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2024. 2. 17. 토요일.
서울 최고온도 10도, 최저온도 영하 1도.
아직은 2월 중순인데도 봄날씨처럼 포근했다.
밤중에 <한국국보문학카페> '등단 시인방'에서 '무봉 김도성' 회원의 시를 읽었다.
'겨울 안방 풍경'
.......
비릿한 *게국지 밥상 위에
주둥이 깨진 사기 술병
손바닥 주름같이 금이 간 사발에
시름을 채워 마신다
* 게국지 : 서산지방 토속 음식
내가 댓글 달았고, 여기에 올려서 내 글감으로 삼는다.
안방, 아랫목, 메뚜기, 등잔, 바늘, 양말, 군담요, 술, 항아리, 막걸리, 지게미, 게국지, 조롱박, 술병, 금이 간 사발, 항아리, 울안, 홍매화, 손바닥, 주름 등.
오래 전, 예전 시골에서 쓰던 토박이말이 잔뜩 들어 있군요.
위 글을 읽으면서 저는 1950년대, 60년대의 시골마을을 떠올립니다.
술을 빚었고, 텁텁한 막걸리를 배달받아서 일꾼들한테 권했고, 시골 잔치상에 오르고.
게로 담는 게국지 국물을 떠먹고....
갯바다에 걸어서 다녔는데.... 60여 년이 흐른 지금,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제 시골집은 텅 비어 있고,
옛 문화가 거의 다 사라졌지요.
강물과 서해 바닷물이 맞닿은 강하구에는 여러 종류의 게들이 많았지요.
지금은 모두 간척지로 개발되어 바닷물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높은 부사방조제로 막았고,
다양한 바닷게 종류도 사라졌지요.
충남 보령시 무창포해수욕장, 용머리해수욕장, 대천해수욕장 등의 갯바다에서 게를 잡았는데
이제는 모두 꿈속인 것 같군요.
게국지 그거 한번 먹고 싶군요.
글맛 좋아서 엄지 척!
글 또 기다립니다.
올봄에 충남 당진, 서산, 태안, 홍성, 보령, 서천 등의 바닷가를 에둘러야겠습니다.
'서산 게국지'에 대한 자료를 검색한다.
1) 오래전부터 서산지방 사람들이 김장을 담글 때면 게를 담아 두었던 간장 또는 젓국물에 소금에 살짝 절인 배추와 열무를 넣어 삭힌 게국지를 만들어 먹는다.
오래 묵힌 김치를 묵은지라 하듯 게국물에 담은 김치를 게국지라고 한다.
김장 재료와 함께 게, 박하지, 능쟁이 등을 잘게 찢거나 절구에 찧어 넣고 호박과 양파, 마늘, 고춧가루 등의 재료를 함께 버무려 항아리에 담아 두었다가 간이 배어 맛이 나기 시작하면 투가리에 넣고 지져 먹는 김치가 게국지이다.
김치가 익었을 때 더욱 구수하고 담백한 맛이 나는데 김치에 각가지 생선이 들어가므로 단백질과 무기질을 그대로 섭취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2) 충남의 향토 음식으로, 게를 손질하여 묵은지 김치와 함께 끓여 내는 음식이다.
게국지는 게를 넣기보다는 겨울내내 먹고남은 게장의 간장과 봄철 김장김치가 떨어질 때 쯤 김치대용으로 먹던 봄동과 얼갈이배추가 쉬게 되면 같이 끓여낸 것이다. 고춧가루가 들어간 꽃게탕같은 색깔이 아닌 간장을 연하게 끓인 연한 커피색이 난다.
능쟁이 : 진흙 갯뻘에서 사는 작은 게
자료와 사진은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용서해 주실 게다.
사진에 마우스를 대고 누르면 사진이 크게 보인다.
2.
나는 1949년 1월 말쯤에서 태어났으니 2024년 2월인 지금은 만75살이다.
서해안 산골 아래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고, 어린시절에는 산골 아래로 흐르는 또랑을 따라서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면 웅천천 강물과 바닷물이 합쳐지는 노천리, 사그네 등에 갈 수 있었다.
진흙뻘밭에는 작은 게(칠게 등)들이 엄청나게 많았고, 강물 속에서 백합, 참조개(대합)도 잡았다.
서쪽바다로 나가면 무챙이(지금은 충남 보령시 웅천읍 관동리 무창포해수욕장)로 걸어서 갯바다로 가서 큼직한 돌멩이를 떠들어서 박하지, 돌쨍이 등 작은 게를 잡았다. 북쪽으로는 남포면 용머리 갯바다가 있어서 갯것을 잡았다. 큰외삼촌네 바로 뒷편은 갯바다.
더 멀리는 대천해수욕장으로 걸어다녔다.
시내버스가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걸어서 다녔다.
머나먼 거리를 단축하려고 산 넘어로, 산길로, 들판을 가로질러서 다녔다.
수십 년이 지난 2020년대인 지금.... 내 고향마을은 쓸쓸하기만 하다.
농공단지, 서해안고속도로 무창포나들목(톨게이트), 최근에는 일반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산골 아래의 논과 야산은 대부분 사라졌다.
바닷물이 밀물되어 오르면 갯물이 내륙으로 밀려들어왔기에 시냇물이 흐르는 곳에는 바닷가의 어류, 게 등이 무척이나 많이도 들락거렸다. 내가 사는 화망마을 뒷산 중턱까지 바닷 생물들이 올라왔다.
하지만 토지가 연거푸 개발되면서 시냇물, 강물, 바다의 어류, 게 등은 깡그리 사라졌다.
토지개발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 도회지인 대전으로 전학가서 11년간이나 살았고, 서울에서 4년간 대학 다녔고, 직장은 서울 용산구 삼각직에서 30년 넘게 다녔다. 나는 어느새 도시문화에 길들여졌으며, 어린시절, 초등학교 시절에 체험했던 경험들이 이제는 꿈인 양한다.
더우기 지금은 나이가 많아서....
지나간 시절을 생각하면 은근히 서럽고 슬프다. 결코 되돌아갈 수 있는 과거이기에.
나는 정년퇴직한 뒤에서야 고향에 내려가서 어머니와 함께 둘이서 살기 시작했다.
섣달 그믐이 생일인 어머니는 집나이 아흔살에도 혼자서 그 크나큰 집에서 사셨다.
내가 수십년만에 고향에 가서 어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에는 어머니는 너무나 늙었고, 치매기가 진행 중이었고, 집나이 아흔일곱살(만나이 95살)이 된 지 며칠 뒤에 저너머 세상으로 가셨다.
어머니는 아들 셋을 두었으나 큰아들은 세 살 때 옴병 걸려서 죽었고, 쌍둥이었던 셋째 아들은 만20살 때 뱀 물려서 다음날에 죽었고.... 어머니한테는 아들이라고는 나 하나뿐이었다.
내가 늙어서야 정년퇴직한 뒤에서야 고향에 내려가서 살기 시작했으니... 혼자서 살던 어머니는 너무나 폭싹 늙었고, 더우기 치매에 걸려서 ....
내 어머니는 시골생활을 고집하셨고 ....
나는 무척이나 나쁜 불효자이다.
이제는 어머니가 없는 시골이 되었기에 나 혼자서 살기가 뭐해서 서울로 되올라왔다.
서울에서는 그 옛날 내가 경험했던 옛일이나 떠올린다.
내가 기억하는 70년 전인 1950년대, 60년 전인 1960년대, 50년 전인 1970년대의 저너머의 세상은 마치 꿈속인 것 같다.
나중에 보탠다.
많은 기억들이 대부분 사라졌고....
2024. 2. 17. 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