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럴 해저드에 대하여
아이들과 이야기하던 중, 파산 면책제도에 대하여 제가 잠시 이야기해 주었더니 한 아이가 그러더군요. 에이, 그런 게 있으면 누가 빚을 갚겠어요?
세상은 참 재미있습니다. 빚 때문에 남들과 다른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 이 순진한 아이가, 자기 빚을 떼일까 겁나서 목청을 높이는 돈 많고 힘 있고 유식한 어른들과 똑같은 말을 합니다.
저 말을 우리나라 유식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어로 하면 바로 「모럴 해저드」 아닙니까. 유식한 사람들은 숫자나 유식한 말로 모든 것을 자신 있게 결론 내리기를 좋아합니다.
그 말들을 실제 사람의 삶과 연관지어 보려면 통역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소비의 하방 경직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소득이 줄어든 마당에 종전의 소비 수준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강하여 빚이 늘어난다는 거죠.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도 유지하려 하는 종전 소비라는 것은 실제로 어떤 것들일까요? 외제 차, 해외여행, 골프인가요?
제가 보기에 그것은 아이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친구들과 선생님이 있는 유치원을 그만두게 하느냐 하는 것이고, 남들 고액과외 시킬 때 아이들 동네 학원이라도 보내며 공부 잘해서 나중에는 부모보다 잘 살기를 바라왔는데, 그나마 그만두게 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고, 노환으로 병원 출입이 잦은 고향 부모님께 병원비와 용돈 보태라고 보내던 10만원을 계속 보내느냐 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에 봉착한 사람들이 경제학자들처럼 과감하게 「소비수준을 하강시키지」못한 채, 앞으로 열심히 돈을 벌어 갚을 수 있다고 믿으면서 마이너스대출을 받고, 현금서비스를 받아 학원비, 병원비, 유치원비를 내다가, 결국 월말 카드대금 고지서를 감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파산은 고사하고 카드대금 연체가 한 번이라도 시작되면 인생 끝장이라고 두려워한 나머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잘도 발급해 주는 신용카드를 또 발급받아 돌려 막기를 시작합니다. 카드 깡을 해 가며 카드대금을 갚아도 원금은 난공불락입니다.
연체료 갚기도 버겁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빚이 1억이라는데 그 중에 학원비, 병원비, 유치원비로 써 보기라도 한 돈은 반도 안 되고 나머지는 다 이자, 연체료인 상황이 되자 벼랑 끝에서 뛰어 내리는 심정으로 빚을 탕감 받고자 법원을 찾는 일이 늘어납니다. 「모럴 해저드가 우려된다」는 말의 통역입니다.
「모럴 해저드」라는 말에는 다른 뜻도 있더군요.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연구한 「신용불량자 증가의 원인분석과 대응방향」이라는 자료를 보니, 신용불량자의 증가는 1998년 소위 IMF 시대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을 거치며 시작되었습니다(이는 실업과 불황 등 「소득 감소」를 원인으로 하는 것이겠죠).
이를 확대시킨 것은 1999년 5월, 현금서비스 한도규제 폐지 후 신용카드 회사들이 길거리 모집 등 위험관리를 도외시한 치열한 자산 확대 경쟁을 전개하여 잠재적 부실을 축적한 채 신용팽창이 계속되었습니다(소득이 줄어들었는데, 그렇다고 생활수준을 더 낮출 수도 없었던 사람들에게 일단 돈을 쓰게 해 주고, 앞에 빌린 돈도 못 갚는 사람들이 돌려 막기로 파산을 모면하며 버틸 수 있게 온갖 카드를 발급하여 주면서 업계 1위, 외형 1위가 되기 위해 노력한 것이지요).
2002년 6월 이후 감독 당국에 의해 건전성 감독규제가 도입되자 갑자기 카드회사들이 신용정책을 엄격화하여 잠재적인 부실이 현재화하게 된 것입니다(더 이상 위와 같은 사람들이 돌려 막기를 할 수 없게 돈을 빌려주는 것을 까다롭게 하자 곧바로 카드대금 연체가 시작되고, 신용불량자로 등록되는 사람이 급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2002년 3/4분기 이후 드러난 신용불량자의 급증은 주로 신용카드회사의 「도덕적 해이」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된다는 겁니다. 「모럴 해저드」라는 말은 이럴 때도 쓰는 것이라 하더라고요.
제가 요즘 자기 전에 읽는 책이 있습니다. 하버드 법대의 파산법 교수인 엘리자베스 워런 교수가 딸인 컨설턴트 아멜리아 워런 티아기와 함께 쓴 「맞벌이의 함정」(The Two-Income Trap)이라는 책입니다.
하버드대학이 주관한 개인파산에 대한 통계적 분석과 연구 성과를 기초로 미국에서의 개인파산의 증가(2002년에 200만 명이 파산신청을 했다는군요) 원인을 알기 쉽게 분석한 책입니다.
이 책에 따르면, 미국에서의 파산자 중 상당수는 맞벌이로 상당한 소득을 올리는 중산층이라는 겁니다. 소득이 올라갔는데 웬 파산이냐고요?
요약하면 소득이 올라가는 것보다 고정지출 늘어나는 것이 훨씬 높아서, 여유자금은 과거보다 대폭 줄어든 빡빡한 삶을 살아가다가 실업, 급여감소, 질병 등 변동요인만 발생하면 곧바로 파산상태에 이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고정 지출이 그렇게 많다는 것이죠. 그건 바로 자녀의 「안전」과 「교육」에 대한 지출이라는 것입니다.
도시의 범죄율 증가와 公교육의 부실화로 중산층 부모들은 안전하고 좋은 학교가 있는 학군(學群) 좋은 교외주택가(비벌리힐즈 같은 富村과 귀족사립학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평범한 주택가를 말하는 것입니다)로 너도나도 몰려가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그런 곳의 주택 값은 천정부지로 뛰어 대출금 이자 갚는 데만도 허리가 휜답니다.
게다가 맞벌이를 하다보니 필수인 아이 봐주는 보육비와 유치원비는 대학 등록금보다도 비싸지고, 자녀가 평범한 샐러리맨 생활이라도 하려면 대학교육은 필수입니다.
대학 등록금은 오르기만 하고, 건강보험료와 본인 부담금은 늘어만 가고. 사치는커녕 부부가 뼈 빠지게 일해서 자녀들을 남들만큼만 교육시켜 보려고 지출하는 돈이 소득의 거의 대부분입니다. 미래의 위험에 대비할 여유자금이라고는 없고. 아슬아슬하게 꾸려가는 이 생활이 작은 충격에도 무너져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4월14일 미국 下院에서는 부시 정부가 내놓은 파산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더군요. 파산신청의 남용을 규제한다면서 파산 면책받기를 까다롭게 만들어 놓은 법입니다. 主 타깃은 바로 중산층인 것 같더군요.
지난 몇 년간 미국 파산법 개정을 위해 소비자신용업계 등 대기업들이 엄청나게 노력을 하고 있다더니 부시 대통령의 재선과 함께 결실을 본 모양이네요.
그날(4월14일), 엘리자베스 워런 교수는 하버드 대학 연구실에서 어떤 심정으로 이 뉴스를 바라보고 계셨을지, 일면식도 없는 주제에 전화라도 해 보고 싶어집디다.
이화여대 법대 오수근 교수의 글을 보면, 파산법의 역사는 영국에서 1542년에 法을 제정한 이래 450년 동안 발전해 왔다고 합니다. 빚 못 갚는 채무자의 목에 칼을 씌워 구경거리로 삼고, 감옥에 투옥시키던 때로부터 정말 오랜 세월을 거쳐 불운하나 정직한 채무자에게 채무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된 것입니다.
그 오랜 역사동안 언제나 채권자들은 채무자들이 파산법을 남용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지요.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의 파산법 개정안 통과 뉴스를 반갑게 지켜보았을 분들이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수백 년 파산법 역사에 연간 200만 명 가까이 파산을 신청하는 미국에서도 위 개정법에 대해서는 악법(惡法)이라고 논란이 많던데,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로 1만 건을 넘은 우리나라에서 이용도 하기 전에 남용부터 막으려 할 정도로 장래를 내다보는 분들이, 왜 400만이나 되는 사람들이 신용불량자가 되기 전에 진작 무분별한 소비자신용업의 남용을 걱정하지 않았는지는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신용불량자 문제는 미국에서의 중산층 위기와는 달리, 보다 서민층에게 집중적으로 나타난 문제이지만 우리나라 중산층의 교육열ㆍ私교육비ㆍ강남 집값 등을 보면 위 책의 이야기는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닐 것입니다.
파산의 문제는 특정한 계층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닥칠 수 있는 문제이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면책제도와 개인회생제도는 일종의 사회적 보험인 것입니다.
파산면책을 이용해 남의 빚을 안 갚는다고요? 안 갚는 것이 아니라 못 갚는 것입니다. 면책결정을 하든, 안 하든 어차피 빚 갚을 능력은 고사하고 신불자로 취업도 안 되고 신용거래도 되지 않아 자기 가족의 기본적 생활도 꾸려나가기 힘든 사람들이 파산선고를 받고 면책을 받는 것이고, 그나마 수입이 조금이라도 있어 기본적인 생활비를 제외한 나머지라도 갚아 나간 후 남은 채무를 면책 받는 것이 개인회생입니다.
경제적으로 말하면 이런 사람들에 대한 채권은 액면이 10억 원이든 100억 원이든 이미 가치가 제로나 다름없는 부실채권입니다. 어찌 보면 법원의 면책결정이 별 게 아닙니다. 원래 가치가 0원인 채권을 0원이라고 공식확인해 주는 것에 불과합니다.
꼬박 꼬박 잘 갚고 있고, 앞으로도 갚을 수 있는 빚을 어느 날 갑자기 법원이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갚지 못해 왔고, 앞으로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숫자에 불과한 채무의 노예로 묶어 놓고 취업도 못하게 하고, 빚 독촉전화에 자살하고 싶도록 궁지에 몰아넣어서 채권자들이, 이 사회가 얻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어차피 못 갚는 빚, 무의미한 숫자 지워주고 경제활동에 복귀하여 자기 앞가림이라도 할 수 있게 해 주지 않으면, 결국은 이 사람들은 국민 세금으로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는 사회복지의 대상자가 되거나, 심하면 홈리스, 나아가 범죄자가 되어 또 다른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킬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전체에게 이익이 되는 것일까요?
물론, 빚을 갚을 수 있으면서도 재산을 숨겨놓고 파산을 신청하는 사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면책불허가 사유가 있고, 사기파산죄가 있는 것입니다. 빚진 사람 사정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누굽니까. 돈 빌려 준 사람 아닙니까. 채권금융기관들이 신용관리를 제대로 해 왔다면 돈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벌써 최대한 돈을 받아 냈을 것이고, 그런 사람이 면책신청을 했다면 당연히 그런 사실을 밝혀서 이의신청을 하겠죠.
법원은 파산면책 절차에서 채권자들에게 이의신청할 기회를 수차 줍니다. 하지만, 실제로 채권금융기관들이 구체적인 사유를 입증하면서 이의를 하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채무자의 온갖 신용정보를 다 갖고 있는 채권금융기관이 이의를 하지 않는데 판사는 이 채무자가 어디다 재산을 숨겨 놓았는지 어떻게 알아내야 합니까. 주역을 공부해서 동남방에 금 항아리를 묻어 놓았는지 점괘를 풀어보아야 하나요?
채권금융기관들이 이의를 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 본 적도 없는 제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두 가지 아닐까요? 이의할 만한 파산을 악용하는 사안이 실제로 많지는 않거나, 또는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받기 힘든 부실채권으로 내부적으로는 대손처리가 끝났기 때문에 별 관심이 없거나가 아닐까요.
서울중앙지방법원 파산부가 2004년에 처리한 면책사건의 면책율은 98.6%입니다. 금년 1/4분기에는 99.3%입니다. 파산부 판사들이 우표에 소인 찍듯이 사건만 들어오면 곧바로 면책도장 찍어주고 있냐고요?
물론 가능한 한 신속하게 처리하려고 애쓰고는 있지만, 그래도 채권자들에게 온갖 이의신청 기회 다 주고 있을 뿐 아니라, 판사라는 사람들의 천성상, 기록이 아무리 쌓여 있어도 기록상 명백히 사치, 낭비, 투기를 일삼거나 재산을 빼돌리는 등 진짜 파산을 남용하는 흔적이 나타나는데 바쁘다고 안 보고 지나가지는 못합니다.
얼마 전에 서울중앙지방법원장님께서 파산부 판사들에게 저녁을 사주면서 건의사항이 있으면 하라기에, 제가 그랬습니다.
파산부 쪽 전기배선이 안 좋은 것 같다. 밤 11시가 되어도, 밤 12시가 넘어도 도통 불이 꺼지질 않는다. 좀 수리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심리해서 면책한 비율이 99%입니다. 그럼 나머지 1%는 정말 흉악한 사기꾼들이냐고요? 솔직히 아닙니다. 그 1%도 비록 면책은 여러 가지 사유로 불허가 되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놓고 보면 다 힘들게 살아 온 사람들입니다. 물론 사건이 급증하면서 남용이 우려되는 사례도 늘기는 하겠지만요.
제가 보기에 파산자들은 대체로 세 가지 종류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자기 가족이 빠듯하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돈을 가까스로 충당하다가 실업, 질병 등의 이유로 감당할 수 없게 된 사람들, 조금이라도 잘 살아 보고 싶어서 돈을 벌어보려고 이것저것 애쓰다가 망해버린 사람들, 자기도 자기 앞가림만 겨우 하는 처지에 그놈의 「정」과 「핏줄」에 목이 메인 한민족으로 태어난 죄로 부모형제, 친지의 빚보증을 어쩔 수 없이 섰다가 같이 망한 사람들입니다.
도대체 「모럴 해저드」를 걱정하는 분들이 말하는, 남의 돈 빌려서 흥청망청 신나게 쓰고는 자기 먹을 것은 다 숨겨 놓고 파산 신청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가야 찾을 수 있는 것입니까. 골프장 해저드 안에 숨어 있나요?
2. 마법 책
지난 연말 아이들과 만났을 때, 한 판사님이 보여준 마술 중 아이들이 가장 좋아한 것은 마술그림책이었습니다. 한번 스르륵 넘길 때는 아무것도 없다가, 다시 한번 처음부터 넘기니 예쁜 그림이 나타나고, 또 다시 처음부터 넘기니 색깔이 칠해져 있고 하는 것입니다.
저도 호그와트에 가서 진짜 마술을 배워왔으면 좋겠습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그 아이들에게 환하게 웃는 엄마 아빠가, 친구들 집 같은 평범한 가정이, 작지만 예쁘게 꾸민 자기 방 한 칸이 나타나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빚 갚으라며 아빠 멱살을 잡던 험상궂은 아저씨의 기억도, 엄마가 보고 싶어 남몰래 베개를 적시고 마는 눈물도, 소풍 때 엄마 아빠와 온 학교 친구들 곁에서 느낀 부러움도 영원히 사라지도록 말이죠.
하지만, 평범한 판사들이 할 수 있는 마법은 한 가지 뿐입니다. 손에 골무를 끼고 기록을 뒤적이다가 컴퓨터 자판을 눌러 주문을 외웁니다.
『파산자를 면책한다』고.〈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