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도 반절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습니다.
추운 겨울을 지나 어느 사이에 예쁜 봄꽃과 푸른 생명의 잎들이 얼굴을 환히 내밀었고,
환하고 따스한 봄볕이 이제 조금 따가운 시간이 되었네요.
여름이 다가오며 6월이라는 한장의 종이에 눈이 멈추게 되고
수많은 사건들로 가득한 호국보훈의 달임을 깨닫게 됩니다.
호국영령들을 기리는 현충일, 동족상잔 민족의 비극인 6.25, 그리고 휴전 이후 두 번의 연평해전.
모두 6월의 어느 날들을 채우고 있는 잊지 말아야 할 하루입니다.
<2011 국가보훈처 호국보훈의 달 포스터>
[NLL, 그곳이 편하면 대한민국이 편하다]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일왕의 떨리는 육성으로 '항복'을 전해들은 대한민국에
꿈에도 그리던 '광복'이 찾아왔습니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사상과 이념의 대립, 그리고 격변하는 국제정세 앞에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극심한 몸살을 앓습니다.
혼란 앞에 어느 새 한반도 허리에는 38도선이 그어져 있었고
1950년 6월 25일, 그 혼란은 전쟁이란 이름으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으로 치달았습니다.
좁은 땅덩이에서 수많은 영혼과 한서린 눈물로 쌓인 슬픔은
그 전쟁으로 끝나지 않았고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남북대치 상황의 상태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통수권자의 정치 이념에 따라 약간씩 남북관계의 변화가 있긴 했지만,
대한민국이 바라보는 북한의 모습과 북한이 대한민국을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냉전’ 그 자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 소리없는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6.25전쟁 휴전협정을 맺었던 판문점의 1953년 7월 27일.
한반도 육상에 대한 남북 경계선에 협정은 명문화 되어 있었으나, 당시 해상에 관한 사항은 없었습니다.
이에 당시 주한유엔군사령관이던 클라크(Mark Wayne Clark)가 정전협정 직후
북한과의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설정하고 북한에 공식 통보도 하지 않은 해양의 한계선인
NLL(북방한계선, Northern Limit Line)을 명명, 보이지 않는 바다 위의 경계를 만듭니다.
<가장 오른쪽이 마크 클라크,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당시 해군력까지 여유가 있지 않았던 북한은 1953년부터 1972년까지 이 NLL을 준수하지만,
이후 NLL이 법적 근거가 없는 군사분계선이라는 이유로 NLL을 넘어오는 일이 잦아지게 됩니다.
동해의 경우는 군사분계선(Military Demarcation Line, MDL)의 연장이라는데
북한도 동의를 하고 있어 문제의 소지가 없으나, 서해의 경우는 문제가 달랐습니다.
1973년부터 북한은 이 서해 5도 수역이 자신들의 바다라고 주장하고,
이 수역을 항행할 경우 자신들에게 사전 승인을 받을 것을 요구하며 번번이 NLL을 남침합니다.
게다가 이 수역이 매해 6월이면 꽃게 풍년을 이뤄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주기에,
경제적 이유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에 남북의 충돌은 늘 첨예했고, 화약고라는 별칭은 글자 그대로였습니다.
<NLL,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를 따라 설정된 서해의 NLL은
대한민국 해양과 안보의 최전선입니다.
지도에서도 보시듯이, 백령도의 경우 서울보다 평양에 훨씬 가까우며
만약 이 NLL을 사수하지 못하면
인천과 대한민국의 심장인 서울이 북한의 위협에 더욱 심각하게 노출됨은 두 번 말할 필요도 없을테지요.
그래서 서해가 편하면 대한민국이 편하다는 말까지 나온다고 합니다.
NLL, 그곳에서는 정말 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 2009년 대청해전,
2010년 천안함 피격사건 그리고 민간인 사상자까지 낸 연평도 포격사건.
잊지 말아야 할 가슴 아픈 사건들이 자꾸 발생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더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며,
그간 세간의 기억으로부터 묻혀 있던 두 가지 사건을 조심스럽게 꺼내어보고자 합니다.
제1,2연평해전.
승리의 이름으로, 그리고 시대의 이름으로 묻힐 수밖에 없었던
대한민국의 20세기 끝과 21세기의 시작을 바라봅니다.
1. 대한민국의 화약고 NLL과 제1연평해전
2. 제2연평해전 - 참수리 357, 서해의 꿈으로 잠들다
3. 제2연평해전 - 그날, 그리고 그 후
4. 제2연평해전 - 부정장(副艇長)의 이야기
[1999. 6. 15, 선체 밀어내기]
1999년 6월.
늘 긴장이 감도는 서해에 이상한 일이 자꾸 일어나고, 긴장감은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6월 6일부터 시작된 그 ‘이상한 사건’이 대한민국 해군의 심기를 자꾸 건드리고 있었죠.
북한의 경비정이 매일 NLL을 넘어와 몇 시간이고 머물면서
아(我) 해군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피고 돌아가기를 매일 반복했다고 합니다.
6월 6일로부터 정확히 9일이 흐른 6월 15일.
북한의 경비정 4척이 북한의 꽃게잡이 어선 20척과 함께 NLL 남방 2km 해역까지 내려왔습니다.
이에 대한민국 해군은 참수리 고속정과 초계함 등 10여척의 전력으로
해군 교전수칙에 따라 경고 방송을 한 후,
오전 9시 7분과 9시 20분, 두 차례에 걸쳐 선체 밀어내기 작전을 시행합니다.
이는 교전의 한 방법이기보다는
북으로 돌아가라는 ‘경고’의 의미가 더 강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선체 밀어내기 후 북한의 경비정 등산곶 684호가
대한민국 해군에 25mm 기관포로 공격을 가해왔고,
북한의 어뢰정 3척까지 공격에 가담합니다.
북한의 선제공격에 우리 해군도 응수를 합니다.
고속정과 초계함의 반격으로 결국 등산곶 684호는 반파된 채 북으로 퇴각합니다.
단 5분의 교전은 너무도 많은 것들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북한은 어뢰정 등 함정 2척이 침몰, 3척이 대파되어
최소 70~200여명의 사상자가 있었으리라 당국은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대한민국 해군은
참수리 325의 정장 안지영 대위와 장병 7명이 부상을 당해 국군수도병원으로 후송되고
함정 2척이 파손된 것 이외에 큰 피해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의 기사보기<경향신문, 1999년 6월 15일>
대한민국 해군의 승리였죠.
이를 기억하고 기념하고자 평택 제2함대사령부 내의 안보공원에 제1연평해전 전승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선체 밀어내기를 형상화 한 제1 연평해전 전승비>
북한은 제1연평해전에서 생존해 북한으로 돌아간 등산곶 684호의 갑판장을 새 함장으로 임명했고,
선제공격했던 사실은 까맣게 잊은 듯 대한민국에 책임자 처벌까지 요구하고 나서죠.
눈여겨봐야 할 사실입니다.
생존한 갑판장이 새 함장으로 임명되었다는 건, 다음을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죠.
북한은 열심히 복수를 다짐했던 것 같습니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1987년 11월에 국적기인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김현희의 사진>
1988년, 서울에서의 올림픽 열기에 찬물 끼얹듯 북한은 1987년 KAL기 폭파 테러를 감행했죠.
세계인의 축제, 축구인들의 희망 - 대한민국이 세계 속에서 빛나던 2002년,
이미 전력이 있는 북한의 테러에 대한민국은 긴장합니다.
[두번째 이야기, ‘제2연평해전 - 참수리 357, 서해의 꿈으로 잠들다’로 이어집니다]
첫댓글 어... 제가 쓴게 여기 올라와있네요;; 그렇지 않아도 인터뷰 내용은 여기 올릴까 말까 생각했었는데...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