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문인들은 활동적인 취미보다는 음주 바둑 화투 포커 등 앉아서 즐기는 오락을 선호한다. 야외 여가활동도 여행이나 등산보다는 한자리에 앉아서 즐기는 낚시를 좋아한다. 성격도 대부분 정적(靜的)인데다가 일찍부터 앉아서 책을 읽고 글을 써온 습관에서 비롯된 취향이다. 60~70년대에는 바둑을 즐기는 문인들이 요즘보다 훨씬 많았는데, 각자 단골 기원이 있어서 신문사나 잡지사 기자들이 기원으로 찾아와 청탁한 원고를 받아가는 사례가 많았다. 며칠씩 기원에 죽치고 앉아 내기바둑을 두는 문인들도 더러 있었다. 명동이 문인들의 아지트이던 시절, 기원도 명동에 있는 송원기원을 가장 많이 찾았다.
송원기원은 해방 전 왜국에서 프로기사로 활동하다 귀국한 조남철 선생이 잠시 한국바둑의 산실로 이용한 곳이기도 하다. 등에 바둑판을 짊어지고 다니며 바둑 보급에 힘을 기울이던 조남철은 송원기원 한구석을 빌려 한성기원을 설립했다. 한성기원은 조선기원 대한기원을 거쳐 현재는 재단법인 한국기원으로 발전하여 프로바둑을 이끌고 있다. 조남철은 찾아오는 청년들에게 무료로 바둑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바둑 입문서 「위기개론(圍碁槪論)」을 발간하기도 하는 등 바둑 불모지에서 혈혈단신 현대바둑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김인 조치훈 조훈현의 왜국 바둑유학을 주선하기도 했다.
송원기원의 단골 문인은 시인 김수영 김윤성 박봉우 박재삼 신경림 신동문 이근배 최백산 등이었고, 소설가로는 이종환이 가장 자주 들락거렸다. 소설가 오영수와 평론가 조연현도 대단한 애기가였지만, 업무가 바쁘다보니 기원에서 죽치기보다는 함께 창간한 월간 『現代文學』 사무실에서 친한 벗들을 불러 한두 시간 정도 수담을 즐기곤 했다. 이들은 실력도 5급 정도의 수준이라 내기바둑과는 거리가 멀었다. 문인 전체가 300명 남짓한 시절이다 보니 그 가운데서 바둑을 두는 문인들끼리는 더 빨리 친해지기도 했다.
바둑이 끝나면 일행은 자연스럽게 대폿집으로 향했다. 애기가 문인들의 단골 대폿집은 송원기원 건너편 골목 안에 있는 쌍과부집이었다. 옥호만으로도 남정네들의 발길을 끌어 모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6‧25전쟁 직후에는 전국 어딜 가나 과부가 흔해 그 집도 과부 자매가 운영했는데, 홍어회와 홍어무침 솜씨가 일품이라 늘 빈자리가 없었다. 40대인 언니와 30대인 동생은 키도 늘씬하고 몸매도 낭창낭창 한데다가 얼굴까지 곱상하다보니 군침을 흘리는 문인들이 꽤나 많았다. 필시 스캔들도 적잖이 일어났을 터인데, 그쪽으로는 도통 흥이 없는지 저자 이유식은 상열지사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조차 없다.
1970년대에는 관철동에 한국기원이 들어서면서 문인 애기가들도 일제히 관철동으로 아지트를 옮겼다. 한국문인협회 주최로 해마다 한국기원에서 전국문인바둑대회를 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現代文學』社와 『映畵藝術』社가 합작하여 문인들과 영화인들 간에 정기적으로 바둑대회를 벌이기도 했다. 문인과 영화인 대결에서는 시인 이인석과 극작가 조남사가 해마다 자웅을 겨루었다. 그 밖에 시인 박재삼 신동문 이근배, 소설가 송영 등도 소문난 고수였다.
1976년에는 소설가 천승세가 종로구 청진동에 한돌기원을 차려 문인들의 아지트가 하나 더 늘었다. 부근에 잡지사와 출판사가 밀집해 있는데다 청진동해장국집을 비롯하여 값싼 대폿집들도 많다보니 자연스럽게 문인들의 발길이 잦았다. 소설가 김원일 방영웅 송영 이문구 이호철 조선작 황석영, 시인 신경림 이근배 황명걸, 평론가 구중서 등이 자주 찾아왔다. 그러나 문인들이 벌이는 사업이 다 그렇듯이, 천승세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1980년대로 접어들자 『文學과 知性』社에서 해마다 ‘작가 대 평론가 신춘대국’을 마련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1983년에는 한국기원 주최로 문인친선바둑대회가 열려 오랜만에 문인들이 대거 관철동으로 몰려들기도 했다. 제1회 대회에서는 충남대 교수인 평론가 김병욱이, 당연히 1등은 자기 차지인 줄 알고 있던 시인 신동문을 꺾어 파란을 일으켰다. 이때 소설가 가운데 최고수인 이문열도 대전에서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대전 바둑이 문단을 접수했다는 우스개가 나돌기도 했다. 이문열은 올라오자마자 문단의 바둑 고수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바둑대회를 개최,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1992년에는 한국소설가협회에서 소설기왕전을 개최했는데, 예상대로 이문열이 초대 기왕 자리를 널름 차지했다. 밀리언셀러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이 이문열과 쌍벽을 이뤘다. 1993년에도 이문열이 우승을 차지하여 ‘공포의 3급’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접바둑제도에서 이따금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때는 소설가 김원일과 영화감독 이창동이 새로운 고수로 이름을 알렸다. 이창동은 영화 《초록물고기》《박하사탕》《오아시스》 등 수준 높은 작품을 남긴 뒤, 노무현 정부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을 역임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밀양》과 《시》라는 영화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치사하게 급수를 낮춰 매번 우승을 차지하는 이문열의 독식이 이어지자 대회는 점점 시들해져 결국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문열의 칼럼을 재론하기가 저어되기는 하지만, 그는 지난번 5차 촛불집회를 가리켜 ‘아리랑축전처럼 섬뜩했다’고 표현했다. 100만 군중이 7시가 되자 일제히 촛불을 끄는 장엄한 질서를 평양 능라도스타디움에 강제로 동원된 10만 군중에 비견한 것이다. 이런 얼치기가 우익을 대표하는 보수논객이라는 건 불행한 일이다. 이런 자들은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태백산맥」의 염상구처럼 완장을 차고 설쳐대며 수많은 무고한 국민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댈 것이다. 7시 소등은 박근혜가 ‘세월호 7시간’ 동안 뭘 했는지 밝히라는 국민들의 자발적인 추궁이다. 이문열이 국민들의 준엄한 추궁을 폄하하자 미국대사관이 답변을 대신했다. 12월 3일 벌어진 6차 촛불집회 때, 오후 7시가 되자 미국대사관도 소등에 동참하여 한국 국민들의 박근혜 퇴진운동에 동조한 것이다.
비록 짠돌이 이문열에게 두석 점을 접어주고 지기는 했지만, 신동문과 이근배는 진정한 고수여서 한국기원으로부터 신동문은 아마5단, 이근배는 아마4단의 단증을 받았다. 산문 필력이 소설가나 수필가 못잖은 시인 박재삼은 서울신문에 고정으로 바둑 관전기를 썼는데, 그 역시 한국기원으로부터 아마 4단의 단증을 받았다. 이 밖에도 문인 가운데 바둑 고수가 더 있을 법도 한데, 책을 쓴 이유식의 기력이 고작 10급이라니 기대하는 게 무리일 듯. 문인으로, 애기가로 일세를 풍미하던 조연현 이인석 오영수 신동문 박재삼 등은 바둑판 대신 칠성판을 짊어지고 일찌감치 저승으로 떠났다.
첫댓글 나는 그 7시간이 하나 안 궁금한데...
다들 궁금하다 하니...이를 우야노~~
또 알아서 말라꼬...
저들은 남에게 내 보이기 싫은 비밀 시간이 없든가?
다른 건 몰라도,
그 7시간만큼은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일세.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