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주님,
주님의 가족을 자애로이 지켜 주시고
천상 은총만을 바라는 저희를 끊임없이 보호해 주소서.
제1독서
<나는 고통스러워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 욥기의 말씀입니다.7,1-4.6-7
욥이 말하였다.
1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2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지 않은가?
3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
4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 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6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 가는구려.
7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제2독서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9,16-19.22-23
형제 여러분, 16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17 내가 내 자유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18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
19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2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9-39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29 회당에서 나오시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가셨다.
30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3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32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34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35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36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37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39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삶에 의미나 목적을 꼭 찾아야만 하는가?
저는 한창 일할 나이입니다. 그러나 은퇴하고도 죽을 때까지 일을 할 생각입니다. 사실 아무 하는 일 없이 건강만 챙기고 놀거나 쉬며 인생을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께서 인생을 즐기다 오라고 창조하셨다고도 하고 그런 삶의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도 말합니다. 인생은 그냥 소풍이고 즐기다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인간은 이유 없이 태어나 우연히 죽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먼저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에 늦게서야 삶의 의미나 목적을 강요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는 창조자를 배제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가 삶의 의미보다 앞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대표적인 철학자가 니체입니다. 그렇더라도 삶의 의미는 찾고 싶었습니다. 이전에 신에 의해 규정된 삶이 감옥처럼 느껴져서 탈출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목적이 없는 삶은 인생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고통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람들을 볼 때 사람들은 대부분 ‘소속감’을 위해 살고 있었습니다. 관계 맺기 위해 타인의 시선이 삶의 의미가 되었습니다. 니체는 신에게 휘둘리나 사람에게 휘둘리나 같은 것이라 여겨 고독한 초인이 되라고 권합니다. 주체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고 그것이 맞는다고 여기며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니체는 삶의 의미는 있는 게 좋지만, 결국 신은 부정하고 싶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수영 회장은 카이스트에 766억 원을 기부하였습니다. 노벨상 수상자가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때 나이가 87세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계속 기부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분이 말씀하실 때는 전혀 자신의 그러한 결정에 후회가 없어보이고 당당해 보입니다.
이수영 회장은 기자였습니다. 1970년대에 일본산 카메라를 메고 이탈리아 소렌토 지방에 취재하러 갔을 때 일본 관광객들이 자기 앞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 회장은 본능적으로 옷으로 자기 카메라를 가렸습니다. 일본인들에게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가 되니 우리나라 기업들의 광고판이 외국에도 붙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국력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신문사를 나와 소와 돼지를 키웠고 그 종잣돈으로 부동산에 투자하여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그러한 좋은 일을 하겠다는 마음이 없었다면 그렇게 열심히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경희대 한의과에 1,300억을 기부한 분도 있습니다. 이란 왕실 주치의로 있었던 이영림 한의사입니다. 이분은 당시 자신을 가르쳤던 신상주 교수님과 우리나라에도 노벨상 의학상이 나올 연구소를 설립하자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한의사로 버는 돈으로는 충분할 수 없었습니다. 우연히 이란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왕실 한의사가 되었으며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건설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궁즉통이라 바라는 게 있으면 길이 뚫리는 법입니다. 물론 그 돈을 기부하기 전에 신상주 교수님이 돌아가시기는 했지만, 이분은 “다시 태어나도 지금처럼 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시다가 새벽에 기도하십니다. 제자들이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다른 이웃 고을들로 가자.”라고 하십니다. 스스로 당신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면 이제 복음을 전하는 일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목표지향적이십니다. 돌아가실 때도 “다 이루었다.”라고 하십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이뤄야 할 사명을 지니고 사셨습니다.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갇혀 살던 부족이 있었습니다. 급격한 사막화로 더는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걸어서 사막을 빠져나오려 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길을 잃고 죽거나 되돌아왔습니다. 우연히 그곳을 여행하던 영국인 켄 리먼은 길을 찾지 말고 하늘의 북극성을 바라보며 갈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은 말합니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한 가지만 말하라고 한다면 원고를 다시 쓰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습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그러나 실상 삶의 의미나 목적을 찾음은 창조자를 인정하는 행위이고 찾지 않는 것은 무신론과 같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부모에게 자녀가 그렇듯이 모든 만들어진 것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창조자에 의해 의미와 목적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 남자가 약속 장소를 향해 서둘러 운전해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의 차가 거의 거북이 수준입니다. 경적을 울리고 헤드라이트를 깜빡여도 속도를 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자제력을 잃고 화를 내려는 순간, 차 뒤에 부착된 작은 스티커가 눈에 띄었습니다.
‘장애인 운전자입니다. 조금만 참아주세요.’
이 문구를 보는 순간, 마음이 차분해지고 조급함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화냈던 것이 미안했고, 그래서 오히려 그 차의 운전자를 보호해 주고 싶어졌습니다. 이제는 약속 시간에 조금 늦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내용이었습니다. 이 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각자 나름의 이유가 담긴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고 말입니다. 앞선 이야기의 남자도 가까이 다가선 다음에야 뒤에 붙인 스티커를 볼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다가가야 그 마음의 스티커를 조금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예전에 운전 면허를 취득한 뒤, 동창 신부 차로 운전 연습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동창 신부는 운전 전에 꼭 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서 무언가를 가지고 왔습니다. A4용지에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글씨 ‘왕초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종이를 눈에 잘 띄는 청색 테이프로 돌려 붙였습니다. 창피하게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하니, 그래야 다른 운전자들이 배려해 준다는 것입니다. 초보운전인 줄 모르고 “왜 저렇게 운전하는 거야?”라며 화를 낸다면, 그를 죄짓게 하는 것이 아닐지 싶어서 창피해도 붙이고 연습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한다고 화낼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마음의 스티커를 봐야 하고, 동시에 나의 감정 스티커를 상대에게 보이는 용기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함께 사는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병으로 누워 있는 시몬의 장모를 찾아가셔서 손을 잡아 일으키니 열이 가십니다. 사위가 가족을 돌보지 않고 밖으로만 돌고 있으니, 화병이 날 만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서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바로 장모의 마음을 보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다른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 역시 예수님 앞으로 나옵니다. 그들 마음을 보시고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즉, 병을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이렇게 전하셨습니다. 마음을 보고 함께하면서 기쁜 소식이 선포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세상에 기쁜 소식을 알려야 합니다.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지요. 복음 선포만이 주님의 마음을 보고 주님과 함께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와 같이 우리 역시 복음에 동참해야 합니다.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의 마음에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나는 성공하는 것보다 쓰임 받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존 맥아더).
사진설명: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