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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12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제1독서 : 히브 2,5-12
복 음 : 마르 1,21ㄴ-28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선생님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지요.
교사가 되어 학생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면서 즐겁게 생활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원했던 선생님이 되었지만,
그 꿈이 얼마나 실현되기 힘든 일인지를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자기를 찾아오는 학생들을 볼 수 없었습니다.
존경심도 전혀 없고, 자신에 대한 호감도 없었습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예전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생님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기쁘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를 친한 고등학교 동창에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아주 뜻밖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너 학생 때 학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잖아. 지금도 학교를 좋아하지 않는 것 아니야?”
학생 때부터 선생님이 된 지금까지도 학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본인이 좋아하지 않으니, 학생들이 자신에게 호감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고
또 존경을 표현할 수도 없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이 있고 없고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사람들은 호감을 느끼고 그래서 함께하고 싶어 합니다.
만약 상대방이 자신에게 호감도 없고, 함께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내 안에 사랑이 있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면서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면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라면서 함구령을 내리시지요.
베드로도 예수님에 대해 똑같이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을 통해 커다란 칭찬과 함께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얻었습니다.
하지만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혼이 납니다. 그의 말 역시 정답인데 말이지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사랑으로 고백했고, 악마는 두려움으로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얼마나 사랑을 간직하면서 생활했는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혹시 자신이 받을 사랑만 생각하면서, 사람들이 사랑을 주지 않는다면서
불평불만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가장 먼저 자신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을 가지고 고백을 해야 주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사랑을 가지고 이웃에게 다가가야 주님으로부터 더 큰 선물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 넘치는 우리의 고백을 원하십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행적은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일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에 벌이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첫 번째 행적은 사고를 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행적인 악마추방 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와를 속인 악마의 혀 놀림을 중지시키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그러자 악마는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그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로써, 당신께서 선포하신 “복음”인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사실이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을 멈추고 어둠을 몰아내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구마자들도 그러한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이를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
그렇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그분의 “권위”입니다.
무슨 권위 인가? 다름 아닌 “말씀”이 이루어지는 권위입니다.
곧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놀라워했던 것은 그분의 권위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권위”를 나타내는 ‘exusia’라는 말은 ‘힘’이란 뜻으로, 하느님께만 사용되는 말이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이 구마치유는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면서
당신 스스로 명령하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에 의탁하여 행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구마 할 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엄의 영은 주 예수께로 가라”고 명함으로써,
예수님의 힘과 권위를 빌어 행하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첫 번째 행적은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권위 있는 가르침”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당신의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르 1,24)
주님!
진리를 알게 하소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거룩함 안에서 제가 새로 나게 하소서.
주님이신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002년부터 2005년까지 교구청 사목국에서 ‘교육담당 업무’를 하였습니다.
구역장과 반장을 위한 월례연수를 기획하였고, 남, 여 총구역장 피정을 준비하였습니다.
월례연수는 각 지구에서 있었기에 한 달이면 18번을 지구로 나가야 했습니다.
겹치는 날은 국장 신부님과 나누어서 나갔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에는 교구의 사목교서를 설명하고, 간단한 오락을 준비하였습니다.
새해가 시작되는 1월에는 교구장님의 새해 인사를 영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주교님의 배려로 월례연수에 참석한 구역장과 반장들에게 ‘묵주’를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마이크를 잡을 일이 많았습니다.
총구역장님들의 소개로 본당에서 대림, 사순 특강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함께하는 여정의 봉사자 교육에도 함께 하였고, 성체분배자 교육도 함께 하였습니다.
사목위원 교육에도 함께 하였습니다.
사목위원들은 본당 사제와 자주 만나게 됩니다.
사목위원 교육을 하면서 본당 신부님의 유형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제가 보좌 신부로 모셨던 신부님들의 사목을 보면서 체험한 것들을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는 기도하는 사제였습니다.
신부님은 하루에 4시간 이상 기도하셨습니다.
신부님의 기도 방에는 커다란 초가 있었습니다.
제방의 초는 1년이 지나도 거의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부님 기도 방의 초는 자주 바뀌었습니다.
초가 다 타들어가 재가 될 때까지 기도하셨습니다.
꽃의 향기가 발이 없어도 퍼지듯이 신부님의 기도는 본당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조용한 성당에서 기도하시던 신부님의 뒷모습이 생각납니다.
아이들과 함께 롤러스케이트를 타러 가셨고, 보좌신부들과 함께 동네 산책을 하셨습니다.
강물이 흘러서 바다로 가듯이, 본당의 일들이 막힘없이 진행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두 번째는 정확한 사제였습니다.
신부님께는 시계가 따로 필요 없으셨습니다. 언제나 같은 시간에 산보를 하셨습니다.
영어, 독일어, 이태리어를 자유롭게 말씀하셨습니다.
건축, 미술, 음악에도 조예가 깊으셨습니다.
본당의 재정도 환하게 아셨고, 투명하게 운영하였습니다.
제게도 두 가지를 강조하셨습니다. 책을 늘 가까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동, 서양의 고전을 소개해 주셨고, 선물해 주셨습니다.
책을 읽고 신부님과 대화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감사할 일입니다.
재정에 관심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사제는 본당 신자들이 내는 헌금과 교무금을 잘 관리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당 마당에 있던 감나무에서 익지 않았던 감이 떨어졌습니다.
신부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감나무도 더 큰 감이 열리도록 불필요한 감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신부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경청하는 사제였습니다.
외국에서 유학하시고 돌아오신 신부님은 첫 본당 사제가 되었습니다.
많은 것을 아셨지만 신부님은 늘 먼저 이야기를 들어 주셨습니다.
수녀님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셨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성당 마당에 텃밭을 가꾸어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사목회장님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셨습니다.
중요한 결정은 언제나 사목회장님과 먼저 상의하였습니다.
부족한 저의 이야기도 잘 들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성서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수녀님은 여성 구역장과 반장을 대상으로 성서공부를 하였고,
저는 사목위원들과 함께 성서공부를 하였습니다.
마르코 복음을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에 대해서 토론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예루살렘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와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가난한 이, 병든 이, 외로운 이, 고통 받는 이와 함께하는 권위였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다스림과 권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의 다스림과 권위를 비판하셨습니다.
그들의 다스림과 권위는 위선과 가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지고 가야할 짐을 남에게 떠 넘겼기 때문입니다.
말은 있지만 그 말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조문은 알지만 율법의 정신은 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은 ‘약육강식, 적자생존, 승자독식’의 다스림이 아니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묶인 이를 풀어주고, 갇힌 이에게 자유를 주는 다스림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까지도 찾아서 양 우리로 데려오는 다스림입니다.
‘다스림과 권위’를 잘못 이해하는 사제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다스림과 권위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하는 사제, 투명한 사제, 경청하는 사제는 바위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 25)
한상우 바오로 신부
고요함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믿음의 시작은
고요함의 시작이다.
시끄러움은 고요함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고요해져야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 된다.
무엇을 꼭 해야지만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조용해져야
하느님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다.
우리의 아픔과
고통스럽지만
맞닥뜨려야할 순간이 있다.
뒤엉켜버린
우리 내면을
정화시키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다.
고요함의 관계가
주님과 참된 관계이다.
고요함은 겸손함이다.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들어오실
빈자리가 없다.
하느님을 향한
참된 사랑은
이와 같이 고요하다.
비워낼 때
투명하고 아름답다.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은
결코
요란스럽지 않다.
고요하고
조용할 뿐이다.
고요함이
제자리를 잡는 은총이다.
고요함이
사람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고요함을 방해하는
많은 것들은
사람에게서 나가라.
믿음으로
고요함을 얻는다.
가르침이 권위를 잃는 이유: 본질을 꿰뚫지 못하기 때문
전삼용 요셉 신부
첫 어부들을 제자로 뽑으신 예수님은 이제 본격적으로 사람 낚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 일을 시작하시며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권위 있는 가르침’입니다.
복음 전파자의 권위는 ‘성령’입니다. 성령만이 악령을 쫓아낼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회당에 있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쫓아내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라며 놀라워합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과 악령을 쫓아내시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가르침은 말로 하는 것이고 악령은 성령으로 쫓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말에 성령의 힘이 더해지면 사람에게서 악령이 떠나가게 되는데
그런 가르침이라야 권위가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권위가 없는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요?
가르치기는 하는데 악에서 구하는 가르침이 아닌 경우입니다.
악에서 구하는 가르침이 아니라면 결국 그 가르침은 권위를 잃게 됩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전설 중에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한 생쥐가 고양이가 너무 무서워 고민하다가
뛰어난 능력을 갖춘 마술사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도움을 구했습니다.
“마술사님, 저는 고양이가 너무 무섭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마술사는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생쥐를 불쌍히 여겨 생쥐를 고양이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고양이가 된 생쥐가 다음날 또 마술사를 찾아갔습니다.
“마술사님, 제가 고양이가 되고 보니 이제는 개가 너무 무섭습니다.”
그러자 마술사는 고양이가 된 생쥐를 다시 개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개가 된 생쥐가 다음날 또 마술사를 찾아간 것입니다.
“마술사님, 개가 되고 보니 이제는 사자가 너무 무섭습니다.”
할 수 없이 마술사는 개가 된 생쥐를 사자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이제 동물의 왕인 사자가 되었으니 더는 무서워하지 않겠지!’ 하고 마술사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자가 된 생쥐가 다음날 또 찾아온 것이 아닙니까?
“마술사님, 제가 사자가 되고 보니 이제는 사냥꾼이 너무나 무섭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덩치 큰 사자가 되어서도 여전히 두려움 속에 있는 생쥐를 어이없이 쳐다보던 마술사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너는 몸은 사자이지만 마음은 여전히 생쥐의 마음이구나.
그러니 다시 생쥐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이 우화에서 멍청한 대상은 쥘까요, 마술사일까요? 저는 마술사가 더 멍청해 보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해주지 않고 겉도는 가르침만 주어
자신은 잘났고 쥐는 여전히 못난 것만 증명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훌륭한 마술사라면 쥐의 두려움을 빼내 주려 노력했어야 할 것입니다.
두려움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왜 어머니의 말이 잔소리가 되는 것일까요?
아이에게서 본질적인 악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 게임 좀 그만하고 공부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아이는 게임을 끊고 공부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래 봐야 행복하지 않습니다.
게임을 하는 아이는 게임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게임을 하게 시키는 세속-육신-마귀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게임을 포기하고 공부를 해봐야 결국 자아로부터 해방되지는 못합니다.
공부도 게임과 다를 게 없습니다. 경쟁 속에서 자아에 여전히 사로잡힙니다.
그렇다 보니 부모의 말은 결국 진짜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고
다음부터는 부모의 말이 권위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어 봐야 참으로 자아에게서 벗어나는 평화는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처음 입교를 할 때 가장 많이 쓰는 입교 이유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세상살이의 고통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얻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사실 마음의 평화를 더 받을 수 있는 종교는 불교입니다.
불교는 삶의 고통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지의 철학적 통찰을 제시합니다.
붓다가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를 닦은 결과물들이 교회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평화를 찾는 이들에게는 불교의 가르침이 더 신통하기만 합니다.
가톨릭교회에 입교해서도 결국에는 스님들의 가르침에 더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주는 평화는 달라야 합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악령에게서 벗어나게 만드는 가르침이어야 합니다.
문제는 악령이 나와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에 있습니다.
사실 내 안에 있는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자아내는 자아도 악령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단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결국 그 욕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악령과 같이 되는 것이 맞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는 평화는 이 악령에서 벗어나서 얻는 평화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가 곧 ‘악’이란 뜻일까요? 그렇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주님의 기도 중 “악에서 구하소서”에서의 ‘악’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교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은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한 위격, 곧 사탄, 악마, 하느님께 대항하는 천사를 가리킨다.
‘악마’(dia-bolos)는 하느님의 계획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룩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가로막는’ 자이다.”(285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한다는 말씀을 하실 때 베드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안위를 걱정하며 자신의 평화도 지키려는 발언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인간도 자기 생각에만 집중하면 사탄과 다를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말씀에 권위가 있으려면 당연히 악령으로부터도 사람을 구할 수 있어야 하지만,
더 보편적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묶여 있는 사람들을 해방하는 가르침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탄과 동침을 하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 채
마음의 평화만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오상의 비오 신부님은 마귀가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내 자신이 곧 마귀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한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 참 해방인지 먼저 신자들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악으로부터 해방해 주려는 말을 할 때 권위 있는 가르침이 됩니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보여 주십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들어가시어 가르치시던 회당 안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도 섞여 있었지요.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거칠게 저항합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따집니다.
당신은 나랑 아무 상관없으니 참견하지 말라는 뜻이겠지요.
게다가 그는 예수님의 신원을 파악해 함부로 떠벌립니다.
증언이 어떤 사람의 입에서 나가느냐에 따라 사람들에게 호의도 일으키고
거부감도 일으킬 수 있다는 걸 악이 이용하는 듯합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예수님은 더러운 영에게 휘둘려 자기도 모르는 행동을 하게 된 그 가련한 이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 더러운 영은 그 사람 안에 들어가 그를 옷 입듯이 입고 사람과 세상을 공격했겠지요.
영문 모르는 이들은 그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하거나 피하며 소외시켰을 것이고요.
하지만 예수님은 더러운 영과, 그 영에게 고통을 겪는 사람을 분리해서 대하십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영은 쫓아내시고,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던 그 사람은 구원해 주신 것이지요.
예수님은 악과 사람을 분리해 대하십니다.
자신에게 괜한 공격을 일삼는 이에게서라도 그 상처 입은 인격이 지닌
고귀함을 볼 수 있는 시선이고, 그를 구해주려는 자비입니다.
더러운 영이 주장한 "관계없음"은 악의 발상입니다.
세상 모든 조물은 서로서로 모두 다 관계가 있으니까요.
하느님에게서 창조된 모든 피조물은 누구도 예외 없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며 생성하고 성장하며 소멸해 갑니다.
이 여정 안에서 누구도 완전히 홀로일 수 없습니다.
제1독서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 관계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히브 2,11)
예수님께는 더러운 영에 들려 인간의 존엄한 몰골을 갖추지 못한 이도, 죄악으로 불결해진 이도,
심지어 은총을 거부하는 이조차도 아낌없는 사랑을 흠뻑 쏟아주고픈 형제입니다.
당신께서 모든 피조물의 맏이시기 때문이지요.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히브 2,10)
성부 하느님은 성자를 통해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고 성장하고 소멸하여 하느님께 되돌아가지요.
모든 만물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만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목적이신 하느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창조하시는 성부, 구원하시는 성자,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 안에서
우리 모든 피조물은 하나입니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
사람들이 놀라서 서로 묻습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제 편인 사람들의 말을 듣겠지요.
더러운 영이 예수님께 복종한 이유는 그 자신이 아무리 주님과의 관계성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그분의 권능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마르 1,27)을 만납니다.
가장 소외되고 허약한 이를 향해 흐르는 사랑이 새로움과 권위의 골자입니다.
그만큼 예수님께 우리 모두가 귀하고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새로움과 권위가 어떤 이들에게는 희망과 위안이 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경계와 두려움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각자에게 고유하게 다가오신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새해에, 방금 들어선 연중 시기에
우리에게서 무엇을 떨쳐내 주시고, 어떻게 회복시켜 주시고자 다가오실지요...
무엇을 건드리시건 분명 우리에 대한 사랑과 자비 때문이니,
기꺼이 따르며 순종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 벗님을 새로이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