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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특수부대 예비역들은 남침 땅굴을 찾아내는 일에 관해 깊은 관심과 후원을 바랍니다. 아래 내용은 청와대민원실에서 퍼온 글입니다>>
공개민원 보기
신청날짜 2002-12-23 오후 2:47:50 접수날짜 2002-12-24 오전
11:21:49
민원인 성명 이창근 피민원인 국방부탐지과
공개 여부 공개 민원번호 A0212-2397
제목 땅굴 징후가 있었던곳을 기록 합니다...
민 원 내 용
땅굴 찾는 사람들의 기록1
이제 장거리 땅굴에 관해 아는 사람은 몇 않남았다...
이준 선생님 김천환씨 그리고 박상문씨.....그리고 나...이종창신부님...
윤태원씨도 작년에 작고 하셨다...
지용이형도 죽고......
많은 사람이 알아야 한다...
난 내가 아는 땅굴의 노선을 다 이글을 통해 밝히려 한다...
우선 장거리 땅굴이 수도 서울에 왔느냐의 객관적인 내 판단을 묻는것이라면 삼박 사일 걸린다...
이것을 밝힘으로서 북의 김정일 위원장도 뜨금 할것이다...
우선 화전을 지나 수색의 철로를 따라 서대문구 연희동 코앞에 더이상 땅굴 징후가 나타나지 않고 멈춰섯다...
이 땅굴의 출입구는 북의 나곡 광산동에서 출발 했다고 보고 있으며 관산포에서 두갈래로 나뉘어져 하나는 철로를 따라 하나는 일산 전망대 밑으로 들어가 인왕산 방향으로 향하였다...
무엇으로 땅굴이 있다고 보느냐의 질문을 한다면 주민들의 제보로 시추하고 청음을 하고 전기 반응 테스트를 하니 나타났다...아주 순차적으로 주민의 제보가 들어 왔으며 내 차에 정명환 장군을 모시고 한분 한분 주민들의 징후를 직접 만나게 해드렸으며 정명환 장군은 마치 수사관처럼 일일히적으셨다...증인은 정명환장군과 이종창 신부님 박상문씨등이 증언자이다...
관산포는 내가 군복무를 막 시작 하고 배치를 받아 애기봉에 근무 할때 관산포 갯벌지역에 250미터가 무너져 땅속에서 갱차를 올리고 인민군이 한강하구에 떠밀려 가는것을 직접 관측 했다 그사이 레일과 갱차가 이미 한강하구가 비무장지역인데 그지역을 이미 넘어 온것이였다..
나중에 징후신고가 없다가 서대문 교도소 주변의 한분이 구치소에서 누가 탈옥 하려고 땅을 파는것이 아니냐는 제보에 전 안기부직원이 신고 받고 일주일동안 감청하니 땅속에 작업 하는소릴듣고 지용이형에게 제보하니 그 축선으로 판단하고 탐사하니 갱도 반응이나타났다...물론 다우징탐사로 김천환씨와 김종우씨가 탐사 했다...물론 당시 서대문 교도소엔 죄수가 한명도 없었다...
내가 군복무한 김포 반도는 화곡 광산동에서 출발하여 한선은 통진 마송을지나 48번 국도에서 크기 9미터 폭4.5미터 의 광장이나타났고 멈춰섯으며....다른 하나는 북쪽의 한터 산을 지나 시암리를지나고 후평리를지나 수참리 지나 향산리에서 더이상 92년도 까지 청음이 되지않았다...
그증거를 물의신다면 시암리 땅속에서 82년도부터6년도까지 발파음이 계속적으로 제보가들어왔고 현재 주식회사 세모에 계시는 김병철심리전과장님과 존안일지에 기록이 되어 있으며 이종창신부님이 책을 쓰신 다우징탐사의 책을 보면 그지역에 어떠한징후가 있었는지 알수가 있다...
또한 수참리의 밭을 메는 한아주머니는89년도에 치마가랑이사이로 발파음이 지나가 그자리서 기겁을 하고 놀라 경찰서와 우리에게 신고를 했다...
후평리는 나와 정지용씨와 박상문씨와 김천환씨와 같이 앞마당에서 삽겹살을 구워 먹고있는데 청음기에서조용하다가 갑자기저녁 11시가되자 시끄럽게 암반을 두들기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 왔다.
향산리는 윤태원씨가 김대중이란 다우징탐사자가 수참리에서 부터 탐사를 해와 지정한장소에서 시추를 하고 박상문씨가 코아 시추를 햇는데...아주 깨끗한 갱차음이 녹음이 됬다...
그심도가 96미터 이다 ...이때부터 그긴 여정의 군탐지과와의 장기적 싸움의 논쟁이 민간 탐사자와 싸움이 됬다....
다음은 법흥리 기독교 묘지넘어 불암산으로 간 땅굴인데 이 땅굴의 제보는 홍곽락 중사의 제보이다..92년 땅굴이 공론화되자 9사단 포병에 간부로 전역한 홍광락씨는 직접 땅굴을 파는 소리는듣고 중대장 씨피가 흔들릴정도의 폭발은을직접 들어 우리에게 제보한후 혈맹의 동지가 됬다...
추후 여러 탐지자 분들과 탐사를 해보니 하나는 폭 1미터50정도이고 그밑으로 3미터가 되는 땅굴이 탐사되어 불암산을 지나 세검정으로 향하고 있었다...93년도...
점심시간이 다됬다...다음은 화성땅굴의 제보와 그 예상축선 그리고 중부전선의 땅굴징후를 쓰겠다 그다음은 동부전선의 마차진리로 넘어온땅굴징후까지 다 기록하고 네티즌의 의견을 받고자 한다....감사합니다..여러분이 아셔야 합니다...
남침땅굴을 찾는 사람들2
서부전선에 이어 중부전선의 땅굴 징후를 기록 하고자 한다...
적지인 황해 남도 개풍군 관산포리는 250미터난 붕괴 되면서 갱차와
네일이 나타나 군복무시절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군은 한강하구의 밀물을 이용 수중의로 간첩을 침투 하기위한것이
아니냐고 해서 적 방향 감시소라 칭하고 화력 계획을 잡이 놓고 있다...
이와 같은 부류로 보고 있는 1땅굴은 소로로 갱도 가로 세로 폭이 2미터 가되지 못한다...
전두환 장군의 직접 지휘에서 찾은 3땅굴은 김부성씨의 귀순자 첩보도 있었으나 있다 없다를 반복하고 직접 자신이 측량했다는 향나무부터 역 관측하여 비무장지대를 들어가서 폭풍지뢰로 다리 한쪽을 잃고
말았다..그러고도 약 2년이 흘러 미리 예상선을 계획시추 한곳에서 시추공 뚜껑이 지하 폭발로 날아가자 이를 지켜본 선임하사가 전두환
장군에게 직접 보고해 3땅굴을 발견 하는데 성공했으며 시추기가 3개나 관통 했는데도 절개 하여 들어간 후에야 알았다...
이 땅굴은 북쪽 지역인 판문 동쪽 북경보병 여단 지하에서 부터 시작하여 자유의다리 쪽으로 향한것으로 만일 이땅굴이 발견 되지 않았다면 김신조 일당이 남하 침투한 노선 보다도 천배 이상의 효과를 보았을것이며 2시간 이내 청와대나 서울 관계공관을 장악 했을것이란 설이 지배 적이다. 이글은 80년도 전두환 장군의 자서전에 나와 있으며 자신이 월남전에서 미군의 패배로 여기던 박쥐17호 작전의 작전 참모시절 충분히 사전 북의 침투로는 이것 밖에 없다는 군인이로서의 방어적 예지력에서 비롯 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3땅굴이 아군 측에 발견 됬다고 끝난것이 아니다..
우리 탐지자들이 확인 하고 시추하여 징후를 잡아 낸것은 문산을 지나 파주 백석 방면으로 향하고 있었고 이 땅굴은 3땅굴의 발각된 부분보다 약 30미터 밑으로 선회하여 굴진 해온것을 알수가 있다 문산의
지하 커피숖을 하는 정 모씨는 근 한달 가까이 밑에서 이상한 소음 을
들었다고 제보 하였고 파평산일대에 수많은 민간인들이 제보하여 그
주변에 절친한 한 스님이 당시 이필섭 합창의장님에게 제보하여 합참의장 명령으로 일미터 간격으로 미군과 협조 하여 800여공이 넘는 시추를 했다고 기록 되어 있다 그러나 민간과 같이 협공을 했더라면 산중턱에서 말고 문산이나 파주 백석이나 고양에서 시추했었더라면 이란 안타 까움도 없지 않다...
다시 말씀드리면 판문 동쪽 12킬로 북 경보병 여단 진지에서 두갈래로 나뉘어져 하나는 문산을 지나 파주와 법원리 가운데를 관통 백석 일영 방면으로 징후가 나왔고 다른 하나는 금파 금곡을 지나 가납 방면으로 간것으로 확신한다.
다른 하나는 황해 남도 장풍 남쪽에서 시작 한땅굴은 황해남도 장풍군 두일리 (경기도 전곡읍 두일리) 사동에서 지하 진지를 구축하고 지하 95미터 에서 세갈래로 나뉘어져 백학을 지나 노곡리 아미리 연천군 백학면 구미리로 나뉘어져 굴진 한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노곡리와 구미리는 연천 땅굴 동영상에 나왔고 구미리는 또 다시 두갈래로 나뉘어져 마지리를 거쳐 감악산으로 향하였고 북의정부
방면으로 간것으로 보고있다..
의정부시 가능 3동 이국진씨의 땅바닥에서 나는 1년간의 소음은 바로
이 땅굴의 지선으로 보고있다.....
연천군은 땅굴 징후도 많이 나왔으나 특히 가장 최근에 나온 징후및
확인 할수 있었던 것은 연천군 군남면 진상리로 두일리에서 유촌으로
갈라져 전곡 방향으로 향하는 것으로서 진상리에 사는 전 상진씨 똘이 엄마 유씨등이 2000년 구정 쯤 방바닥에서 폭발은 돌 깨는소리 착암소리를 들었다.
특히 똘이 엄마는 방바닥에서 나는 소리를 동네 아주머니에게 같이
들어 보자고 불러 저녁을 함께 먹는데 텔레비젼을 크게 틀었어도 소리가 났고 자신은 침대에서 자는데도 15일동안 지속적으로 들었으며
전상진씨는 이것이 무슨소리인가 야밤에 자신집을 배회 하기도 했다고 증언 했다..
강원도 철원군 동송면과 경기도 연천군 대광리 도신리의 땅굴은 세갈래로 나뉘어져 하나는 대광리 도신리 신망리로 철길을 따라 동두천으로 향하였고 또하나는 재인폭포동쪽 종자산 방향으로 향하였으며 그 이후 주민들의 징후가 나타나지 않았다.
특히 미군은 도신리 땅굴을 찾으려고 3달간이나 매복 하고 청음 하여
시추하였고 실패 했다.
또 미군은 재인폭포 북쪽에서 나타난 갱도에 폭약등르 넣어 발파하고
시추하고 찾으려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었으나 연결갱도를 찾는데 실패 했다
나머지 다른 하나는 철원가까이 냉정리에 징후가 나타났으며 냉정리 이후 별다른 징후가 나타나지 않았다...
냉정리는 물이 빠지고 에어가 분출하고 지하에 발파음등 민간제보 만도 수십명에 이르렀으나 군 탐지과는 3군데를 시추하고는 종결 지었다..
도신리의 한 목장을 하시는 분은 원인 모르게 92년도에 젖소가 지하에서의 폭발음에 축대를 넘다가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가 났으며 목장주인은 도로에서 우리 집을 차가 부딪힌게 아니냐며 밖을 나와 보니
축사가 무너졌다고 증언 해주었다...
이는 연천군 백학면 이승환씨네 집이 금이간것도 자신의 집이 차에
받힌것아니냐는 동일한 표현과 군남면 진상리의 증언 표현도 같았다..
역시 모든 징후 지역에 다우징 탐사후 시추 청음기를 넣어 보니 작업 소음등이 다량으로 잡혔다...
다음은 동부전선과 정명환 장군께서 찾으신 제2땅굴....그리고 신중철 대위의 과학적 팸스장비조사에 나타난 제4땅굴과 제 4땅굴 우회 로 다시판 땅굴을 군에서 찾지 못하는 이유에 관하여 기술 하겠다...
땅굴문제는 정치성이 없어야 한다는것을 나는 계속 주장한다...
땅굴 문제가 해결되기위해 서라도 대전으로 행정 정치 수도 이전을
찬성 하는 난 모쪼록 이문제가 순수하게 해결되기를 새 대통령후보에게 바란다...
남침땅굴을 찾는 사람들3
남침땅굴 찾는 사람들의 기록 이란 글로 1과2 그리고이제 제보에 관한 제 3을 기록 한다..
이글은 법적으로 징후 제보자가 분명 있었고 민간 탐사자인 우리들이
확인을 거쳐 기록 하는것임을 분명히 말해둔다...
이글이 사실이고 정말인 강에 대해 문의를 많이 해오시는 분들의 심정을 저는 이해 한다 .
만일 군 탐지과가 1가2그리고 이제 기록 하는 3의 장소나 우리 민간인들의 제보 외의 지역에서 땅굴을 찾아 낸다면 존경할일이고 그 원인 지역이 그간 민원인들이 제보한 지역에 근원이 되어 있지 않다면 내 열손가락에 장을 짖는 것은 당연하고 미려한 내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는것을 네티즌에게 엄숙히 맹세 한다...
의정부 가능 3동의 이국진씨는 애기봉에서 땅굴을 제보 했던 최승대씨와 마찬가지로 옆방에 딸이 잠자고 있는데 갑자기 구들장 밑에서 발파음 굴착음등을 느끼고 놀라 그들의 부모에게 겁에 질려 조력을 구한다..
이국진씨는 이 소리를 직접 듣고 1년동안 일기장에기록 하고 땅속에서 나는 의성어를 기록하여
당시 정명한 장군 (민간인보다 구속력이 있고 증거력이 다소 있다고
보는 2땅굴을 발견한 예비역 장군)에게 전달 되어 월간조선에 제보됬다...
이후 우리팀이 도착하여 다우징 탐사를 통해 그 연장선을 찾았으며 윤태원 우물시추업자를 통해 시추후 청음을 하자..갱차음과 날래 날래 타라우 라는 북한식 말투의 녹음을 청음하는데 성공했다....(추후 다우징탐사와 시추후 관통 되지 못하는 이유과 관통의 어려움과 북한의 역대책에 관하여는 다음에 기술하기로한다 양해를 구함)
또한 경찰관으로 평생을 봉직한 후 땅굴 핵심 인원이 되신 이준 선생님의 땅굴 징후는 동두천 관할 민간 지역이나 주내 파출소의 지하실에서 여러 경찰관이 동시 다발적으로 땅굴 징후를 들은 후 이를 군에 제보및 이첩 하자 소홀히 처리 함으로서 경찰관 옷을 벗고 이일에 근 십년 넘게 동지가 되셨다....
이 동두천의 땅굴 징후는 도신리에서 출발한 지선으로 보는 동지도
있고 감악산을 지난 연천군 구미리의 관통 지선으로 보는 동지도 있다....
본인은 그징후와 제보를 분석 하면 동두천시 미군 부대의 땅굴설은
박상문 사장의 코아시추로 인해 청음도 없었고 그 지역이 예전 메립지였다는결과로 정지용선배에게는 죄송하나 땅굴 징후는 아니였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아무튼 동두천 주내 경찰서 오른쪽으로 관통하여 지나친 땅굴 지선의 원인추정선은 마지리를 지나 감악산 7부 능선을 지나 동두천으로 향한것으로 난 추정한다...
7사단 화천 땅굴은 윗비끼네와 아래 비끼네의 중앙을 관통하여 한지선을 향하였고 쌍룡땜(다리)에 한 지선을 내놓았으며 나머지 한지선은 그 쌍룡땜 북으로 일백미터 아래로 내려와 멈춰섰다...
군에선 이종창신부님의 제보로 무수히 많은 시추를 하였고 아직 생존해있는 예병규 대령은 30미터 까지 절개를 하여 땅굴을 찾으려 노력 했으나 실패 했다...
그 원인은 소리만 난다고 바로 밑이 땅굴이 아니라는것이다 소리나 발파음은 땅의 매질 그러니까..크렉을 타고 소리가 나는것으로 바로 밑에 징후가 있다고 절개를 강행하는것은 무모한 착오라 말할수 있다...즉 화천땅굴은 대성산을 지나 파포 그리고 윗비끼네 를 집중 물리탐사를 강행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수있다고 본다...
화천땅굴에서 볼수 있는 좋은 경험은 시추 만으론 땅굴을 찾을 수없다는 교훈이 있다.
그 이유는 적은 지하에서 2개 내지 3개의 마지막 출구를 양산 하는데... 어는 한곳의 땅굴지선이 노출 되면 다른 새로운 곳으로 진출로를 파면서 시추로 노출된 갱도를 그 버럭 (암반쓰레기로 되메우기를 하는것이다)으로 메우기를 하는것이다 화천 땅굴의 심도는 약 50미터로서 절개를 하거나 시추로 확인 또는 노출이 되도 그 공간을 (시추로 노출된부위를 되메우기 하는데는 2일정도 면 충분하다)
남침땅굴을 찾는 사람들의 기록4
이렇듯 화천 땅굴을 찾으려는 군의 시도는 계속 되었으나 자주 실패를 거듭하고 땅을 절개 하는 수고 까지 행하였으나 결실을 보지 못했고 주위의 따가운 시선및 인근 민원의 제기로 결과적으로 참모장인
예병규대령의 장군 진급을 못하는 결정적인 실책으로 남아 그 노력으로 정작참모부 탐지과장으로 부임한다...
이로서 알수있는 군 생리는 결과의 공적이며 그과정의 노력의 실패는
그 책임 부분을 분명히 물기에 결과적으로 군은 확실 하고도 분명하고 오차 범위가 없는 포인트를 시추하고 절개를 결심 하기까지는 수많은 검증과 시일이 걸린다는것이고 자신의 정보 판단과 군 경력을
걸고 군 예산을 편성 실시 하는것으로 민간인이 땅굴이 다우징 탐사결과 어디어디에 있다고 하며 절개를 요구하는 것에 우리는 확신하나
군에서도 일말의 오차없이 설득되어야만 가능 하다는것을 새삼 느낀다..
아무튼 화천 땅굴은 윗비끼네에서 발적적으로 갱도가 굴토되어 남하한것으로 징후및 그간 군복무자의 첩보로 확인을 하니 세갈래로 굴진되었으며 지금이라도 시추를 한다면 찾을 수있다...
또 다른 땅굴 징후는 김화지구를 말할수 있겠는데 이 땅굴 징후는 전방에는 확인이 않되었고 오히려 가평 방면에 징후 제보자들이 지하의
소음을 호소 한다...이 역시 평강 이란 적지에서 출발한것으로 되어 있는데 당시 이북 오도민의 제보에 의하면 평강가까이 일제시대 때에도
기차가 이중으로 다닐수 있는 지하 진지가 있었고 그지하에 오랫 예날 광산이었으나 그곳에 군량미를 저장해두고 일제 시대 때는 철원
평야에서 착취한 일제가 그곳에 군량미를 저장 만주등 중군 전투지역으로 북쪽에 보내졌다는 제보가 있고 625사변에는 그곳에 수용소를
만들어 부르조아 포로등 반동분자들을 수용하고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는것이다
철원지역에 테어나신 윤 모씨는 아버지 면회를 갈려고 그곳에 2일을
걸어 갔는데 들밑에 양쪽에 물이 흐르고 그안으로 들어 가니 땅굴이 1시간을 넘게 들어가도 모두다 갱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군량미등 보급품등을 나르고 있었다..고한다
기차가 양쪽으로 들어갔다.더 깊은곳으로 들어 갈수도 있었는데 밑으로 내려가는 지하가 다섯길이나 됬다고 증언 했다...
간이 판단 하건데 김포의 화곡 광산동이나 나곡 광산 등을 견주어 생각 하면 이땅굴은 평강 지하 진지에서 출발하여 자동을지나 광덕산-백운산-화악산-75번 도로를 주로로 굴설 한것으로 보고있다....
2땅굴을 발견 하신 정명환 장군의 일화는 이미 남굴사 게시판이나 백서에 기록이 되어 있으니 그것을 참조 해주시길 바란다....
강원지역에서 가장 침투로가 길고 치명적인 땅굴은 홍천 땅굴로 홍천
북쪽 인근 부대 연병장에서 의 징후가 마지막으로 조사가 되었다...
이 침투로는 풍산 상대 유촌 고성 신북을 지나 공작산으로 향하였고
공작산에 지하진지를 두고 중앙고속도로를 거점으로 교두보를 확보하고 작전을 개시할것이다
주선인 신북을 지나 춘천을지나연엽산라인이 주선으로 보고 있으며 조양상화계라인과 결정적으로 합쳐져 두라인이 가공할 침투 노선이 될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땅굴의 조사는 주민제보가 결정적이었으며 지하 무진동 발파음이나고 산과 들에 물이 빠지고 특히 조양에 사시는 장모씨는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재래식 우물물이 발파음 이후 물이 낙수 하고 한달여가 지난 다음에야 다시 차오랐다는것이며....
홍천의 모 부대는 (부대명은 대외비로 함, 그 이유는 앞전에 땅굴징후란에 연천의 25사단 1연대로 들어간 땅굴징후로 글을 올린바 있으나
그 여파가 상당하기에 개별적 문의에는 남굴사와 협의후 밝히기로 함을 송구함)부대에 식수가 부족 하자 부대장이 우물 시추업자에게 용역을 준것인데
연병장에서 간부 식당 쪽으로 시추를 2개공을 하자 모두 27미터에서
2미터 이상 낙하하고 찬바람이 올라옴 ...황급히 폐공하고 보안 유지함...그 우물시추업자는 김모씨로 당시 용산식당에서 제보하여 그부대를 동지들과 같이 현장 방문 함....
다음은 백석산을 거점으로 출발한 땅굴로 이진삼 장군이 사단장 군단장 군사령관이 되서야 찾으신 제 4땅굴로 이는 귀순자 신중철대위의 특수제보로 당시 이진삼장군의 아우이신 이진백 장군의 관심과 두분의 조력으로 결과를 얻은 것이라고 볼수있다...
그러나 중국의 병법과 옛소련의 현대 군장비조직력으로 무장된 북한군은 이 4땅굴이 무수히 많은 논란을 가져와 우리를 단결시켰으며 논리의 증거력을 가중시켰다...
이유를 간략 하게 소개 한다면 제 4땅굴의 효용성면과 효과면에서 고육지책이라는것과 사전 군에서 미흡한 징후는 있었으나 결정적으로
신중철 대위가 넘어 오면서 어디에서 어느곳으로 갱도를 팠다고 가르쳐 준점이다.
당시 이향수 장군님은 모든 땅굴 징후접수는 중부전선에 짐중되었으나 신중철씨가 제보 한후 21사단에 시추작전이 집중된것이다.
즉 , 21사단지역 주변 경계지역은 모두가 야산으로 적이 침투를 해도
서로가 엄폐은폐가 가능하고
교두보 확보에 미흡하고 서로가 빨치산 전투밖에 되지 않는다는것이다.
그리고 그심도를 추정하면 산 허리에서 출구가 나온다는것인데 대규모 장비를 갱도에서 나올것이냐는것이며 그효용성이 1땅굴 보다도 못하다는 견해이다.
다시 말하면 대간첩 침투작전과같이 아군측의 부대 장비의 게릴라 효과는 있을수 있을 지언정
대규모 접전은 그렇게 무모할까 하는것이다...
또다른 사유는 이중 간첩론으로 당시 97년도에 밝고 힘찬 나라운동의 박근대사님을 정선배와 내가 방문 하여 여러 회원님이 계신곳에서 일장 브리핑을 할때...우린 주장 했다...
아군의 땅굴업무를 고육지게로 4땅굴을 찾겠금 동부전선에 집중시키고 서부와 중부전선에 공백을 유도 한것이 아니냐는 우리의 판단이
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예병규탐지과장은 왜 연천에 징후가 많고 김포
반도에 시추조사를 않합니까 하고 항의를 하니 땅굴에도 급이 있다
특급 땅굴을 조사 중에있다...하며 4땅굴 역갱작업시 관여 했던 작업자와 이재섭 대령은 역갱작업을 하는 와중에 우리 장비를 멈추게 했는데 바로 옆에서 땅굴 굴착 하는 소릴 들었다는 것이다....바로 그 땅굴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우린 정보 사령부로 아군 군복을 입은 신중철귀순자를 우리의 땅굴
제보를 위해 조력을 구하고자
만나자고 해도 이유없이 회피하고 중부전선엔 땅굴이 없다는 것이고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실수를 했다..
2땅굴이나 3땅굴도 정책상 땅굴이지 땅굴이 아니라는 망언을 하는것이다.
지용이형은 19년동안 간첩 잡는 부서로 이놈은 간첩이다라고 단정했고 밝고 힘찬 나라운동 이종군 부회장님께 말씀을 드리자 이중간첩이다라고 확신 하시고 자신이 합동귀순자 심문관이였을 때 에도 북한군 간부이자 대위급 나무날때없는 지위와 보직에 귀순한 신중철을 의심했다고 말씀하셨고 이중간첩이라 단정 했다...
다시 말씀드리면 80년도에 제보받고 귀순자 특수제보에도 10년만에 1990년에 알고 치는 고스돕에 광하나건져 광으로 3점 내고 게임끝낸것이나 다름없다...
왜 그러냐 하면 이미 지난해 신중철 (우리나라 계급 대령)은 중국을 통해 북으로 넘어 갔다고 보고있다.....
그리고 모든 탐지업무의 관심을 동부전선에 집중시켰다면 서부와 중부엔 어떤 작전이였을까...
최후 노동당에서 관리 한다는 장거리 땅굴을 은폐하기위한 작전이 아니였을까 한다...그리고 안심하고 파고 내려 온것이 아닐까 한다....
마지막으로 고성 통일전망대를 지나 마차진리로 향한 땅굴징후로 통일 전망대 지하에 근무한 관측대 고모 하사의 제보로서 야간에도 전망대 지하가 울리고 이것이 북축의 사격훈련인줄알고 있었는데 야밤에도 계속 울렸다고 증언을 하였다 이 땅굴은 송헌을 지나저진은 거쳐 마차진리로 향하였다....
이로서 155마일 휴전선 일대에 나타난 땅굴 징후를 모두 기록 했다....
이제 네티즌의 리플을 기다린다...이 사실은 여러분들이 알아야 한다...
화성 장거리 땅굴의 현장에서 작고한 지용이 형이 못다한일을 과연
남아 있는 우리가 해낼수 있는지 ........기도만 한다.............
끝으로 이는 휴전선 155마일 로 침투한 땅굴 주선을 간략하게 기술 했으며 그 지선은 우리는 알고 있으며 이글을 쓰는 본인은 시간과 예산만 준비 되면 밝혀 내시경 카메라로 내부를 촬영 남굴사(http://www.ddanggul.org/ )회원 네티즌 여러분께 빠른 시일 안에 밝혀 드릴것을 약속한다....
나와 내가정과 우리 자손이 살 조국을 위해...
첨부화일
민원요지 반복 민원(동일건 4회 이첩처리)
민원분야 (기타)-기타
심사날짜 2002-12-24 오후 2:43:58 이첩날짜 2002-12-26 오후
5:32:13
처리결과 자체종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