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4. 2. 18. 일요일.
아직은 겨울철인데도 햇볕이 났으니까 덜 춥다.
서서히 봄이 다가온다는 뜻이다.
다큐영화 '건국전쟁'이 2024. 2. 1.에 개봉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제각각이다.
하나의 사실인데도 보는 시각에 따라서 평가(의견)은 전혀 다를 수 있다.
'달려라, 런승만(Run Seungman)' : 원 제목이나 차마 .....
'런승만(Run Seungman)'
이 문구로 검색하면 무척이나 많은 글/자료가 뜬다.
이승만(Lee Seungman 1875 ~1965년) :
1875년 3월 26일(2월 19일[음]) 황해도 평산군(平山郡) 마산면(馬山面) 대경리(大慶里) 능내동(陵內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양녕대군(讓寧大君)의 16대손이다.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
사망 : 1965년 7월 19일(향년 90세),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 카운티 호놀룰루시, 카이무키구 마우타네리아 요양원.
묘소 :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남측 창빈안씨 묘소 바로 아래에 있다.
*창빈 안씨 묘역(昌嬪 安氏 墓域)은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1488∼1544년)의 후궁으로, 선조(1552∼1608년)의 할머니가 되는 창빈 안씨(昌嬪安氏, 1499∼1549년)의 신도비와 묘소이다. 1983년 11월 11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되었다.
창빈안씨의 후손으로 조선조 왕은 14명.
선조 다음 왕들은 모두 선조의 후손이니 선조부터 27대 왕 순종까지 14명의 왕들이 창빈 안씨의 후손.
창빈안씨 묘역 인근에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묘소가 4개.
-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 창빈안씨의 묘역이 길지(吉地),명당이라는 뜻.
풍수적 관점에서 역대 대통령들과 국가 유공자(有功者)들이 혈 자리에 있는 청빈 안 씨를 호위하고 있는 형국(形局)이다.
왕을 낳고, 왕(大統領)들이 쉬는 곳. 바로 현충원이고 동작릉이다.
국립서울현충원과 창빈안씨 동작릉은 관악산(冠嶽山)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한강(漢江)을 만나는 지점에 아늑하게 펼쳐져 있다.
6 · 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터졌고, 이승만은 6월 27일에 서울 한강교를 빠져나가 대전으로 내려갔다.
이승만이가 도망친 뒤 한강다리는 국군에 의해서 폭파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3일 뒤인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에 한강 인도교와 철교에 하늘을 훤하게 밝히는 거대한 섬광이 일어나고 동시에 다리의 일부 상판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면서 강으로 추락하였다.
대교 구간의 2, 3, 5번째 경간이 폭파되어 사용불능 상태가 되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피난민은 엄청나게 밀려왔고, 무너진 다리 아래로 떨어져서 한강물에 빠져 익사했다.
한강 인도교 폭파로 그 자리에서 800여명의 피란민이 불귀의 객이 됐고 강북에 묶인 더 많은 목숨이 오뉴월 뙤약볕 아래에서 이슬처럼 사라졌다.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며 분전하던 국군의 주력부대도 퇴로를 잃은 채 뿔뿔이 흩어졌고, 국군의 중장비도 대부분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한강 인도교 폭파.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북한군이 미아리 저지선을 제치고 서울로 입성한 지 두 시간 만에 한강철교는 엄청난 섬광과 천지를 뒤엎는 듯한 폭음과 함께, 그렇게 두 동강이 났다.
참으로 성급하고도 무계획적인 결정이었다. 비록 적군이 가까이 온다고 해도 한강다리 앞에서 서울역까지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한강 인도교 폭파는 당시 수백만 서울시민을 아무 대책 없이 적 치하에 묶어놓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시민들이 공산화 됐다. 그것은 참으로 참담한 비극이었다."
부서진 한강철교 아래로 피난가는 난민들
이승만의 '건국'이란 용어는 잘못이다.
'나라를 새로 새운다'는 뜻의 '건국'이란 용어를 쓰면 '38선' 이북은 우리나라 땅이 아니냐?
김주열 : 1960. 3. 15.부정선거에 항거한 고등학교 1학년 입학예정인 학생은 데모에 참가했다가...
경찰관은 김주열 학생의 눈에 체류탄을 쏴서 죽인 뒤 마산 앞바다에 수장시켰다. 우연히 낚시꾼의 낚시바늘에 꿰어서 해수면으로 떠올랐고, 이를 기폭제로 하여 4·19학생혁명으로 촉발되었고, 1960. 4. 27. 이승만은 하야해서 하와이로 돌아갔다.
4·19혁명은 부정선거에 대한 반발과 김주열의 끔찍한 죽음으로 촉발되었다.
부정선거는 관료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진행된 부패 행위였고, 김주열을 비롯한 수백명의 사망자와 부상자는 국민보다 대통령에게 맹종한 경찰들의 폭거가 원인이었다.
이승만의 양아들 이강석 :
부통령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은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 1957년.
4월 19일 학생혁명이 일어났고,
4월 27일 이승만은 하야했고,
4월 28일 이강석은 친아버지 이기붕(향년 63살), 친어머니 박마리아, 동생 이강욱을 총으로 쏴서 죽였고, 본인도 자살했다(23살). 이강석은 육군 육사장교.
*사진은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용서해 주실 게다.
사진에 마우스를 대고 누르면 크게 보인다.
2024. 2. 18. 토요일.
잠시 쉬자.
나중에 보탠다.
'진실은 아는 만큼만 눈에 보인다'라는 말을 다시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