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우린 생존을 위한 사회생활 중에 자의든 타의든 우정이란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만난다.
우정은 그 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마치 공기와 같이 우리 주위에 항시 관념적으로 존재하므로 알듯 하지만 알수 없는 미지의 산물이다.
아마 우정은 고립무원의 사회에서 가장 두려운 고립의 탈출 방법으로 고안 되었을 것이다. 서로의 감정의 교감과 동질감 교차는 인간으로 하여금 생존적 측면에서 사회생활을 훨씬 수월하게 영위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을 것이고 이로 하여금 고립의 불안을 해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사실을 차치하고 우정을 통해 한 인간을 알아간다는 사실은 기쁜 일이다. 서로 어울리며 우정을 확인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우정을 통해 전혀 예기치 못한 감동에 빠지거나, 갑작스런 불행을 서로 위로하고 슬퍼하거나, 뜻하지 않는 배신에 치가 떨리는 분노를 자아내지만, 이 또한 우정이 만들어 내는 천변만화의 감정이다.
이렇듯 우정은 인간을 희노애락의 감정을 만드는 연금술사이며, 인간의 인생을 지루하게 만들지 않는 유쾌한 감정이다.
허나 우정이란 단어가 자아내는 친근감에서 오는 신뢰의 미묘한 뉘앙스는 우릴 의식혼란에 빠트린다.
우정이란 단어에는 마치 영원의 확약을 당위적으로 받아들이게끔 하는 견고한 숨은 마력을 분출한다.
이건 필시 무지한 인간의 착각이다.
우정에 기인한 영원의 확약은 신뢰를 낳고, 시간이 갈수록 언덕위에서 내려오는 눈덩이 처럼 급속히 불어난 신뢰는 더욱 큰 기대로 승화된다. 엄밀히 말해서 우정에서 기인되는 기대감. 바로 기대감 자체가 우정의 모순점이다.
이러한 기대는 인간의 순수한 이성의 통찰력을 흐린다.
우정을 쌓는 행위. 그 자체는 인간 생활을 영위하는데 더 없이 든든한 보험이다.
하나 보단 둘, 둘 보다는 셋. 많은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통해 서로 도우며 세상을 사는 것 만큼 보람된 일은 없다.
허나 명심해야 할 것은 인간의 우정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물론 사랑보다는 간헐적이지만 오래간다.)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견고한 우정의 성을 쌓는다 하더라도 이기적 본성이란 모래 위에 쌓는다면, 세상의 모진 풍파가 불어오면 그야말로 사상누각 일 수 밖에 없다.
어차피 필요할 때 존재하는 보험같은 우정이라면 우정에 너무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큰 기대는 그에 상응하는 실망을 낳는 법이다.
우정에 너무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 말로 인간의 순수한 이성을 자각하는 첫걸음이다.
위와같은 우정에 대한 기대의 폐해는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첫째, 우정에 대한 영원한 확약은 세상사의 모진 풍파에 금방이라도 흔들릴 수 밖에 없다. 고로 우정을 담보로, 엄밀히 말해 신뢰를 담보로 배반의 장미를 흩뿌리는 인간을 많이 봤다.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계속해서 우정을 확인하고 이를 기반으로 형성된 신뢰란 가면을 이용하여 종국에 이르러 자신의 편의에 따라 극악무도한 배신을 서슴치 않는다.
또한 상대방의 마음에 돌이킬 수없는 상흔을 남긴 채 모든 만물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인도하기를 전혀 거리낌없이 자행한다.
이것이야말로 우정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영원한 확약의 비참한 결말이다.
둘째, 이런 기대는 우정을 확인케 만든다. 인간이란 지속적으로 우정을 확인하려고 애쓴다. 정말 부질없는 짓이다. 우정이란 애매모호한 관념이기 때문에 확인도 안될 뿐더러 확인할 필요도 없다.
무릇 우정이란 공기와 같아서 언제 어디서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격지자간이라 할지라도 우정이란 인연의 끈으로 묶인 이상 그들의 우정전선엔 전혀 이상이 있을리 없다. 연락을 자주하든 안하든, 자주 만나든 안만나든 우정은 공기와 같이 내가 살아있는한 계속 존재하는 것이다. 잠시 괴리되어 있는 우정의 시간과 공간의 차이는, 그 속에 충만한 우정에 대한 기민한 통찰력을 발휘하여 지속적으로 감응하기를 게을을리 하지 않는다면, 분명 우정이란 따사로운 느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위와같은 우정에 대한 환상을 확실히 자각한지 이미 오래되었다.
내가 괴팍한 성격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인간 자체를 무작정 믿지 않는다. (처음부터 너무 큰 호의를 베푸는 사람을 경계한다.)
특히 우정을 지속적으로 확약하는 인간은 더더욱 믿지 않는다.
좋게 말하면 중용이고, 나쁘게 말하면 회색분자 같은 상태라고 해야할까?
허나 이런 어중간한 중립의 입장 가운데서 상대방을 의심하여 내게 주어진 우정을 그르치는 일은 결단코 하지 않는다.
상대방을 믿지만 동시에 우정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최악의 상황도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정에 너무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조금은 거리를 둔다.
이러한 우정의 거리는 은은한 기쁨의 향을 물씬 풍기는 부겐빌리아와 같다.
우정의 적절한 거리.
이것은 내가 세상을 살면서 습득한 우정의 기술이다.
나는 우정에 관해 생각하면서 과연 나는 그들에게 어떤 친구로 남을 것인가? 심히 고민한다.
항상 멀리 떨어져 있어 전혀 기대하고 있지 않지만, 과연 우리가 우정이란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면, 그 기대의 외면을 파고들어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친구가 되고 싶다.
마치 우연히 당첨된 로또복권처럼 의외의 상황에서 전혀 기대와 예상을 못했는데 불현듯 나타나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친구 말이다.
허나 이런 우정을 생각한다면 수많은 오해와 편견이 도사린다.
있는듯 없는듯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상대방은 그 감정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정의 마력은 이런 오해와 편견을 괴리를 충분히 상쇄시킬 충분한 힘이 있다. 이것이 곧 우정의 힘이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사람은 기억해 주길 바란다.
이미 당신이 나를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은 나와의 우정의 얼개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주길 바란다.
언제 어디서 도움이 될지 나 역시 모르겠지만...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을 뿐 나는 당신과의 우정을 항상 고이 간직하고 있다.
고로 로또 복권과 같은 행운 정도는 아니어도 크든 작든 언제든지 당신을 도울 용의가 있다.
부디 내가 습득한 기술인 우정의 거리에 거부감을 느끼지 말았으면 한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의 우정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앞으로 살아갈 동안... 계속... 포에버... 쭉~..... 부디... 말이다.
첫댓글인간이란 지속적으로 우정을 확인하려고 애쓴다. 정말 부질없는 짓이다. 우정이란 애매모호한 관념이기 때문에 확인도 안될 뿐더러 확인할 필요도 없다. - 얼마간의 사이를 둔, 서로의 꿈과 한곳으로의 하제에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우정, 저는 그것을 '벗나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아리아리~ 들꽃님.
첫댓글 인간이란 지속적으로 우정을 확인하려고 애쓴다. 정말 부질없는 짓이다. 우정이란 애매모호한 관념이기 때문에 확인도 안될 뿐더러 확인할 필요도 없다. - 얼마간의 사이를 둔, 서로의 꿈과 한곳으로의 하제에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우정, 저는 그것을 '벗나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아리아리~ 들꽃님.
이어지는 나날 벗나래라 예 그리하지요. 벗은 아주 먼 곳을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