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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49,8-15
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내어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재산을 다시 나누어 주기 위함이며
9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10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11 나는 나의 모든 산들을 길로 만들고 큰길들은 돋우어 주리라.
12 보라, 이들이 먼 곳에서 온다.
보라, 이들이 북녘과 서녘에서 오며 또 시님족의 땅에서 온다.
13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14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15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5,17-30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17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23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27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자타에서 병자를 고쳐주셨는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를 보고 문제 삼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요한 5,1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것의 정당함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고 하시며, 세 가지 중요한 말씀을 주십니다.
첫째는 그 하시는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아버지께서 행하신 것을 아들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곧 이 지상에서 하시는 당신의 일에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는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요한 5,19)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 아들이 기뻐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아들에게 재판권을 위임하시고,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일하십니다.
곧 사랑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아들의 일에 있어서의 아버지와의 연합은 사랑의 연합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 아버지와의 사랑의 연합에서 하셨듯이, 우리도 일할 때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연합으로 일해야 할 일입니다.
둘째는 하느님께서 먼저 신적 생명을 주신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당신을 통하여 풍성해짐을, 특히 부활의 신적 생명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신적 생명이 사람의 행동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행동에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결과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곧 생명은 믿는 것의 보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미래형이 아닌 ‘얻는다’는 현재형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는 생명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사람의 믿음이 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께서 먼저 사람 속에 생명을 넣으시기 때문에 사람이 믿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믿는 자는 이미 자기 속에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믿게 되며, 그 믿음으로써 생명의 체험을 깊게 하게 되고,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고, 부활의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무덤 너머에는 두 존재의 양식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과의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러니 바로 지금이 예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바로 그때입니다.
바로 지금, 오늘이 바로 그때인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는 바로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이 예고되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5)라고 선포됩니다.
무엇보다도 이 거룩한 성찬을 통해서, 그리고 오늘의 나의 삶을 통해서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요한 5,30)
주님!
제가 하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맞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사랑의 연합으로 당신께서 행하신 바를 행하고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하는 일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일이 당신 뜻 안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사랑 버릇>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시니’라는 주님 말씀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여태’라면 ‘지금에 이르기까지’, ‘Until now’라는 뜻이 있잖습니까?
그러니까 천지창조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하신다는 뜻이며, 그 일은 사랑의 창조를 계속하신다는 뜻이니 사랑을 멈추지, 중단하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와닿은 것이고 정확하게 얘기하면 마음이 찔린 것입니다.
저는 어떤 때 사랑을 그만두고 싶고 포기하고 싶은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저의 사랑이 무시당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저의 사랑에 시큰둥하거나 크게 감사하지 않을 때도 사랑을 포기해버리고 싶고, 사랑이 열매를 맺지 못할 때도 굳이 이 사랑을 지속해야 하나 생각되곤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를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포기 전에 내가 나의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지요.
샘으로 치면 샘이 말라 더 이상 흐르지 않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그가 손해가 아니라 사랑이 말라버리는 내가 손해라는 말입니다.
사랑을 포기해 버릇하면 한번 포기가 계속 포기가 되는 것입니다.
제일 나쁜 버릇이 뭐겠습니까?
사랑을 포기하는 버릇이 아니겠습니까?
빈대로 제일 좋은 버릇은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끙’하고 힘을 내 버릇하는 사랑의 버릇이겠지요.
힘은 쓸수록 생기고 쓰지 않으면 약해지는 것처럼 사랑 또는 사랑의 힘도 할수록 사랑이 자라고, 포기해 버릇하면 사랑은 쇠퇴일로를 걷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 버릇을 잘 들여야 하는데, 버릇을 들일 때 오늘 주님처럼 잘 배워 들여야 합니다.
주님도 당신 나름으로 하지 않고 아버지 하시는 것을 보고 배워서 하신답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사랑의 버릇도 잘 들이려면 본래 잘 배워서 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그 사랑을 배워서 버릇 들이면 됩니다.
사랑할 때마다 특히 사랑을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주님께서 하시는 것을 우리도 그대로 따라 하면 됩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을 첫 자리에 모셔라>
예수님의 관심사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안에 충실히 머물렀고 그래서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선언하시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8-4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따라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나의 계획과 집착, 이기심과 낡은 생활 방식을 고쳐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여야 하겠습니다.
발에 꼭 맞는 신발이 편안하듯 우리가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매일이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아버지와 하나 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주님과 하나 되기를 희망합니다.
공자께서도 “일흔이 되었을 때 하고 싶은 마음을 쫓아 그대로 하되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당신의 뜻이 하늘의 뜻과 온전히 일치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물론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마음껏 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일입니까?
인간적인 욕심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우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원하는 바를 마음껏 한다면 부끄러움이 있을 리 없습니다.
혹,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이 있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걸었다 해도 우리 마음을 둘 곳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역경에 처해 있을 때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하고 한 번 기도드리는 것이 좋은 일을 당했을 때 수없이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 더 값집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생각에 우리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기도에 우리의 기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행위에 우리의 행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생명에 우리의 생명을 일치시킵시다.”
주님과 하나 되는 기쁨과 행복이 넘쳐나길 기도드립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
(성 알퐁소)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성령께서 내리시는 자리의 조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라고 하시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도 하십니다.
그리고 이 순종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라고 하시듯이 생명을 살리는 능력을 받게 됨을 시사하십니다.
생명을 살리는 능력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생명이기도 하시고 선물이기도 하시고 능력이기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라고 하실 때 예수님은 아버지께 순종하심으로써 성령을 받으셨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순종하는 이에게 주어집니다.
성령은 권능이기도 하고, 능력이기도 하고, 생명이기도 하며,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의 하느님 나라입니다.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성령은 누구에게 주어질까요?
성령을 받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 아닌 그저 최대한 죽으려는 사람에게 내립니다.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는 장면은 참으로 극적입니다.
사실 그의 형 ‘아도니야’가 누가 보더라도 왕위를 물려받아야 마땅했습니다.
그가 솔로몬의 어머니 밧 세바에게 “모후께서도 아시다시피 이 나라는 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도 제가 임금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라가 뒤집어져 아우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가 주님에게서 그것을 받았기 때문입니다.”(1열왕 2,15)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 다윗 왕의 허락도 없이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합니다.
그를 지지하는 세력도 많았습니다.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고 모든 백성으로부터 왕으로 추대 받았습니다.
하지만 왕권을 주는 사람은 왕입니다.
다윗 왕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에 솔로몬의 어머니 밧 세바는 이 모든 사실을 다윗 왕에게 알렸고 다윗 왕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붓게 하고 자기 나귀를 태우고 왕좌에 앉게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결과가 어땠을까요?
그동안 한마디도 안 하던 솔로몬은 자기 왕권을 노리던 모든 이들을 처단합니다.
솔로몬은 그전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답답하게 아무것도 안 하는 아들이 안쓰러웠는지, 어머니 밧 세바가 다윗의 왕권을 자기 아들에게 오게 하였습니다.
밧 세바처럼 죽어있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권능을 가져오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교회 내에서도 어떤 자리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사제가 그것을 보지 못할 것 같지만 다 보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자리에 앉히려다가도 한 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성령을 통해 오는 은총은 가만히 있는 이의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리시는 자리를 ‘제단’이라 합니다.
요즘 ‘제대’에 대한 공경이 매우 약해졌습니다.
아무 곳에서나 아무 상을 펴 놓고 미사를 거행합니다.
미사를 거행할 때 성령께서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께서 잉태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아무 곳에나 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위에 자기 죽음을 합친 사람에게만 내리십니다.
야곱은 베텔에서 바위 위에서 잠들었고 그 위로 사다리가 내려지며 하늘에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였습니다.
야곱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고, 그리스도의 죽음 위에 성령께서 내리시는 곳이 베텔, 곧 하느님 집이라는 뜻입니다.
사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성령께서 오시도록 아버지께 순종하시어 성령의 자리를 마련하신 그리스도의 죽음의 역할도 간과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제가 없으면 미사가 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오시지 않으십니다.
제단도 마찬가지로 여겨져야 합니다.
제단이 없으면 미사가 안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제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고 그 위의 제물은 나의 죽음입니다.
사도행전 5장 32절에는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신 성령”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순종은 나의 뜻을 죽이고 하느님 뜻의 자리를 내어드림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처럼, 죽은 사람처럼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내 뜻으로 걱정하고 근심하는 우리는 모두 결국 내가 살아있으므로 성령께서 내리시지 않고 그래서 기분이 좋지 못하고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라는 제단에 우리 죽음을 결합합시다.
그 자리에만 성령께서 내리십니다.
그러면 우리도 성령의 사람이 되고 충만한 행복과 능력을 발휘하며 살게 됩니다.
살아 움직이는 제단에서는 미사를 거행할 수 없습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정확하게 맞춰진 예수님의 순명과 겸손의 생애>
천부당만부당한 일, 참으로 배은망덕한 일이 오늘 복음에서 은밀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한갓 피조물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작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그리고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입장에서도 도무지 수용할 수 없는 일이 틀림없었습니다.
자신들의 행복과 구원,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하느님께서 직접 이 땅에 보내신 메시아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환영하고 받아들이지는 못할망정, 호시탐탐 그를 감시하고, 여차하면 고발하고 죽이려고 혈안이 된 유다인들, 참으로 대책이 없는 인간들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유다인들이 그토록 예수님을 고발하고 죽이려고 혈안이 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딱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① 신성 모독죄
유다인들 입장에서 자신들과 다름없는 한갓 인간인 듯한데, 예수님 스스로 하느님처럼 말씀하시고, 그분의 외아들임을 강조하니,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 예수님을 늘 봐왔던 고향 마을 사람들은 그분의 메시아성을 백번 깨어나도 수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신성 모독죄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② 안식일 규정의 폐기
예수님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분이셨습니다.
뭔가 어색하거나 경직된 모습들을 본성상 수용하기 힘드셨습니다.
그런 예수님 눈에 안식일 규정을 목숨처럼 여기던 유다인들의 모습이 너무나 웃겼을 것입니다.
그런 연유인지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시작 때부터 보란 듯이 안식일 규정을 깨트리셨습니다.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행동들만 골라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밀 이삭을 훑어 주린 배를 채우셨습니다.
다른 날도 많은데, 하필 안식일에 수십 년 된 고질병 환자들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안식일 규정을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던 유다인들 눈에 이런 예수님의 모습이 좋아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만 만나면 분기탱천했습니다.
어떻게든 율법 위반 혐의를 예수님께 씌워 고발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습니까?
하느님 아버지의 지혜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지혜로움의 끝판왕이셨습니다.
아직 하느님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결정적 수난의 때가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이리저리 피해 다니시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백성들에게 선포할 때였습니다.
치고 빠지는 데 명수셨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삶은 온전히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정확하게 맞춰진 순명과 겸손의 생애였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요한 5,17)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쉬지 않고 일하시니 나도 안식일에도 쉴 수가 없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이 안식일에도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하신 이유를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창세 2,2)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창세기의 말을 해석하면, “하느님께서 쉬셨다.” 라는 말은 창조 사업을 마무리하셨다는 뜻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안 하고 쉬시는 분이 아니라, 안식일에도 인간들을 보살피고 돌보는 일을 계속해서 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랑은 한 순간도 중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반복해서 멈추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어떤 이유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결코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이 중단되는 날은 없습니다.
만일에 안식일이 ‘하느님께서 사랑을 멈추시는 날’이라면, 그날은 ‘하느님 없는 날’이 되어버리고, 하느님이 없는 날이면 거룩한 날도 아니고, 지키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안식일을 주일로 바꿔서 지키고 있지만, 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에 어떤 법이 하느님의 사랑을 중단시킨다면, 그 법을 없애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중단되는 것은 온 세상이 멸망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요한 5,19)
이 말씀은 “내가 하는 일은 곧 아버지의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라는 표현만 보고서 예수님께서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따로 있는데도 못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상’이신 분”입니다(콜로 1,15; 히브 1,3).
이 말을 그냥 단순하게 표현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곧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말씀’도 같은데,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요한 5,25)
여기서 ‘죽은 이들’은 ‘죽어야 할 이들’, 즉 ‘모든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의 인간들의 처지를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모두 영원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그 말씀을 그대로 실천함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라는 말씀은 “이미 시작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신 일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길을) 알려 주신 일입니다.
여기서 ‘지금’이라는 말은 ‘나중’은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지금 믿어야 하고, 지금 실천해야 합니다.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사람이고, 그 생명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중간에 멈추면, 그동안 신앙생활을 한 것은 모두 ‘헛일’이 되어버립니다.
끝까지 가지 않은 사람은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요한 5,29-30)
이 말씀은 “나의 심판은 곧 하느님의 심판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심판과 예수님의 심판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 때에 생명을 선고받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유일한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유일한 생명입니다.
다른 길, 다른 진리, 다른 생명은 없습니다.
이것은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선택’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영원히 멸망하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멸망을 당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내 의지로 선택할 일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그냥 구원을 포기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라고 호소하십니다(에제 33,11).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회개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 뜻에 따라 또 그 뜻을 이루려고 예수님께서 오셨고, 우리를 살리려고 당신이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과 만남의 여정 - 하루하루가 "새 하늘과 새 땅, 새 날"이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라.
주님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시편 103,2)
저에게 강론 제목은 하루 삶의 지표이자 다짐이요 확인이 됩니다.
맨먼저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 그날의 강론 제목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과 만남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과 만날 때 하루하루가 새 하늘과 새 땅, 새 날입니다.
오늘도 하루를 시작하며 주님의 초대에 응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려 미사전례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야 살아갈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우리 마음에 기쁨이 없다면, 평화가 없다면, 희망이 없다면, 자유가 없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참기쁨, 참평화, 참희망, 참위로, 참자유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주님을 만날 때 선사되는 참 좋은 선물이 기쁨과 평화, 위로와 치유, 희망과 자유입니다.
자주 나눴던 행복기도 중 그 일부를 다시 나눕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주님,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주님을 만날 때 솟아나는 감동의 고백이지만, 또 이렇게 고백할 때 주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위한 참 좋은 고백 기도가 시편입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 145장이 주는 위로는 얼마나 큰지요!
그 일부만 인용합니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넘어지는 누구라도 주님은 붙드시고, 꺾인 이는 누구라도 일으켜 주시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서도 희망과 위로를 전하고 있습니다.
주전 8세기, 그러니까 2800년 전 바빌론 귀양살이 동안에 이름없는 예언자가 신탁을 받고 해방될 그날을 내다보며 희망과 위로를 전합니다.
이 예언자의 하느님 체험을 그대로 전하고 있습니다.
“은혜의 때에 내가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오늘도 미사 샘터로 우리를 인도해주신 주님이십니다.
이어지는 예언자의 하느님 고백은 다음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는다."
특히 마지막 “설령 여인들은 잊느다 하더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는다.”라는 대목이 감동적입니다.
여인인 어머니가 잊는다 해도 하느님은 결코 나를 잊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우리 하나하나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이사야서 말씀 43장 4절 말씀입니다.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
그러니 어찌 해안지방을 주고라도 너늘 찾지 않으며, 부족들을 내주고라도 너의 목숨을 건져내지 않으랴!”
정말 우리 하나하나에 대한 하느님 사랑은 이렇다는 것입니다.
앞 부분은 고백성사 말씀 처방전으로 가끔 써드리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이런 주님을 만나 체험해야 할 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배워 깨닫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체험을 반영하는 복음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로 이어지는 세 단락을 나눕니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결론하여 주님은 우리 하나하나를 결코 잊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코 우리 하나하나는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우주와도 바꿀수 없는 하느님께 불림 받은 귀한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이 바로 그때이니 주님을 만나 살아날 때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 영원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만나는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기쁨과 평화, 위로와 치유,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십니다.
"주님을 찬양하라 내 영혼아, 한평생 주님을 찬양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
(시편 146,1-2)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서른여덟 해나 앓아오던 이를 고쳐주신 날이 하필 안식일이라, 유다인들은 안식일 법을 무시한다는 혐의를 씌워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응수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요한 5,17)
그런데 이 말씀은 유다인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고 맙니다.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 죄인인 주제에 감히 하느님을 아버지 운운하다니!"
분명 안식일은 태초에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후 쉬신 일곱째 날을 기념합니다.
그러니 이를 수호하려는 유다인들의 생각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놓친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일곱째 날을 쉬라 하신 건, 영육의 휴식이 필요한 모든 이들, 보호받지 못하는 종과 짐승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제외됨 없이 차별 받지 않고 쉬게 하시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안식년에는 땅마저도 양분을 축적하도록 쉬게 놀리니까요.
쉼의 날을 통해 사람을 회복시키고 되살리고 더 풍요롭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의도는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부를 축적하려고 약한 이들을 착취하고 제 잇속만 챙기는 불균등한 거래를 금지하시려는 조치였지만, 세대를 거듭하면서 그 정신은 희미해지고, "뭐는 되고 뭐는 안 되고" 하는 세부 항목만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하느님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사랑의 계명에 이바지하기 위해 다른 일을 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하느님의 일과 사리사욕을 챙기는 인간적·세속적 일은 목적 자체에서 구분이 되어야 하지만, 문자에 집착하면서 지킬 항목이 늘어나니 숙고와 성찰은 그쳐버렸습니다.
"아,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으니까,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결론만 말해주세요!" 하는 식으로 율법을 익히다 보니, 원 뜻과 정신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의도는 묻혀버리고 그저 기계적으로 가부를 판별하는 방법론만 늘어나고 만 것이지요.
한번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한 유다인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제대로 들릴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요한 복음사가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꽤 긴 부분을 반복해 할애하는 건, 성자이신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성이 앞으로 펼쳐질 파스카 여정에 단초가 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에 대한 수용과 믿음이 듣는 이들의 구원에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요한 5,22)
심판의 권한은 이제 아드님이신 예수님께 이양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또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24)고 하시는데, 정말로 귀가 번쩍 뜨이는 말씀입니다.
나약하고 부족하며 탐욕으로 들끓는 자신의 실존적 처지를 처절히 체험하며 귀양살이 인생 순례길을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하는 이라면,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에서 엄청난 위안을 받습니다.
사실 철저한 믿음으로 아무리 열심히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도 심판이라는 단어 앞에 온전히 자유롭기는 어렵기에 그렇습니다.
과연 내 주제에 심판이라는 관문을 제대로 통과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서는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 부분이 없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듣고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을 믿는 것, 그것이 심판을 뛰어넘는 구원의 열쇠라고 하십니다.
우리와 같은 죄인에게는 마치 목적지에 이르는 지름길을 만난 듯, 지루한 컴퓨터 작업에서 단축키를 익힌 듯 반갑기 그지 없는 말씀인데, 유다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오히려 죄에 죄를 더하는 신성모독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믿는 이는 어떻게 심판을 피하게 될까요?
그 답은 오늘 독서에 들어 있습니다.
"설령 여인들은 (제 젖먹이를) 잊는다 해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 답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의 절정이 제 몸에서 낳은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이 그보다 더 짙고 깊고 뜨겁고 애틋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런 하느님께서 아들의 말씀을 듣고 당신을 믿는 이에게 어찌 심판의 항목들과 잣대를 들이대실 수 있겠습니까? 사
랑으로는 도저히 못할 일이 바로 그런 심판일 것이니까요.
그렇다고 심판에 대한 교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을 믿고, 그 사랑의 결정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에게 어느 여인보다 애끓는 사랑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율법이 아니라 자비와 연민 가득한 사랑의 프리즘으로 우리를 비춰보시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는 심판의 다른 말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은 참된 구원이시옵니다."
(입당송)
오늘 미사를 여는 시편 저자의 고백처럼 과연 구원은 하느님의 자애를 입고 다가옵니다.
믿는 우리에게 자애는 심판의 다른 이름입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1984년 겨울입니다.
저는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에 있는 나환자 마을(한센인 마을)로 봉사를 갔습니다.
마을에는 공소가 있었습니다.
저는 공소에서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지냈습니다.
마을 분들은 양계, 양돈을 하면서 생활하였습니다.
40년이 지났지만 그때 함께 하였던 학생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학생들 중에 한 명은 수도자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 소식을 나누고 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 ‘공소(公所)’에 대한 지면이 있습니다.
2월 19일 신문에 ‘신평공소’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제가 봉사활동을 갔었던 공소입니다.
저는 공소 사택에서 머물었습니다.
학생들이 계란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눈이 많이 내린 날 학생들과 함께 뒷동산에 올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군대에 갔다 왔고, 사제가 된 뒤로는 한 번도 공소를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제가 바쁘기도 했지만 한번이면 족하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신평공소 이야기를 읽으면서 ‘조선희 신부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호주 출신으로 골롬반 선교회 소속이었습니다.
1939년에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님은 1940년 한국으로 파견돼 홍천본당 보좌로 사목을 시작했습니다.
1941년 12월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을 신호탄으로 미국과 전쟁을 벌이자 조선의 서양 선교사들은 모두 연금됐습니다.
조 신부님도 5개월간 연금과 투옥 생활 후 강제 출국 됐다가 해방 후 1947년 2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홍천본당 주임으로 사목했습니다.
하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신부님은 북한 인민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1950년 겨울 중강진수용소로 이감되었습니다.
신부님은 휴전 때까지 3년간 중강진수용소에서 지냈습니다.
750명 수용자 가운데 500명이 사망하였습니다.
다행히 신부님은 수용소에서 풀려났고, 1953년 5월 본국으로 귀환했다가 몸을 추스른 후 1954년 8월 세 번째 한국에 입국해서 홍천본당으로 돌아왔습니다.
신부님은 더 이상 사목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인 1998년 고향인 호주로 돌아가 2005년 3월 선종하였습니다.
포천 신평공소는 신부님의 한센병 환우에 대한 각별한 사목적 배려로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렸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1940년 선교사로 한국에 왔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연금과 투옥을 당하였고 본국으로 강제 출국 당하였지만 다시 돌아왔습니다.
죽음의 행진을 거쳐 3년간 중강진수용소에서 지냈고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다시 돌아왔습니다.
더 이상 사목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홀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3번이나 넘어지셨던 예수님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번이나 넘어지셨지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십자가를 포기한 적도 많았습니다.
게을러서 십자가를 포기한 적도 많았습니다.
더 크고 좋은 것을 찾기 위해서 십자가를 포기한 적도 많았습니다.
아예 십자가를 버린 적도 많았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고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때로는 억울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조선희 신부님은 많은 시련과 고통이 있었지만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믿습니다.
홍천본당 교우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사랑은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는 달랐습니다.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사랑이 생명을 살리고, 이 사랑이 희망을 주고, 이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어미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을 잊지 않고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자비와 용서, 친절과 온화함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운전할 때 우리는 신호등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신호등의 색은 어떻게 될까요?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맞습니까?
아마 맞는다고 대답하실 것이고, 이 대답이 틀렸다고 하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틀렸다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노란색이 아니라 오렌지색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색 계열이니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싶은데, 실제로는 전혀 다른 색입니다.
노란색은 레몬 빛을 띤 밝은색이지요.
그에 반해 실제 우리가 보는 신호등은 오렌지색에 더 가까운 짙은 노란색입니다.
그래서 주황색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빨간색은 정지, 초록색은 진행(통과), 노란색은 신호 변경 예고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란색이 아닌데도 노란색이라고 배우다 보니, 노란색이 아닌데도 ‘노란색’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고정관념을 자기도 모르게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정관념이 틀린 것도 모르게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도 고정관념으로 인해 남 탓, 또는 내 탓만을 외치게 됩니다.
어떻게 남 탓만일 수 있고, 또 내 탓만일 수 있겠습니까?
카톡 문자를 보냈는데 ‘읽음’ 표시가 없거나, 읽은 것 같은데 답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자기를 싫어한다고 단정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일까요?
문자를 읽지 못하는 상황을 비롯한 답장하지 못할 이유는 너무나 많습니다.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무조건 받아들이고 보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께서 보여주셨듯이 곰곰이 생각하며 마음에 담아두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그 순간에는 이해할 수 없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느님의 손길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100% 틀린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이 점을 기억하며 새로운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어기고,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말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알았다면 어떠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많은 표징을 곰곰이 생각하며 마음에 담아두었다면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원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그들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변화가 필요할 때입니다.
스스로 만드는 고정관념으로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불경에서 벗어나서, 삶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는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갖춰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을 빛으로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진리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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