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隱退)
정명숙
공터에 앉아 있는 폐타이어
흙을 품고 있다
지난여름 들풀 속에 뿌리내리고
휠 빠져나간 해어진 몸 안에
들꽃 키운다
가끔 쉬었다 가는 덤프트럭과
굴착기를 반기며
현역으로 굴러다니는
바퀴들의 모험담에 귀를 모은다
구름 만큼 구른 뒤에 찾아온
삶의 여백이 키운 들꽃 자랑에
별이 지는 줄도 모르는 폐타이어
이른 새벽 일터로 굴러가는
바퀴들을 응원하며
겨우내 품고 있던 씨앗들
푸른 잎으로 돋아나길 기다린다
들풀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한계( 限界 )
정명숙
검은 새 한 마리 하늘을 난다
몸 안 가득 겨울바람을 싣고
아파트 숲을 거침없이 날아오른다
숲 너머 파란 구름 위까지
올라가 보라고, 오를 수 있다고
응원했는데
28층 벽에 갇힌
날개 없는 새
허공이 내어 준 내리막길을
바틀 짚으며
도로 위에 내려앉는다
여정을 함께했던 바람도
무심히 제 길 가고
한때 새가 되어 날갯짓하던
검은 비닐봉지 하나,
푸른 꿈 가슴에 접은 채
바퀴에 감겨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다.
시집 『그 많은 인연의 어미는 누구인가 』 2024 글나무
정명숙 시인
- 춘천교육대학교 졸업
- 2006년 <문학마을> 신인상 수상
- 시집 『섬이 바다에 머무는 것은 』, 『그 많은 인연의 어미는 누구인가』가 있음
- 2018년, 2024년 강원문화재단 전문예술 문학창작 지원금을 받음
- 현재 강원문인협회 이사. 설악문우회 <갈뫼>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