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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과 적백내전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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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 러시아의 대략적인 한인 정책
제정 러시아는 1917년 2월 혁명으로 붕괴될 때까지 일제 침략자와 같이 한국인들에 대한 말살 정책을 펼친 적이 없었기 때문에,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 이후 벌어진 러시아내전에서 러시아령 거주 한국인의 상당수도 러일전쟁 때부터 같은 편이었던 백파(白軍)와 차르정부를 지지하였다.
1921년 6월 28일 벌어진 자유시 사건(자유시 참변)의 원인 중 하나도 한인들이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이후 볼셰비키(적군, 赤軍)을 지지하였는지 아니면 백파를 한 때 지지하였는지를 놓고도 심각한 대립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영상 : 닥터 지바고 (특정 유튜버 홍보 목적은 없습니다. ㅎㅎ)
https://youtu.be/1Phjz3zyo14?si=3wKiLAjC2srsEBga
1917년 10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이후의 한인 사회
1917년까지 한인 사회는 이미 러시아 연해주 전지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은 러시아와 세계뿐만이 아니라 고려인과 연해주, 만주 거주 고려인들에게 심각한 변화를 가져왔다.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군주제가 폐지되는 혁명이 발생한데 이어.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으로 불려지는 공산혁명이 발생하여 레닌 등 공산주의자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적군과 백군으로 나뉜 러시아는 1917년부터 1923년까지 유럽, 극동, 몽골 등에서 내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과정에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1917년 12월경부터 만주지방의 대도회중 하나인 하르빈에서 중국 정부와 백파 러시아 장군이 볼셰비키 세력을 단속하기 시작하였다.
내전기간 동안 대부분의 한국인은 볼셰비키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물론 러시아 정교회를 믿던 한국계나 제정 러시아의 교육을 받은 한국인들 중에는 러시아 백파(白波)를 지지하는 한국인들도 다수 있었다.
그러나 백파가 러시아에 간섭한 외세중 특히 일제와 함께 한국계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자 대놓고 백파를 지지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새로운 사회주의 사상의 등장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이후 러시아 중부와 극동에서 볼셰비키들(공산주의자들)은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의 평등, 형제애, 자유라는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사상(공산주의)으로 권력을 잡았다.
이러한 공산주의는 즉시 일제와 그들을 피해 만주, 시베리아에 머물던 한국 젊은이들을 사로 잡았고, 이미 1918년경 러시아령 연해주와 아무르주에는 다양한 한국인 무장 조직이 출현하여, 모국 독립, 일제와 친일파 타도를 목적으로 하였다.
당시 일제의 한민족 말살정책을 반대하고 약소 민족과 억압받는 자의 해방을 부르짖는 최초의 공산혁명에 동조하지 않고,
한인 사회가 다른 입장을 취하거나 러시아 내전에서 중립을 유지한다면 매우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레닌과 볼셰비키의 약속
레닌으로 대표되는 볼셰비키는 소수 민족과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차별을 종식하겠다고 입으로는 분명 약속했다.
한국인은 러시아 시베리아 접경지역의 민족으로 항상 본심에서는 연해주와 만주·간도는 아주 먼 옛날 자기 조상들의 고향으로, 심지어 강조차도 러시아나 중국의 명칭이 아닌 “까망강, 까만강(黑水)”이라고 부르며 삼국시대에나 쓰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한민족의 자세를 이해하는 일제, 중국, 만주 친일파, 러시아 당국은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볼셰비키는 무인지경의 광활한 연해주와 시베리아의 땅을 대지주가 아닌 가난한 한국인 소농(小農)에게도 균등하게 나누기를 원했다.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볼셰비키의 연합 이유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토지약탈, 노동력 착취, 강제징용, 정신대, 위안부 강제동원 등을 통한 민족 말살(몰살) 정책의 희생자였다.
러시아 극동(원동) 지역에서 볼셰비키의 적은 백파와 동맹자인 일본 침략군이었으며, 이는 볼셰비키와 한국인들을 공동의 적을 가진 동지로 만들었다.
특히 북경의 친일파외에도 장작림으로 대표되는 친일파가 서서히 득세를 하고 있던 만주와는 달리, 국적을 따지지 않는 볼셰비키 이념을 한국인들을 큰 열의를 가지고 받아 들였다.
나아가 토지의 균등분배와 생존권 보장은 볼셰비키 세력이 미치는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의 열망과 일치하였다.
새로운 이념이 등장한 혁명
이것은 한국 역사상 농업의 시작, 청동기의 전래, 새로운 기술의 전래, 다른 민족의 도래, 철기의 전래, 불교의 전래, 유교의 전래, 산업혁명, 각종 법과 제도의 정비를 가져왔던 역사시대에 기록된 것과 같은 새로운 혁명의 시작이었다.
과거 러시아 영토에서 한국인은 이러한 이상적인 사회정의와 원칙에 따라 토지를 획득하거나 재산를 획득한 적이 없었고,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국가적 이념 아래에서 노동자로 일한 적도 없었다.
연해주에서의 무장 독립운동의 시작
볼셰비키에 한국인들은 당연히 협력하였으나, 러시아에서는 1917년경부터 일본과 미국·영국·유럽 등 연합국의 간섭이 계속되었고, 내전과 대기근은 러시아 혁명기의 사회혼란을 가중시켰고,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혹은 자본주의, 일본 제국제주의, 러시아 제정 왕조 등의 이념에 따라 시베리아에서 싸움을 벌였고,
거의 대부분의 한국계는 일제와 협조한 콜차크 등 백파와 대립하게 된 것이었다.
이것이 연해주에서의 한국 무장 독립운동의 시작이었다.
1918년 4월~5월경 이동휘, 박진순 등이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
볼셰비키 혁명 시기 연해주의 혼란상
청일전쟁(1894~1895), 의화단 사건(1899~1901) 기간 러시아의 만주 침략, 러일전쟁(1904~1905) 등으로 만주에서는 마적떼가 들끓고 「폭력과 주먹 센 놈이 법인 시대」가 전개되자 한국인의 러시아 이주는 가속되었다.
러시아에서 1917년 2월 혁명과 10월의 레닌 등에 의한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령 시베리아는
「러시아계 친일파, 볼셰비키, 멘셰비키(меньшевики), 사회주의혁명당(Партия социалистов-революционеров. 고려인은 「에세리당」 이라고 부름), 무정부주의자, 입헌민주당(Конституционная 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시베리아 자치파, 볼셰비키군(붉은 군대와 여러 지지자들로 구성된 군대), 백군」
등의 약육강식의 혼란 시대가 도래하였고,
거기에 체코 군단의 반란과 일본의 시베리아·만주 침략, 14개국 연합군의 시베리아 침략 등의 무력 간섭, 러시아 대기근이라는 식량부족 사태가 겹쳐져 대량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실로 과거에 경험하기 힘든 대흉년의 시기였다.
일제의 친일파 양성 목적
1918년 2월경부터 일제는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던 아무르주 블라가베셴스크의 일본 거류민들을 중심으로 의용 자경단을 조직하여 백파(반혁명세력)를 지원하기 시작하자,
한국인들이 누구를 지원해야 하는 지는 분명해지기 시작하였다.
백파와 러시아계 친일파를 지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일제의 본심은
시베리아·만주·사할린·쿠릴열도 등의 영구 점령이었으며, 이르쿠츠크까지 점령하고, 콜차크의 백파가 시베리아 지역을 한 때 장악하자 그들에 협조하는 러시아인과 중국인·조선인 등도 많았다.
러시아령의 한인사회도 백파 지지자들과 볼셰비키 지지자 등으로 분열되었다가, 백파가 일제 침략자와 작당하자, 일제에 대한 적대감이 큰 한인사회는 더 이상 백파를 지원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1918년 볼셰비키의 곤란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 직후에도 식량 문제인 「빵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러시아의 1차 세계대전 참전이 계속되었고, 볼셰비키 정부도 자본가·귀족 계급의 대토지와 재산을 무상몰수, 균등분배, 무상분배, 평등한 생존권, 공정한 기회 보장과 같은 공산주의 이념에 부합하는 개혁을 이룩하지 못하자 반볼셰비키 진영은 레닌정부의 약점을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1918년 1월 12일 일본 군함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하였다.
볼셰비키와 독일의 타협, 러시아의 1차 세계대전 철수
1918년 3월 3일 레닌의 볼셰비키 정부는 전쟁중이었던 독일과 휴전 및 영토일부 할양을 포함하는 브레스트 조약을 맺었고 3월 15일 조약이 비준되자, 러시아는 1차 세계대전에서 철수하였다.
1차 세계대전에 연합군의 중요한 일원이었던 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 성공 이후 독일과의 사실상 평화조약을 맺고, 독일 등에게 영토할양과 이익을 보장하자,
러시아내에서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은 러시아의 영토상실과 배상금 등으로 러시아의 권리가 침해된 것으로 느끼기 시작하였다.
1918년 반볼셰비키 운동과 러시아 내전 발발
이들은 외국의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캐나다 등의 지원을 받아 반볼셰비키 운동을 강화하기 시작한다.
1차 세계대전 참전 후유증을 전혀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경작지는 급감하였다.
볼셰비키 정부는 1918년 여름부터 당면한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일부 토지의 재분배와 식량 조달계획을 시행하자 러시아 전역에서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운동이 격화되었다.
연합군들의 러시아 간섭 전쟁
연합국들은 러시아가 1차 세계대전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사할린주·흑해 등의 유전·광산·산림·공장·농장 등의 국유화, 러시아내 외국인 재산 국유화, 차르 정부의 외국 채무 승계 거부 등으로 경제적 손해까지 발생하자,
볼셰비키의 이러한 행동을 세계 공산화 방지 등을 위해서 러시아 내전에 간섭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연합국들의 러시아 서부 무르만스크 점령
1918년 3월 6일 영국군, 프랑스군이 러시아 서부지역의 중요 항구인 무르만스크에 도착하였고 미국 윌슨 대통령은 러시아의 1차 세계대전 참전을 도울 수 있다고 발표하자 러시아는 식량과 무기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연합국은 곧 무르만스크를 점령하였다.
러시아 내부의 볼셰비키 적대 세력(백파)과 연합군에 의해 러시아 내전 간섭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국, 영국, 프랑스는 당장 프랑스와 독일 국경지역의 서부전선에 배치된 군대를 러시아 백파를 지원하기 위해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니항,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캄챠카, 이만, 하바로프스크, 블라가베셴스크, 치타, 이르쿠츠크, 만주 하르빈, 동청철도 등의 동시베리아 지역에 동원할 수는 없었다.
연합국들이 러시아 내전에 일본이 참전하도록 요청
그들은 1918년 3월 15일경 연합국의 일원이었고 동지였던 일본, 중국 등에 러시아 간섭 전쟁 참전을 요청하였다.
일제의 시베리아 침략 개시
일제는 청일전쟁 무렵부터 만주와 시베리아, 사할린주 일대에 시마다 모토타로를 비롯한 수천여명 이상의 간첩들을 보내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자 극동을 점령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였고, 1918년 4월 5일 일제(日帝) 시베리아 침략군(일본의 용어로는 「시베리아 출정군」)의 시베리아 파견 선발대 1백여명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했다.
1918년 5월경 일본 군함들이 아무르강 하구에 정박하여 볼셰비키가 장악하고 있던 니콜라예프스크(尼港, Николаевск, 니항)을 위협하였다.
(※ 니항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르쿠츠크파 김낙현이 쓴 「파르티잔의 수기」에 나오는 내용이며 수기는 1967년경 쓰여져 니항 사건의 순서가 틀리는 부분이 있다. 김낙현은 니항사건의 「안드레예브」를 진실한 공산주의 혁명가로 묘사하고, 이지택, 박병길은 영웅으로 묘사하지만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측 기록과 대조하면 대부분 허위다.)
중화민국과 일본의 연합
1918년 5월 16일경에서 ~ 5월 19일 사이 중화민국 정부와 일본간에 독일·오스트리아 등 공동의 적에 대응하기 위해 공동 군사협정이 체결된다.
체코 군단의 반볼셰비키 반란
1918년 5월 26일경 볼셰비키가 무장해제 시킨후 대륙횡단철도를 통해 블라디보스토크을 통해 프랑스로 귀국시키려고 시도하였던 체코군이 반란을 일으켜 첼랴빈스크를 점령하였다.
체코군의 반란은 시베리아 지역과 볼가강 지역에서 반볼셰비키 세력인 약칭 「백군(백파)」의 통합에 기여하였다.
1918년 6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의 볼셰비키들이 체코군과 백파의 공격으로 전복되었다.
체코군단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체코로 귀국하면서, 한국 독립군들에게 무기를 팔고 떠나 독립운동에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연합군의 러시아 적백내전 간섭과 블라디보스토크 점령
1918년 8월경에는 일본군(시베리아에 많을 때는 약 7만 3천여명)과, 미국군 약 5천명(나중에는 증원되어 약 9천여명), 영국군 8백여명, 이탈리아군 1천4백여명, 1백여명의 프랑스군 등의 연합군이 대륙횡단철도로 귀국하려는 체코군단을 구원하고 러시아내전에 간섭하기 위해 두만강 너머의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항(해삼항) 점령하였다.
중화민국 북경정부 소속 군대도 러시아 내전 간섭에 참가하였다.
(※러시아내 거주 다수의 중국인들은 볼셰비키 측에도 가담하였다.)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처형
1918년 7월 16일에서 ~ 7월 17일경 볼셰비키 지지자에 의해 예까쩨린부르크에서 러시아 전황제 니콜라이 2세가 가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적군과 백군 모두 피에 대한 보복을 주저하지 않고 있었다.
볼셰비키도 대대적으로 병력을 모집하였다.
일본군의 사할린주 니콜라예프스크(니항) 점령
일본군은 1918년 8월 2일경 연합군의 시베리아 출병 목적과는 별 관련이 없는 교통·어업·광업의 중심지였던 아무르강(흑룡강) 하류의 니항(니콜라예프스크)을 공격하여 무력으로 점령하였다.
1918년 9월 5일경 러시아 동시베리아의 대도회 하바로프스크(Хабаровск)도 일본군이 점령하였다.
1918년 9월경에는 러시아 백파와 연합한 일본군의 선봉부대가 치타에 도달해 볼셰비키를 제거하기 시작한다.
일본군은 결국 바이칼 호수 좌측의 이르쿠츠크까지 진군한다.
1920년 7월경 자바이칼 지방에 주둔한 일본군만 약 3만여명이었다. 콜차크가 죽은 후 일본군은 1920년 10월경 치타 및 자바이칼 지방에서 철군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료
제1차 세계대전(1914년~1919년)이 일본, 미국, 영국 등 연합군의 승리로 1918년 11월 11일경 종료되었다.
일본군의 연해주·아무르주 침략과 대규모 민간인 학살
시베리아 대륙횡단 철로, 아무르강, 만주와 하르빈을 등을 경유하여 시베리아 침략에 나선 일본군에 의해 아무르주도 공격을 받는다.
1919년 1월 11일경 일본군이 아무르주 마자나바(※ 독립운동관련 자료에는 마사노프, 마자노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러시아어의 발음법칙 때문이다.) 일대에서 어린이, 여자, 농민 등 포함한 대피하지 못한 사람 300여명 이상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웠다.
당시 마자나바 마을은 중심지가 불타 주민들은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으로 대피해야 했으며,
일본군 철수후에도 파괴된 마을이 복구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도 마자나바 학살 현장은 위령비를 중심으로 한적한 농촌이다.
러시아 간섭전쟁과 내전으로 인한 대기근 발생
1919년 1월경 볼셰비키에 의해 러시아 전역에서 농민들의 남은 식량을 고정가격으로 압수하는 제도가 시행되었으나, 하이퍼 인플레이션 시대에 이것은 몰수를 의미하였다.
볼셰비키에 의한 강제적인 식량 분배 정책에도 불구하고 일부지역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아사자까지 발생하였고, 내전으로 인한 경작지 감소로 농민들도 식량이 몰수되면 굶주리고 파멸되는 경우가 있었다.
일본군의 하바로프스크, 우수리스크, 블라가베셴스크, 자유시, 이바나프카 일대 민간인 학살
일본군은 동시베리아 지역 대륙횡단 철도, 만주 동청철도, 아무르강 등을 따라 교통 요충지들과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간도 토벌 때부터 이어지는 일본군의 주요 목표는 시베리아의 영구 점령과 특히 한국계 항일 세력의 몰살이었다.
1919년 3월까지 일본군은 아무르주 이바나프카(Ивановка, 이바나프카에서는 수차례 학살을 감행), 마자나바 일대에서만 공산주의 동조하는 마을을 파괴하라는 지시에 따라 900명 이상을 학살하고, 30여명을 산채로 불태웠다.
그러나 아무르강 하류의 니항의 일본군은 1920년 3월 12일 트리피츤의 파르티잔 부대를 공격했다가 반격을 받고 전멸하였다. (니항사건)
일본은 니항의 일본 수비대가 전멸한 후 1920년 4월경부터 연해주 일대에서 대규모 민간인 학살극을 자행하고 1920년 4월 22일경 사할린섬 북부와 유전 등을 추가 점령을 하였다.
(※1922년 10월 25일경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 1924년부터 사할린섬 북부에 대한 협상이 시작되어 1925년 소련·일본간 국교 수립시 사할린섬 북부를 반환하였고.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후 사할린 섬 남부와 주변 섬들도 소련에 양도하였다.)
동시베리아 아무르주 자유시와 블라가베셴스크 일대의 내전
러시아령에서 1921. 6. 28. 자유시 사건 직전 독립 운동가들의 분열 원인중 하나는
내전·대기근·외세침략이 겹쳐진 볼셰비키의 한국계에 대한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었던 정책 때문이다.
아무르주 일대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 1918년 1월부터 볼셰비키가 득세하였으나. 1918년 9월경 일제와 백파의 공격으로 붕괴되었다.
극동의 대도회 하바로프스크도 1918년 8월~9월경에 백파가 점령하였다.
1920년 초반까지 블라가베셴스크와 자유시 일대는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과 친일 백파 괴뢰정부의 손바닥에 있었다.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이 무렵 차르 러시아 장교였던 오하묵이 볼셰비키에 가담하여 전설적인 활약을 하였다고 하는데 오하묵이 어디에서 어느 정도의 활약을 했는지 확인하기 힘들며, 일본군 측 기록과 한국·중국·미국(뉴욕타임즈 신문) 등의 신문 보도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아 무렵의 주요 반일 사건 등은 미국 뉴욕시에서 발행되었던 「뉴욕타임스」라는 신문에도 자주 보도되었다.)
파르티잔 부대들은 교섭과 전투를 통해 1920년초 자유시와 블라가베셴스크 일대를 탈환한다.
이후 극동공화국이 수립되자 극동공화국의 영역이 되었다.
한국계 독립운동 부대들과 피난민들이 아무르주의 주도(州都)인 블라가베셴스크 보다 더 안전한 자유시(스바보드니) 일대로 피난하기도 하였는데, 아무르 강변에 위치한 블라가베셴스크는 중국령 흑하시와 마주보고 있고,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과 백파군은 친일파가 장악한 만주 혹은 아무르강을 따라 쉽게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동휘 선생의 연해주·만주·간도에서의 독립운동
독립운동가 이동휘는 볼셰비키와 손을 잡고 1918년 초 노령에서 한인사회당을 창설하였으며, 그 때부터 레닌과 관계가 있었다.
이동휘는 1995년 한국에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을 때에도 논란이 많았으나, 독립운동사에서는 상해임시정부, 연해주, 만주, 간도, 러시아 본토, 국내 등지에서 이동휘의 독립투쟁만큼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동휘는 구한국의 무관 출신으로 일찍이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걱정하다가. 1906년 군대를 사직하고 교육과 대한자강회 등의 활동에 힘썼다.
일제가 침략하자,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되었다가 1912년경 북간도로 탈출하였다.
1913년경에는 로령 연해주로 이주하여 군사학교를 설립을 추진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간도 왕청현 나자구 일대로 이동하여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이 때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구춘선, 김규면, 이용, 계봉우, 임병극, 홍범도, 이범윤, 장재관, 신채호, 한형권 등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1916년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이리저리 피난하였다.
1917년 10월초 러시아 무산혁명 발생으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였다.
1918년 4월경 하바로프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 김규면, 김립, 류동열, 리인섭 등과 한인사회당이란 정당을 만들어 볼셰비키를 지지하고 독립전쟁에 나섰다.
같은 해 크라스나쇼코프 등과 한국인 독립군 부대를 조직하여 일제·백파와의 전쟁에 가담하였다.
1918. 9월경 일본군이 시베리아 하바로프스크를 점령하자, 다수의 독립운동가들과 피난을 떠나거나 숨어서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이동휘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 3·1운동이 발생하자, 연해주·만주·간도 일대에도 독립 운동이 활발해졌다.
1919년 8월 이동휘는 김립과 같이 상해에 도착하여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가 되었다.
1920년 모스크바에 열렸던 제2차 제3국제 공산당 회의에 한인사회당이 참석하여 승인되었다.
이 무렵 이동휘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좌익·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의 거목으로 평가되기 시작한다.
이르쿠츠크파, 일부 민족주의자 등과 대립하여 다툼이 있었고. 1921년 6월 독립운동사의 비극이었던 자유시 참변으로 지원하던 사할린부대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기도 하였으나, 이후에도 연해주·만주 일대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 출처 : 이영일저, 「이동휘 선생」, 1981. 8. 1.)
1936년경 조국독립인지, 무산혁명인지를 부탁하고 연해주에서 작고하였다고 한다.
1995년 한국에서 논란 끝에 해외에서 작고한 사회주의자 계열로는 거의 처음으로 독립유공자 훈장이 수여되었다.
상해파 고려공산당 약사 |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약사 |
·1917년~1918년 초경 전로한족회 중앙총회 조직 (연해주) ·1918. 4월경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 선발대 블라디보스토크 도착 | |
·1918. 4월~5월경 하바로프스크 일대에서 한인사회당 창당 ·1919. 4월경 한인사회당 대표자 대회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1919. 4월경 상해임시정부 조직 1920. 8월경 제3국제공산당 2차대회 참가하며 「고려공산당」이라는 명칭 사용 ·1920년 12월 21일경 치타의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극동국(달뷰라) 소속 한인부(상해파)는 통합 독립군 단체 조직을 결정 | ·1918. 1월경 김철훈, 오하묵 등 몇 명이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이르쿠츠크 볼셰비키내 한인지부 조직 ·1919년 초 일부 인사들이 「대한국민의회」 조직 ·1919. 9월경 김철훈, 오하묵 등이 전로한인공산당 조직 ·1920. 1월경 이르쿠츠크 공산당내 고려부 조직 |
·1919. 8월경 ~ 9월경 한인사회당 박진순 등이 모스크바에서 금전지원을 약속 받고 전로한인공산당(나중의 이르쿠츠크파)과 금전관련 분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음 (오늘날까지도 확인하기 힘든 소액으로 추정됨) | |
1920. 3월경 이르쿠츠크에서도 합동민족군대 조직 (고려인 포함 11개 민족) | |
·1920. 3. 1. 일경 일본군이 물러난 아무르주 자유시 일대에서 최고려 등이 피난온 고려인들과 자유시 고려인들을 모아 「흑룡주 고려주민대회」 소집 제의했다고 주장은 하지만 러시아측 기록에는 최고려가 주도했다는 내용은 전혀 없고, 자유시 일대로 피난 온 한인들로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된 것은 사실임 | |
·1921. 3월경 마자나바 일대에서 상해임시정부와 극동공화국 등의 지원을 받아 「사할린특립의용대」 조직 ·1921. 5월경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개편 | ·1921. 5월경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지원으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개칭. 정부성격의 「고려혁명군정의회」 조직 |
1921. 6. 28. 자유시 참변 발생. 상해파 등이 자유시에서 연해주 등지로 탈출 | |
·1922년 말경 코민테른이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해체 ·1922. 12. 30일 한국에서 「소련」이라고 불렀던 국가 수립 ·1922년 말경 볼셰비키에 의해 연해주의 독립군 부대 해산됨 ·1923. 2월경 블라디보스토크에 고려국(꼬르뷰로) 활동 개시 |
자유시 참변과 관련되었던 1919년에서 ~ 1921년경 만주·간도 일대 독립운동 단체
(※ 출처 : 1920. 6. 16. 일자 고경(高警) 제16,900호. 「최근 간도지방 불령선인단체 무력준비상황(國外情報(間島地方 不逞鮮人團體의 武力 준비상황과 首腦部의 所在地)」 등)
부대명 | 주요 인물 | 활동지역 | 기타 |
(1) 대한군정서 | 서일, 현천묵, 김성, 김좌진, 나중소 (서로군정서 일부 포함) | 주로 왕청현 등 간도 | 소총 1,200자루 |
(2) 대한독립군 | 홍범도, 박경철 | 연길현 명월구 등 | 소총 200자루 |
(3) 대한군무독군부 | 최진동, 박영 | 왕청현 등 | 소총 200자루 |
(4) 대한의군단 | 방위룡(방우룡), 허근, 김종헌, 김연원 | 왕청현 등 | 소총 400자루 |
(5) 광복단 | 이범윤, 김성윤, 홍두극, 김백우, 김성극, 김성원, 황만실 | 왕청현 등 | 소총 150자루 |
(6) 신민단 | 김성배, 유봉득, 김준근, 이흥수 | 왕청현 등 | 소총 150자루 |
(7) 대한 국민회 | 구춘선, 안무, 강구우, 김규찬, 김동합, 한중진, 양도헌, 마룡하, 박혁춘 | 간도, 연길현 등 | 소총 400자루 |
(8) 대한의사부 | 김리근, 최정국, 박창준 | 왕청현 등 | 소총 160자루 |
(9) 대한노인단 | 이승교, 정치윤, 김치보 | 연길현, 노령 | 소총 60자루 |
(10) 공의단 | 엄준, 심룡운 | 만주 | 소총 40자루 |
(11) 흥업단 | 김창일, 서관일 | 장백현 등 | 소총 50자루 |
(12) 군비단 | 이희삼, 박동규, 윤덕보 | 장백현 | 수십자루 |
(13) 태극단 | 임석우, 박대성 | 임강현 등 | 수십자루 |
(14) 야단 | 오석영, 윤좌형 | 간도 | |
(15) 노농회 | 조응순, 권중선 | 간도,연해주 | |
(16) 농무회 | 김기형, 김직묵 | 간도 | |
대원 최소 3,000여명 이상 | 소총 3,000자루 이상, 기관총 9정 이상 등 |
위의 표 외에도 만주·간도·연해주 일대에서 독립투쟁에 나선 사람들은 많았다.
1919년 3·1운동 이후 조직된 독립군 부대들은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명칭과 주둔지를 자주 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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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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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의 적은 바로 나의 동지이기 때문에 러시아 공산당이 이 무렵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한 것은 사실입니다. ㅎㅎ)
1919년 3월경 러시아의 레닌은 30여 국가의 대표가 모스크바에 모인 자리에서 코민테른(다른이름 :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제3 인터내셔날, 제3 국제공산당)을 결성하였다.
코민테른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지원을 위해 결성되어 코민테른을 통해 당시 약소국, 식민지국가들의 무장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편의를 제공하기도 했다.
제1회 코민테른 대회에서는 실제 창립 선언만으로 그쳤다.
하지만 1년 후의 제2회 코민테른 대회(1920년 7월)에서는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 독재」를 선언하고, 비합법 조직의 병행, 군대⦁농촌⦁노동자 조직, 의회에서의 활동, 식민지 독립, 민주적 집권주의 확립, 각당의 중앙위원회는 코민테른 대회와 집행 위원회의 결정에 무조건 복종할 것 따위의 구체적 가입 조건을 규정하고, 」세계 혁명」을 목표로 운동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코민테른은 1943년에 스탈린에 의해 해산된다.)
러시아 내전에서의 한국인의 역할
1917년 10월 혁명이후 시베리아 지역의 러시아인들 중에는 정치적 이념에 따르거나 기아를 피해 몽고, 중국, 중국, 터키 등 국외로 탈출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도시지역에서 식량과 연료를 구하지 못하여 농촌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수두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인 지식인 중에는 볼셰비키의 지지자들이 출현하였다.
1918년 1월경 동시베리아 하바로프스크에서 극동인민위원회 외교인민위원이 된 김알렉산드라(Ким 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1885~1918)도 있었다.
김알렉산드라는 1918년 9월 16일 하바로프스크가 점령되었을 때 일제와 백파들에게 죽었지만 러시아 내전 무렵에는 최소 수백 명의 한국인이 볼셰비키당(공산당)에 참여했다.
1920년 초까지 대략 3,700여명에 이르는 한국계 볼셰비키가 있었다. 또한 수천 명의 한국인이 적군에 입대하거나 볼셰비키를 위해 싸웠다.
일제가 시베리아, 만주, 간도를 침략하자 한국인 중 많은 젊은이들이 일제를 맞아 자발적으로 싸웠다.
대표적인 인물은 박일리야, 홍범도, 한운용, 이용, 한창걸 등이 있다.
1919년 11월 14일경 볼셰비키(공산주의, 파르티잔)가 콜차크 백군의 수도 옴스크를 해방시켰다.
1920년 2월 콜차크는 한 때 동지였던 체코군에게 체포되어 볼셰비키에게 넘겨져 처형되었다. 러시아 내전에 관계된 체코군단은 1918년 2월부터 우크라이나 부근에서 출발하여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약 9,700킬로미터에 이르는 대륙횡단 기차여행을 통해 온갖 사건에 휘말린 후 1920년경까지 대략 6만여명이 체코로 귀환할 수 있었다.
1920년 가을부터는 러시아내전에서 적군의 승리가 확실해지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 식량 부족에 허덕이던 러시아에서 1920년경 대기근이 발생하였으며 1921년 봄까지는 극심한 화폐가치 하락과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러시아 내전기에 기아로만 죽어간 사람은 대략 수백만여명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는 러시아의 1차 대전 사망자와 러시아 내전 사망자보다 많은 것으로, 외국 구호기관에서도 러시아에 식량을 지원하였다.
1920년 허수아비 국가로 건국된 극동공화국의 군부 사령관을 역임한 에이히 의 사열식
1920년 허수아비 국가로 건국된 극동공화국 각료들
1920년 허수아비 국가로 건국된 극동공화국 각료들. 치타
아무르강의 대도시 하바로프스크
1918~1922년경 러시아 내전에서 활용된 전차 혹은 철갑 장갑차
1903년경 아무르강 하류 니콜라예프스크 인근 물고기 가두리 어장.
니항 인근 가두리 어장
첫댓글 항상 잘 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