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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17일 연중 제2주일
제1독서 : 1사무 3,3ㄴ-10.19
제2독서 : 1코린 6,13ㄷ-15ㄱ.17-20
복 음 : 요한 1,35-42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사람을 고쳐 쓸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많은 이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언제부터인가 인터넷상에서 유행하는 신조어이지만,
이 말을 많이 쓰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고쳐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평범한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변화시킨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켰고 세상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습니다.
고쳐지길 바라는 그 사람의 변화를 간절히 원한다면 먼저 믿어줘야 합니다.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먼저 하기에 그 생각대로 고쳐지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단 한 사람도 고쳐지지 않았다면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을 수도 있겠지만,
이제까지 너무 많은 사람이 고쳐졌고 세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고쳐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고쳐 쓰시기 위해서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이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제자들을 부르실 때 반드시 “나를 따라라.”라고
구체적으로 부르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가자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시지요.
그들이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묻자, “와서 보아라.”하십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와서 보아라”라는
주님 말씀을 듣고 보면서 주님의 뜻을 본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직접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셔야 따를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 곁으로 가서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흐름에 젖어서 세속적으로 살 뿐입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보면,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 성령의 성전입니다(1코린 6,15.19 참조).
그래서 우리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1코린 6,20 참조).
그러나 너무나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불가능하다는 생각, 변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
그러면서도 멈추지 않는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에 우리는 주님께 제대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우리를 고쳐 쓰시기 위한 주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님 곁으로 우리가 먼저 가야 합니다.
그래야 고쳐 쓸 수 없을 것 같은 내가 변할 수 있습니다.
초대, 그리고 만남
류해욱 요셉 신부
오늘은 연중 2주일입니다.
저는 마종기 시인의 시로 시작을 엽니다.
마종기 시인은 마해송 시인의 아들로서
대부분의 작품이 인간에 대한 따뜻한 공감의 시선을 보여줍니다.
도미 이후 마종기의 작품은 의사로서의 체험이 창작의 근간으로 놓여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만나서 그분의 책을 3권 선물로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의 시, ‘우화의 강’이라는 시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을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의 흔할 수야 없겠지
긴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마 종기 시인의 寓話의 강 1을 들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우화의 강 2라는 시도 있거든요.
제가 서강대학교에서 가르칠 때 수업 첫 시간 처음으로 만나는 학생들에게 들려주곤 하던 시입니다.
만남. 그것보다 가슴 설레는 낱말은 없을 것입니다.
노사연의 만남이라는 노래가 있지요?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우리의 만남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만남일 수는 없습니다.
비록 카페에서 여러분들에게 저와의 만남이 그냥 스쳐 지나가는 만남이라고 하더라도
회원 여러분들과 주님과의 만남은 그럴 수 없고 더없이 소중하지요.
우리는 늘 주님을 만나지만 특별히 미사에서 주님을 깊이 만납니다.
그 만남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물길이 트이기 마련이지요.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하여 유장한 물길처럼 아주 편안할 수는 없겠지만
자주 만나 서로 물을 보내고 섞이다 보면 수려한 강물이 되는 것처럼
매일 미사에서 주님을 만나다 보면
그 만남이 수려해지고 하루라도 섞이지 않으면 어색하고 허전하게 느껴지지요.
요한의 제자 두 사람과 예수님과의 만남은 신기합니다.
이 만남은 처음에는 어색하여 몇 마디 주고받음에 그쳤지만
하루 밤을 머물면서 서로 사이에 물길이 트였고 두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꾸는 만남이 됩니다.
우리에게 모두 그런 만남이 있지요.
말없이 따라오는 두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돌아서셔서 묻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이 물음 안에는 예수님의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 깊이 있는 갈증을 아시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당신을 따르는 행위로 바뀌기를 바라시는 그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진심이 담겨 있는 그 한마디의 말씀은 마치 화살처럼 두 사람의 가슴을 꿰뚫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이 단순한 대답 안에는 아직 당신이 누구신지 모르지만,
함께 머물면서 당신을 깊이 만나고 싶다는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디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와서 보아라.”라고 하십니다.
당신과 함께 묵으면서 당신을 만나보라는 초대입니다.
함께 묵는 가운데 당신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두 사람은 따라가서 예수님이 계신 곳을 보고 거기서 예수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함께 머물면서 내밀한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고 복음사가가 전해 줍니다.
때는 단순히 시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만남이 이루어진 시간, 은총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 시간이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과의 첫 해후가 이루어진 시간이기에
깊이 마음에 새겨 둔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특별한 만남의 시간은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새겨지는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였던 두 사람은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어
그 순간부터 예수님을 줄곧 따라다니게 됩니다.
단순히 따라다닐 뿐만 아니라 처음에 초대받았던 그들이 이제 다른 사람을 초대하게 됩니다.
먼저 가까운 사람을 초대하게 마련이지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는데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찾아 가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말하고는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갑니다.
이 모든 일이 기쁨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들이 발견한 너무나 귀한 보물이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가까운 사람에게 나누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늘 새롭게 초대하십니다.
그 초대에 응답하여 그분과 함께 머무십시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지내는 시간,
그분과의 내밀한 만남이 얼마나 은혜로운 것인지,
그 만남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 주는 것인지를 떨리는 가슴으로 체험하십시오.
“와서 보아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연중 2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부르심과 응답, 그리고 그 사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무엘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
말씀의 ‘들음’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전해줍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8)
<화답송>에서 시편작가는 응답의 사명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데 있음을 노래합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시 40,8)
<제2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어
당신의 “지체”(1코린 6,15)로 삼으시고 “성전”(1코린 6,19)으로 삼으시니,
그에 합당하게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20)라고 권고합니다.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로 안내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곧 ‘제자 됨의 길’을 깨우쳐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곱 개의 동사, 곧 일곱 가지 행동을 요청합니다.
곧 ‘듣다.’ ‘따라 가다’, ‘함께 가다’, ‘보다’, ‘함께 묵다’, ‘말하다(선포하다)’, ‘그분께 데려가다.’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에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따라 갔습니다.”(요한 1,37).
여기서 제자가 가는 두 가지를 길을 말해줍니다.
곧 “듣다”와 “따라가다”라는 동사는,
제자 되는 길이 단지 동의하고 받아들인다는 수동적인 측면을 넘어
자발적으로 응답하는 순명의 자세를 포함하며,
단지 추종한다는 것을 너머서 운명을 같이하고 전적으로 헌신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게 따라오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
곧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진정 찾아야 할 것을 무엇이며,
진정 향해야 할 곳이 누구인지를 일깨워주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라삐, 어디에 묶으십니까?”(요한 1,38) 하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그분이 “묶으신 곳”이라는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라는 당신 인격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와서 보아라.”(요한 1,39).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인격적 체험을 직접 하도록 초대하십니다.
곧 원하는 그것을 “보게 되리라”는 약속과 보장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신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습니다.”(요한 1,39).
여기서, 제자들이 가는 길 세 가지를 말해줍니다.
곧 그분과 “함께 가”는 일, 그분께서 묵는 곳으로 인도를 받아 함께 가는 일이요,
그곳을 “보는” 일, 그분이 누구신지를 깨닫는 일이요,
그분과 “함께 묵는” 일, 그분을 체험하여 사랑으로 흠뻑 젖는 일입니다.
그러니, “와서 보아라.”(요한 1,39)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쪽으로 걸어라’, ‘이렇게 걸어라’라는 제자들의 삶의 방향과 방식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체험을 통하여 배우야 함을 깨우쳐줍니다.
사실 제자라는 히브리어(탈미딤)와 희랍어(마테테스)의 뜻은
‘배움에 헌신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 모범을 우리는 엘리사에게서 볼 수 있는데,
그는 엘리야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시종이 되어 섬기고 전적으로 헌신하면서
인격적 유대로 전인격적인 변형을 이루어 갑니다.
사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스승과의 인격적 관계는 친아버지를 넘어서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이런 격언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랍비가 다 같이 인질로 잡혀가면, 제자는 랍비의 몸값을 먼저 지불해야 한다.”,
“아버지와 스승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면, 먼저 스승의 짐을 덜어드린 후
아버지의 짐을 거들어야 한다.”
그래서 엘리사가 스승과 사별할 때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2열왕 2,12)라고 부르짖으며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결국, 제자가 된다는 것은 진리나 스승에 대한 정보적인 접근이 아니라,
교리적인 진리를 배우고 신념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승을 따라 사는, 스승을 닮아가는 진정한 변형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예수님과 함께 묶은 그들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갑니다.”(요한 1,42 참조).
여기에서 제자들의 두 가지 사명이 드러납니다.
곧 그분을 ‘말하는’ 일, 증언하고 선포하는 일이요,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가는’ 일이입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마태 28,19) 사명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동반자요 반려자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향하여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우리 주님의 동행을 바오로 사도는 참으로 아름답게 표현해줍니다.
“그분께서는 늘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내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2코린 2,14)
그렇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바로 그것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동행에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이 복된 길을 동행하시는 우리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증언하여 선포하고 증거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것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요한 1,39)
주님!
말씀을 듣고 단지 동의하지만 말고, 받아들여 따르게 하소서.
따르지만 말고, 전적인 헌신으로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무엇을 찾고, 무엇을 원해야 할지를 일깨워주시고
저를 향해 계시는 당신을 향해 달려가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흠뻑 젖게 하시고,
당신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서양의 철학자 중에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동굴과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언젠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세상은 동굴 밖이라고 합니다.
동굴에 갇혀있는 사람은 동굴을 나갔다가 돌아온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동굴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동굴 밖에는 찬란한 태양이 있고, 아름다운 꽃과 싱그러운 바람이 있다고 말해도 믿지 않습니다.
호수와 바다가 있고, 하늘에는 조각구름이 떠 있다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새들이 노래하고, 시냇물이 흘러간다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동굴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밖에서 온 사람을 이단으로 몰아서 심판한다고 합니다.
안전한 동굴이 있는데 위험한 세상으로 나오도록 현혹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동양의 현인 장자는 ‘호접몽(胡蝶夢)’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하늘을 높이 날았습니다. 그런데 깨어보니 침상이었습니다.
장자는 문득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나비가 지금 꿈속에서 장자의 모습을 보고 있는가?
하늘을 나는 나비가 애벌레들에게 ‘너희는 곧 나처럼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될 거야.’라고 말하면
애벌레는 ‘그럴 리가 없어’라고 말할 겁니다.
땅위를 기어 다니는 애벌레에게 하늘은 어쩌면 위험한 곳일 수 있습니다.
날개의 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애벌레는 고치가 되고 나면 결국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됩니다.
진화의 과정이고,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새들이 작은 나뭇가지에 앉을 수 있는 것은 날개를 믿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서는 플라톤처럼 이상적인 세상을 말하는 사람을 예언자라고 합니다.
장자처럼 하늘 높이 날 수 있는 깨달음을 주는 사람을 예언자라고 합니다.
예언자는 앞날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일기예보처럼 날씨를 알려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질문하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우리가 어디까지 왔는지 성찰하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우리가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무엇인지,
그 목적을 알았다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동굴 속에 갇혀서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하늘 높이 날 수 있는 나비가 된다는 희망이 없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무엘은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 되는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때부터 기름부음 받은 자를 ‘메시아’로 부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는 ‘능력, 힘, 나이, 재산’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는 하느님께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도, 아픈 사람도, 배우지 못한 사람도, 나이가 많은 사람도, 나이가 어린 사람도,
어부도, 세리도, 창녀도 하느님께로부터 선택받으면 기름부름 받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많았던 엘리사벳도 하느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아서 세례자 요한을 잉태하였습니다.
나이가 어렸던 마리아도 하느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아서 예수님을 잉태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두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찾느냐?”
제자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와서 보아라.”
불가에서 말하는 ‘선문답(禪問答)’과 같습니다.
세상이라는 동굴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3차원의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동굴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3차원의 세상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이제 제자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행복,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기쁨,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이제 시몬은 반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무엇을 찾느냐?”
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와서 보아라. (요한 1, 39)
한상우 바오로 신부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만남이 있다.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은
주님과 함께하는
이 순간들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진실 된 생명력이다.
다양한 사연들과
함께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생애에
함께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의 정체성은
함께 머무르는
머무름의 정체성이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힘든 일도
이겨낼 수 있다.
다시금 신앙이란
머무름의 진실 된 관계임을
깨닫는다.
나는
어떠한지를
아프게 보게 된다.
우리의 오늘
또한
주님과 함께하는 오늘이다.
함께하는
머무름은
주님께서 주시는 내적 자유이다.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도망치지 않고
머무르는 것이다.
머무름의 방식을 따른다.
왜 그리스도를 만나야 사랑이 가능해지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첫 두 제자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짧은 복음 안에 요한의 구원관이 다 들어있습니다.
우선 요한에게는 구원자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인도자가 필요합니다.
그 사람이 세례자 요한인데, 마태오 복음에서는 교회라 볼 수 있습니다.
그 인도자는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며 그리스도께로 안내해줍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은 우리 죄를 위해 희생되셔야 하는 구세주를 상징합니다.
요한에게 죄는 ‘사랑하지 못하는 것’, 혹은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안드레아가 베드로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계명을 완성한 것입니다.
요한에게 이 사랑의 계명을 지킴과 복음을 전함은 숫자 ‘10’으로 상징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시간이 “오후 네 시쯤”이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당시 시간으로 ‘열 시’를 ‘오후 네 시’로 옮긴 것입니다.
사랑은 그리스도께 성령을 받음으로써만 완성됩니다.
베드로는 안드레아에게 복음을 전해 받고 시몬에서 케파로 이름이 바뀝니다.
새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도 ‘10’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이렇듯 이제 형제들에게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합니다.
요한은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두려움이 없어야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나의 것을 내어주는 ‘모험’인데, 나의 생존이 걱정된다면 내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어지고 그래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불 밖은 위험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 삶도 두려움에 싸이면 자기 안으로 숨어듭니다.
그러나 밖의 멋진 세상을 구경도 못 하고, 사랑도 못 하며
이불 속에서 불안해하며 살다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그렇게 살기 싫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사망률 1위 스포츠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혹시 안전장치(로프)를 하지 않고 맨몸으로 암벽을 등반하는 스포츠인
프리솔로(클라이밍)을 아십니까?
유튜브에 보면 이런 영상들이 여럿 올라와 있습니다.
로프에 몸을 의지하는 것도 끔찍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맨몸으로 작은 틈, 작은 돌기를 찾아서, 거기에 자신의 몸을 의지하고,
초크가루를 묻힌 손가락 끝으로 암벽에 매달리며, 오르는 클라이밍 방법입니다.
단 한 순간의 실수로 추락할 수 있기에 아주 조금의 방심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암벽 곳곳에는 이들을 절벽에서 추락시킬 많은 위험한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절벽에서 돌출되어 나온 작은 암석 조각, 손톱만 한 크기의 움푹 들어간 홈 등,
중요한 이 홀드들이 암벽등반가들의 몸무게를 지탱해 줄 수 있을 만큼 단단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 절벽 오르기를 할 턱에는 모래와 자갈들이 있어서 손을 미끄러지게 할지도 모릅니다.
날씨도 매우 중요합니다.
산악지형에서 돌풍이라도 불면 손가락에 의지하고 있는 몸이 흔들릴 수 있으며,
소나기라도 지나가면, 암벽이 미끄럽게 됩니다.
물기는 손가락의 땀을 제거하고, 손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초크(하얀가루)의 기능을 마비시킬 수 있습니다.
바위에 손가락을 베이기라도 하면, 절벽 등반을 중지하고,
꼼짝달싹 못 하는 처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2019년 오스카상(장평 다큐멘타리 부문)을 수상했던
프리솔로 등반가 ‘알렉스 호놀드’의 엘카피탄 등반 과정을 보면 오금이 저립니다.
그는 23살 나이에 300m가 넘는 문라이트 버트레스 암벽과 롯데타워보다 높은 기암절벽 하프돔을
프리솔로로 오르기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2017년 6월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있는 유명한 914미터 절벽 엘캐피탄을 도전합니다.
안전장치를 하고도 사고가 자주 나는 악명 높으면서도
최상 등급의 난이도를 넘어서는 오직 손가락 첫 마디만 이용해서 올라야 하는 무서운 곳입니다.
그런데 그 손가락 하나 미끄러지면 한없이 밑으로 떨어져야만 하는
그 시간 동안 호놀드는 전혀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람을 느끼고 새소리를 들으며 평안한 마음으로 등정했다는 것입니다.
보는 사람만 후들후들합니다.
어떻게 죽음의 문턱에서 손가락 몇 개로 버티고 있으면서도 무섭지 않았을까요?
그에겐 안전에 대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떨어질 수 없다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한순간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무려 9년 동안 준비를 하였습니다.
시도하기로 하고는 무려 50차례나 로프 등정을 하며,
루트에 존재하는 홀드들의 위치와 촉감 등을 세세히 살피며 기록하고,
또 그것들을 암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홀드에서 다음 홀드로 이동하기 위한 손동작과 발동작을 시각화(이미지 트레이닝)하며
계속 그 상황을 상상하고 연습했습니다.
등반 하루 전날은 홀드와 턱 등, 손이 닿을 장소들에 있는 모래와 자갈들을 직접 모두 제거했습니다.
그도 프리솔로잉에 대해 큰 공포와 두려움을 가졌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번 등정할 때마다 사고에 대해 생각한다고 합니다.
프리솔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정’인데,
오직 ‘반복과 연습’만이 그런 마음의 평정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리 준비하고, 미리 연습하고 모든 절차를 스스로 완벽하게 하는 것.
이것이 그 극한의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고, 완벽하게 성취해내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어떤 여자 청년은 남자들이 자신을 좋아하면 그들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호감을 느끼는 사람이 떠나가려 하면 불안하고 잡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소유욕입니다. 소유욕은 생존 욕구입니다.
이렇게 생존 욕구를 이기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 놓치고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만 쫓아다니게 만듭니다.
그러다 자신 이불에서 나오지 않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과 머물고자 했던 것은
이런 자신 안에 갇혀있는 그 두려운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잃는 두려움을 무릅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생존 욕구는 그리스도와 머물 때 해결됩니다.
그분이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내일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머물러야 하는 이유는 그런 믿음을 갖는 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호놀드가 로프에 의지해 수없이 연습했기에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며 수 없는 시행착오를 거치며
두려움 없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그리스도와 머무는 시간을 ‘기도’라 합니다.
그분과 함께 머물 줄 알 때 사랑의 계명이 완성됩니다.
사랑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계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과 머물다 보면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분 안에서는 수없이 실패하고 떨어져도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 안에서만 참 사랑이 가능한 이유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사무엘의 성소 장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사무엘서 저자는 사무엘이 태어나기 전에
그의 아버지 엘칸나와 그의 어머니 한나와의 배경을 자세하게 설명 해줍니다.
오랫동안 아기를 낳지 못하던 한나는 하느님의 집에서 기도를 해서
하느님의 도움심으로 사무엘을 임신하고 낳게 되지요.
하느님의 집에 머무는 사제 엘리에게 약속했던 대로 한나는 젖을 떼고 난 후에
어린 사무엘을 사제 엘리 아래에서 두고 하느님의 집에 머물게 합니다.
사무엘 저자는 하느님께서 사무엘을 예언자로 부르시는 대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너무 어려서 하느님께서 두 번이나 부르시는 사실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세 번 째 하느님께서 ‘사무엘아, 사무엘아!’(1사무 3,10)하고 부르실 때
비로소 엘리가 가르쳐 준 말,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0)라고 대답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제야 하시고자 하시려는 뜻을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에서 브에르 세바에 이르기까지
온 이스라엘에서 그의 말이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
이스라엘의 큰 예언자로 만드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서두에 ‘말씀에 대한 찬미’에서
복음의 첫 입문이면서도 전체 내용의 요약이라 할 수 있는 내용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접근하는 공관복음인 마태오, 마르코, 루카와는 달리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먼저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2)라는 말을 제자들에게 합니다.
이집트 땅에서 열 번째 재앙인 사람의 맏배와 동물의 맏배를 모조리 치시겠다는 주님의 계획에서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어린양의 피로써 재앙을 피하여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인 시몬과 안드레아는 스승의 이런 표현을 듣고
그 대상인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따라 오는 것을 보시고 그들이 당신에게서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어 보십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어디에 묵고 계시는 지를 질문하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3)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날 주님께서 묵으시는 곳에 함께 보냈는데 그 때가 오후 네 시쯤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이 시몬 베드로와 동생 안드레아였는데
동생이 형 시몬을 예수님께 안내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시몬을 앞으로 ‘바위’ ‘반석’이라는 뜻인 ‘게파’
번역하면 ‘베드로’로 불릴 것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아직 깨닫지 못하는 시몬을 눈 여겨 보십니다.
시몬 자신도 주님께서 세우시려는 교회의 반석이 되리라고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눈으로 시몬을 반석의 뜻인 ‘베드로’로 보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
세례자 요한의 제자 시몬과 안드레아의 예수님 방문과 주님의 초대,
시몬에 대한 주님의 예견의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소리를 듣습니다.
'저 사람은 참 권위적이야!' 권위를 스스로 가지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있는데,
그 버릇이 오래가고 어떤 이들은 죽을 때까지도 못 버린다고 하데요.
그런데 사실 참다운 권위는 자신이 스스로 세우는 것이 아니고
이웃의 존경과 사랑으로 세워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권위적이셨을까요?
세력이 대단했던 바리사이처럼 율법으로 따지며 손을 씻지 않았다고 해서
제자들을 나무라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동내에 행실이 안 좋다고 평이 나 있는 한 여인이 와서
눈물과 향유와 함께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을 때
주님께서 그 여인에게 발을 내밀고 그대로 두십니다.
그리고 그녀의 정성과 회개를 받아주시지요.(마태 26,6-13; 마르 14,3-9; 요한 12.1-8)
주님께서는 권위 위에 앉으시거나 허세를 부리신 적도 없으십니다.
인간적이고 격의 없으시고 우물가에서 한 여인에게 물을 청하십니다.(요한 4,7)
만나는 이웃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에게도 평화를 주시고 다정한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와서 보아라.”(요한 1,39)라고 말씀하시며 이웃을 초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스스럼도 없으시고 꺼리길 것도 없으실 뿐만 아니라 말과 행동이 같으셨지요.
요한복음은 주님의 거처가 어디인지 또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일정하게 머무시는 거처가 없으시고
당신께서 그날 머무시는 곳이 로 당신의 집이었습니다.
훗날 그 집이란 바로 주님의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어느 공간에 제자를 초대한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삶에 사람들을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오늘 독서를
우리 자신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이며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1코린 6,19-20)
우리는 그리스도의 세례를 통해 이미 초대를 받았고 성령이 머무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는 감사해야하고 정결을 지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남의 부족함에 눈을 돌리지 말고 내 자신의 소중함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성전이 된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남에게 비판적이고 옹졸한 마음을 지닐 것이 아니라
항상 너그럽고 사랑의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적이지 않으시고 항상 이웃을 초대하십니다.
주님처럼 우리도 이제는 이웃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당에서만이 아니라 사는 가정에서 그리고 일터와 공동체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초대하는, 항상 열려있는 마음으로 살 때
오늘 복음이 우리 삶의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의 말대로 그리스도의 지체 중의 하나인 우리는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 안에 일치를 이룰 수 있고
성령께서 머무시는 빛나는 성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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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무엘아, 사무엘아! (서무엘, 서무엘 שְׁמוּאֵ֣ל שְׁמוּאֵ֣ל)’(1사무 3,10).
사무엘 저자는 세 번째에 어린 사무엘의 이름을 두 번이나 겹쳐서 부르신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부르심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문학적 형식이다.
아브라함이 모리야 땅에서 제단을 쌓고 칼을 들어 제물로 아들 이사악을 죽이려 할 때
주님의 천사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라고 다급하게 부르신다.(창세 2,11),
시나이 호렙산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야, 모세야!’라고 부르신다.(탈출 3.4)
교회를 박해하며 다마스쿠스로 가는 사울을 향해 예수님께서 ‘사울아, 사울아’라고 부르신다.(사도 9,4)
2) ‘하느님의 어린양 (암노스 투 테우 Ἀμνὸς τοῦ Θεοῦ; 앙뉴스 데이 Agnus Dei)’은
‘하느님의 종’으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진 속죄’의 의미(이사 53,7)를 담고 있다.
또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맏아들과 동물의 맏배의 생명을 위해
도살당하고 피를 흘리는 파스카의 일 년 된 어린 양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탈출 12,5-6)
세례자 요한이 말하는 ‘하느님의 어린양’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 ‘하느님의 종’을 말한다.
성전에서 제물로 바치는 ‘어린양’에 대한 설명이 있다.(탈출 29,38; 레위 4,32)
3) ‘와서 보아라.’(에륵세스테 카이 옾세스테 Ἔρχεσθε καὶ ὄψεσθε)‘라는 말씀의 표현(1,39)은
초대하시는 말씀이다.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나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주님께서 대답하시는 말씀.
일반적으로 제자들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 스승을 찾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당신의 삶으로 제자들을 초대하시는 것이다.
그들은 직접 주님을 뵙고 지내면서 그분의 신원이 메시아이심을 깨닫게 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