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4. 2. 14. 수요일.
<한국국보문학카페>에는 강에리 시인의 시가 올랐다.
'한국국보문학' 월간 문학지 '2024년 3월호'에 오를 예정이다.
그날
강에리
그날, 순하디 순한 사람들이
태극기 하나 들고 떨쳐 일어났다
로마 병사들 앞에 선 순교자처럼
총칼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함성을 찢는 총성과 함께
하얀 옷 위로 붉은 꽃이 피어났다
....
열일곱 어린 소녀는 알고 있었다
시간은 느려도 정의 편인 것을
내가 댓글 달았고, 퍼서 여기에 올린다.
내 댓글 1 :
1919. 3. 1. 기미독립만세가 있었고, 한 달 뒤에는 4월 1일에는 천안 병천면 아우내장터에서도 만세가 있었지요.
그날 유관순의 아버지 어머니 등 친척들도 만세불렀으나 현장에서 부모님은 사살되었고,
어린 유관순은 징역살이가 시작되었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도 만세 부르다가.....비참하게 살해되었고....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그 지역이 개발되면서 유관순의 시신은 상실했지요. 시신조차도 없기에 국립서울현충원에는 영혼으로만 안장되었지요.
지금도 친일파 후손들이 득세하고 ...이들이 싫어하는 내용이겠지요.
일제식민지 역사관을 청산하지 않은 우남 이승만대통령이 .....
내 댓글 2 :
1919. 3. 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분은 33명.
기독교 16명, 천주교 15명, 불교 2명.
유교/사대부 양반은 단 1명이라도 있을까요?
없지요!
오래 전 새벽에 천안 병천면 흑성산에 올라서 독립기념관을 내려다보고는 목이 터져라 만세 부르고, 태극기를 흔들던 어떤 사람을 떠올립니다.
유관순이 갇혀서 옥살이를 했던 서울 서대문형무소도 훗날 대폭 철거되어서
이제는 조금만 형식적으로 남겼지요.
지난해 여름철 동해안 독도 인근에 들어와서 '미국 일본 한국'의 군함이 합동훈련을 실시했지요.
세상에나... 일본 자위대가 독도로 들어와서???
그게 누구인데?!
청산하지 못한 친일역사가.... 아쉽군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유관순은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충청남도 천안 병천군 아우내장터 만세사건 :
1919년 4월 1일, 조인원 · 유중권 · 유중무 등과 함께 천안 병천 시장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하여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하였다.
참고 자료 :
1919년 3월 1일. 고종황제의 장례를 바로 앞두고,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기념서를 낭독했고(요정 명월관에서는 33인 중 29명이 모여서 조용히 자진 체포되었다), 우리나라의 독립 요구를 세계에 날리는 날이었다.
삼천리 전국에서 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그 결과로 숱한 사람이 왜경과 왜군인한테 검거되었고, 형무서에 갇혔고, 다쳤다. 특히나 7,500명은 목숨을 빼앗겼다. 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 부르며, 독립을 요구했다는 그 이유 하나로.
무자비한 검거와 탄압...
서울 서대문 형무소
서대문형무소 : 시설물이 조금은 남아 있다.
유관순 열사는 1920년 9월 28일, 향년 17세 나이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이후 시신을 반환받아 장례를 치르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치했지만 이장하는 과정에서 유실되었고 행방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 부군당 역사공원은 유관순 열사가 안장되었던 이태원 공동묘지 터가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2015년 유관순 열사 추모비가 건립됐다.
일제시대인 1936년 이태원 공동묘지가 개발되면서, 무연고 2만8000기를 망우리공동묘지로 이장하면서 유관순 유해는 멸실되었다.
* 지금은 서울 용산구 남산 남쪽방향 지하전철 녹사평역 일대로 개발 발전되었음.
* 묘소가 없기에 영현 위패로 모셨음.
사진들은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용서해 주실 게다.
사진에 마우스를 대고 누르면 사진이 크게 보임.
<한국국보문학카페>에는 유관순 만세사건에 대한 글이 수십 개나 많이 수록되어 있다.
얼마 뒤에는 2024. 3. 1.이 온다.
위 강에리 시인의 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2024. 2. 14. 수요일.
나중에 보탠다. 잠깐이라도 쉬자.
첫댓글 댓글 달아 주시고 유관순 열사에 대한 많은 자료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저도 유관순 열사에 대한 자료가 많이 보강되어 나중에 수필로 한번 써볼까 합니다. 선생님 항상 건강하시고 멋진 봄 맞으세요. ^^
댓글 고맙습니다.
강에리님은 그전부터 독립운동사에 관심을 가지시고, 글도 올리었지요.
이번에도 그렇고.
우리나라 근대사, 현대사를 공부하려면 화가 무척이나 나지요.
구한말 일본이 우리나라 조선에 행동한 것을 보노라면... 해방 이전에 카이로 선언으로 한반도는 이미 남북한으로 분단되었지요.
미쏘 강대국의 입맛으로.... 1945. 8. 해방되자마자 북한지역에는 쏘련 군대가 넘어오고, 남한에서는 미군이 들어오고... 1948. 8. 15. 이승만의 반토막 정부가 수립되었지요.
남한 단독만의 정부가 들어섰고, 한 달이 채 안 되어 북한 김일성은 9월 9일에 북조선을 수립했지요.
리승만은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한 것이지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은 아니지요.
'건국'했다면 38선 이북의 땅은 우리나라 영토가 아닌가요?
정치학을 전공한 사람의 판단으로는 이런 억지에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겠지요.
삼일운동과 유관순 열사의 만세사건 ....
유관순 가족들이 만세 불러서, 죽어서 얻은 게 과연 무엇일까요?
제 개인적으로는 가슴이 쓰라리고 아픕니다.
오래 전 천안 흑성산에서 독립기념관을 내려다보면서 목이 터져라 '독립운동 노래'를 불렀던 사람을 떠올립니다.
선생님께서 지적하는 많은 면에 공감합니다. 자주는 힘 있는 백성만이 행할 수 있었겠지요. 이제 잘 살게 된 우리나라는 밖으로 어느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안으로도 많은 것이 정돈되리라 믿습니다. 그시절을 겪지 않았으니 하는 말이라 꾸짖으실 수도 있지만 그렇기에 저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고 봅니다. 저의 아버지는 일본의 일자만 나와도 손사래를 치고 일본을 싫어하셨지만 일본제품은 좋아하시더군요. 그시절을 겪으셨으니까요. 저는 일본에 아무 선입견도 없고 일본 문화도 존중하지만 일제는 별로에요. 우리제품 품질이 훨 좋으니까요. ^^ 그리고 일본인들 중 딱 정신나간 군국주의자들만 극혐합니다. 차츰 양국의 과거사가 하나씩 정리되고 좋은 이웃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