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의 방(외 2편) 김재근 여긴 고요해 널 볼 수 없다 메아리가 닿기에 여긴 너무 멀어 몸은 어두워진다 시간의 먼 끝에 두고 온 목소리 하나의 빗소리가 무거워지기 위해 몸은 얼마나 오랜 침묵을 배웅하는지 몸 바깥에서 몸 안을 들여다보는 자신의 눈동자 아직 마주친 적 없어 침묵은 떠나지 않는다 말없이 서로의 몸을 찾아 말없이 서로의 젖은 목을 매는 일 빙하에 스미는 숨소리 같아 잠 속을 떠도는 몽유 같아 몸은 빗소리를 모은다 같이 앉아도 될까요 너는 아프다 아픈 너를 보며 같이 우울해야 할까 혼자 즐거워도 될까 처음 걷는 사막처럼 처음 듣는 빗소리처럼 어디서부터 불행인지 몰라 어디서 멈추어야 할지 몰랐다 너를 위한 식탁 창문은 비를 그렸고 빗소리가 징검다리를 건널 때까지 접시에 담길 때까지 그늘이 맑아질 때까지 고요가 주인인 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 너를 위한 식탁 촛불은 타오르고 촛불 위를 서성대는 그림자 너를 밝히는 시간 너를 기다리는 시간 시간을 함께 나누려면 얼마나 더 멀어져야 할까 너를 처음 읽는 것 같아 헤아릴수록 빗소리 늘어나는데 너는 오늘의 불안인가 식탁은 불멸인가 수프는 저을수록 흐려지고 빗소리에 눈동자가 잠길 때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너를 위한 식탁 너를 본 적 없어 너를 부를 수 없다 우리를 증명하는 우리의 봉인된 불행 미래에서 미래로 다시 오늘의 불안으로 너를 지울 수 없어 너를 잊을 수 없다 너를 인정해야 할까 불행이 너라면 우리가 불행이라면 같이 앉아도 될까요 여기밖에 없어서요 저녁의 부력
1 물속 저녁이 어두워지면 거미는 지상으로 내려와 자신의 고독을 찾아 그물을 내린다 미로 속, 미아가 되어 지구의 차가운 물속으로 눈동자를 풀어놓는 것이다 몸이라는 악기 출렁이는 몸속, 물의 음악 북극을 감싸는 오로라의 젖은 메아리처럼 허공에 매달려 시간이 무뎌질 때까지 거미는 스스로를 배웅하는 것이다 2 비행운을 그리며 날아가는 어린 영혼들 어느 물속에서 잠들까 태어나 처음 듣는 울음에 귀가 놀라듯 태어나 처음 보는 눈동자에 눈이 놀라듯 자신에게 숨을 수 없어 거미는 스스로를 허공에 염하는 것이다 3 물속 지느러미보다 느린 저녁이 오고 늦출 수 없는 질문처럼 말할 수 없는 대답처럼 스스로 듣는 거미의 잠 잠 속이 밝아 뜬 눈으로 밤새 눈알을 태우는 몸속 까마득한 열기, 식힐 수 없다 촉수를 뒤덮는 시간, 늦출 수 없다 어떤 부력이 저녁을 떠오르게 할까 허공의 기억만으로 흐려지는 여기는 누구의 행성인지 누구의 무덤 속인지 대답할 수 없기에 체위를 바꾼 기억이 없기에 몸속에 고이는 게 잘못 흘린 양수 같아 매일 젖은 몸을 말리며 매일 젖은 눈을 더듬으며 허공을 깁는 것이다 거미줄에 매달려 식어버린 지구의 저녁, 거미의 울음 같아 만질수록 쓸쓸하다 ―시집 『같이 앉아도 될까요』 2024.9 ---------------------- 김재근 / 1966년 부산 출생. 2010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무중력의 화요일』 『같이 앉아도 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