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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 3,25.34-43
그 무렵
25 아자르야는 불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입을 열어 이렇게 기도하였다.
34 “당신의 이름을 생각하시어 저희를 끝까지 저버리지 마시고 당신의 계약을 폐기하지 마소서.
35 당신의 벗 아브라함, 당신의 종 이사악,
당신의 거룩한 사람 이스라엘을 보시어 저희에게서 당신의 자비를 거두지 마소서.
36 당신께서는 그들의 자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37 주님, 저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저희의 죄 때문에 저희는 오늘 온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38 지금 저희에게는 제후도 예언자도 지도자도 없고 번제물도 희생 제물도 예물도 분향도 없으며 당신께 제물을 바쳐 자비를 얻을 곳도 없습니다.
39 그렇지만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 주소서.
40 이것이 오늘 저희가 당신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 되어 당신을 온전히 따를 수 있게 하소서.
정녕 당신을 신뢰하는 이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41 이제 저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렵니다.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의 얼굴을 찾으렵니다.
저희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주소서.
42 당신의 호의에 따라,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희를 대해 주소서.
43 당신의 놀라운 업적에 따라 저희를 구하시어 주님,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8,21-35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사순시기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리고 올바른 관계맺음의 한편에는 “회개”가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제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마태 18,21)
용서의 한계를 묻는 이 질문은 용서를 선심 쓰듯이 적당히 아량을 베풀면 되지 않겠느냐는 마음의 발상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당시 유대의 랍비들이 세 번까지 용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던 것보다는 관대한 것이었기는 하였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 18,21)
참으로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절대적입니다.
‘만약 상대가 회개하거나 용서를 청하면’이라든지 혹은 ‘상대가 준비가 되면’이라든지와 같은 조건을 달지 않으시고, 무조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용서를 적당히 하거나 알량한 선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항구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그렇게 먼저 우리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셔도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또한 자기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용서는 무색해지고 말게 되는 경우를 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넘겨준 유다는 자신의 죄를 뉘우쳤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간음죄와 살인죄를 지은 다윗, 성범죄를 지은 막달레나, 스승을 배반한 베드로, 그리스도인을 박해한 바오로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을 용서했으며, 그래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사실 자신이 용서받았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용서하는 사람은 자신이 받은 바로 그 용서의 심연으로부터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결국 먼저 자신을 용서할 때 타인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머리로 하거나 동정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야말로 용서는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이 됩니다.
사실 우리가 용서한다는 것은 그의 죄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며,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느냐?”
(마태 18,33)
이 말씀은 용서받는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절대적으로 용서를 행해야 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십시오.”
(에페 4,32)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골로 3,13)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 18,22)
주님!
용서할 수 있게 하소서.
아니, 용서하기에 앞서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여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주님!
일곱 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게 하소서.
무한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나아가,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고 도와주고 돌보게 하소서.
주님!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게 하소서.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아무것도 없을 때>
“그렇지만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 주소서.”
몇 년 전부터인지 모르지만, 저는 아자르야의 이 기도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점차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의 아자르야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저의 영혼과 정신이 아자르야처럼 부서지고 겸손해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물론 이전의 저는 결코 이런 존재가 아니었고, 아직도 이런 존재와는 거리가 먼 저이며, 또 이렇게 되는 것이 두렵습니다.
이전의 저는 부서진 영혼이 아니라 부수는 영혼이었고, 겸손해진 정신이 아니라 교만하기가 하늘을 치달을 정도였습니다.
내 영혼이 부서져야 한다고 생각지 않고 다른 사람 특히 불의를 저지르는 인간들이 부서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교만한 저인 줄 알면서도 그 교만을 꺾을 수 없다고 제가 교만한 줄 아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겸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말로는 작은 형제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결코 작지도 낮지도 않고 사람들 위에 군림했기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중요한 책임을 많이 맡다 보니 그리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저를 보는 것이 너무도 괴로웠습니다.
작은 형제인 제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그렇지만 생각뿐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의 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저 스스로 이렇게 되지 못하니 하느님께서 저를 부숴주십니다.
오늘 아자르야가 얘기하는 그대로입니다.
아자르야는 이스라엘의 지난날과 지금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 저희는 저희의 죄 때문에 온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저희에게는 제후도 예언자도 지도자도 없고 번제물도 예물도 분향도 없으며 제물을 바쳐 자비를 얻을 곳도 없습니다.”
죄 때문에, 있어야 할 것들, 그러니까 백성을 다스릴 지도자, 바쳐야 할 제물, 제물을 바칠 성전이 하나도 없게 되었는데, 그것은 겉으로 보면 바빌론 임금의 침략으로 인한 것이지만, 신실한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느님께서 바빌론 임금을 통해 그렇게 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아자르야와 청년들은 불가마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바빌론 임금 앞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아니, 다른 번제물이 아니라 지금 불에 타서 죽을 자기들을 번제물로 봉헌합니다.
자기들 대신 바칠 번제물들이 없으니 자기들이 번제물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내게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없게 되었을 때 영혼과 정신이 부서지고 겸손해지고, 우리는 그것들 앞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이렇게 온전히 또 진실하게 있게 됩니다.
그리고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번제물이나 예물 대신 자기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바치는데, 이것이 오히려 하느님께서 더 기꺼워하시는 번제물과 예물입니다.
이제 갈수록 힘도 없어지고 건강도 잃게 되었을 때, 저도 그리고 여러분도 오히려 더 하느님 앞에 온전히 있게 되길 빌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복을 상속 받으십시오>
우리는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걸맞은 노력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어느 한순간 걸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도 아무의 도움도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넘어지는 이유를 보면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야고 4,1-2) 하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도 탐욕과 어리석음과 성냄이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독이라고 가르칩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화를 내고 다투는 일이 없을 텐데 욕심 때문에 남과는 물론 심지어 형제와도 등지게 되기도 합니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서로를 힘들게 하고 자유를 억압하며 담을 높이 쌓게 됩니다.
얼마 전 한 어르신이 자녀들에게 유언으로 유산을 분배하고 세상을 뜨셨는데 자녀들에게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자녀들은 모두 내로라할 만큼 큰 재산을 가진, 그야말로 살만한 사람들이었는데, 서로 서운함을 가지고 등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재산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재산은 분명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데 재산이 사람을 죽입니다.
그 담을 허물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담을 허문다는 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용서라는 것이 말같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듯이 하느님으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성찰해 볼 때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삶을 살아온 날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음을 다잡으려 하지만 인간의 연약함에 넘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왔고, 앞으로도 분명 용서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내가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 용서 덕분에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유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당신을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고 기도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며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하고 애원하였던 스테파노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선물로 주어졌지만 만약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담고 있게 되면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고립되게 되고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건강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 18,22)
용서는 결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선행도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만큼 우리도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설령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이라도!
어느 날 내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1베드 3,9)
주님 안에서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해계십니다>
이 세상 수많은 말 가운데, 용서(容恕)라는 말처럼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요?
살다 보면 백번 깨어나도, 천 번 마음을 고쳐 먹어봐도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소중한 인생을 완전히 파멸시킨 그, 내 소중한 사랑을 앗아간 그 사람, 나를 지근지근 짓밟은 그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성경은 집요하게 용서하라고 당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술 더 뜨십니다.
한번 두 번도 아니고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이건 너무 지나친 권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건 차라리 바보가 되라는 거야 뭐야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렇게까지 용서와 관련해서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만큼 용서가 영성 생활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영성 생활뿐 아니라 육체의 건강, 더 나아가서 정신건강에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특히 어머님들에게 많이 발생하는 독특한 병이 있습니다.
화병입니다.
소화불량, 두통, 불면증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점점 죽음으로 몰고 가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 원인을 추적해 올라가 보면 용서란 중요한 작업을 소홀히 했거나 서툴렀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때, 즉시 우리는 심리적 정서적 균형을 잃게 됩니다.
그 누군가로부터 받은 상처에 연연하기 시작할 때, 즉시 끔찍한 내면의 고통이 시작됩니다.
결과적으로 그로 인해 내가 내 인생을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 그가 내 삶을 좌지우지합니다.
마음이 늘 불편합니다.
신체의 모든 장기들이 원활하게 가동될 리 없습니다.
즉시 이런저런 신체적 질병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제대로 된 신앙생활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절실한 하느님 체험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기도에 집중하려 해도 집중이 안 됩니다.
용서란 참으로 어렵고도 험난한 작업입니다.
용서(容恕)란 단어의 용(容)자는 ‘받아들임’을 나타냅니다.
서(恕)자는 상대방을 뜻하는 如(여)자와 심(心)자로 이루어져 있으니 결국 상대방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헤아린다는 뜻입니다.
용서란 말은 내 입장에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는 일입니다.
내 시각이 아니라 상대방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일입니다.
상대방이 지니고 있는 나름의 고충을 참작해주는 일입니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이해해주는 일입니다.
큰마음 먹고 다시 그를 받아들여 주는 일입니다.
다시 한번 새롭게 그와의 관계 형성을 시작하는 일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위대한 일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일이 용서입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큰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큰 겸손이 필요합니다.
이토록 어려운 일이기에, 용서를 실천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큽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참 평화가 찾아옵니다.
새로운 관계 형성이 시작되는 만큼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속적인 용서의 과정이 우리 내면 안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네 삶을 즉시 휘청거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함으로 인해 우리 영혼에 퇴적되는 갖은 독소들-적개심, 증오심, 복수심, 미움, 폭력성, 분노는 언젠가 반드시 부메랑처럼 우리에게 되돌아와 우리 영혼을 갉아먹을 것입니다.
용서를 통해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본인 자신입니다.
용서를 통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자유로워집니다.
나 자신부터 편안해집니다.
내 인생길이 편해집니다.
용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가장 구체적인 현존 방식입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해계십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십니다.
용서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때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인간 상호 관계 안에서 찾을 필요도 있습니다.
서로 용서를 주고받는 인간관계 안에서, 다시금 새롭게 출발하는 인간관계 안에서 하느님께서 환하게 미소 짓고 계십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매정한 종의 비유>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라는 말씀의 뜻은 “하느님께서 이미 너를 용서하셨으니 너도 형제를 용서하여라.”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있는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우리가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용서의 은총’을 취소하신다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행동을 지켜보시다가 당신의 마음에 안 들면 이미 주신 은총을 취소하시는 분일까?
정말로 그런 분이라면,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하느님은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을 것을 모르셔서 무턱대고 용서부터 하시는 분일까?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이라는 말씀을 설명할 때,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보다 용서받은 체험이 먼저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용서받은 체험이 없으면 형제를 용서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그 체험은 언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용서받은 체험을 하려면 죄를 지은 체험부터 하라는 말인가?
‘매정한 종의 비유’에 나오는, ‘만 탈렌트’ 라는 엄청난 거액을 빚진 종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의 빚은 백 데나리온이다. 만 탈렌트는 저 사람의 빚이다.”라고, 즉 “나의 죄는 작고, 저 사람의 죄는 크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게 아니다. 네가 바로 ‘만 탈렌트’ 라는 빚을 탕감 받은 종이다.” 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렇게 큰 빚을 진 적이 없다.” 라고 반박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받은 체험’을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나는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다.” 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또 나 대신에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십자고상을 벽에 걸어 놓고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다.” 라고 자처했던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대신 속죄 제물을 바치는 메시아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믿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또 그들은 죄를 지은 적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으니 용서를 청해서 받을 필요도 느끼지 못했고, 이웃들에 대해서도 용서가 아니라 심판과 단죄만 말했습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요한 4,7-8)
우리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사랑이신 하느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즉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랑함으로써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관한 말은 그대로 용서에도 적용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은 우리에게 용서로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용서는 사실상 하나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하게 됩니다.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함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되고 체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사랑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사랑과 용서를 깨닫지 못하게 되고, 체험하지 못하게 되고, 믿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은 주시는 것을 안 받겠다고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안 받겠다고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가 안 받아서 못 받게 됩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다음과 같이 다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하느님은 한 번 주신 은총과 사랑을 취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니 취소하실 일을 하지 않으시고, 한 번 하신 일을 취소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은 영원히 유효한데, 내가 안 받으려고 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능동적으로, 또 진심으로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은총과 사랑을 받아서 나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자동적으로 나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고, 내 쪽에서 능동적으로, 또 진심으로 용서와 사랑을 실천해야만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사랑과 용서를 받아서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2)
우리는 용서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이미 나를 용서하셨고,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체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용서하는 것보다 용서받은 체험이 먼저다.” 라는 말은 ‘틀린 말’이고, “먼저 용서를 실천하는 사람만이 용서받은 체험을 할 수 있다.”가 올바른 말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인생은 “자비의 학교”이다 - 기도와 회개, 용서와 자비의 사람이 됩시다>
“주님, 당신의 길을 저에게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제게 가르쳐 주소서.”
(시편 25,4)
파스카의 봄철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누리에 가득한 주님의 자비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바로 시편 136장은 온통 주님의 자비로 가득한 세상을 노래합니다.
봄이 되면 시도 노래도 많습니다.
예전 써놓고 애송했던 시가 생각나 나눕니다.
이 또한 깊이 보면 주님의 자비를 노래한 시입니다.
'예수님은 봄이다'란 시입니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봄은 생명이다
봄이 입맞춘 자리마다
환한 꽃들
피어나고
봄의 숨결 닿은 자리마다
푸른 싹
돋아난다
예수님은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봄은 생명이다.”
- 1999.3.
예수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한 파스카의 봄철입니다.
봄비 내린 후 확연히 주변 풍경도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봄비란 시도 생각납니다.
봄비란 시를 떠올리면 정말 봄비같은 딸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주책없는, 대책없는 생각도 떠오릅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
- 2005.3.
봄비뿐 아니라 봄꽃, 봄길, 봄빛, 봄바람, 봄햇살 다 예쁜 이름입니다.
“봄햇살 붓으로”란 시도 생각납니다.
흡사 자비하신 아버지께서 그림 그리는 장면처럼 생각되어 저절로 솟아난 감흥에 써놨던 시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오, 하느님
바야흐로 그림 그리기 시작하셨네
생명의 화판 대지위에
부드러운 봄햇살 붓으로
연한 초록색 물감
슬며시 칠하니
조용히 솟아나는 무수한
생명의 싹들
오, 하느님
당신의 화판
봄의 대지위에
바야흐로 그림 그리기 시작하셨네”
- 2007.3.
시는 짜내는 것이 아니라 선물처럼 주어진 것을 줍는 것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시가 저절로 와야지 내가 억지로 시를 불러낼수는 없습니다.
말 그대로 시는 자비하신 주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시 중의 시가 우리 수도형제들이 평생 날마다 7차례 바치는 시편 성무일도입니다.
시편집 대부분의 시가 하느님의 자비를 노래한 찬미와 감사의 시에 속합니다.
마음을 다해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속속들이 체험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생명과 빛, 희망으로 가득한 시편들을 통해 하느님께 맛들이다 보면 저절로 세상의 시詩나 세상의 맛은 저절로 잊게 됩니다.
인생은 자비의 학교입니다.
평생학인이 되어 자비의 배움터에서 주님의 자비를 배워가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평생 전사이듯, 졸업이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평생 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역시 자비의 공부요 훈련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선택하여 훈련함으로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오늘 지금 여기 자비의 훈련장에서 자비의 실천에 의식적 노력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자비를 체험할 때 기도와 회개, 용서는 저절로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주님께서 무한히 용서하시고 사랑하심으로 여기까지 살아온 우리들이기에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도 용서가 가능합니다.
밑빠진 독에 물붓듯이 끊임없이 주어지는, 지칠 줄 모르는 자비하신 아버지의 아가페 순수한 용서의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은 수없이 밥멋듯이 숨쉬듯이 용서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이어 무자비한, 매정한 종의 비유가 나옵니다.
자비의 열매가 용서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체험한 마음에서 저절로 나오는 용서입니다.
아, 자비도 훈련이지만 용서도 훈련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용서의 훈련에 의식적으로 항구히 노력하다 보면 정말 은총으로 자발적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참으로 용서할 때 용서받음으로 내 먼저 치유되고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무자비한 종은 정말 무지의 사람입니다.
자기를 모릅니다.
얼마나 하느님께 사랑의 빚을 많이 졌는지 말입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인데 이 무자비한 종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모르니 자기를 알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이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내가 누구인지 알길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계시기에 회개와 겸손인데 도대체 하느님 없이 지정 회개와 겸손은 불가능합니다.
똑같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인 독일과 일본을 비교하면 뚜렷이 드러납니다.
독일은 겸손히 자기의 죄과를 뉘우쳤지만 일본은 여전히 자신의 죄과를 인정하는 회개와 겸손이 없습니다.
자비로운 하느님도, 자기도 모르는 오늘 복음의 무지하고 무자비한 종이기에 그렇게 많은 빚을 탕감받고도 까맣게 잊고 소액의 빚진 자기 빚장이 종에게는 그토록 무자비하고 가혹합니다.
주님의 정의로운 판결이자 우리 모두에게는 경종이 됩니다.
행여나 주위 형제들에게 무자비했다면 즉시 회개하여 용서하라는 깨우침을 줍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래서 의식적 용서의 훈련입니다.
용서가 되지 않으면 용서하려는 지향을 던져놓고 의지적으로 용서의 노력을 다하다 보면, 때가 될 때 하느님의 용서의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성경 말씀 공부와 시편 성무일도를 통해 하느님 자비의 훈련에 항구하다 보면 자비하신 하느님은 때가 되면 ‘용서의 사랑’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자비의 훈련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참 좋은 주님의 자비 훈련의 사람이 제1독서 다니엘서의 다니엘의 세 동료들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의 금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하자 이들은 불타는 화덕속에 던져졌고, 이들은 하느님을 찬송하고 주님을 찬미하며 불길 한가운데를 거닙니다.
그리고 아자르야는 불 한가운데 우뚝 서서 입을 열어 주님께 찬미가를 바칩니다.
다니엘 4,34-43까지 아자르야의 구구절절 아름답고 감동적인 용서를 청하는 진정성 가득한 겸손한 회개의 기도가, 주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 가득한 고백의 기도가 심금을 울립니다.
이 세 유다인 젊은이들이 평소 자비하신 하느님 공부가, 하느님 체험이, 하느님 자비의 훈련이 얼마나 항구하고 깊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때로 불가마 연옥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살길은 이런 항구하고도 간절한 기도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들의 거인 신앙에 비하면 우리는 난장이 신앙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하느님의 자비를 공부하고 체험하는데 온갖 노력과 훈련, 정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평생 학인으로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자비의 수행에 항구할 때 주님은 당신 자비를 풍성히 체험할 수 있게 해주실 것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기도 합니다.
“주님, 당신의 진리 위를 걷게 하시고 저를 가르치소서.
당신께서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니 날마다 당신께 바랍니다.”
(시편 25,5)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독서들 안에는 "자비"라는 말씀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됩니다
"저희에게서 당신의 자비를 거두지 마소서."
(다니 3,35)
바빌론에 유배간 유다 청년들이 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하다 불가마에 던져집니다.
그중 한 명인 아자르야가 불길 한가운데서 주님께 이처럼 기도를 드리지요.
이스라엘에게는 지금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고 민족은 유배로 뿔뿔이 흩어졌지요.
게다가 자신들은 죽을 곤경에 빠진 상태입니다.
이토록 처참한 상황에서 보통 사람이라면 신을 원망했을지도 모르지요.
바로 지금 여기서 우리는 아자르야의 고백을 통해 신앙의 정수를 만납니다.
"저희의 죄 때문에"
(다니 3,37)
아자르야는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을 자신들에게 돌립니다.
하느님 탓, 조상 탓, 남 탓 하지 않고 자신을 봅니다.
원래 하느님 앞의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당신의 벗, 당신의 종, 당신의 거룩한 사람"(다니 3,35)이었지요.
이제 그 모든 걸 잃은 듯 보이는 생의 밑바닥에서 자신들의 우상숭배와 배반과 타협을 뉘우칩니다.
"당신 호의에 따라,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 저희를 구하시어"
(다니 3,42)
우리가 기대하고 희망하고 간청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주님의 호의와 자비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우리가 주장할 권리는 사실상 없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용서를 화두로 하느님 자비를 가르치십니다.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마태 18,21)
베드로의 이 질문에서 "용서"는 마치 선심 쓰는 행위처럼 느껴지는데,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는 예수님의 대답에서 "용서"는 의무에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요?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마태 18,27)
예수님은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종의 이야기를 비유로 드십니다.
주인의 "가엾은 마음"에서 시작된 용서는 한 사람을 살릴 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재산까지 지켜 줍니다.
그런데 그 자비가 그 종에게 이르러 멈추어 버리지요.
그는 제가 입은 자비를 잊고 제 동료를 다그쳐 감옥에 가두어 버렸으니 말입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마태 18,33)
주님은 자비의 연속성을 말씀하십니다.
한번 베풀어진 자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비의 길은 이어져야 합니다.
자비의 흐름이 끊기지 않고, 자비의 걸음이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태초에 시작된 하느님의 자비가 온 세상을 돌고 돌아 우리에게까지 다다랐는데 우리게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는 안 됩니다.
자비를 삼켜버리고 아무 꽃도 열매도 내지 못하는 돌덩이 심장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
(마태 18,35)
베드로의 질문 안의 "용서"와 예수님 답변 안의 "용서"가 같은 단어, 다른 온도를 담고 있음은 이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용서는 가식이나 요식행위가 될 수 없는 심장의 일이어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고 하시는 이 말씀 안에는 이미 그분이 우리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셨다는 전제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당신의 자비를 우리 죄에 대한 조건 없는 용서로 표현하십니다.
"주님, 당신의 자비 기억하소서."
(화답송)
부족하고 나약한 죄인인 우리는 죄에 떨어질 때마다 주님 옷자락에 매달려 당신의 자비를 기억해 달라고 읍소합니다.
그런데 사실, 진정으로 그분의 자비를 기억해야 할 존재는 바로 우리들이 아닐까요?
주님은 결코 당신 자비를 잊지 않으시지만 우리가 받은 자비를 종종 망각해 버리고는 그 자비가 필요한 형제와 이웃에게 영 딴소리를 하기 일쑤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받은 자비를 기억해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는 이제 우리에게 선심이 아니라 의무니까요.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태 18,35)
비유를 맺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괜한 추임새가 아니라, 자비의 길을 이어가라고 한번 더 강력히 촉구하시는 다짐입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예전에 ‘무협지’를 읽을 때가 있었습니다.
무협지의 주된 사상은 ‘권선징악(勸善懲惡)’입니다.
부모님은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어린 아들이 깊은 산중에서 스승의 가르침으로 무예를 익힙니다.
성장한 아들은 이제 부모를 죽인 무도한 사람들을 상대로 원수를 갚는 것입니다.
무술의 경지는 약방의 감초처럼 즐거움을 주지만 결국 무협지의 결론은 선은 승리하고 악은 응징한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도 공동체를 이루면서 ‘권선징악’이 사회의 질서를 이루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의 내용도 권선징악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야 권위가 생기고, 질서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다닐 때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lex talionis)’도 배웠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잘못을 응징하는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표현으로 이야기합니다.
구약의 율법과 계명도 권선징악과 동태복수법의 근간에서 제정되었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난다.’라는 말처럼 선한 일에는 보상을 주고, 악한 일에는 벌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권선징악과 동태복수법’의 ‘틀’을 과감하게 허물었습니다.
이는 기존의 질서 속에서 권위를 누리던 이들에게는 엄청난 도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물었던 ‘틀’은 안식일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안식일의 규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지킬 수 없는 사람은 ‘죄인’으로 규정했습니다.
죄인들은 속죄의 행위로 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물었던 ‘틀’은 ‘권선징악’의 질서였습니다.
물론 선한 사람에게 상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도 방법이지만 악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면 하느님께서는 그 자비를 보시고 나의 잘못도 용서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 하느님께서는 나의 잘못도 용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물었던 ‘틀’은 동태복수법의 질서였습니다.
누가 뺨을 때리면 다른 뺨마저 내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천 걸음을 가자고 하면 이천 걸음까지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주라고 하셨습니다.
달라고 하면 기꺼이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가르침이 있지만 이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악인들도 자신의 가족들은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이제 자신의 가족을 넘어서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이웃의 잘못을 몇 번이나 용서하면 좋은지 물었습니다.
일곱 번이면 충분한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용서에는 제한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간구하였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자비와 용서’였습니다.
1930년대에 미국은 ‘대공황’이 있었습니다.
대공황의 원인은 산업혁명으로 많은 제품이 생산되었지만 그것을 소비할 수 있는 노동자들에게 공정한 임금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자본가는 공장을 늘리고, 수익을 올리지만 노동자는 더욱 가난해지고, 생산된 물품을 소비할 수 없기에 공황이 시작되었습니다.
대공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정부 주도로 새로운 사업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적법한 임금을 지급하였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새로운 경제 정책 수립에 도움을 준 사람은 가톨릭교회의 성직자 라이온 몬시뇰입니다.
라이온 몬시뇰의 이론적인 근거는 교황 레오 13세가 반포한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였습니다.
이 교서는 간단히 말하면,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기본권과 의무를 올바르게 제시하여 사회 정의를 실현하게 한 것입니다.
이 교서의 사회 정의관에 근거하여 자본가와 노동자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노동법으로 미국의 노동자들은 제대로 임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노동자의 구매력이 왕성해졌으니 자본가의 생산 활동도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부익부 빈익빈’의 ‘틀’을 버리고 모두가 행복한 공생의 ‘틀’을 만들었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들 또한 자비와 용서의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몇 년 전에 결혼식 주례를 위해 예식장에서 겪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신랑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으로 결혼식 주례를 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랑 신부도 잘 모르고 또 하객들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와 신랑 아버지의 친분만 있을 뿐이었지요.
신랑 아버지는 어떻게든 저를 챙겨주려고 하셨지만, 오시는 손님을 맞이하셔야 하니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린 뒤에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서 예식장 주변을 돌면서 묵주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예식 시간에 맞춰서 들어가 주례를 선 뒤에 곧바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아쉽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당연히 이 결혼식의 주인공은 제가 아니라 신랑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단지 결혼식을 빛내기 위해 잠시 들린 엑스트라 중 한 명일 뿐입니다.
만약 주인공인 신랑 신부에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고 저한테만 모든 관심이 쏠렸다면 어떠했을까요?
이 결혼식은 엉망이 되고 맙니다.
주인공은 항상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어느 어르신과 대화를 나누다가 자신이 왕년에 얼마나 대단하셨는지를 이야기해 주십니다.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음을 말씀해주셨습니다.
한때 이런 분을 만나면, ‘꼰대처럼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열심히 사셨다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주인공은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하고,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열심히 사신 분을 무시하는 것은 큰 실례입니다.
이렇게 따져보면 그 누구도 소홀히 해서는 안됨을 깨닫습니다.
스스로 다른 이로부터 관심받고 싶고 존중받고 싶은 것처럼,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사람 편에 서셨고, 그들에게 당신 사랑을 가득 전해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성경에서 ‘7’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를 의미합니다.
즉, 일곱 번 용서하면 완전한 용서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더 큰 용서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그 뒤에는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사는 사람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삶의 주인공인 ‘나’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삶의 주인공을 소홀히 합니다.
주인공인 ‘나’를 불편하게 했다면서, 다른 삶의 주인공을 판단하고 단죄하기를 당연한 것처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하고,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라는 덕목으로 분명해집니다.
우리 모두 특별하기에 용서해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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