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륜(河崙)
하륜(河崙, 1348년 1월 22일 (1347년 음력 12월 22일) 고려 경상도 진주 출생 ~ 1416년 11월 24일(음력 11월 6일) 조선 함경도 정평에서 객사)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대림(大臨) 또는 중림(仲臨), 호는 호정(浩亭)이다. 아버지는 부사 하윤린(河允麟)이며, 권문세족인 이인임의 조카사위이다.. 이인복, 이색의 문인이다. 고려 말 정몽주, 남은, 권근 등과 함께 신진사대부를 형성했고, 처음에는 역성혁명에 반대하다가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참여했다. 정도전과 함께 한양 천도를 적극 주장했고, 1393년 정도전이 쓴 표 전문어 불손하다는 이유로 홍무제가 문책하자 명나라에 가서 사태를 해결하였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과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 1등에 책록 되었다.. 좌의정을 역임하고 1416년에 70세로 치사(致仕) 하여 진산 부원군 (晉山府院君)이 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출생과 소년기 하륜의 출생지-진주성 영남 포정사 옆 호정 하륜은 1347년(고려 충목왕 3년) 순흥부사(順興府使)를 지낸 하윤린 (河允潾)과 진주강 씨(晉州姜氏)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하공진의 후손으로, 하식(河湜)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식목녹사 (拭目錄事)를 지낸 하시원(河恃源)이다. 어머니 진주강씨는 증 찬성사 강승유(姜承裕)의 딸이다. 초은 이인복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뒤이어 목은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선배인 정도전, 정몽주, 조준 등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하륜은 10년 연상인 정몽주를 무척 어려워했으나 정도전은 나이를 따지지 않고 그와 가깝게 지냈다. 또한 후에 정몽주의 문하생 중의 한 사람인 권근과도 가깝게 지냈다. 1360년(공민왕 9년)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 국자감의 유생이 되었다.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초반 1365년(공민왕 14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시험관이기도 했던 스승 이인복은 하륜의 사람됨이 큰 것을 보고 아우 이인미(李仁美)의 딸과 결혼시켰다. 또한 당시의 동지공거 중의 한사람은 그의 스승이었던 이색이었다. 1367년(공민왕 16년) 춘추관 검열(檢閱)ㆍ공봉(供奉)이 되었고, 1368년(공민왕 17년) 감찰규정(監察糾正)에 시보(試補)되었으며, 이듬해 감찰규정으로, 그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신돈의 문객인 양전부사(量田副使)의 비행을 탄핵했고, 신돈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짐을 들어 신돈을 공박하다가 지영주군사로 좌천되고 신돈에 의해 파직되었다.. 1371년(공민왕 20년) 신돈이 사형당하자 복직되어 다시 지영주군사가 되었으며, 이때에 영주목(榮州牧)을 잘 다스려 안렴사 김주(金湊)는 그의 치적을 가장 높이 평가하여 보고했다. 이어서 고공좌랑(考功佐郞)을 거쳐 판도좌랑(版圖佐郞)으로서 교주(交州)ㆍ 강릉도찰방(江陵道察訪)이 되었다. 정치 활동과 관료 생활 그는 스승 이인복이 동생인 이인임과 친하지 않은 것과 달리, 이인임과 가깝게 지내면서 그의 심복이 되었다. 또한 임견미, 염흥방 등과도 가깝게 지냈는데 하륜은 이인임의 측근 중에서도 유난히 문신을 싫어하던 임견미에게 임기응변의 술수를 간언하기도 했고, 비상한 지혜를 인정받기도 했다. 1374년(공민왕 23년) 제릉서령(諸陵署令), 사헌부지평이 되었다. 그는 이색의 문하에서도 수학한 바 있어 이 연고로 공민왕 말년부터는 신진사대부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이후 전리정랑(典理正郎)· 전교서부령 지제교(典校署副令知製敎)·전의감부령(典儀監副令)·전법서총랑 (典法署摠郎)·보문각직제학·판도서총랑(版圖署摠郎) 등을 거쳐 교주도안렴사 (交州道按廉使)로나갔다가 다시 되돌아와 전리총랑(典理摠郎), 전교서령(典校署令)을 지내고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했으나 1380년(우왕 6년)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 신진사대부와 가깝게 지내면서 이인임과 다소 멀어졌지만 훗날 1388년에 이인임이 죽었을 때에 전의부에서 그 시호를 황무(荒繆)라고 하여 악시(惡諡)를 올리자 시호를 올리는 담당자에게 항의를 하기도 했다. 신진사대부 활동 1380년 어머니 진주강씨의 상을 당해 사직하였다. 1383년 어머니의 3년 상을 마친 뒤 복직, 사간원우부대언, 우대언, 전리판서, 밀직제학을 역임했다. 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퇴청 후에는 별도의 서실을 열고 문하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385년에 명나라의 사신 주탁(周卓) 등을 서북면에서 영접하는 일을 맡았다. 1388년 벼슬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이르러 1388년(우왕 14) 최영의 요동 공격을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며 비판, 적극 반대하다가 양주(襄州:지금의 양양군)로 유배되었다. 그해 여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이 제거되자 복직, 관작을 회복했다. 그 해 가을 영흥군 왕환(永興君王環)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그가 가짜라고 공격하였다가, 역공격을 받고 오히려 광주, 울주 등지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윤이 이초의 변이 일어났을 때 복직하였고, 1391년(공양왕 3)에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었다. 그는 스승인 이색이나 동문인 정몽주, 이숭인, 권근, 길재 등과 함께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함으로써 초기에는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했다. 그러나 정도전 등의 권고로 권근 등과 함께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였다. 조선 건국에 참여 역성 혁명에 참여 1392년 (고려 공양왕 4년) 7월초 고려가 멸망하자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했다. 그러나 1392년(조선 태조 1년) 7월 이성계가 즉위한 뒤 경기좌우도관찰사 (京畿左右道觀察使)로 기용되어 관직에 나갔다. 이때 경기도의 부역제도를 개편,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393년(태조 2) 경기도도관찰사로 기용되었을 때 수도 천도 논의가 나오자, 정도전과 함께 계룡산 건도역사(建都役事)의 부당함을 역설하여 마침내 중지케 했다. 이어 정도전과 함께 한양 천도를 적극 주장하였다. 1393년(태조 2년) 무악으로의 천도를 강력 주장하였지만 실현되지 못했고 1394년 (태조 3) 중추원첨서사(中樞院簽書事)에 전보되었다. 그는 관료생활 중에도 퇴청 후 틈틈이 문인들을 길러냈는데 그의 문인 중에선 세종 때의 명재상 중 한 사람인 윤회 등이 배출되기도 했다. 1395년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그러나 특별히 3년상을 마치지 못했으나 곧 기복(起復)되어 복직했다. 정도전과의 갈등 1396년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로 복직했다가 예문춘추관학사로 있을 때 당시 명나라 홍무제가 표사 (表辭)와 표전물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시비가 일어나 표사 글을 지은 정도전을 소환하자, 그는 명나라의 요구대로 정도전을 보내자고 주장하고, 스스로 명나라에 들어가 정도전을 대신하여 해명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은 명나라에 가기를 거부했고, 결국 그는 표전문 작성에 연루된 권근, 정탁, 노인도(盧仁度) 등을 데리고 갔다. 홍무제가 정도전이 오지 않은 이유를 추궁하자 그는 '정도전이 당시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서 올수 없다'며 해명하였다. 그러나 이때 데려갔던 권근, 노인도, 정탁은 억류되고 그 혼자 돌아왔다. 1396년(태조 5) 한성부윤으로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표전문 작성의 전말을 상세히 보고함으로써 홍무제의 오해를 풀어 해명에 성공했다. 그 후에도 명나라에 자주 왕래하여 외교에 공이 컸다. 그러나 표전문 문제가 제기될 때 명나라의 요구대로 정도전을 보내자고 했다가 정도전의 미움을 받아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좌천되었는데, 그 때 항왜(降倭)를 도망치게 했다 하여 정도전파 사람의 탄핵을 받고 파면, 수원부에 안치되었다가 얼마 뒤 복직, 충청도도순찰사가 되었다. 이방원의 측근 사람의 관상을 잘 보던 하륜은 처음에 정안대군 이방원을 보고서 장차 크게 될 인물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정안대군의 장인 민제를 만나서 간청하기를 '내가 사람의 관상을 많이 보았으나 공의 둘째 사위만한 인물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한번 그를 만나보기를 원합니다.'고 했다. 민제는 사위 이방원에게 하륜이 꼭 한번 보려 하니 한번 그를 만나보도록 하라며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그의 부탁으로 민제를 통해 정안대군을 만나게 됐고 이후 그의 심복이 되었다. 당시 여러 왕자 가운데 공을 세웠다고 자부했고 야망이 크고, 머리가 뛰어났던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하륜은 정안대군의 야심을 간파했고 그의 측근이 되었다. 이후 하륜은 제1차 왕자의 난과 제2차 왕자의 난 당시 이방원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하륜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실질적으로 계획하고 지휘했다.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정도전이 남은의 첩의 집에서 술을 마신다는 정보를 입수,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등을 불시에 습격하여 죽이고, 세자 이방석과 이방번을 제거했다. 1차, 2차 왕자의 난 1398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충청도 도관찰사로서 충청도 병력을 이끌고 한성부에 이르러 이방원을 도와 의안대군, 무안대군 형제를 제거하고, 정도전 일파를 숙청하는 데 공을 세웠다. 태조가 양위하고 정종이 즉위하자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태종)을 도운 공로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어 정사공신 1등에 오르고 진산군(晉山君)에 피봉되었으며 1399년 우정승(右政丞)이 되었다. 그해 5월 명나라 홍무제가 죽자 홍무제의 국상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가서 조문하는 한편 정종의 왕위승습(王位承襲)을 승인받고 귀국하였고, 문하부참찬사에 오르고 다시 문하찬성사 의흥삼군부 판사(義興三軍府判事)겸 판상서사사를 거쳐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으로 승진, 진산백(晉山伯)에 진봉되었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도 이방원을 도왔고, 이방원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그의 최측근이자 권력의 실세가 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 당시 그는 박포 일당의 거병 계획을 미리 파악한 뒤 선수를 쳐서 회안대군 이방간, 맹종 부자와 박포를 체포, 박포 일파를 죽이고 회안대군 부자를 유배시켰다. 정안대군의 측근 세자가 된 정안대군은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찾아가 인정받으려 했고, 무학대사 등의 간곡한 건의로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함흥에 가서 머물던 태조 이성계는 한성부로 돌아오게 되었다. 태조가 한성으로 환궁하던 날 정안대군은 살꽂이 다리까지 마중을 나가서 부왕을 맞이했다. 하륜은 정안대군을 말렸으나 듣지 않았고, 하륜은 정안대군에게 '태상왕(太上王, 태조 이성계)의 노기가 아직 풀리지 아니했을 터이니, 막사 차일(遮日, 천막)의 중간 기둥을 굵은 나무이되 수령이 오래되고 조밀한 나무로 만들라'고 건의하였다. 정안대군은 하륜의 말대로 아름드리 큰 나무를 준비하여 차일의 대들보를 세웠다. 환궁한 태조 이성계가 아들 정안대군을 보자마자 노기충천하여 활을 잡고 마중 나오는 정안대군을 향하여 화살을 쏘았다. 나오던 정안대군은 황급히 천막의 대들보 뒤로 몸을 피하여 그 위기를 모면하였고 날아온 화살은 차일의 기둥에 꽂혔다. 이는 후에 '살꽂이'라는 이름,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정안대군이 아버지 태조의 환영연회에 참석할 때에도 대신 내관에게 곤룡포를 입혀 보내라고 진언하였다. 정종 내외가 술잔을 올린 뒤 정안대군의 세자 곤룡포를 입은 내관이 태조에게 술을 따라 올릴 때 태조는 뒤에 숨겨둔 철퇴를 내리쳤고 내관은 그자리에서 즉사하였다. 이후 태조는 '모두가 하늘의 뜻이다'하고 단념했다 한다. 생애 후반 태종 즉위 이후 체제 개혁과 제도 개편 1400년 정안대군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좌명공신 1등(佐命功臣 一等)에 책록되었다. 그는 태종에게 스스로 창업과 수성의 방책으로 '변통'(變通)을 제시하였다. 그에 의하면 학문은 하나의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은 변화하는 현실에 맞추어 그때그때 달라져야 한다고 보았다. 1401년(태종 1년) 관직을 사임했다. 다시 복귀, 영삼사사(領三司事)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 시험을 주관하고, 관제를 개혁하였다. 그리고 영사평부사 겸 판호조사(領司評府事兼判戶曹事)로서 저화(楮貨)의 유통을 건의하였다. 태종 즉위 직후 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제도를 개편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6조 직계제(六曹直啓制)를 도입하여 각 판서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왕에게 업무를 직접 보고할 것을 주청하여 성사시켰으며, 재상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였다. 시장에서의 화폐유통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저화를 발행하게 하고 재정의 확충을 도모하였다. 또한 좌주문생제의 혁파나 호패법의 실시, 신문고의 설치[3] 등을 성사시켰다. 한편 하륜 자신이 지지한 정책의 방향과는 달리 태종이나 다른 주변 인물들과의 사적 관계에 의해 행동하는 경우가 많아서 인사 청탁을 많이 받는다거나 정책을 공론화하기보다는 태종과의 밀담으로 추진해 나간다는 비판을 샀다.[4] 1401년(태종 1년) 자신의 문하생인 윤회가 과거에 급제했다. 하륜은 학문에 뛰어나면서도 호탕한 성품이었던 윤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외교 활동, 역사서 편수 1402년(태종 2년)에 문하좌정승(左政丞)이 되었고 판승추부사를 겸임, 바로 의정부좌정승 판이조사 (議政府左政丞判吏曹事)로서 명나라 영락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등극사(登極使)로 가서 조선 왕조의 정식 승인을 표하는 고명인장(誥命印章)과 태종의 책봉 고명을 받아왔으며, 이첨과 함께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수하였다. 그는 사서에도 관심을 갖고 삼국사략 등을 지었으며, 동국사략 등의 편찬에 적극 참여하고, 역사서도 편수하였다. 그러나 그의 저서들 중 상당수는 임진왜란과 병자, 정묘호란 등을 거치면서 대부분 인멸되었다.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회복하고 더욱 돈독하게 하기 위해 하륜은 계속 사신으로 남경을 다녀오는 등 명과의 관계를 다지는 데에 주력했다.
[출처]진주하문(晉州河門) 호정(浩亭) 하륜(河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