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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평화교섭 (일명 대련회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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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조아 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였던 극동공화국 정부는 1921년 8월 26일경에도 일본 정부와 교섭에 들어갔다.
몇 년 동안 지속되었던 대련회담(大連會談)이라는 것이다.
이 무렵 일제를 제외한 다른 시베리아 간섭국들은 1920년경 이미 모두 철군하였고, 중화민국에서는 1919년 5·4운동 등으로 일제의 만주침략 정책 등에 반발이 거세지기 시작하여 만주일대의 악명 높은 친일군벌에 대한 반감이 증가하고 있었다.
일제가 제2의 니항사건이라고 떠들어 대던, 1920년 10월경의 훈춘사건(琿春事件, Хуньчунь Инцидент)도 일제의 거듭되는 조선·중국·러시아 민간인 대규모 학살에 대한 보복적 성격이 강하였다.
아무르강 일대의 중국인들
독립군 이만전투 추모비
아무르주 일대의 반일 파르티잔
1920. 7월경 중화민국, 미국, 영국 등이 일제의 만주 동청철도 점령과 북사할린섬 점령을 인정하지 않음을 발표하고, 1920년 8월경부터는 미국 등이 일제의 사할린섬 북부 점령을 비난하고, 캘리포니아 주내에 일본인 토지 소유를 금지하는 등 압력을 가하자
일본 역시 니항사건 배상문제·시베리아 철군·만주 동청철도·사할린섬 북부와 쿠릴열도·오호츠크해 일대 어업권·러시아 영내의 한국독립군 문제 등을 놓고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1921년경에는 볼셰비키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연해주의 러시아계 친일파들로 구성된 백파 괴뢰정부는 일제의 앞잡이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일제 시베리아 침략군과 일본정부는 극동공화국·모스크바 정부와 교전과 휴전, 교섭 등을 거듭하며 일본군의 철군 조건 등을 협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원하던 사할린섬 북부 할양, 동청철도 양도, 니항사건 배상, 한국독립군 해산 등은 「세계 무산 혁명과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을 표방하며 설립된 레닌 정부가 쉽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모스크바 정부 역시 자유시 일대의 독립군을 연해주나 한국 국경으로 진출시킬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후, 일본은 여러 국제회의들, 특히 대련(1922년 7월), 워싱턴(1921년 11월 ~ 1922년 2월), 장춘(Чанчунь, 1922년 9월 2일 ~ 26일) 회의에서 이 문제를 거듭 제기하였다.
볼셰비키 정부의 일제에 대한 양보
볼셰비키 러시아와 일본간 국교 정상화 교섭은 1925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일본은 결국 니항사건의 배상금과 동시베리아 철군의 조건 때문인지 1922년 수립된 소련(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으로부터 양보를 받아
1925년경 사할린섬 북부의 유전·탄광·삼림·쿠릴열도·어업권 등은 획득하였다.
이것은 소련이 부정하였으나 사실이다.
그러나 만주 동청철도에서는 중국·일본·러시아간의 분쟁이 있어 1929년경에도 동청철도 중동로 사건(中東路事件)이 터지기도 한다.
중동로 사건에도 소련군에는 소수의 여러 민족 군인이 있었으며, 중국 군벌군에는 북만주의 특성상 반일성격이 강하던 장병 등이 동원되어 또 한번 남의 나라 전쟁에 동원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 부근의 국경선 분쟁은 알바진 요새 전투 때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도 간도·녹둔도 문제 등등 다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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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혁명군정의회의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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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쿠츠크파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 주장하기를
1921년 8월 말경 자유시에 남아 있던 일부 독립군들이 철도로 이르쿠츠크에 도착 완료하였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독립군의 총수가 대략 1,745명이었다.
(※카프카스 기병(혹은 카자키 기병)과 중국계 군인을 제외한 수)
그리고 고려혁명군정의회는 취소되고 러시아 볼셰비키 제 5군단의 지도를 받는 동시에 일반 교육의 편의를 위하여 한국인들로 1개 여단을 편성한다.
여단장에 까란다리쉬비리(전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 군정위원장에 박승만이 선임되었다.
※ 필자의 의견 :
이르쿠츠크파 몇 명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기관으로, 러시아·만주·중국 일대의 한국인들에 대한 정부 기능과 한국 독립군 최고 지휘권을 가진다고 설립했던 고려혁명군정의회는
자유시에 모였던 독립군, 아무르 일대의 고려인, 상해파, 만주·간도 일대 독립운동 단체, 상해임시정부 등이 거세게 반발하자 바로 폐지된 것이 아니었고
아마 상해파와 관계가 있었던 극동공화국 인물들과 아무르주 현지 러시아계 공산당원의 반발도 대단하였을 것이다.
심지어 이르쿠츠크파 내부의 반발도 있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일방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고려혁명군정의회」가 간단히 폐지된 것은
대포까지 쏴대며 그 학살극을 벌렸는데 모스크바까지 보고가 되지 않았을 리가 없고, 체카와 달뷰라 등도 이르쿠츠크파가 계속해 독립군들을 “무정부주의자, 반혁명, 일제 간첩, 강도, 강간범”의 누명까지 씌웠는데 진행 과정을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려혁명군정의회 폐지와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의 퇴진은 아시아 혁명과 한국 독립운동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레닌과 모스크바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지시가 있었을 것이다.
또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최고 독립운동지도 기관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근래에는 자유시 참변의 원인을 일제와 친일 밀정들의 주장만을 골라 모아 독립군들과 조선놈들이 “무정부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감행하고, 강도질, 강간, 약탈, 살인 등을 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 이라는 사람도 있고 일부 반공학자의 사기만을 인정해 “러시아 볼셰비키가 공산 혁명 성공을 위해 일본과 공모해 학살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볼셰비키의 영웅 까란다리쉬비리의 사임
1921년 10월 3일경
여단장 까란다리쉬비리는 본직을 사면(까란다리쉬비리가 한국어를 전혀 못함으로 군대 교육에 불편하다는 이유)하고 오하묵을 여단장을 선임하고 동시에 정치부를 설치하고 정치부장에 채동순을 선임한다.
(※ 까란다리쉬비리(Каландаришвили, Несто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1876년 출생 ~ 1922. 3. 6일경 사망. 혹은 까란다라쉬비리 : Каландарашвили)는 1921년 10월경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적기훈장을 받는다.
그는 그루지아(조지아)계 러시아인으로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칼란다리쉬비리, 까란다라쉬비리」등등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1921. 5월경 고려군정의회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6월 28일 사할린부대를 기습공격하여 무력으로 무장해제시키려다가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였다.
한국 독립군 통합 부대를 조직해 일본과 싸우고자 했던 그는 1922년 3월 6일경 이쿠치야(Якутия)에서 반란군의 공격으로 사망하였다.)
여단편성
1. 여단 관리부 (참모부, 공급부, 위생부, 정치부)
2. 제 1연대
3. 제 3연대
4. 특립대대(사관학교)
5. 여단 특립연락중대
6. 특립포병소대
7. 제 2연대는 편성중에 있음
이상으로 여단을 편성하니 여단의 인원 및 무기, 마차 수량은 아래와 같았다고 한다.
1. 20개 중대 및 여단 관리사무원 총수가 2천 1백여명
(※카프카스(혹은 카자키)기마병은 본 군대를 떠나 5군단 직할로 감)
2. 대기관포 36문, 소기관포 6문, 대포 3문, 5연발 소총 2,800자루(각 자루마다에 탄환 150발), 폭발탄 1,500개
3. 말 150필
교육
사관학교 설립
1921년 10월 16일경
이르쿠츠크파 등이 계속해 문제를 삼았던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원 자금 문제에 대하여 상해파 측이 자금의 사용처 등을 러시아측에 보고한다.
이후 미지급되었던 자금은 러시아측에서 상해파로만 전달하지 않았다.
오늘날 공개된 독립운동 자료와 일제의 기록, 러시아의 기록에 따르면 이후부터 이르쿠츠크파·화요파계 등의 일부에도 지원이 된 것으로 나온다.
1921년 10월 28일경
한국인 독립군 여단 내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수업 기한은 6개월로 정하여 200명 학생을 양성하니 임시교장에 류동열, 교관에 이청천, 채영, 김승빈으로
군정위원장 선우정으로 선임되였다가 1921년 10월말에서~ 11월경 임시교장 류동열은 사면하고 동 교관 이청천이 교장을 겸임하였다.
포병과 설치(1921년 11월 6일경)
연락과 설치(1921년 11월 9일경)
각 기술과 설치 및 양성
1. 기병 교관대 34명
2. 보병척후대 45명
3. 의생 및 간호대 36명
4. 연락대 115명 (내부에 전신·전화 학생 40명)
5. 무기제조 견습생 17명
6. 음악대 28명
위의 기술과에 대하여는 제 5군단내 러시아인 교관으로 가르치게 하였다.
1921년 11월 15일경 국제공산당 상임위원회의 한국문제에 대한 결론
양파간 분쟁을 해결하고 자유시 참변을 조사할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ЦК РКП)가 아무르 사건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체포된 80명 문제를 다룰 것을 요청한다.
Док. № 69
Заключение Комиссии Президиума ИККИ по корейскому вопросу1
г. Москва
15 ноября 1921 г.
В Президиум ИККИ и в ЦК РКП
1921년 11월 28일경 이동휘의 레닌 접견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동휘, 홍도, 박진순, 통역사 김아파나시 4명이 레닌과 면담하여 독립군 석방을 탄원한다.
1921. 11. 월경부터 독립운동 단체가 「워싱턴회의」에 한국 독립 문제 제기하였으나 실패한다.
※ 과거 한국에서는 이동휘의 레닌 접견, 슈먀츠키의 국제 공산당 동양비서부장 퇴진, 고려혁명군정의회의 폐기, 상해파·이르쿠츠크파의 해체 등에 대해서 날짜와 이유 등이 잘못 알려진 점이 많았으나,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측 기록을 확인한 바 러시아 공산당 중앙과 최고 지도자의 지시도 있었다.
1921년 12월 9일경 러시아 공산당 중앙의 결정
코민테른이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지시를 받지 않고 상급기관으로 간주되는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ЦК РКП(б))」는 자유시의 포격·총격 사건을 수사할 것을 지시한다.
한국 파르티잔 처형 사건에 관한 조사위원회 구성
......중략......
소위, 아무르 사건은 한국 파르티잔들의 기억에 매우 불쾌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아무르 사건은 여전히 두 파 사이의 말다툼을 가열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서로 대립하고 있는 2개의 한국 공산주의 단체간 다툼에 있어서
한국 파르티잔 문제들은 더 재치 있게 해결했어야 했습니다.
무력으로 무장해제 시키는 것은 너무나 터무니 없는 일이었다.
12시간 동안 불필요한 대포 포격과 소총 사격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포위된 파르티잔에 대한 포격, 불신되고 바람직하지 못한 분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직접적인 범인 조사가 필요합니다.
유혈 사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그렇게 되는 방식으로 행해져야 합니다.
러시아령으로 이동해온 유명한 한국 군인들, 불행히도 동양비서부의 슈먀츠키 동지가 대표하는 코민테른의 역할은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객관성이 필요했으나, 기본적인 분파적 다툼을 해결하는 것조차 실패했습니다.
아무르 사건은 파르티잔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보복 방법이었습니다.
따라서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자료에 국한되지 않고 이 사건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지시한다.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정 중략.......
1921년 12월 18일경(혹은 12월 20일경)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의 형식적인 퇴진과 동양비서부 폐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와 바이친스키가 한국 독립운동 분야에서 형식적인 퇴진을 발표한다.
바이친스키는 한국 공산주의 운동과 관련된 분야에서 이 때 당시에는 물러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다.
슈먀츠키는 1922년 1월경부터 1925년 1월경까지 페르시아(이란) 주재 전권대사 및 무역대표를 하다가. 1926년 말부터 2년가량 공산주의 동방 노동자 대학 총장을 지냈다.
그 이후에는 한국 독립운동과는 별 관련이 없다.
그리고 슈먀츠키가 수장이었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역시 다른 부서로 대체되며 폐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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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쿠츠크 독립군 2,000여명의 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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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 1월경
러시아 내전에서 활약은 했다는 데 일본군과의 교전기록을 아직도 찾기 힘든 여단장 오하묵이 이끌게 된 이르쿠츠크의 1,400여명에서 ~ 2,000여명의 독립군 부대는 러시아 대기근과 겨울이라는 곤란에 부딪친다.
(이르쿠츠크파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 주장하기를)
1921년 말부터 1922년 초쯤
러시아 정부 군부에서 이르쿠츠크에 있는 고려 군대에 대하여 1922년 1월 1일부터는 고려 자체에서 공급 문제를 해결하라 하였기에 공급의 곤란이 발생하자,
1922년 1월 동양대회에 참가한 고려혁명 23개 단체대표에서 고려혁명에 대한 원조 및 군대에 대한 위급문제를 볼셰비키 정부 외교부와 교섭하기 위하여 대표단에서 교섭단원으로 4인을 선정하여 외교를 진행한 결과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의 소개로 볼셰비키 정부 외교부에 교섭한 결과 희망이 있었다고 한다.
첫째 군대 문제에 대한 요구는 현재 무장과 또는 다소 활동비 기십만원을 원조하여 연해주 즉 중로국경까지 출동시켜주던지 불연(不然)하면 일난(日暖)을 기다리기 위하여 1922년 5월까지 극동공화국 영내가 아닌 러시아 볼셰비키 정부 지대에 주둔케하고 전과 같은 공급을 요구한다는 것을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에 건의하니 동양비서부에서는 위 요구에 대하여
“고려공산당 임시간부의 승인을 득하라” 하였다고 한다.
임시간부 중 한명이 이 무렵 모스크바 쪽에 도착한 이동휘였다.
즉 이르쿠츠크파만을 지원하던 동양비서부가 앞으로는 상해파와 무슨 일이든 협의를 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것은 한국 독립운동에 공헌은 없고 「자유시 참변」이라는 해악을 남긴 슈먀츠키가 퇴진하고 러시아 공산당 중앙의 지시에 따라 일어난 것이다.
이르쿠츠크파에서 주장하기로는
이것은 무산혁명을 인도하는 국제공산당에서 고려 민족혁명을 원조함은 역시 세계혁명을 운전함에 긴요한 도화선을 구함이니 민족혁명도 후원함은 물론이거니와 고려에 공산당이 있기 때문에 그 공산당의 정견에 따라 후원하겠다는 제 3국제공산당의 정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동휘는 이 무렵 이르쿠츠크로 이동한 독립군 부대의 개편을 원한 것으로 보인다. (※ 임시간부 중 이동휘, 홍도외 간부 6인은 원동에서 도착 전이었다고 한다.)
이르쿠츠크파에서는 교섭단원의 동의만으로 볼셰비키 정부 군부에 교섭하여 군대에 대한 공급을 5월 15일까지 연기한 것으로 주장하지만, “잘 된 것은 자기가 다 한 것”이라 말하는 이르쿠츠크파의 주장인지라 사실이라고 믿을 수는 없으며,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 정부 문서에 따르면,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한 한인 대표중 일부가 이르쿠츠크로 이동한 독립군 2,500여명에 대한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나옵니다.
이르쿠츠크 독립군 부대의 반발
그리고 이르쿠츠크 독립군 부대에서도
류동열, 이청천 외에도 채영, 이다물, 황하일, 송세주, 김표돌 등 14명 이상이 오하묵 등의 전횡에 반발하기 시작한다.
자유시 참변이 반발의 원인이 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1922년 1월 극동인민대표대회
1922년 1월 21일경부터 2월 2일경까지 러시아 서울인 모스크바와 산크트피졔르부르크에서 「극동인민대표대회(Съезд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их и революционных организаций Дальнего Востока)」가 개최된다. 혹은 「동양인민대표대회」라고도 한다.
한국의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등 독립운동관계자들이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운동 방향을 토론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 대회의 참석자는 대략 150명 정도였으며, 한국대표단은 여운형, 이동휘, 김규식, 박헌영 등 23개 단체 52명 정도로 알려졌다.
한국의 저명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참석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고 러시아 내전이 안정화되기 시작할 무렵의 러시아가 한국의 독립운동과 사상계, 그리고 현대사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큽니다.
러시아 공산당 중앙의 지도하에 코민테른(제3 국제공산당)이 개최한 이 대회에는
볼셰비키 지도자들인 레닌, 트로츠키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장 : 지노비예프
코민테른 총비서 : 사파라프
동양비서부장 : 슈먀츠키 (자신의 퇴진결정에 반박하기 위해 온 것으로 보인다)
등이 참석하였다.
이 대회 기간중 레닌,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중국·일본 등의 대표들과 한국 대표들의 만남이 있었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의 지도자 레닌, 코민테른 총비서 사파라프(Сафаров),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이었던 슈먀츠키, 김규식, 여운형, 구오남, 홍범도, 일본대표 센카타야마(片山潜), 중국대표 왕, 인도대표 등의 만남이 있었고, 한국측 통역사는 최고려였다.
1922년 2월 17일경
이르쿠츠크의 한국인 여단을 고쳐 특립 연대로 줄이고 연대장은 오하묵이 군정위원장은 박승만을 그대로 임명하였다.
그 무렵 근무 장교가 137명, 군인 총수가 1,451인이었다고 한다. (병노자를 제대시켰다고 한다.)
이르쿠츠크파에서 주장하기를 한국인 독립군 여단을 다시 연대 편제로 줄인 이유는 처음부터 여단 병력 규모에 부족한 군인수로 여단을 편성하는 것은 허장에 불과하고,
또 기관 시설 및 공급상 어려움을 감안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세계 신문상 보도와 같이 몇천만여명의 기민(飢民)이 도로에 전전하는 그 지대에서 검정떡 한쪽이라도 고려인들에게 여유롭게 주지 못할 것이며,
세계혁명을 원조하는 볼셰비키 정부가 아니면 군복 한벌을 고려 군대에 지급할 리가 만무할 것이라 한다.
이르쿠츠크 독립군 교육의 어려움
즉 대기근과 경제침체에 시달리던 러시아 볼셰비키 측의 독립군 병력 감축 요구가 있었던 것이다.
대략 1921년 8월말경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여 10월 28일경 군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 교육에 나섰을 때는 이미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의 겨울이었고 야외활동이 불가능한 시기였다.
1922년 2월 17일경 한국인 여단을 연대로 축소하기까지 제대로 된 군사 교육이 불가능하였고 실내 교육, 사상 교육, 한글·러시아어 교육에 집중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르쿠츠크파에서 주장하기를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독립군 부대의 욕망만을 추구하는 것은 양심상 고통이 있는 시기였고
이와 같은 형세에 있음에도 원조를 주려는 볼셰비키 정부와 원조를 받으려 하는 고려군대 서로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여만 하는 것이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 성공이후 세계를 놀라게 한 러시아 볼셰비키들의 정신상 지도를 받는 일반 교육은 만족할 수 있었으나, 몇 년간의 내전에 따른 대기근 시기 식량 등의 공급은 원활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르쿠츠크에서의 독립군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 무렵 볼셰비키 러시아도 유럽쪽의 내전은 끝난 형편이었으며, 동시베리아 지역의 일본군 철군만이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군인수를 줄여 생업에 투입하여 수년에 걸쳐 급감한 경작지 등을 회복하고 산업생산을 복구하려고 노력하던 시기였다.
이에 따라, 물질상 공급에 대한 경비 축소를 연구함도 러시아 볼셰비키의 지도를 받아야만 했던 이르쿠츠크파로서는 어쩔 도리 없이 따라야만 했던 것이다.
즉 이르쿠츠크에서의 독립군 병력 감축은 러시아 대기근에 따른 식량난과 경제침체, 일본과의 평화교섭 등 때문이었다.
한인의용군사회(韓人義勇軍事會) 등 조직
1921년 7월경부터
자유시 참변의 참화를 피해 탈출한 이용, 김규면 등이 연해주로 돌아와서 「한인의용군사회」를 조직한다. 혹은 「제3차 군정위원회」, 「군정의회」 라고도 한다.
김홍일, 김규면 등의 주장에 따르면,
연해주 있던 독립군외에도 자유시 참변에서 탈출해온 독립군들이 증가하여 위원장에 김규면, 사령관에 이용, 1중대장에 임표, 2중대장에 김홍일, 3중대장이 한운용 등이었고 총 병력은 300여명에서 ~ 1,500여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자유시에서 살아서온 박일리야 등도 가담한다.
과거 자유시에 있던 사할린 의용대중 니항부대는 100여명 정도가 연해주 독립군에 복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광복군 출신의 진술에 따르면 이 무렵 김홍일의 활동은 대단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으나 러시아에서 작고한 김규면, 리인섭, 최계립, 김승빈 등은 김홍일이 독립군에 가담하였음을 확인하였습니다.
1921년 겨울에는 상해파 측에서 이르쿠츠크파에 보복한다는 소문이 나돌며, 중국에서 이르쿠츠크파 이성(李聖, Ли Сенг)이 상해파의 총에 맞았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1921년 10월말경 극동공화국·일본간 대련회의 결렬과 일제의 발악
일본과 극동공화국간의 대련회의가 결렬되어 연해주 일대에서 일본군·백파와 볼셰비키 간의 전투가 다시 벌어진다.
(1925년 1월 20일경 북경에서 소련·일본 간의 조약이 체결 될 때까지 수십차례 이상이 교섭이 더 있게 된다.)
1921년 11월 14일에서 ~ 18일경 연해주 올가(Ольга)에서 전투가 발생하여 독립군 신용걸 등이 전사한다.
1921년 12월 4일경 이만 전투에서 한운용 등 수십여명의 독립군이 전사한다.
이만(Има́н, 현재명칭 : 달네레첸스크)과 인(Ин) 전투에서 전사한 의용군수는 대략 78명 정도라고 한다.
홍범도 등의 독립군 재판 참여
(※ 이르쿠츠크파 문건인 「붉은군사」 제2호. 1921. 12. 24자 「중대사건 판결」 및 2023년 8월경 한국 방송 뉴스 보도 등에 따르면)
「1921년 11월 27일로 ~ 30일까지 4일 동안에 고려혁명군법원은 재판위원장 채동순, 위원 홍범도, 박승만 제동무가 출석하여 금년 6월 28일 자유시 병변에 범죄자 50명을 판결하였는데 세 사람은 2개년, 다섯 사람은 1개년 징역에 처하고, 24인은 일개년 집행유예에 처하고 17인은 방면하야 군대에 보내여 종사케 함.」
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이르쿠츠크파 문건이라 일방적으로 믿을 수만은 없다.
동시베리아 내전의 볼라차예프스키 전투(Волочаевский бой)
(※ 하바로프스크 인근의 볼라차예프스키 지역은 여러개의 명칭을 가지고 있다.)
1921년 12월 23일경 극동의 대도회 하바로프스크 시를 백파군대가 다시 점령한다.
1922년 2월 5일경에서 ~ 14일경 하바로프스크 인근 볼라차예프스카야 전투(Волочаевский бой)에서 한국 독립군 수십여명이 전사한다.
1922년 2월 14일경 극동의 대도시 하바로프스크는 결국 볼셰비키가 탈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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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말에서 1922년 초쯤 자유시 참변 이후 만주·간도로 귀환한 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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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기록에 따르면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중 최소 2천여명 이상은 러시아령 연해주가 아닌 북만주 등을 거쳐 만주나 간도로 돌아간 것으로 나온다.
자유시 참변에 관련되었다가 만주·간도로 생환한 독립군
(※ 출처 :
1. 하르빈 일본 총영사관 작성, 기밀(機密) 제15호, 「不逞鮮人의 行動 및 共産黨員 連絡에 관한 件」. 1922년 3월 20일.
2. 하르빈 일본 총영사관 작성, 기밀 제17호 「不逞鮮人 各 團體 및 共産黨 調査報告의 件」. 1922년 3월 20일.
3. 간도총영사관 작성, 기밀 제500호, 「間島부터 노령으로 옮긴 不逞鮮人團의 末路에 관한 건」. 1921년 12월 1일.)
부대명 | 주요 인물 | 활동지역 | 자유시 참변 직후 현황 |
(1) 국민회 | 구춘선, 이봉우 | 만주·간도 | 500명 |
(2) 군비단 | 이희삼, 윤덕보 | 만주 | 400명 |
(3) 광복단 | 김성원(김성구), 황만실 | 만주 | 500명 |
(4) 신민단 | 김성배, 유봉득 | 만주, 연해주 | 900명 |
(5) 로농회 | 조응순, 권중선(권중전) | 만주 | 800명 |
(6) 공의단 | 엄준, 심영택 | 노령, 만주 | 1,500명 |
(7) 태극단 | 임석우, 박대성 | 만주 | 200명 |
(8) 농무회 | 김직묵(김직점), 김기형 | 만주 | 1,000명 |
(9) 의민단 | 방우룡, 김연원 | 북간도, 만주 | 450명 |
(10) 청년독립단 | 정태선(정일선), 장민준 | 만주 | 600명 |
(11) 야단 | 오석영, 윤좌형, 김소래 | 만주, 중동철도 | 800명 |
(12) 청년단 | 김승만, 박춘근 | 만주 | |
(15) 대한독립단 | 박장호, 이웅해 | 만주 | |
(16) 군정서 | 현천묵, 김좌진, 박영 | 만주 밀산현 | 노령과 만주에서 독립운동 |
(17) 혈성단 | 김국초 | 흑룡강성, 만주 | |
로령 거주 (만주로 미귀환) | 홍범도, 오하묵, 김하석, 이청천, 채영, 강규창, 박일리야(朴イリア) | 러시아령내 | 이청천은 나중에 만주로 귀환. 박일리야·채영은 만주 및 노령에서 활동 |
※ 위 표는 일제의 자료를 참고하여 자유시 참변과 관련된 독립운동 단체를 중심으로 정리된 것이며,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1922년 말경 러시아 간섭 전쟁의 종료와 러시아내 독립군 부대의 해산
1919년 3·1운동 전후 노령 연해주 일대의 독립군 부대들은 대부분 볼셰비키와 관계가 있었으며, 간섭전쟁이 끝나자 러시아 영내의 독립군 부대들은 오하묵, 김승빈, 전희세, 유익정 등의 소수를 제외하고는. 1922년 말경 볼셰비키에 의해 대부분 해산되었다.
김좌진, 안무, 구춘선 등 연해주로 피난 왔던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해산에 불응하고 만주나 중국으로 돌아간 독립군들도 많다.
러시아령 연해주에서의 김좌진 장군
니항사건, 4월참변,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간도참변, 일본군의 민간인 학살시기,
오늘날 한국의 일부 작가들은 김좌진(1889~1930) 등은 볼세비키에 적대적이었다고 하나 실제 김좌진을 만나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청산리 전투 당시 이범석(1900~1972)의 역할에 대해서도 자유시 사건에 집결한 독립군들은 대부분 니항사건, 청산리·봉오동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범석이 청산리 전투의 주요 지휘관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이범석이 쓴 회고록 「우등불」에서 주장한 역할은 하지 못했지만, 청산리전투에 참가한 사실은 대부분 인정하였다.
1922년경 러시아 지원 자금 문제
러시아가 지원한 금화 40만 루블이 레닌이 약속한 금화 200만 루블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나머지 약 1백 40만 ~ 1백 60만 루블을 받기 위해, 김규식(金奎植) 등이 직접 레닌 정부와 교섭하기도 했으나 실패한다.
1922년 4월 22일경 국제공산당 상임위원회의 상해파 복권 결정
코민테른(국제공산당) 상임위원회 한국문제위원회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지도하에 이르쿠츠크파가 1921년 5월 4일경부터 ~ 5월 17일경 폐회할 때까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제1차 대회 개최하여 고려혁명군정의회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까란다리쉬비리, 의원에 류동열, 최고려 등을 임명 할 때)
제명된 (주로 상해파의) 모든 당원을 복권하고, 박진순·박애·최고려·김규식이 퇴진하며, 두 세력의 통합을 위한 3개월의 실천기간을 가지기로 결정한다.
※ 출처 : Док. № 85 Постановление Комиссии Президиума ИККИ по корейским делам г. Москва 22 апреля 1922 г.
상해에서의 여운형 등의 활동
1922년 5월 10일경 여운형 등은 상해에서 국민대표대회 준비위원회의 활동을 부활시킨다.
상해 임시정부의 내분사태를 개탄하는 모든 인사들의 공감하였다.
그리고 한형권이 모스크바에서 자금을 가지고 오자 국민대표대회는 열릴 수 있었다.
1922년 5월 중순부터 수개월간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구성된 임시 연합 간부회의가 시작된다.
결국 겉으로는 파쟁을 중단하고 통일된 공산당 조직에 합의를 한다. 그러나 양파에서는 서로 자기파의 세력 확장에 노력하고 있었다.
8월경에는 연해주 송전관(松田關, 솔밭관) 등지에서도 문창범, 이중집, 오주혁, 이범윤, 이표(李杓), 윤기영, 김승덕, 김석훈, 홍범도, 백림, 김좌진, 이용, 김승덕, 김하석, 이동휘 등의 회의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동아일보 1922. 9. 19자 3면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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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8월경 아무르주 우수문 노역장에서의 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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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해 독립신문 1922년 8월 1일자 제2면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 블라가베셴스크로부터 철도선로로 서북방향으로 사백여리를 떨어진 우수문 산속에서 벌목정정의 노역하는 2,000여명의 독립군은 무삼 죄역(罪役)인지 아모도 알지 못하는 바이나 작년 흑하 참변시에 독립군 이백여명을 포로로 하야 벌목 징역을 식한 바 이것은 이미 해방하기로 작정(酌定)되엿으나 아라사(러시아) 당국은 이르쿠츠크파(伊市派)의 무함(誣陷)과 또난 군용차(軍用車)의 화목을 빙자(憑藉)하고 1년간이나 무임(無賃)의 노역(勞役)을 식켓더라
더욱이 원통한 것은 앞에 작성한 노동대(勞働隊) 가운데서 도망하야 중국령지방(中領地方)을 러시아지방(俄領地方)인 줄 알고 잘못 도달한 즉 중국 육군은 이를 궁당(躬黨, 볼셰비키 군대 赤軍)이라 하고 20여명을 총살하고 겨우 5명은 러시아촌에 와서 야간에 떡을 걸식(乞食)하려 하다가 절도(竊盜)의 혐의로 촌민의 포격(包擊)을 당하야 피살된 일이라더라
(소왕영 통신원경)
(※ 일부 표기를 요즘의 표기로 수정하였습니다.)
......독립신문 보도 끝......
1922년 7월경에는 연해주의 이용, 김규면, 박일리야 등이 지도하던 상해파측 독립군 부대에 이르쿠츠크파인 박창인, 김춘선, 심상구, 최미하일 등이 가담하자 또 양파의 분란이 발생한다.
이 때의 분란으로 이르쿠츠크파에 의해 일부 독립군들이 우수문 노동병으로 수감된다.
그들은 극동공화국 군부의 지시로 1922년 8월 9일경 석방되었다. (이르쿠츠크파 문건인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98쪽 등)
결국 1922년 8월경에 이르러서야 우수문 노역장에 수용되었던 자유시참변 포로 및 연해주 독립군 수백여명에서 ~ 2,000여명이 석방되기 시작한 것이다.
파벌싸움의 무서움은 이것이다.
러시아 공산당 중앙의 석방 지시까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양비서부, 슈먀츠키, 채동순, 박승만, 오하묵, 최고려 등은 시간을 끌며 석방조차 시켜주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이르쿠츠크파 문건을 읽거나 자유시 참변, 니항사건에 가담한 사람들의 글을 읽을 때는 반드시 철저한 검증과 사실여부 확인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실제 조금만 비교검증하면 허위 주장한 부분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르쿠츠크 독립군 부대의 원동 이동
이르쿠츠크 볼셰비키군 5군단 산하에 있던 독립군 부대는 대기근과 독립운동 노선 갈등 등으로 줄어들기 시작하여, 결국 류동열, 이청천 등도 이탈하였다.
볼셰비키 러시아 군부, 극동공화국 군부와 이르쿠츠크의 고려인 부대를 원동으로 이동시키기로 타협하여. 1922년 8월 15일경부터 원동으로 수송하였다.
그리고 같은 시기 장교와 군인중 주로 오하묵의 자유대대 출신으로 선발한 70여명은 수학키 위하여 모스크바로 보내고, 노약자로 제대한 군인 500여명은 각기 지원에 의하여 원동 각지로 출거하였고, 정식 군인은 고려특립연대로 원동 모처에 주둔케 하였다.
※ 출처 :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94쪽)
일본군 측 자료에 따르면 이 때 이르쿠츠크에서 하바로프스크 쪽으로 이동한 독립군 병력이 대략 1,200여명 정도라는 설이 있다.
일본군의 연해주 철군 준비
이 무렵 연해주에서는 일본군과 볼셰비키 간의 격렬한 전투가 없었다.
백파 군대의 상당수도 친일파 장작림이 장악한 만주로 후퇴한 상황이었다.
독립유공자 최호림·이지택 등이 주장하는 「이르쿠츠크파 독립군의 활약상」은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입니다.
1922년 10월 8일부터 ~ 9일까지의 연해주 스파스크 전투(Спасская операция (Штурм Спасска))에서도 고려인 부대의 활약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르쿠츠크 독립군 부대의 감축
원동으로 이동한 이르쿠츠크 독립군의 다수는 일본군이 동시베리아에서 철군하자, 러시아의 병력 감축에 맞추어 규모가 축소된다.
오하묵을 비롯한 장교 등과 모스크바 등지에서 교육 받은 사람은 소련 정규군으로 편입되었다.
결국 이르쿠츠크로 이동했던 독립군 부대는 일제와의 전투에 앞장설 기회를 갖지 못했다.
임진왜란 때 같으면, 아무리 과오가 있는 자라도 왜놈의 수급을 가져오면 면천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유시 참사를 일으킨 몇몇이 독립전쟁에 나가 조국독립의 염원을 입증하지 못하고 최호림·최고려·오하묵·채동순 등과 같은 일부가 입으로만 주장한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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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침략군의 시베리아 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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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1922년 10월말경 동시베리아에서 철군한다.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 1922년 10월 25일경 극동공화국 군대가 다시 진입한다.
연해주에 잔존하던 러시아 내전 백파 군대의 상당수가 중국령 혹은 만주 등지로 탈출한다.
캄챠카 반도도 1922년 11월경 볼셰비키 군대가 해방시킨다.
1922년 11월 14일경 극동공화국 의회는 극동공화국을 해산하고 소련(1922. 12. 30일경 수립)에 가입하기로 한다.
일본군은 이제 사할린섬 북부만 점령하고 있게 된다.
1922년 10월 베르흐네우진스크 대회
1922년 10월 19일부터 ~ 10월 29일경까지 베르흐네우진스크(울란우데)에서 국내외 각지역 대표 등을 포함한 고려공산당 연합대회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연해주에서의 일본군 철군 등으로 인해 상해파 측 인원이 더 많이 참석하자 결의방법과 대표 자격 문제 등으로 이르쿠츠파가 이탈하여 실패한다.
※ 출처 : Док. № 86 Доклад Нам Ман Чхуна в Дальневосточный отдел ИККИ
Г.Н. Войтинскому о съезде корейских коммунистов в г. Верхнеудинске (Улан-Уде)
Док. № 89 Письмо Ли Дон Хви, Юн Чжа Ена и Ким Шен У В.И. Ленину
с жалобой на действия Г.Н. Войтинского и на непризнание
Исполкомом Коминтерна решений Верхнеудинского съезда ККП1 )
1922년 11월경 한형권이 러시아 자금을 가지고 상해로 온다. (이 자금은 국민대표회의 자금으로 이용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때의 자금은 러시아측에서 한국 민족 운동의 연합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한국 공산주의자에게만 지급한 것은 아니다.
1922년 말경 코민테른의 개입과 양파 고려공산당 해산
1922년 말경 코민테른에 의해 두 파 고려공산당의 해체 결정이 내려진다.
이후 러시아, 중국, 만주, 한국, 일본 등지로 오가면서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대체로 1개 국가의 공산당에 가입하기를 권유 받는다.
1922년 11월경 블라디보스토크의 코민테른 집행위원회(Исполнительный комитет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го интернационала(ИККИ)) 극동국에 고려국(高麗局, 꼬르뷰로, Корбюро, Корейского бюро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го отдела, 혹은 고려총국)의 설치가 결정되어 1923년 2월경 활동을 시작한다.
의장은 바이친스키였으며, 이동휘, 한명세, 김철훈 등이 참가한다.
※ 출처 : 러시아 국가 사회 및 정치 역사 기록 보관소(РГАСПИ). Ф. 495. Оп. 135. Д. 73. Л. 261-265.
Док. № 109
Докладная записка Ли Дон Хви в Исполком Коминтерна о разногласиях в Корейском бюро и с предложениями по изменению его состава
г. Владивосток 17 ноября 1923 г. )
적기단 조직
1922년 말에서 1923년 1월경 명칭은 공산당과 흡사하나 실상은 조선 독립당의 별동대인 적기단(赤旗團)이 사회주의자, 김좌진 등 민족주의자, 야소교인들이 가담하여 만들어진다.
「조선일보 1923. 1. 20. 자 보도」,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 1923. 5. 3일자 3면 보도」
국민대표회의
1923년 1월 3일경 상해에서 독립운동계를 통합하고 독립운동 방법 등을 협의하기 위해 70여개의 독립운동단체와 각지역 대표 160여명이 모인 「국민대표회의」가 개막되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분열
1923년 5월에서 ~ 6월경 국민대표회의내 창조파 등이 상해임시정부를 대체하는 새로운 독립운동 통합 조직을 만들려고 시도한다.
※ 출처 : 독립신문 1923. 12. 5일자 보도내용. 동아일보 1923. 6. 15. 일자 3면 보도내용 등
1923년 6월에서 ~ 8월경 창조파 일부 등이 새로운 정부 성질의 독립운동 단체를 러시아에 세우려고 블라디보스토크(해삼)에 갔으나 실패한다.
(상해 독립신문 1923. 9. 1. 일자 보도내용, 신한민보 1923. 10. 11일자 보도내용)
1924년 4월경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국(꼬르뷰로)은 해체된다. 1924년 초부터 고려공산당창립대표회 준비위원회(조직국, 오르그뷰로, Оргбюро)가 만들어진다.
※ 출처 : 러시아 국가 사회 및 정치 역사 기록 보관소(РГАСПИ). Ф. 495. Оп. 135. Д. 94. Л. 9-12. Машинописная копия
Док. № 118
Полномочия и задачи Бюро по созыву Учредительного съезда ККП1
22 апреля 1924 г.)
1925년 3월 3일경 코민테른(국제공산당, 제3 인터내셔널)의 지적
1925년 3월 3일경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자유시 참변이 한국 문제에 많은 문제를 일으켰음을 지적한다.
......중략......
1921년 러시아 영내의 한국 독립군 무장 해제는 수많은 모순을 조성했다.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분파 투쟁을 격화시켰다.
또 러시아내 조선인의 분파투쟁은 혁명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후략......
※ 출처: 러시아 국가 사회 및 정치 역사 기록 보관소(РГАСПИ). Ф. 495. Оп. 135. Д. 104. Л. 32-34. Машинописный текст, подлинник.
Док. № 130 Проект тезисов ИККИ по корейскому вопросу
г. Москва 3 марта 1925 г.)
그리고 1925년 4월경에는 형식적으로나마 국내외의 여러 파를 통합한 성격의 조선공산당이 만들어진다.
한국 현대사에서 좌익계 사회주의 운동의 겉으로 통합된 조직이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1925년 5월 14일경 사할린섬 북부의 일본 군인들은 철군한다.
1925년 9월경 소련과 일본의 수교 이후 서울에 소련 영사관이 설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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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 러시아령의 한인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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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주로 인터넷 사이트 : 고려사람 https://koryo-saram.ru)
「소련」이라는 나라의 수립
극동에서의 러시아 내전은 1922년 말경에 끝났고. 1922년 12월 30일 한국에서 「소련」이라고 부르던 공산주의 국가가 성립되었다.
소련 정부는 처음에는 한국인들에게 하였던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공산주의 이상에 따라 소련은 처음에는 매우 진지한 국제주의를 보여 주려고 했다.
1920년대에는 고려인 공산당원, 고려인 장교 (또는 「소련군 장교」이라고도 함), 고려인 공무원 등이 등장했다.
한국인들에 대한 자치 허용
러시아령의 여러 지역에서 한인(고려인) 마을 의회가 창설되었고 한국인들은 병역의 의무를 한국인 부대에서 복무했다. (소련군 76연대)
많은 교육 받은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이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과 정보국에서 일하도록 파견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세계혁명과 소수민족 해방의 국제적 슬로건에게도 불구하고 소련은 1920년대 한국인의 러시아 영토내 이주를 항상 도와준 것은 아니며, 우려하는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하였다.
연해주 일대의 고려인 밀집 지역
한국 농민들이 토지를 받고 연해주 지역에 새로운 한국 학교가 열리기 시작했고 (1930년대 초까지 300개가 넘었다), 한국 교육 대학이 우수리스크에서 운영되기 시작했고, 한국 극장이 설립되었으며, 한국어 신문이 연해주에서 발간되었고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후에도, 지금까지 “고려일보”라는 이름으로 카자흐스탄에서 계속 출판되고 있다.
연해주의 한국 교육기관
1930년대 중반, 블라디보스토크에 한국 교육원이 설립되어 당시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고등 교육 기관이 되었다.
(일제의 지배를 받던 한국 내에서는 대학 교육이 일본인을 중심으로 친일파·부르조아 계층을 위주로 일본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일제에 적극 협조한 한국인은 수두룩했다.)
소련의 공산당은 「소수 민족」을 지원하는 공식 노선에 따라 소련내 한국인들 사이에서 「민족 간부」를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아무르강·우수리강·두만강·몽골 일대 국경 봉쇄 시작
1925년경 외교 인민위원회(외무부의 기능을 함)는 「한국인과 중국인이 소련 영토로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명령했다.
1929년 세계 대공황시기에 소련으로 이주했던 많은 미국, 유럽인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소련내에서의 이주와 직업선택이 항상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만주의 친일군벌, 일본 괴뢰인 만주국, 일제 식민지 조선과의 국경 문제
만주의 친일파(장작림·장종창·장학량 정권과 그 후신)들과 소련은 「1929년 동청철도 중동로 사건」과 국경분쟁이 있어왔으며. 1930년경에서 연해주 지방정부와 소련 중앙정부 등에 의해 러시아와 한국, 중국 간의 국경 출입은 더욱 엄격해졌다.
일제의 괴뢰인 만주국 수립과 국경 폐쇄
1931년 이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여 아무르강·우수리강 등을 중심으로 소련과 국경을 접하게 되자 국경을 넘는 불법 이동과 이주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 물론 소수의 불법적 이동은 항상 있었다. 요즘도 각종 밀엽꾼들과 밀수꾼들, 탈북자 등이 활발하게 활동한다.)
이 때부터 러시아 영토에서 간도, 만주, 한국땅으로 독립군이 공격해 오거나 러시아 영토로 대피하는 것이 급격히 줄어들었으나, 소수의 항일 유격대들은 1945년 8월 소련군의 만주국 공격 전까지 국경 일대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오늘날에도 중국, 한국, 러시아, 몽고 국경을 이루는 아무르강, 우수리강, 압록강, 두만강 등의 경비는 삼엄하다.
심지어 종종 국경을 넘다가 사살되는 사람도 있다.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1937년 극동의 고려인들 약 17만에서 ~ 23만여명 정도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참상은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
연해주 일대의 고려인 밀집지역과 1937년 강제 이주후 중앙아시아에서는 20세기 초에 평범한 고려인들은 러시아 말을 몰라도 농민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
고려인 상점에서 물건을 사고, 한국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한국 노인들과 소통하고, 한글(한국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무렵의 고려인들과 러시아·우크라이나·중앙아시아·시베리아·중국 등 다른 민족과의 혼혈은 매우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후 수 세대가 지남에 따라 한국어를 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줄어들었고, 후손들은 러시아쪽 문화에 동화됩니다.
이것은 중화인민공화국령 간도·만주지방 거주 조선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르주 인근 거주 고려인들에게도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은 자연스럽게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1921년 6월 28일 발생한 자유시 참변은
외세 침략주의자들의 야욕과 일제의 앞잡이가 득세하던 어둠의 시기,
조국 독립의 일념으로 러시아령 시베리아 아무르주 자유시 일대에 모였던 독립운동가들에게 일어났던 참변이다.
자유시에 모였던 다양한 독립운동가들과 여러 이념으로 뭉쳐진 여러 사람들이 다퉈 동지에게 총을 쏘는 생지옥의 참극을 연출하였다.
그리고 자유시 참변 이후에도
자유시에서 경험하였던 여러 가지 민족, 종교, 이념, 정치체제 등의 내부적 문제는 한반도의 분단과 한국의 반공정권 수립, 북한의 독재체제 등과 겹쳐져 1991년 소련 붕괴시까지 쉽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첫댓글 일제가 소련으로 부터 양보를 받아 사할린섬 북부의 유전.탄광.삼림.쿠릴열도.어업권 등을 획득하였군요
예. 그렇습니다. 요즘 한국도 베링해, 오호츠크해 어장 아니면 명태, 대게 등을 잡아오기 힘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