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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요하강 (10) 무다구치 렌야, 원균, 당생지
1948년경 만주지역에서 국공내전이 한창일 시기, 소멸되었던 한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소속 부대의 기원과 소멸 그리고 이에 동조했던 국민당 지지 조선인들의 소식에 관한 창작물입니다. 과거에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던 분야입니다.
얼마전 한국에서 상당히 유명한 역덕이신 권아무개 선생의 블로그에 들어갔더니, 당생지를 중국의 원균, 혹은 무다구치 렌야라고 말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러나 당생지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당생지는 1889년 중국에서 태어나 1970년경 중국에서 사망하였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공격으로 상해가 함락되자, 중국의 수도였던 남경의 위수사령을 자처하고 나서, 남경을 지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일본군에게 재기불능의 소모전을 강요하거나, 시민을 대피시키지는 못하였으나 부하들과 주민들은 거의 다 싹 죽고 당생지만 살아서 돌아왔기에
정유재란 때 부하들을 싹 죽이고, 자기도 죽은 ‘원균’과는 비교가 안되는 인물이라고 생각됩니다.
1937년 남경학살사건을 일본에서는 ‘중국 특유의 허풍이다.’라고 이야기들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략 수십여만의 주민과 군인들이 죽은 것은 맞습니다.
이 때 동북군에 소속되었다가 1936년 서안 사건 이후 국민당군에 편입되었던 일부 동북군 병력도 남경함락 이후 전원 소식이 두절된 것을 볼 때, 이들도 거의 전멸했거나 모두 탈영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무다구치 렌야는 ‘원균’보다는 위업이 뛰어나며 한국 독립에 크게 기여한 장군
임팔전투
임팔전투
한국 역사에서도 상당히 알려진 인물인 무다구치 렌야(1888~1966)는 2차 세계대전중인 1943년경 미얀마, 인도 일대 그 유명한 임팔작전을 감행해 못죽여도 최소한 수만여명에서 대략 10만여명 이상을 굶겨서 죽인 독립유공자로 평가되는 인물로,
근대사에는 훈련된 군인들을 굶겨죽이는 경우가 드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싹 죽여버린 진정한 ‘독립유공자’로 한국의 ‘원균’보다는 몇수 위의 위인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제 생각이죠......
물론 일본군 1명이 굶어 죽을 정도면, 식량과 재산을 수탈당한 미얀마, 태국, 베트남 주민은 최소 10배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음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고요......
지나사변에 구경꾼으로 간 00백부
제가 알던 분의 백부께서도 어린시절 중국에 있었는데 그 무렵 중국은 일본군의 침략, 내전 등으로 혼란한 시기였고, 백부가 만났다는 사람중에는 황군, 지나군, 팔로군, 광복군, 조선의용군, 호로군, 동북항일연군, 소련군을 비롯해서 심지어 그 유명한 의열단의 ‘김약산’을 직접 중국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김약산 즉 오늘날에 김원봉이라고 부르는 사람에 관한 자료가 많이 출판되다보니, 언제가 살펴보니 이름을 알 수 없는 조선인 상인이 왔다고 하는 것을 볼 때, ‘아 ! 이분이 그분의 백부셨구나’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때도 그 중국 오지에도 조선인들이 먹고살기 위해, 돈벌이 노동을 위해 오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물론 오늘날까지 유명한 독립운동가들도 분명 계셨고요.
(199×년경 00백부뻘 되는 분과 저의 대화내용)
문 : 요즘 한국 언론에서는 백두산 영토를 북한이 중공에 팔아먹은 것이 아니었고, 중공의 주은래가 북한 김일성에게 양보했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주은래가 한국인에게 우호적인 사람이 정말 맞습니까?
답: 누구? 누구 말인가 ?
(최소 40~50년 이전 중국 어느 산골에서 만난 인물을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 할 것입니다.)
문 : 주은래 말입니다. 저우언라이...... 중공의 2인자. 즉 넘버 투 말입니다.
답 : (한참 생각하고) 더럽게 생긴 사람 말인가?
문 : ???, 혹시 팔로군 사령 주덕, 즉 주떼를 만난 적 있습니까?
답 : 대답 안함
문 : ??? 혹시 6.25사변 때 중공군 사령으로 온 팽덕회, 즉 펑떠화이를 만난 적 있습니까?
답 : 대답 안함
(1930~1950년대 중공의 권력 2인자는 유소기, 주은래, 임표가 아니고 ‘주덕’이 맞았다. 한국의 일부 자료의 오류를 잘못 판단하고 질문하였으나 백부는 정확하게 답변하였다.)
답 : 대국에서 하는 말은 함부러 믿을 수 없다.
문 : 아~~ 요즘 중공보다 한국이 월등히 잘산다고 말합니다. 국민소득도 높고요
답 : 아 ! 이 사람아, 대국이 어떻게 우리보다 못 살 수 있는가 ? 그 넓은 땅에. 자원에
문 : ??? 한국이 공업도 발전하고, 상품 수출도 잘해서 중공보다는 훨씬 잘 먹고 잘 산다고 합니다.
답 : 이 사람아.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우리가 이 정도 살면 대국은 얼마나 더 잘 살겠어......
문 : (대답 못함)
1945년 해방이후 1950년 6.25전쟁과 절대빈곤, 보릿고개 등을 경험한 00백부는 어린시절 중국의 부유를 구경했기에 한국이 중국보다 요즘 더 잘살고 있다는 사실을 끝내 믿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사람을 설득시키기가 그만큼 어려운 것이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은 중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넘어서는 민간인 희생률과 대립과 논쟁이 있어왔음을 명확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심지어 00백부의 말이 틀린 말이 없고, 다른 여러 일제 때 기록이 틀린 경우가 많기에 백부가 주장한 ‘중국이 더 잘산다’는 것은 필자가 직접 중공에 가서 확인하고 나서야 한국이 최소한 비슷하게 살거나 더 잘산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한쪽의 주장만을 듣는 것은 잘못
제가 역사 카페에서 역사물을 자주 쓰지만
1920년 아무르강 하류에서 발생한 ‘니항사건’의 일본측 주장을 살펴보면,
-영하 30도라는 혹한의 기온에, 한 조각의 천조차 주지 않고, 빨가벗겨 철사로 손을 뒤로해 묶어, 엉망으로 찔러 죽이고, 도려내고, 참살했다.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내고, 팔을 자르고, 안구를 뽑아내고, 코를 부수고,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고, 보는 것도 무참한 나체의 시체가 있었다.
-남녀를 달리게 하고, 갑자기 무릎 아래를 도끼로 자르고, 빨가 벗기고, 단말마의 고통에도 사로잡은 인간을 불에 던진다
-가랑이를 찢어 죽이겠다며, 두 마리의 말에 한 발씩 묶고, 힘차게 달리게 함으로써 몸을 두동강냈다.
-몇 명이 누르고 산채로 머리 껍데기와 다리 피부를 벗긴다.
-양눈깔을 도려내 나무 가지에 꽂는다.
-집단으로 능욕하고 국부를 찢어 촛불을 세운다.
-남녀의 목을 잘라내고, 남자의 목을 여자의 목에, 여자의 목을 남자의 목에 연결한다.
-아무르강의 얼음 위에 산채로 빨가벗겨 자게 해 동사시킨다.
-남자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피가 떨어지는 인육을 먹게 한다.
-여자를 강간한 후, 술에 취하게 한 후 벌거벗은 채 춤을 추게 하고, 그 후 항문에 칼을 꽂아 네 발로 기어가게 하며 학살하였다.
-참살한 사망자의 손가락을 자르고 반지를 도둑질하고 치아를 부수고 금치를 빼앗았다. 또 임산부의 배를 째고 태아를 꺼냈다.
-니항의 여자들은 모두 강간후 학살하였다. 어린이도 한명 남김 없이 무참히 죽였다.
라고 역사학자가 쓴 한국 독립기념관 공식도서와 유명 소설가 박경리가 쓴 소설 ‘토지’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박일리아(혹은 박일리야, 박엘리야)가 최소 4천여명에서 1만여명 이상의 무고한 러시아 주민까지
위와 같은 다양한 방법으로 학살해,
연해주 4월 참변을 불러왔고,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을 죽게 만들었으며
1921년 자유시 참변의 원인과 실체가 되었고
관동대지진 조선인 대학살의 원인, 북사할린섬 보상점령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오늘날 러시아 ‘00항’에는 조선인 독립군에 의해 조상이나 이웃주민의 조상이 살해되었다는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즉 박일리아는 한명의 러시아 민간인도 죽이지 않은 것입니다.
당시 박일리아는 교사로 군사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으로 정규군인 일본군 시베리아 출정군과는 차원이 아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4천여명 이상을 학살했다’는 사람과 ‘한명도 안죽였다’는 사람 둘중 하나는 수십년 이상 온갖 모략질과 거짓말을 계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한쪽 말만 들을 것이 아니고, 철저한 조사를 해서 무고한 러시아 시민 4천여명을 학살했다면 오늘날에서라도 사죄와 보상을 해야 하겠습니다.
물론 한국 독립군에 의해 말로 하기 힘든 간악한 수법에 죽었다는 사람의 후손이나 이웃주민의 후손이 있을 때 말입니다.
없으면, 죽은 사람 없었던 것이죠. ㅎㅎ
1948년경 요하강과 만주일대에서 벌어진 국공내전에 대한 글을 쓰는 이유
저는 1990년대부터 1930~1940년대의 만주에는 공산주의 계열인 동북항일연군 외에도 반일군이나 호로군 계열이 존재하였음을 알고 있었으나
섣불리 입도 뻥긋할 처지가 못되었습니다.
오늘날 중국 현대사에서 잘 다루어지고 있는 ‘신강 사건’만 생각해 보십시오.
신강 사건에서 죽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
바로 모택민 선생입니다. 그 이름만 들어도 살이 벌벌 떨릴 수 있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임금 연산군은 역적을 죽일 때,
아버지 성종 때 폐비윤씨에게 사약을 먹인 사람을 가장 먼저 죽이면서, 가장 가혹한 방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6.25사변 때 중공군으로 와서 죽은 사람은 또 누구였습니까? 바로 모안영입니다.
모안영이가 죽으면 상관이 무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
중국 정치인중 한국에서 호인으로 알려진 주은래가 신중국 수립직후, 국민당계 인물이 자수하자, ‘당신의 과거 진짜 지위와 직책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 공산당은 인민을 위하고 개인간의 은원은 따지지 않는다. 사실대로 말하시오’라는 식으로 말해, 좋은 인물로 평가된다는데......
그 말을 믿었던 사람중 산사람이 있기는 있었겠습니까 ?
오늘날 한국 역덕에게 잘 알려지지도 않은 사건들인
강교 사건, 해만 사건, 호로군, 반일군, 장성항전을 줄기차게 써대는 이유는 또 무었이겠습니까?
얼마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아예 알려지지도 않던
주복성이라는 인물만 살펴봐도 1936. 12. 12. 중국 섬서성 서안에서 발생한 서안 사건에 사장(사단장)으로 참가한 인물이었고, 황하 제방을 폭파한 화원구 사건, 미얀마 전투(일명 임팔전투), 베트남, 요심전역에도 참가해 조선의용군과도 전투한 사실은 있으나 중국에서 아예 이름조차 언급된 적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일본 역덕들의 활약
그런데 일본의 역덕들이 만주의 각종 사건마다에 개나 소나 각종 백과사전에 항목을 작성해 올려대니, 중국도 결국에는 안 올릴 수 없었고......
필자도 그냥 막 올려대는 상황이 오게 된 것입니다.
알고보니 이제는 그냥 TV역사 드라마 ‘서안 사건’에 나오는 것처럼 그냥 흔한 역사적 사실들이 된 것이죠.
그러나 장성 항전, 노구교 사건, 서안 사건, 노몽한 사건, 신강 사건,...., 자유시 참변, 니항사건은 최근 국내에서 각종 이유로 주목을 받으면서,
000 자유시참변 가담설, ‘박일라아가 4천여명 학살했느냐? 아니면 한명도 안죽였느냐?’를 놓고 놀랍게도 논쟁이 되기도 합니다.
https://youtu.be/99OJ8nBY_dU?si=TZx8szZFqN1bkRKc
참고인물 : 조선인 여성을 성노리개로 동원하고 노예 노동자로 활용했던 한 일본인 상인
첫댓글 대한독립군 전선사령관 모전구렴야 선생님 흑흑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한국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하신 외국분들에 대한 표창도 마땅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주옥 같은 어록도 하나 세워 기념할 만하죠. ㅋㅋㅋ
@신룡기2 옳소!
잘 보고 갑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