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1858년 2월 11일부터 원죄 없으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프랑스 루르드 근처의 마사비엘 동굴에서 베르나데트 수비루에게 여러 차례 발현하셨다. 어린아이를 통하여 성모님께서는 죄인들을 회개로 부르셨고, 교회에서는 기도와 사랑의 놀라운 정신, 특히 가난한 이와 병든 이를 도우려는 열정을 일으키셨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2년부터 해마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인 이 발현 첫날을 ‘세계 병자의 날’로 지내도록 하였다. 이날 교회는 병자들의 빠른 쾌유를 위하여 기도한다. 또한 병자들을 돌보는 모든 의료인도 함께 기억하며 병자들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책임감을 다지도록 기도한다.
본기도
하느님,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제1독서
<부정한 사람은 진영 밖에 혼자 살아야 한다.>
▥ 레위기의 말씀입니다.13,1-2.44-46
1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2 “누구든지 살갗에 부스럼이나 습진이나 얼룩이 생겨,
그 살갗에 악성 피부병이 나타나면,
그를 아론 사제나 그의 아들 사제 가운데 한 사람에게 데려가야 한다.
44 그는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이므로 부정하다.
그는 머리에 병이 든 사람이므로,
사제는 그를 부정한 이로 선언해야 한다.
45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친다.
46 병이 남아 있는 한 그는 부정하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
제2독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10,31─11,1
형제 여러분, 31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32 유다인에게도 그리스인에게도 하느님의 교회에도
방해를 놓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33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는 나처럼 하십시오.
나는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내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한 것을 찾습니다.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복음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0-45
그때에 40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1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2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3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44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은총 때문에 지옥문도 열렸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는 믿음으로 치유를 받습니다. 무슨 믿음일까요? 주님은 자비로우시고 능력자시라는 믿음입니다. 거기다가 하나의 믿음이 더 있습니다. 바로 자신이 그런 은총을 청할 ‘자격’이 있다는 믿음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 강아지 취급을 당하면서도 강아지도 주인 자녀들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는다며 자신이 은총을 청할 자격이 있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그녀의 믿음을 칭찬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치유된 나병 환자는 처신을 잘못합니다.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리셨음에도 이야기를 널리 퍼뜨리고 다니십니다. 나병 환자를 치유해주셨다는 소문은 많은 나병 환자들을 불러 모으게 될 것이고 또한 예수님도 부정하게 되셨을 것이기에 비난의 대상도 되실 수 있으십니다. 어쨌든 이러한 불순종은 예수님께서 더는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게 만듭니다. 이 말은 치유를 입은 나병 환자가 오히려 그 받은 은총으로 예수님과 멀어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은총은 언제나 은총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는 지옥에 이르는 문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거부할 때 지옥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는 저승에 선인과 악인이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은총의 피를 흘리신 후 그곳에 남아 있는 이들은 지옥을 살게 됩니다. 천국도 그렇지만 지옥의 문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 때문에 열립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죽을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는 것은 곧 영원히 하느님과 헤어져 있겠다고 우리 자신이 자유로이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옥’이라는 말은 이처럼 하느님과 또 복된 이들과 이루는 친교를 결정적으로 ‘스스로 거부한’ 상태를 일컫는다.”(1033항)
지옥이란 구원의 은총을 스스로 거부한 이들이 가는 곳입니다. 이스카리옷 유다처럼 천국의 은총을 맛보았으면서도 스스로 거부한 이들은 지옥을 체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19살에 177억 복권에 당첨된 마이크 캐롤이란 영국 사람이 있습니다. 이전 그의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이혼과 새 아버지의 폭력으로 모든 면에서 비뚤어지는 아이로 성장하였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자존감이 아닌 열등감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열등감은 자격이 없다는 스스로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돈을 얻게 되니 자기 열등감을 그것으로 올리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방탕한 생활로 4년 만에 다 탕진하고 청소부와 공장 노동자를 하며 간신히 살아갑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런 삶을 살기는 했지만, 훨씬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돈의 맛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받은 모든 것들이 은총입니다. 그 은총에 합당하게 응답하지 못할 때 더 큰 은총은 오히려 더 큰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신화에 따르면, 포세이돈은 크레타의 미노스 왕에게 크고 흰 황소를 주었는데, 그 황소는 다시 신에게 제물로 바쳐져야 했습니다. 미노스 왕은 그 황소를 이용해 왕이 되었음에도 신에게 다른 황소를 바쳤습니다. 분노한 포세이돈은 그 황소가 왕비와 사랑에 빠지게 만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미노타우로스가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미노스는 어쩔 수 없이 미노타우로스를 미로에 가두고 산 사람을 계속 제물로 바쳐야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지옥을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총이 저주가 되지 않게 하려면 그것들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이미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미 에덴동산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은총에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땅의 소출의 십분의 일은 감사히 주님께 바쳐야 했지만, 바치지 않아 생명나무를 먹지 못하고 쫓겨납니다. 생명나무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아브라함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멜키체덱에게 바칩니다. 멜키체덱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해 주기 위해 빵과 포도주를 가져 나왔습니다. 이것이 미사의 상징입니다. 미사는 은총 중의 은총인 생명나무,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미 받은 은총으로 우리 자격이나 높이려 십분의 일도 봉헌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성체성사가 오히려 지옥으로 가는 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축복으로 받은 외아들 이사악까지 감사히 바치려고 했음을 잊지 맙시다.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1989년 조지아 대학교의 에이브러햄 테서가 이끄는 사회심리학 연구팀은 11세에서 14세 청소년이 있는 가족들에게 텔레비전 채널 선택이나 숙제하는 시간 등과 관련된 모든 의견대립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조사 결과, 부모와 의견대립이 많은 청소년이 더 행복하고, 사회적으로 잘 적응하며, 학교생활을 더 잘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부모가 자녀와의 의견대립에 대해 열린 관점으로 대화를 풀어갈 때 가능했습니다.
종종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며 어떤 간섭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부모는 아이가 사춘기를 심하게 겪는다면서 전혀 대화하지 않고 그냥 기도만 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친한 친구와 의견 차이로 인해서 심하게 싸웠고 역시 기도만 하면서 이 친구와 예전 관계로 다시 돌아가길 바란다고 하십니다. 과연 기적처럼 그런 일이 생길까요?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열린 관점입니다.
미국의 어느 소도시에 있는 은행에 강도가 들어왔습니다. 권총을 든 강도는 창구 여직원에게 총을 겨누며, “천만 원 내놔!”라고 고함을 지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은 천만 원을 내주거나, 아니면 몰래 비상벨을 눌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직원은 강도를 바라보며, “천만 원은 왜요?”라고 이야기를 건넨 것입니다. 그 말에서 강도는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강도는 총을 내려놓고 지금 자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이야기했고, 직원은 은행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었다고 합니다.
“천만 원 내놔!”라는 말에서 대화의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까?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말이지만, 이 말에서도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강도하고도 이렇게 대화가 되는데, 왜 다른 사람과 대화가 되지 않겠습니까? 사람과의 대화가 가능해야 주님과도 대화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병은 무서운 병으로, 공동체는 나병에 걸린 사람을 멀리하고 부정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공동체에서 벗어나 혼자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 곁에 갈 수 없기에 치료받을 수 있는 길도 없습니다. 이렇다고 해서 주님께서 이 나병 환자를 내쳤을까요? 아닙니다. 당신께 다가오는 사람을 절대 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가온 사람의 자세가 중요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행동하고 말했습니다.
바로 무릎을 꿇는 겸손한 자세만이 주님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그를 낫게 하셔서 다시 공동체 안에서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혹시 이런 겸손한 모습보다는 맡긴 것을 찾는 사람처럼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라며 주님께 명령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를 내려놓는 겸손, 그래야 주님과도 또 사람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다른 방식으로 얻은 교훈이 있을 뿐(트롸일라 타프).
사진설명: 오늘은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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