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아가타 성녀는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는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고자 평생을 동정으로 살았다. 아가타는 철저하게 동정을 지키려다가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249-251년) 때 그를 차지하려던 지방 관리에게 혹독한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녀에 대한 공경은 초대 교회 때부터 널리 전파되었다.
본기도
주님,
복된 아가타는 동정과 순교의 영광으로 교회를 빛냈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제1독서
<계약 궤를 지성소 안에 들여다 놓았다. 구름이 주님의 집을 가득 채웠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8,1-7.9-13
그 무렵 1 솔로몬은 주님의 계약 궤를 시온, 곧 다윗 성에서 모시고 올라오려고,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의 각 가문 대표인 지파의 우두머리들을
모두 예루살렘으로 자기 앞에 소집하였다.
2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두 에타님 달, 곧 일곱째 달의 축제 때에
솔로몬 임금 앞으로 모였다.
3 이스라엘의 모든 원로가 도착하자 사제들이 궤를 메었다.
4 그들은 주님의 궤뿐 아니라
만남의 천막과 그 천막 안에 있는 거룩한 기물들도 모두 가지고 올라갔는데,
사제와 레위인들이 그것들을 가지고 올라갔다.
5 솔로몬 임금과 그 앞에 모여든 이스라엘의 온 공동체가 함께 궤 앞에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이 많은 양과 황소를 잡아 바쳤다.
6 그러고 나서 사제들이 주님의 계약 궤를 제자리에,
곧 집의 안쪽 성소인 지성소 안 커룹들의 날개 아래에 들여다 놓았다.
7 커룹들은 궤가 있는 자리 위에 날개를 펼쳐 궤와 채를 덮었다.
9 궤 안에는 두 개의 돌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돌판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올 때,
주님께서 그들과 계약을 맺으신 호렙에서 모세가 넣어 둔 것이다.
10 사제들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주님의 집을 가득 채웠다.
11 사제들은 그 구름 때문에 서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주님의 영광이 주님의 집에 가득 찼던 것이다.
12 그때 솔로몬이 말하였다.
“주님께서는 짙은 구름 속에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13 그런데 제가 당신을 위하여 웅장한 집을 지었습니다.
당신께서 영원히 머무르실 곳입니다.”
복음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53-5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53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55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56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주님 안에 머무는 방법: 뜻을 따를 것인가, 도움을 청할 것인가?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기만 하면 병이 낫고 구원받았다고 나옵니다. 예수님께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려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진리와 은총을 받음입니다. 누군가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그 사람 안에 머무는 것이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 사람 안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가르침보다는 은총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그 나무의 가지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뿐께 붙어있어야만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이와 연결하여 오늘 복음에 따르면 은총을 청함도 그분께 붙어있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일까요? 하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음이 가능할까요? 사탄이 아니라면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다 보면 그 사람의 뜻도 따르게 됩니다.
윌 스미스가 지니 역을 맡은 2019년 실사 영화 ‘알라딘’은 일부 현대적인 업데이트를 가미한 오리지널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와 유사한 줄거리 선을 따릅니다.
알라딘: 이 영화는 아라비아의 도시 아그라바에 살고 있는 친절하지만 한 푼도 없는 길거리 알라딘을 소개합니다.
그는 살기 위해 종종 도둑질하기도 하지만 마음이 악하지는 않습니다.
술탄의 딸인 자스민 공주는 궁전 밖의 삶을 경험하고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싶어 합니다. 그녀는 알라딘을 만나기 위해 몰래 도시로 나갑니다.
술탄의 권력에 굶주린 대재상 자파르는 불가사의의 동굴에 숨겨진 마법의 램프를 찾고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되찾기 위해 거친 다이아몬드가 필요하며, 그것은 알라딘으로 밝혀졌습니다.
알라딘은 자파르에게 속아 동굴에 들어가 램프를 찾습니다. 자파르는 램프만 빼앗고 알라딘을 동굴로 밀어 넣었지만, 알라딘은 램프를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알라딘이 램프를 문지르자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지니가 나옵니다. 알라딘은 왕자만이 자스민과 혼인할 수 있음을 알고는 지니에게 자신이 왕자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자파는 알라딘의 진짜 정체를 알아내고 램프를 훔쳐 술탄이자 가장 강력한 마법사가 되기 위해 사용합니다.
알라딘은 자스민, 애완 호랑이 라자, 지니의 도움을 받아 자파르와 맞서게 됩니다. 그는 자파르의 교만함을 자극하여 전능한 자가 되게 해 달라는 청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전능한 자는 지니입니다. 지니는 그를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새로운 지니로 만들어버립니다.
자파르는 램프에 갇힙니다. 알라딘은 자신이 왕족으로 영구적으로 변신하는 대신 지니를 자유롭게 해 주려는 마지막 소원을 사용합니다. 지금까지 지니를 위해 그러한 소원을 빈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니는 램프의 저주에서 풀려 자유로운 인간이 됩니다. 그리고 술탄은 자스민이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고 자스민은 알라딘을 선택합니다.
나에게 모든 것을 다 해주는 이의 뜻을 묻지 않으면 사탄일 수밖에 없고 그 교만함 때문에 스스로 멸망하게 됩니다. 마음이 착한 사람은 자신에게 모든 것을 해주는 이의 뜻을 물어봅니다. 알라딘이 그런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은 주님과 머물기 위해 많은 것을 청합니다. 언제나 도움을 청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없이는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은 모세를 파견하실 때도 지팡이를 주셨습니다. 이때의 소명이 진리이고 지팡이가 은총입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통해 주님께 끊임없이 청하며 그 받는 은혜 때문에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욕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누군가에게 머문다는 말은 그 누군가의 은총과 진리를 거부하지 않고 받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아이들은 그렇게 부모의 가르침과 음식을 먹지만, 사춘기가 되면 이를 거부합니다. 독립하겠다는 말입니다.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것은 또한 부모의 뜻을 따라주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주님께 붙어있기 위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뜻에만 집중하기보다는 그것을 위해 매 순간 어떤 은총이 필요한지를 청하는 게 낫습니다. 그 청함을 통해 주님에게서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은총을 받은 사람들처럼.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 남자가 시골길을 운전하며 가던 중, 주위 풍경에 한눈을 팔다가 그만 자동차가 진흙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했지만 차 바퀴가 헛돌 뿐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근처 농장에 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농부는 들판에 있는 나이 많은 노새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워릭이 차를 웅덩이에서 꺼낼 줄 수 있을 거요.”
남자는 이 늙은 노새가 과연 그 무거운 차를 웅덩이에서 꺼낼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농부는 고삐를 잡고 노새를 잡아당기며 소리쳤습니다.
“당겨, 프레드. 힘껏 당겨, 잭. 온 힘을 다해 당겨, 테드! 너도 힘껏 당겨, 워릭!”
노새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쉽게 차를 웅덩이에서 끌어냈습니다. 남자는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에, “노새는 한 마리인데 왜 다른 이름을 불렀습니까? 이 노새의 이름이 여러 개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웃으며 말했지요.
“아니요. 워릭은 늙어서 눈이 보이지 않는다오. 하지만 자신이 다른 노새들과 함께 있다고 믿으면 어떤 무거운 것도 끌 수 있소.”
혼자라고 생각하면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함께하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일이 되곤 합니다. 함께 한다는 믿음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주님께서 믿음을 강조하셨던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요?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음을 믿음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힘센 주님께 대한 믿음이 지금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해줍니다.
병든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들이 혼자서 오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특히 병이 죄의 결과라는 당시 사회 분위기 때문에 돌아다니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함께합니다. 바로 예수님께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은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만 대어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복음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함께했기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또 주님과 함께하려는 마음에 구원까지 받을 수 있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함께하고 있을까요? 나의 이웃들과 함께하려고 노력하며, 그들과 함께 주님을 만나려고 하고 있습니까?
누구는 자기만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믿는다는 것은 그 누구와도 함께하지 못한다는 고백과 같습니다. 함께하지 않는 곳에서 과연 진정한 믿음이 나올 수 있을까요?
오늘의 명언: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억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인생을 두 번 사는 것이다(마르티얼).
사진설명: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