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한 삶 (외 1편)
장수진
끝없이 내린 첫눈 속에 잠긴, 작은 짐승. 곁에는 수분이 바싹 마른 수국 한 묶음이 쓰러져 있다. 이 거리의 오래된 소설, 영화, 편지, 시는 끝났다. 너는 오늘도 사라진 흑백영화 속에서 무언갈 찾는다. 익숙한 골목과 재킷, 슬로와 폭발. 끝에 파도가 쳤지. 주인공의 볼품없는 몸이 훤히 드러난 그 장면에서 너는 계급과 인종에 대해 잠시 생각했지만 결국엔 파도가 아름답다고 느꼈고, 그 파도만 보게 되었다. 파 도 파 도 미 도. 단순한 멜로디를 즉흥적으로 흥얼거리며 너는 파도를 이끌고 가는 여인의 모습을 보았다. 짧은 팔, 굵은 목, 뜻밖의 단정한 말들 소진된, 사람들. 비닐장갑 위에 놓인 병든 아버지의 불알처럼 너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면을 살아간다. 간판만 남은 영화관에 쪼그려 앉아 팥빵을 문지르던 금 간 손과 멋없는 금은방, 두엇 앉은 벤치, 두엇 누운 공원 주변을, 죽음, 죽음, 곱씹으며 걷는다. 안개 낀 겨울의 날씨, 가벼운 눈발에 쓸려 귓불에 피가 번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안부를 물으려 했는데… 숨길 수 없는 나의 얼룩, 당황하려나… 굶주린 들개라도 껴안을 수 있다면… 시시한 시 허풍을 떨면서도 어쩌지 못했다. 그 딱딱한 허무를. 한참을 헤매다 도착한 작은 정원에서 언 사과를 콱 깨물어 먹던 순간에 너는 정갈한 도서관이나 심리상담, 복지, 공부, 이런 것들을 생각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래를. 고요하고 깨끗한 겨울나무 곁에서. 오늘 아버지는 네가 만든 커다란 식빵에 한 손을 찔러 넣은 채 새로운 문장을 말씀하신다. “얘야, 그 오븐을 끌어다 내 무릎을 좀 덮어주겠니. 날이 춥구나.”
밤의 기원
긴 여행 끝에 눈의 흰자마저 검게 타들어간 그들은 허겁지겁 기도를 올린 후 목을 축이듯 불을 삼켰다 불에서는 천궁의 향이 났다 캄캄한 달콤 작은 불길과 함께 혀가 치솟았다 사라진 자리에선 달이 부풀었다 낮의 풍경이 지워진다 밤은 미래보다 얼마나 오래된 것인가 그들은 장식성을 배제한 단순한 합창으로 회당을 울렸다 —시집 『순진한 삶』 2024.3 ---------------------- 장수진 / 1981년 서울 출생. 2012년 《문학과사회》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사랑은 우르르 꿀꿀』 『그러나 러브스토리』 『순진한 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