을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답에 발목을 잡힐까봐 두려워 “모르겠소.”(27절) 하고 대답한다. 사실 그들은 요한 하늘에서 왔는지 사람에게서 왔는지 몰랐다.
그들에게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어두워진 마음은 빛에서 나온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눈이 멀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영적으로 눈이 멀면 신앙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다. 소리 없이 사냥하는 사냥꾼은 함정을 파면서 동시에 함정 옆에 결코 도망칠 수 없도록 그물을 쳐 놓는다고 한다. 사냥감이 도망을 못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덫을 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주님께서는 사탄에게도 똑같이 하셨다. 사탄이 성경을 인용하며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마태 4,6; 시편 9,11-12). 주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하시지 않고, 신명기의 말씀을 들어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7; 신명 6,16)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도 “나도 모른다.”고 답하지 않으시고,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27절)고 하신다. 즉 그들에게는 자격이 없으므로 말씀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지 않으시면서도 당신을 신문하는 자들을 가르치시고, 합리적인 논증으로 상대의 교묘한 비난을 논박하시고 계시다.
신앙을 가진 우리들은 필요하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진리를 알려고 하는 태도를 가져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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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님]
발라암 예언자가 모압 임금 발락의 거듭된 청에 못 이겨 모압으로 길을 나서자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그의 길을 막으십니다. 그래서 발라암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을 발락의 뜻대로 저주하기보다는 하느님의 뜻대로 축복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볼 수 있듯 발라암이 하느님께 받은 네 번째 신탁은 메시아 탄생의 환시입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발라암은 다른 예언자들 못지않게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그의 삶은 주님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발라암의 권유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프오르에서 우상 숭배에 빠졌고, 발락과 헤어진 뒤 미디안족과 함께 머물면서 이스라엘이 다시 우상 숭배에 빠졌기 때문입니다(민수 31,16 참조). 신약 성경에서 발라암이 돈 때문에 이스라엘을 위험에 빠뜨린 부정적인 인물로 소개되는 데에는 바로 이런 까닭이 있습니다.(2베드 2,15; 유다 11; 묵시 2,14 참조)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자 기꺼이 스스로를 내놓은 이들은 하느님을 대신하여 자신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드러내었습니다. 발라암도 하느님의 힘이 그의 모든 능력을 지배하였던 것이지, 그가 뛰어나서 하느님의 힘을 드러낸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성전 정화 사건 직후 예수님의 권한에 시비를 거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권한이 하늘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것인지를 물으십니다. 자신의 안녕만을 위하여 돈과 권력을 따른다면 구원의 별도 볼 수 없고 정화의 세례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자 자신을 기꺼이 버리는 가난한 마음만이 구원의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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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권한>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태 21,23-27)
복음서 저자가 이 이야기를 기록한 것은, 단순히 당시에 이런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신 분이고, 예수님의 권한도 하늘에서 왔다.” 라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촉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이 한 말에서 ‘이런 일’은 ‘성전 정화’(마태 21,12-13)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권한에 대해서 물은 것은, 예수님을 “공적으로 권한을 받은 일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예언자 행세를 하는 가짜 예언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 27장을 보면, 예수님을 가리켜서 ‘사기꾼’이라고 부르는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말이 나옵니다. “이튿날 곧 준비일 다음 날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가서 말하였다. ‘나리, 저 사기꾼이 살아 있을 때, `나는 사흘 만에 되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한 것을 저희는 기억합니다. 그러니 셋째 날까지 무덤을 지키도록 명령하십시오.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내고서는, '그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 마지막 기만이 처음 것보다 더 해로울 것입니다.’"(마태 27,62-64) 당시의 지도층 사람들과 기득권층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안 믿었고, 사기꾼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어떻게든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과 일이 군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실행하지는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제들과 원로들의 질문에 대해서 ‘반문’으로 대답하신 것은 당시 학자들의 논쟁 방식을 따르신 것인데, 사실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선택하신 방법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기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간에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그들 스스로 답을 얻도록 인도하는 것이 가장 좋은 대답이 됩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겉으로만 보면 단순한 질문이지만, 사실은 이 질문 속에 답이 들어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하늘에서 왔다. 너희가 그것을 믿었다면 나의 권한이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내가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요한이 이미 증언하였기 때문이다.”가 예수님의 질문 속에 들어 있는 가르침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너희가 믿지 않는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너희는 믿지 않을 것이다.”가 됩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이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요한의 세례는 사람에게서 왔다.”, 즉 “요한은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지 않았으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세례를 주었다.”입니다. 그러나 요한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여기고 있는 군중이 두려워서 그렇게 대답하지 못하고 “모르겠소.”라고 대답합니다. 모르겠다는 그들의 말은 사실은 “안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믿는다는 말을 못하는 것은 안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군중만 두려워했다는 점입니다. 만일에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예언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사제들과 원로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군중의 여론만 신경 썼습니다. (그들이 군중을 두려워한 것은,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세속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생각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모두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마태 13,13) 자들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내가 진리를 말해도 너희가 듣지 않으니 말하지 않겠다.”가 아니라,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너희는 왜 듣지 않느냐?”입니다. 요한복음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2-44) (세속의 명예와 이익만 추구하는 자들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안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난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너희가 하느님에게서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8,47) (하느님을 사랑하고, 충실하게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권한이 하늘에서 왔다는 것을 금방 알아보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하느님을 충실하게 섬기지도 않는 사람은,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권한이 하늘에서 왔다는 것 자체에 관심이 없습니다. 믿기가 어려워서 못 믿는 것이 아니라, 아예 관심이 없어서 안 믿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그저 세속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예수님이 자기에게 물질적인 복을 얼마나, 어떻게 줄 수 있는지, 그것만 따집니다. 그러니 그런 자들이 혹시라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다고 나선다 하더라도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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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알려진 마이클 셀던 교수가 ‘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을 새롭게 출간하였습니다. 저자와의 인터뷰를 듣고, 책에 대한 소개를 읽었습니다. 오늘은 책의 내용과 분석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아이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아이가 공정하게 자랄 수 있는지 의문을 갖습니다.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아이는 운이 좋은 것인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아이는 운이 나쁜 것인지 묻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본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은 정말 본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는지 묻습니다. 그런 사람은 성공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지 묻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열등감과 좌절감에 빠져서 살아야 되는지 묻습니다. 사회가 양극화 되면서 빈부의 격차가 커지는 상황,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흑인과 이민자에 대한 차별, 저학력자와 고학력자에 대한 임금의 차별이 있습니다. 지금의 코로나 확산은 교육을 많이 받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수선공, 식료품 가게 점원, 택배기사, 배달원 등과 같이 급여가 낮다고 무시하고, 존경하지 않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이 의존해 왔었는지를 자각하게 해줍니다.
미국의 엘리트 정치인들은 공정하지 못한 현실에 대해서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46대 대통령은 분열과 갈등을 넘어서 통합과 치유의 정책을 제시하면 좋겠습니다. 환경미화원이 일을 하지 않으면 거리는 쓰레기로 넘쳐나고 전염병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건강을 위한 측면에서 의료종사자의 일이나 환경미화원의 일이나 노동의 가치는 다르지 않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의 노동과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사람의 노동도 소중합니다. 노동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노동하는 사람의 헌신과 인격도 중요하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공부라는 기준으로 누구는 사무직으로, 누구는 청소부가 되는 능력주의는 공공의 선을 손상시키고, 직업에 열등의식을 심어주는 오류에 빠지게 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하는 일의 중요성을 참작하여 급여나 사회적 인정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사회적인 안정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코로나는 세계화(Globalization)보다는 로컬화(Localization)의 필요성을 부각시키는 등 삶의 방식과 태도를 바꾸고 있습니다. 외부 의존성을 줄이고 혼자서 해결하는 자급자족 라이프를 대세로 만들고 있습니다. 귀향 산업이 뜨고, 국내여행이나 로컬 푸드 같은 자생적 지역 산업을 재조명 받게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 지자체와 이웃 사람이라는 단어가 신뢰도 리스트에 올라왔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지역화는 과거로의 회귀가 아닙니다. 지역 공동체적인 유대는 소속과 안정 욕구를 충족시켜 심리적인 만족감을 줍니다. 세계화는 문화의 정체성과 다양성을 없애 단일문화화하고 경쟁을 부추겨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코로나 확산은 역설적이게도 그동안 외부로 돌려졌던 시선을 전 세계에서 지역으로, 파편화된 경제에서 지역 공동체로, 외부에서 자신에게도 돌리는 촉매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말하는 주장은 이미 2,000년 전에 유대의 산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엘리사벳을 찾았던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습니다. 그 인자하심은 세세대대로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미치시리라. 당신 팔의 큰 힘을 펼치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도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셨도다.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주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으로 높이 쌓인 ‘기득권’이라는 탑을 사랑과 희생으로 허무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능력, 학벌, 가문으로 제자를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부, 세리, 소경, 중풍병자라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마치 투수가 심판에게 왜 이렇게 스트라이크 존을 좁게 주느냐고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타자가 심판에게 왜 이렇게 스트라이크 존을 넓게 주느냐고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신 적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세례자 요한이 와서 단식을 하니, 좋은 날 단식을 한다고 비난을 하였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니 죄인들과 함께 지낸다고 비난을 하였습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께서 무슨 권한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는지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누가 예수님께 그런 권한을 주셨는지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이라는 큰 선물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다가오는 성탄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오늘 올바른 일을 행하는 것이 가장 커다란 성탄의 준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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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물음과 대답>
마태오 21,23-27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물음과 대답>
어떠한 대답도
바라지 않고
어떠한 대답도
만족시킬 수 없는
물음이 아닌
물음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거지요
어떠한 대답도
대답이 될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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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세상을 떠나 홀로 있고 싶은 마음>
+찬미예수님
사제로써 살아가다보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본당 신자분들과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학교의 학생들, 외부 강의에서 만나는 분들을 비롯해 유학 시절 만난 많은 분들, 그곳의 친구들과 신자분들과 동료 사제들 모두가 지난 시간 제가 만나온 이들입니다. 그밖에도 친분이 있는 경우가 아닌 익명의 사람들도 자주 만나게 되니 사실상 사제의 인간관계는 그 수를 헤아리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과의 만남이 자주 이루어지다 보면 간혹 사람을 “만난다”기보다는 “상대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가끔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고 크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연속해서 이루어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미움이 생기고 사람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벗어나 혼자 기도하고 묵상하며 하느님만 생각한다면 얼마나 삶은 편안하고 행복할지요. 죄를 지을 기회도 없을 것 같고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이 들 때마다 언젠가 읽었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기억하곤 합니다.
“여러분들이 길거리로 나서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에 때로는 우려할 만한 사고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교회가 자기 자신 안에 갇혀서 살아간다면, 교회는 노후해질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고통을 겪는 교회, 그리고 집안에 갇혀서 병에 걸려 시름하는 교회,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저는 주저 없이 전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이러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은 가끔 세상을 떠나 홀로 있고 싶은 저에게 커다란 지침이 되어줍니다. 사제란 계속해서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며 자신 안에 안주하지 말아야 함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제는 사람들을 피해 홀로 안주하는 것이 가능하긴 합니다. 누군가가 면담을 요청하거나 어떠한 제안을 할 때 그냥 지나친다 하더라도 크게 뭐라 하는 사람이 없고 굳이 새로운 일을 벌릴 필요도 없습니다. 봉사자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적당히 개인 기도와 미사만 해도 적당히 사제생활은 흘러갑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황님이 말씀하셨듯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면 그 사제는 노후해지고 교만의 병 혹은 태만의 병에 걸려 시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제의 정체성은 사람들을 만나 고민을 듣고 성사를 줌으로써 견고해지는데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본당에서 활동을 하다 보면 간혹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마음에 미움이 생기기도 합니다. 본당 뿐만 아니라 각자의 터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이러한 기회는 어떻게든 피할 수 있기도 합니다. 어떠한 봉사도 하지 않고, 갈등의 소지가 있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 시간을 최대한 줄이며 내 가족, 내 구미에 맞는 친구들과만 시간을 보낸다면 그 삶은 한결 편안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살아간다면 선을 실천할 기회는 잃어버리게 되고 자신의 즐거움, 자신의 이익에만 안주하게 됩니다. 그러한 삶은 결코 하느님이 원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 삶에 이웃의 자리는 없고 그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자리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러한 삶의 전형을 바라보게 됩니다.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에 대한 예수님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합니다.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하면 그런데 왜 믿지 않느냐는 말을 들을 것 같고,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고 하면 군중의 반감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이 되려 공격받을 것을 우려해 어떠한 대답도 내어놓지 못합니다. 이 안에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 피하려는 이기적인 모습이 있는 한편, 진리를 위한 성찰은 전혀 없습니다. 지금껏 같은 생각을 가진 그들만의 논의 안에서 모든 일을 편안하게 선택하여 왔으니 다른 사람의 반응이 두렵기만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렇다면 그들의 질문에 답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그들이 본인의 의향에 따라 어떠한 답을 선택했다면 예수님께서는 요목조목 그 답에 대해 잘 설명해주셨을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듣고자 하는 말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그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배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대하고 마주하는 기회를 스스로 거부함으로써 결국 그들은 아무런 답도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 속에 계속해서 남아있는 것은 자신들의 편견에서 비롯된 미움 뿐입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지금껏 많은 시간 동안 사람들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기도 했고 주기도 했습니다. 그 안에서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고 미안함을 느끼기도 하며 하루하루 살아왔습니다. 왜 그때엔 그렇게 미숙했는지 다소 후회되는 일도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으리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부족한 사제이지만 지난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보다도 더욱 덜 떨어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오늘 영성체송의 말씀인,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상처를 입음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나의 마음을 짓누르는 여러 갈등과 미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잘 다듬고 다듬어 실수와 미움을 줄이고 사랑을 늘려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대림 3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예수님은 수많은 군중들로부터 많은 상처와 미움과 오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꾸준히 사람들을 만나 사랑을 실천하였고 특별히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돌보셨습니다.
오늘 다시금 이렇게 우리에게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우리 역시 수많은 사람들 안에서 상처와 미움을 덜어내고 더 많은 사랑을 실천할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스러운 아기 예수님이 그러한 우리를 돌보아주시기 위해 오실 날이 이렇게 또 하루 줄어들었습니다.
“길거리에서 고통을 겪는 교회, 그리고 집안에 갇혀서 병에 걸려 시름하는 교회,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저는 주저 없이 전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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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박동진 베르나르도 신부님]
<인정받는다는 것>
권위와 권위주의가 다르다는 것을 안다면, 앞선 것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부여되는 것이고, 뒤의 것은 스스로 그것을 부리려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많은 젊은이들이 독일에 가서 강제노역을 했습니다.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마음에서 많은 신부님들이 성직자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함께 강제노역을 떠났습니다. 수용소에서 생활하면서, 어떤 때는 몇몇이서 몰래 화장실에서 기도와 미사를 드려야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노동사제의 시작입니다.
해방이 되고 난 이후 다시 고국에 돌아와서도 노동자들과 더불어 살게 된 몇몇 노동사제들은 노동 안에서 때로는 이념적으로 다르고 때로는 종교적으로 다른 이들과 형제애를 나누었습니다.
언젠가 한 노동사제가 다른 노동자를 구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주교님과 여러 신부님들, 그리고 신자들이 모였습니다.
장례미사가 끝나고, 그의 관이 성당 문밖을 나가자 왼편과 오른편에 각기 자신들의 깃발들을 들고 서 있던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깃발을 숙임으로써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습니다.
비록 신앙면에서는 함께하지 않았지만, 수용소에서 어려움을 겪었을 때, 같은 노동자로서 아파하는 동료들 곁에서 늘 함께해 준 이를 진정한 형제로 인정한다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권위주의로 덧씌워진 이들이 ‘권위’와 ‘권한’에 대한 질문을 던지니, 예수님의 반문에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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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카리스마와 제도>
우리나라 최상위법인 헌법은 사상의 자유를 얘기합니다. 그러나 하위법인 보안법은 그 사상의 표현을 제한합니다. 헌법은 표현의 자유를 얘기합니다. 그러나 영상 표현법은 영화에 등급을 매기고 표현을 제한합니다.
사상과 표현은 하늘이 모든 인간에게 준 권리이기에 기본적으로 누구에게나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고 판단이 될 때 집단은 그 자유를 제한합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판단의 권한이 어디에 있고 어디까지 제한할 수 있느냐가 항상 문제입니다. 이것은 종교, 신앙 행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나누는 일에 있어서 특히 악령을 치유하거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있어서 은사를 받은 사람과 교도권은 자주 충돌을 합니다. 그러나 교도권은 성령의 은사를 존중해야 하고 개인도 교도권의 판단을 존중해야 합니다.
좋은 예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은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당시 유다교의 충돌을 얘기하며 올바른 교도권 행사의 한 예를 소개합니다.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가 사도들의 말과 행위가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면 인간, 즉 교도권이 막아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내버려 두어도 결국 없어지고 말 것이라는 태도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주님으로부터 복음을 선포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평신도로서는 할 수 없는 설교의 허락을 교황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이는 당시 교도권의 허락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교도권을 부정하고 비판하며 복음을 선포하던 이단과는 다른 태도였습니다.
교황님으로부터 설교의 허락을 받았지만 그는 어느 교구를 가던지 그 교구장의 허락을 또 받았습니다. 하루는 어느 교구에 들어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그 교구장께 설교의 허락을 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주교님은 당신이 설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하며 프란치스코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밖으로 나가라고 내치셨습니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이쪽 문으로 나가 저쪽 문으로 다시 돌아와 주교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 이었습니다. 왜 다시 돌아왔냐는 주교님의 물음에 프란치스코는 자식이 어떻게 아버지 곁을 떠날 수 있느냐고 여전히 주교님께 대한 애정과 존경을 보였습니다.
이를 보고 주교는 자신의 교구에서 설교할 수 있는 허락을 주었습니다. 교도권을 존중하고 순종하는 자세를 보고 교도권은 그의 복음 선포가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고 허락을 준 것입니다.
개인과 교도권, 카리스마와 제도. 이것은 끊임없는 갈등의 관계이며 서로 존중해야 할 영원한 상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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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고정배 요셉 신부님]
<사랑이 권한이다>
지난번에 있던 성당에 안나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는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유복자 하나를 애지중지 키우셨다. 한참 젊었을 때는 치근덕대는 사람이 생길까 걱정이 돼 미친 사람처럼 하고 다녔다고 한다.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정도 많았지만 성격도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40년을 농사일, 남의 집 일을 봐주며 생활하셨고, 지금은 성당 옆 골목에 방 하나를 얻어 지내신다.
물론 아들·며느리와 같이 살 수 있는 성격도 아니다. 얼마 전 허리를 다쳐 일을 못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나 할머니는 강론 시간에도 당신 마음에 안 들면 대꾸하고, 미사 후에도 신부를 한 수 가르쳐야 성에 차는 분이었다.
장날 못 팔면 버릴 과일을 잔뜩 사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버리는 것이 아까워 일부러 산다), 쌀이 남으면 떡을 해서 온 동네에 돌리셨다. 물론 할머니에게 찍힌 사람은 국물도 없다.
통장에 생활비가 입금되면 본당 신부와 자장면으로 의무 방어전을 치르고, 신세 진 신자를 불러 비빔밥으로 신세도 갚고, 장에서 예쁜 화초도 사서 키우시던 분이다.
처음에 나는 할머니의 말투도, 끊임없이 들고 오는 떡과 과일 등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여유도 없으신데 이 사람 저 사람 밥 사주고, 과자며 떡, 채소를 사다 주고, 굽은 허리로 농사지은 옥수수며 고추를 나누어 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동네 사람들도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쓰레기 같은 것만 가져온다고 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도 사람들도 할머니를 주책이라고 여기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안나 할머니의 마음이었고 애정의 표현이었다. 아무리 말려도 이 애정은 그치지를 않았다.
할머니에겐 주고 싶은 애정과 힘이 있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쁘게 받아줄 수 있는 애정은 물론 되갚을 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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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제이자 신학자인 헨리 나우웬 신부님의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당신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이 죽어가고 있으며 또 어떤 것이 새로 태어나고 있음은 명백하다. 당신은 주의를 집중하고 차분한 상태도 당신이 가진 최고의 직관에 복종해야 한다.”
이 구절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는지 모릅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마음을 꽝 때리는 큰 깨달음을 주는 글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힘든 순간이 찾아오면 어떻습니까? 죽을 만큼 아프고, 죽음 외에는 아무런 길도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 순간이 바로 내 안에 어떤 것이 죽어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순간 내 안에 어떤 것이 새롭게 태어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내 안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깊이 내 안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부활이라는 희망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고, 그분 뜻에 복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의미 없는 삶이 아닌 그 너머에 있는 부활의 의미를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희망 아닌 죽음의 단계에서 갇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고 있냐면서 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답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질문 하나를 던지시지요. 즉, 세례자 요한의 세례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르겠소.”라고 대답합니다. 자신들의 답변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반대를 받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솔직하지 않은 사람에게 주님께서 진리를 굳이 말해 줄 필요가 없었지요. 그래서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모르겠다고 해서 “나도 모른다”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진리를 들을 자격이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희망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을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세상의 틀 안에 갇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틀에 갇혀서 부정적인 생각만을 하게 됩니다. 이런 모습이 주님의 진리를 들을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요? 희망의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거짓을 버리고 솔직하게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진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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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미루지 마세요>
학창시절, 꿈을 가진 문학청년이었다고 말씀하시는 어느 형제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젊었을 때는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답니다. 돈을 벌 수 있을 때 열심히 일하고, 먼 훗날 은퇴하고 난 뒤에는 좋아하는 책을 실컷 읽고 글도 다시 써 보겠다고 아내와 약속했답니다.
시간이 지나, 이 형제님도 은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내와 약속을 전혀 지킬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왜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을까요? 시력에 문제가 생겨서 도저히 책을 볼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또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아서인지 글을 쓸 수 없는 것이 당연했지요. 그렇게 좋았던 것이었지만, 노화로 인해 전혀 할 수 없게 된 사실이 너무나도 슬프다고 고백하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예측을 합니다. 그러나 뒤로 미루는 예측은 늘 틀렸던 것 같습니다. 불가능할 것 같아도 미루지 않고 지금 어떻게든 하려고 노력했을 때, 실제의 현실이 될 확률은 높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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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소명에 응답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기적을 베풀고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곱지 않은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21,23) 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 21,25).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한 후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눈 가리고 아웅’한 것입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때로는 우리도 진실을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아닌 줄을 알면서도 나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에 지배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뜻을 굽히지 않을 때가 있고, 때로는 내 뜻을 주님의 뜻 인양 내세우기도 합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내가 그분에게 맞춰야 하지만 합리화 거리를 찾습니다. 주님을 나의 들러리로 세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습니다.”(집회 42,20)
이현주 목사는 “세상에서 사람이 하는 일에는 두 가지가 있을 뿐인데 하나는 주님의 일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인으로써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진대 사람의 일이 앞서는 것을 보면 아직도 믿음의 길이 멀기만 합니다.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사람의 일을 줄이고 하느님의 일을 늘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과 권한에 모두를 걸었듯이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 사명에 충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십자가의 성요한은 “ 이제 당신이 저에게로 오셨고 제 사랑 또한 뜨거운 열정으로 불타는지라, 저의 모든 기도를 들으시는 줄 제가 아나이다. 당신께서 제게 기도하기를 바라시는 그것을 제가 기도합니다. 당신께서 제게 욕망하기를 바라시는 그것을 제가 욕망합니다. 당신께서 제게 하기를 바라시는 그 일을 제가 합니다. 당신은, 당신 종이 되게 하시려고 저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신자들의 유형이 여러 가지인데‘백설공주형'이 있답니다. ‘백방으로 설치고 다니는 공포의 주둥이’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바빠야 하는 데 오히려 남을 흉보고 헐뜯고 욕하는 사람이지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원망하고, 불평불만하며 교만한 '원불교'신자도 있지요. 그런가 하면, ‘우거지’형도 있습니다. ‘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성적인’신자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기왕이면‘우거지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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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기다림의 시간이 더 늘어날 것만 같은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다가와 묻습니다. 자신들 조직에 속하지도 않고 계보에도 없는 사람이 나타나서 백성에게 하느님의 뜻을 가르치고 그분의 선함을 드러내는 것이 그들에게 위기감을 안긴 탓입니다. "우리가 당신에게 권한을 준 적이 없는데" 하는 오만과, "혹시 저 위 거룩하신 분에게서 받은 것이라면" 하는 두려움이 공존하는 물음이었을 겁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 21,25)
예수님께서 되물으십니다. 사실 생명과 거룩함을 다루는 모든 권한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누군가 그 권한을 위임받아 행사할 뿐이지요. 그런데 권한을 차지한 이들이 권한의 단맛에 빠지면 자칫 그 권한을 자기들 것인양 사유화하는 우를 범하고 맙니다. 조직과 제도가 너무 견고해지면 주님조차 들어가실 수 없는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태 21,27)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를 보면 누구에게서 온 권한인지 모를 수 없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모순이 드러날까 두려워 대답을 피하지요.이에 예수님도 똑같이 응수하십니다.
사실 이 말씀은 인간에게 내려진 참으로 비참하고 가슴 아픈 선고입니다. 말씀이신 분이 말씀을 거두겠다고 하시니까요. 말씀이 세상에 오시어 백성 가운데 사시지만, 사람들의 몰이해와 모독은 그 말씀을 막아버립니다. 예수님도 안타깝고 아프시지만 지금은 침묵의 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발라암이 등장합니다. 그는 전승에 다라 점쟁이나 주술사, 또는 주님의 예언자라 여겨집니다. 이집트를 탈출해 광야에서 헤매던 이스라엘이 모압을 침략하기 위해 모압 벌판에 진을 치자, 모압 임금 발락이 발라암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는 것이 이 일화의 배경이지요.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민수 24,17)
하느님은 모압 임금이 요청한 저주 대신 축복을 발라암의 입에 담아 주십니다. 게다가 발라암의 눈에, 당장 일어날 일이 아닌 먼 훗날의 일까지 보여 주시지요. 아직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나눠 정착하기도 전에 "오실 분"에 대한 예언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발라암의 이 말은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성자께서 오시어 세상을 구원하시리라는 하느님의 계획이 이스라엘 국가의 탄생 전에 이미 섭리되었음을 오늘의 말씀이 증명해 주시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천 년도 하루 같으신 시간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말하지 않겠다." 하시는 예수님 말씀과, "지금은 아니다." 하는 발라암의 신탁이 함께 묘한 긴장을 건넵니다. 주님은 이천 년 전에 분명히 오셨고 올해도 반드시 오시지만,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침묵"이시고 "아직"일 뿐이니까요.
강생의 신비, 성탄의 신비는 오시는 말씀에 마음을 열고 기다리는 이들에게 열리는 문입니다. 불신과 안일함, 무관심의 동굴에 머리를 넣고 어둠을 이불 삼아 덮은 채 이대로가 안전하고 좋다고 경계하는 이는 물리적 시간이 아무리 흐르고 빛의 시기가 돌아와도 늘 대림이고 사순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멈추시지 않도록, "아직"의 시간이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다가오시는 말씀에 마음을 활짝 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과 사람에게서 오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영의 시력과 용기 또한 주시길 청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십자가의 성 요한은 가장 처참한 십자가 위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고 사랑한, 고도로 발달된 영적 시력의 소유자셨으니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시길 청합시다.
십자가의 성 요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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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나 안 죽었어?”
어린 남매가 있다, 교통사고로 오빠가 수술을 받는데 피가 필요했다. 맞는 피는 동생밖에 없다, 부모가 조심스럽게 딸에게 말한다. 딸애는 잠깐 고민하다가 흔쾌히 허락하여 수술을 무사히 마쳤다. 딸아이가 마취에서 깨어나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나 안 죽었어?!” 딸아이는 자신의 피를 주면 오빠는 살고 자신은 죽어야 하는 줄 알고 있었다.
♣인간관계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단위는 ‘3’이다. 먼저 ‘두 당사자’가 있고, 그 두 사람 간에, 오고 가는 ‘사랑의 표현’이 있어야 한다. 위 예에서는 피이다. 두 당사자만 있고 오고 가는 선물이 없다면 관계는 형성되지 않는다. 사랑이 커질수록 사랑의 선물도 커진다. 생명까지도 내어줄 수 있게 된다. 부부 일심동체로 서로 생명을 내주고 있어야 한다. 남편은 피 같은 돈을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을 위해 또한 산고를 겪고 피를 흘리며 죽음을 각오로 생명을 걸고 자녀를 출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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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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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성탄이 곧 다가옵니다. 이제 열흘 남짓 남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발라암은 신탁을 통해 선포합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 24,17)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을 합니다. 곧 예수님의 성전정화에 대한 권한을 따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원래 ‘권한’ 혹은 ‘권위’를 말할 때, “권”은 저울을 말한다고 합니다. 저울의 눈금은 어느 것이 딱 들어맞고, 어느 것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인지를 판가름해 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저울은 ‘하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람의 저울은 물건의 경중을 가려서 판가름해 내지만, 하늘의 저울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가름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 21,25)
그들은 자신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였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모르겠소.”라는 이 말마디가 가슴을 쿵 내리칩니다. 이는 평소의 나의 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진실하지도 솔직하지도 못하고, 비겁하고 위선적이고, 눈치 보며 회피하는 계산적인 이 말마디가 바로 내가 자주 내뱉는 말마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가린 제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가려진 거짓을 들추시고, 제 오만함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죄를 일깨워주십니다. 제가 저 자신의 저울로 예수님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는 오늘도 제 자신의 저울로 다른 이들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게 합니다. 사실,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은밀히 감추어진 속내가 드러날 것입니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속셈이 들통 날 것입니다. 그러니 타인을 저울질 하다가, 자신이 저울질 당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 진 것은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함과 자신의 속셈과 거짓과 위선으로 치장하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이제는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자기 자신을 올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이제는 남을 저울질하기보다, 자신이 주님의 저울인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따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그에게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볼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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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태 21,23)
주님!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내 사랑의 무게를 따지게 하소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 지를 가리게 하소서.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 진 것은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임을 알게 하소서.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저 자신을 올려놓고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속셈과 거짓과 위선을 들여다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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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태 21,23)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다가와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습니다. 메시아가 오기 만을 간절히 기다린 시간이 4천 년이고, 기다려온 메시아가 자기들 눈 앞에 있는데도, 그들은 메시아를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하면서 헛소리를 해댑니다.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에 계십니다. 그 표지 중 하나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어디든 중심이 되는 곳에 '십자가 고상'을 걸어 놓습니다. "십자가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처럼 십자가는 벽이나 목에 거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결정적 표지입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함께 상징하는 구원의 표지입니다.
오늘은 온전히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열렬히 사랑한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사부 축일을 맞이한 가르멜 수도회 가족들과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아빌라의 성녀'로 잘 알려진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오늘날의 개혁 가르멜 수도회를 탄생시킨 분으로서, '교회 학자'이자 '교회의 위대한 신비가'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러 돌아다니는 노력의 반만이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관상생활'에 쓴다면, 더 많은 영혼을 구하고 교회에도 유익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언급한 '관상생활'은 어떤 생활을 의미할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온전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 안에 깊이 머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성 요한을 통해 우리를 관상생활에로 초대하십니다. 이 초대에 기쁘게 응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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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SZD3vxbcxyg&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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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태 21, 23)
예수님의
권한(權限)과
인간의 권력은
사뭇 다르다.
우리의 사정을
헤아려주시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시는
주님의 살아 있는
권한이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참된
권한이시다.
내려오셔도
그 권한은
조금도
사그라들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예수님의 권한은
사람을 살린다.
참된 권한으로
우리의 삶을
참된 삶으로
바꾸어 놓는다.
건강한 권한은
건강한 삶의
중심이며
축(軸)이다.
불안한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
주신다.
예수님의 권한은
길 잃은 우리를
찾아오신다.
거짓과 흉내를
멈추고 우리를
본래의 모습으로
살게 하신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는
본래의 우리
모습으로
돌아가는 때이다.
우리는 어떤
권한을 믿고
살아가고 있는가?
미사 때마다
성체로 내려오시고
우리 죄를
씻어주시는
구원과 해방
용서와 치유의
주님, 그 권한을
믿는다.
주님에게는
당신 자녀들인
우리가
전부가 되는
그 권한을
사랑이라 부른다.
사랑으로
내려오시고
살리시는
권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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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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