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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족(漢族)으로 변신(變身)한 대륙(大陸) 땅!
○「조선사(朝鮮史)의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은,
「한족【漢族 : 남방(南方) + 서남방(西南方) = 남만(南蠻)】과 왜【倭 +서구열강(西歐列强=야합(野合)】의 결탁(結託)에서 나온 결과물(結 果 物)이다.」라고 본다. 물론(勿論) 이것은 개인적(個人的)인 의견(意見)이며, 주장(主張)입니다.
「대륙(大陸)의 땅은 남만(南蠻)출신들이, 열도(列島)와 대만(臺灣) 유구(琉球)등은 왜(倭)가, 세계(世界)패권(覇權)은 서구(西歐)가 차지하기 위한 음모(陰謀)였으며, 해체(解體)당 한 조선(朝鮮)은 변방(邊方) 땅이었던 반도(半島)로 이식(移植)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지요.
서구(西歐)열강은 세계(世界)각지(各地)의 식민지(植民地)를 지배(支配)통치(統治)하여, 자신(自身)들이 필요(必要)로 하던 많은 것들을 충족(充足)시키고, 패권(覇權)을 가졌다. 이러한 패권(覇權)구도(構圖)는 현재(現在)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현실(現實)을, 현실(現實)임을 직시(直視)하지 못하는 정권(政權)이나, 국민(國民)들은 과거(過去)의 치욕(恥辱)을 되풀이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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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경(北京)의 ‘자금성(紫禁城)’을 서구(西歐)열강(列强)의 연합군(聯合軍)에 의해, 탈취(奪取)당한 청(淸)【조선왕조(朝鮮王朝)이다】정권(政權)이, 서구(西歐)열강(列强)들의 압력(壓力)에 못 이겨, 1,898년 개혁(改革)을 향해 서툰 걸음을 떼는 사이에, 좀 더 심각(深刻)한 수준(水準)의 움직임이 나라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는데,
1,898 년의 정변(政變)이후 청(淸)【조선(朝鮮)이다】의 많은 지식인(知識人)들이 일본(日本)으로 건너갔는데, 1,906년에는 위험(危險)한 사상(思想)을 공부(工夫)하는 청(淸)나라【조선(朝鮮)이다】 유학생(留學生)이 15,000 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위험(危險)한 사상(思想)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봉건왕조(封建王朝)에 대한 사상적(思想的) 대립(對立)이었으며, 왕조(王朝)의 입장(立場)에서 봤을 때는 대역(大逆)사상(思想)이었다.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중화민국(中華民國) 건국(建國)의 아버지로 추앙(推仰)받고 있는, 남만(南蠻)출신의 손문(孫文)은, 1,894년 비밀(秘密)결사(結社) “흥중회”를 주도적(主導的)으로 조직(組織)하고,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공화주의(共和主義) 운동(運動)이 내부(內部)에서 비밀(秘密)결사(結社)와 함께 은밀(隱密)하게 추진(推進)되었다고 한다.
○ 손문(孫文)【1,866년~1,925년 자는 일선(逸仙), 호는 중산(中山)이다.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제창하고 신해혁명(辛亥革命) 후에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되었으나, 원 세 개(袁 世 凱)에게 정권을 양보하고 일본(日本)으로 망명(亡命)하여 중화 혁명당을 조직하였다.】은, 광동 성(廣東 省) 향산(香山)출신으로, 일찍부터 ‘하와이’의 신교(新敎)계 학교(學校)를 다녔으며【영국계에서, 또 미국계 학교에서 교육받음】, 광주(廣州)와 홍콩【향항(香港)】의 의학교를 졸업했으며, 1884(또는 1885년) 한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 때 미국(美國) ‘하와이’에서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한 뒤 화교(華僑)들을 모아, 이듬해 10월 광주(廣州)에서 거병(擧兵)하였으나, 실패(失敗)하고, 일본(日本)으로 망명(亡命), 변발(辮髮)을 자르고 양복(洋服)차림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또 영국(英國)으로, 또 미국(美國)을 거쳐, 다시 일본(日本)으로, 1,900년 제2차 거병【혜주(惠州)사건】을 시도하였지만 실패(失敗)로 끝났다. 다시 미국(美國)으로 돌아갔다.
○ 손문(孫文)의 일생(一生)을 보면, 기독교(基督敎)와 봉건왕조(封建王朝)에 대한 반역(反逆)을 빼고는 말할 것이 없다. 이러한 손문(孫文)을 지원(支援)한 자(者)들은, <일본(日本)과 미국(美國) 및 영국(英國)등의 당시 열강(列强)>등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초대(初代) 대통령(大統領)이었던 “이승만(李承晩)!” 이 분도 기독교(基督敎)에 심취(心醉)하여, 미국(美國)에서 대중(大衆)연설(演說)을 하면서 ‘기독교(基督敎)공화국(共和國)’을 만들겠다고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손문(孫文)과 이승만(李承晩)>의 기독교(基督敎) 입문(入門)과정과 봉건왕조(封建王朝)에 대한 반역(反逆), 그리고 망명(亡命), 해외(海外)에서의 활동(活動)과정(過程)등, 어쩌면 그렇게 닮은꼴의 행동(行動)이었을까? 당시 신지식(新知識)인들은 다 그랬을까?
또 <미국(美國). 일본(日本). 영국(英國)등등>의 나라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이들 존재(存在)와 우리의 관계(關係)를 정립(正立)해야 할 필요성(必要性)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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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大陸)에서 「천자(天子) 또는 황제(皇帝)」라는 고정관념(固定觀念)을 가진 정치체제(政治體制)가 수천(數千)년 성공적(成功的)으로 이어온 「하늘(天)과 땅(人間)이란 관계(關係)를 규정(規定)하는 사상적(思想的) 철학(哲學)이 도덕적(道德的) 기반(基盤)과 어울려, 유연성(柔軟性)과 보편성(普遍性)을 제공(提供)하고, 특히 도덕성(道德性)에 기반(基盤)한 중앙집권적(中央集權的) 형태(形態)의 권력(權力)을 제공(提供)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하늘【天】과 땅【인간(人間)】의 중재 자(仲裁 者)인 “천자(天子) 혹은 황제(皇帝)”가, 하늘의 뜻을 거역(拒逆)하고, 실정(失政)하여, 땅【인간(人間)】이 괴롭힘을 당했을 때에는, 천자(天子) 또는 황제(皇帝)의 자격(資格)을 상실(喪失)하고, 덕(德)과 지혜로움을 가진, 하늘의 부름을 받은 자(者)가, 「새로운 천자(天子) 혹은 황제(皇帝)가 된다.」는 이러한 유연성(柔軟性)과 보편성(普遍性)은 수천(數千)년 동안 누구도 이러한 체제(體制)나 사상(思想)에 대해 이의(異議)를 제기(提起)하지 않았으며, 그것은 19세기 말경(末境)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계속(繼續)되는 왕권(王權)의 실정(失政)은, 이러한 사상적(思想的) 원인(原因)에 대한 의구(疑懼)심을 부추겼고, 「하나님 말씀만 믿는다면, ‘진실’과 ‘정의’를 추구할 수 있으며, 걸인과 노동자, 몸 파는 여성(女性)과 도둑을 보듬고, 이들의 회개(悔改)에 하나님은 용서(容恕)로 답하고, 자신(自身)의 피와 살로 굶주린 자(者)들을 먹인다.」는 “예수”의 말로 무장(武裝)한, 선교사(宣敎師)들을 전선(前線)의 최 일선(一線)에 배치하고, 진격(進擊)하는 서구(西歐)열강(列强)들의 포교(布敎)와 대포(大砲)의 부상(浮上) 은,
「하늘【天】과 땅【인간(人間)】의 중재자(仲裁者)」로, 특별(特別)한 관계(關係)로 설정(設定)되어 얽매여 있던, 당시(當時) 사회(社會)를 지배(支配)했던 개념(槪念)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지식인(知識人)들의 머릿속에는 봉건왕조(封建王朝)에 대한 반감(反感)과 서구(西歐)열강(列强)들의 사상(思想)으로 물들어져 갔다.
○ 때를 같이하여, 손문(孫文)은, 새로운 운동(運動)을 획기적(劃期的)인 발전책(發展策)으로 이용(利用)한 것이 바로 “민족주의(民族主義)”였으며, 이곳은 소위(所謂) 말하는 “한족(漢族)”화였으며, 이것은 “흥한(興漢)의 원망(願望)”이라는 구호(口號)아래,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의 원동력(原動力)이 되었으며, 1,912년 2월 15일 손문(孫文)은 남경(南京)의 명 태조(明太祖) 홍무제(洪武帝)의 릉(陵)에서 의식(儀式)을 거행(擧行)하여 「한족(漢族) 황제(皇帝)와 그들의 선조(先祖)에게 그 영토(領土)를 바친다.」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 자신(自身)들의 세력(勢力)을 결집(結集)시키고, 수많은 백성(百姓)들에게 보여주기 위한“쇼”이상(以上)의 것이 될 수 없었으나, 이것은 신지식(新知識)인과 백성(百姓)들에게는, 폭발적(爆發的)인 지지(支持)를 얻었는데, 이것은 청(淸)【조선(朝鮮)이다】 내부(內部)의 혼란(混亂)과 실정(失政),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의 부정부패(不正腐敗)등에 영향(影響)을 받았으며, 긴밀(緊密)하게 얽혀있었다.
○ 그렇다면 홍무제(洪武帝)는 과연 한족(漢族)출신(出身)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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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明)의 홍무제(洪武帝)가 “한족(漢族)”이란 증거(證據)는 없다. 근거(根據)나 고증(考證)없는, 그저 그렇다고 말할 뿐이다.
〔앤 팔루던 지음 “중국의 황제”〕라는 책에 의하면 : 〔그는 6 남매(男妹)중 막내로, 그의 아버지는 각지(各地)로 떠돌아다니며, 먹고 살기 위해 품을 팔며, 세금(稅金)과 부역(賦役)을 피해 남경(南京)에서 안휘(安徽)로 도망을 갔다고 하며, 그의 ‘증조부(曾祖父)’는 사금(砂金)채굴업자였고, 그의 ‘외증조부’는 무당(巫堂)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1,344년 흉년 때는 그의 가족(家族) 대부분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 먹고 살기 위해 황각사의 탁발승이 되고, 25살 때 폭도(暴徒)가 되었는데, 홍건(紅巾)적의 우두머리였던 “곽 자 흥”의 양녀【뒤에 마(馬)황후(皇后)이다】와 혼인(婚姻)하였고, 1,359년에 남경(南京)을 장악했다〕고 한다. 이것은 대륙 사(大陸史)와 똑같다. 물론(勿論) 책을 지은 저자(著者)가 대륙 사(大陸史)를 참고(參考)했을 것이다.
또,〔홍무제(洪武帝)의 초상화(肖像畵)를 보면, 아주 추악(醜惡)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명(明) 황실(皇室)의 성(姓)인 ‘주(朱)’는 돼지를 의미하는 ‘저(猪)’와 발음(發音)이 같아서 홍무제(洪武帝)가 ‘돼지’같은 용모(容貌)를 지녔으리라는 설이 유행(流行)했다고 하는데, 그는 빈농(貧農)출신으로 교육(敎育)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주걱턱인 못생긴 외모(外貌) 때문에 많은 열등감(劣等感)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380년의 승상(丞相) ‘호유용’의 반역죄(反逆罪) 사건 때는 음모(陰謀)에 연루(連累)된 일만(一萬)여명의 목을 베었다고 하며, 금의위(錦衣衛)라는 비밀경찰(秘密警察)과 같은 제도(制度)를 만들었다. 그가 죽자 36명의 후궁(後宮)들이 생매장(生埋葬 : 순장)되었다.〕고 책에서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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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한족(漢族)”이라는 것은, 자신(自身)들의 역사서(歷史書)에서 조차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根據)로 한족(漢族)이라고 하는 걸까? 모든 것은 1,912년으로 돌아가면 그 연유(緣由)를 알 수 있는 것이다.
○ 반도조선(半島朝鮮)을 만들면서, “백의민족(白衣民族)이니, 단일민족(單一民族)”이니 하는 것과 똑같은 맥락(脈絡)으로, 당시(當時) 사회(社會)를 자신(自身)들이 원(願)하는 방향(方向)으로 이끌고 가기 위해 “미사려구(美辭麗句)”로, 구성원(構成員)들을 위한 “쇼” 이상(以上)의 것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 역사(歷史)란, 이렇게 승자(勝者)의 기록으로 아름답게, 가슴을 울리는 곱고, 우아(優雅)하게 기록(記錄)이 되지만, 그 뒷면은 추악(醜惡)하기 그지없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理解)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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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대륙(大陸) 섬서 성(陝西省) 임동 현(臨潼縣)에서 발견(發見)된, “병마용”의 주인공(主人公)은 누구였을까? 직접(直接) 볼 기회(機會)는 없었으나, 많은 사진들을 보면서 느낀 점은, 다양(多樣)한 부류(部類)들의“도용(陶俑)”들이, 왜 “상투”를 튼 보습을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疑問)이 바로 그것이다.
“상투”는 “조선(朝鮮)의 것”이며, 또 ‘쌍상투’도 보이는데, 쌍상투는 고구려(高句驪)의 벽화(壁畵)에 나타나 있다고 한다.
1,974년에 발견(發見)된 기원전(紀元前) 3 세기(世紀)의 위대(偉大)한 기술자(技術者)라고 칭송(稱頌)했던 ‘이빙(李冰)’의 석상(石像), 머리 부분을 유심히 보면 상투를 튼 모습이 보인다.
○ 그렇다면 “상투”란 어떤 머리 모습을 말하는 것일까?
「상투」 : <다음백과사전> / 〔결혼을 하거나 관례를 올릴 때 상투를 하는데, 이는 머리카락을 올려빗어 정수리 위에서 틀어 감아 삐죽하게 맨 것이다. 여기에 동곳을 꽂아 고정시킨 다음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망건(網巾)을 썼다. 상투의 확실한 모습은 고구려 고분벽화, 신라 도제기마 인물상(陶製騎馬人物象)에 잘 나타나 있다.〕고 하였으며, 벽화(壁畵)의 보습을 보면, 「오래된 것일수록 상투의 높이가 높은데 시대적(時代的)인 영향(影響)일 것으로 판단(判斷)된다. 고구려(高句驪)의 상투는 쌍상투도 있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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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난”이 지은 “진시황릉”이란 책의 표지(表紙)모델이 바로 쌍상투를 튼 기병(騎兵)의 모습이다. 「무릎을 꿇고 앉은 쇠뇌 병의 모습을 보자. : 머리는 상투를 틀고, 왼 발을 구부려 세우고, 오른쪽 무릎은 땅에 밀착했다. 가장 활을 잘 쏠 수 있는 자세다.」라고 설명(說明)한다.
전차(戰車)를 따르는 보병(步兵)부대(部隊)를 보자. 「키 1.5미터 몸 길이 2미터인 4 필의 말이 나란히 서서 전차(戰車)를 몰고 그 앞뒤에 보병(步兵)부대(部隊)가 뒤따른다.」라 했으며, 그 따르는 보병부대의 뒷모습 머리는 모두 상투를 가지런히 틀은 모습이다.
「1호 용 갱의 동서는 230미터, 남북이 62미터, 도용(陶俑) 8천여 개를 비롯해 도마, 전차, 청동병기가 발굴(發掘)되었다.」하였는데, 그들의 머리를 보라. 모두 상투를 틀고 있지 않은가!
「월 왕(越王) 구천(鳩淺)의 검은 길이가 55.7 cm의 검인데, 2천5백년이 지났는데도 녹슬지 않고, 사람의 얼굴이 비칠 정도라고 하였다. 또한 1호용 갱에서 출토(出土)된 청동(靑銅)검은 91.3cm, 너비 3.2cm인데 2천 2백년(百年) 동안 땅속에 묻혀있으면서도 ‘크롬 화합물 산화층’에 덮여 있어서 새것과 같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다 당시(當時) 「“조선(朝鮮)의 것”이지, 진시황(秦始皇)의 것이 아니다.」“진(秦)”나라가 대륙(大陸)에 존재(存在)했는지 조차 불분명(不分明)한 상황(狀況)이다. 이는 「진(秦)이 있었다는 땅은 “조선(朝鮮)의 땅”이었기 때문이며, 진(秦)이 조선(朝鮮)의 한 나라였다」면 가능(可能)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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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족(漢族)에 대한 중국(中國)고금지명대사전(古今地名大辭典)의 설명을 보자.
〔最初根據地當在崑崙山.五千年前.沿河源東下.居於內地之西部及北部.自皇帝戰勝苗族.勢力大廣. : 최초(最初) 근거지(根據地)는 곤륜산(崑崙山)에 있었는데, 5천여(千餘)년전에, 하(河)의 근원(根源)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와, 서부(西部) 및 북부(北部)의 내지에서 살았다. 황제(皇帝)가 묘족(苗族)과의 전쟁(戰爭)에서 승리(勝利)하여 세력이 크게 확대(擴大)되었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조선사(朝鮮史)의 반만년(半萬年)! 삼위(三危)태백(太白)! 고구려(高句驪)는 북지(北地)에서 일어났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말, 신라는 소호금천(少昊金天)의 후예(後裔)라 하여, 성을 김씨(金氏)로 했다. 고구려(高句驪)는 고신(高辛)씨의 호(號)을 따라 “고씨(高氏)”로 했다는 기록(記錄)과 위에서 말하는 “한족(漢族)”설명을 비교(比較)해보면, 도대체 한족(漢族)의 혈통(血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예 없다. 「조선(朝鮮)의 각(各) 나라들은 황제(黃帝)로부터 그 아들, 손자(孫子), 증손자(曾孫子)들로 계속(繼續) 이어지고 있는데, 왜 한족(漢族)의 혈통(血統)은 없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歷史)란 선대(先代)와 후대(後代)가 연결(連結)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생뚱맞게 서양(西洋)에서 반도(半島)로.........이런 식의 역사(歷史)서술(敍述)은 조선사(朝鮮史)를 얕봐도, 너무 얕보는 행위(行爲)라 아니 할 수 없는 일이다.
현(現) 대륙(大陸)측에서 자랑스럽게, 자부심(自負心)에서 말하는 “한족(漢族)”이란 실체(實體)가 어디에서 출발(出發)하는 것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냥 말로만 하는 “정책적(政策的)인, 정치적(政治的)인 구호(口號)”일 뿐인 것을...........!!!!!!!!!!!!!!!!!
○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를 보자.
〔黃 帝 者 , 少 典 之 子 ,姓 公 孫 , 名 曰 軒 轅 。生 而 神 靈 , 弱 而 能 言 , 幼 而 徇 齊 ,長 而 敦 敏 , 成 而 聰 明 。 軒 轅 之 時 , 神 農 氏 世 衰 。 諸 侯 相 侵 伐 , 暴 虐 百 姓 , 而 神 農 氏 弗 能 征 。 於 是 軒 轅 乃 習 用 干 戈 , 以 征 不 享 ,諸 侯 咸 來 賓 從 。 而 蚩 尤 最 為 暴 , 莫 能 伐 。炎 帝 欲 侵 陵 諸 侯 , 諸 侯 咸 歸 軒 轅 。 軒 轅 乃 修 德 振 兵 , 治 五 氣 ,蓺 五 種 , 撫 萬 民 , 度 四 方 ,教 熊 羆 貔 貅 貙 虎 以 與 炎 帝 戰 於 阪 泉 之 野 。 三 戰 , 然 後 得 其 志 。 蚩 尤 作 亂, 不 用 帝 命 。於 是 黃 帝 乃 徵 師 諸 侯 , 與 蚩 尤 戰 於 涿 鹿 之 野 ,遂 禽 殺 蚩 尤 。 而 諸 侯 咸 尊 軒 轅 為 天 子 , 代 神 農 氏 , 是 為 黃 帝 。 天 下 有 不 順 者 ,黃 帝 從 而 征 之 , 平 者 去 之 ,披 山 通 道 , 未 嘗 寧 居 。 東 至 于 海 , 登 丸 山 ,及 岱 宗 。 西 至 于 空 桐 ,登 雞 頭 。南 至 于 江 , 登 熊 、 湘 。北 逐 葷 粥 ,合 符 釜 山 , 而 邑 于 涿 鹿 之 阿 。 遷 徙 往 來 無 常 處 , 以 師 兵 為 營 衛 。官 名 皆 以 雲 命 , 為 雲 師 。 置 左 右 大 監 , 監 于 萬 國 。 萬 國 和 , 而 鬼 神 山 川 封 禪 與 為 多 焉 。 獲 寶 鼎 , 迎 日 推 筴 。 舉 風 后 、 力 牧 、 常 先、 大 鴻 以 治 民 。 順 天 地 之 紀 , 幽 明 之 占 , 死 生 之 說 , 存 亡 之 難 。時 播 百 穀 草 木 ,淳 化 鳥 獸 蟲 蛾 , 旁 羅 日 月 星 辰 水 波 土 石 金 玉 ,勞 勤 心 力 耳 目 , 節 用 水 火 材 物 。 有 土 德 之 瑞 , 故 號 黃 帝 。 黃 帝 二 十 五 子 , 其 得 姓 者 十 四 人 . 黃 帝 居 軒 轅 之 丘 , 而 娶 於 西 陵 之 女 ,是 為 嫘 祖 。 嫘 祖 為 黃 帝 正 妃 , 生 二 子 ,其 後 皆 有 天 下 : 其 一 曰 玄 囂 , 是 為 青 陽 ,青 陽 降 居 江 水 ; 其 二 曰 昌 意 , 降 居 若 水 。 昌 意 娶 蜀 山 氏 女 , 曰 昌 僕 , 生 高 陽 , 高 陽 有 聖 德 焉 。 黃 帝 崩 , 葬 橋 山 。 其 孫 昌 意 之 子 高 陽 立 ,是 為 帝 顓 頊 也 。〕
눈을 씻고, 또 씻고 다시 봐도, 그 유명한 황제(黃帝)에 대한 기록(記錄)속에 “한족(漢族)의 시조(始祖) 또는 한족(漢族)이란 말 자체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이곳에 기록(記錄)되어 있는 것은, 황제(黃帝)의 아들인 현효(玄囂)가 기록(記錄)되어 있는데, 이 분은 바로 신라(新羅)의 시조(始祖)요, 또 손자(孫子)인 제곡고신(帝嚳高辛)씨는 주(周)나라와 고구려(高句驪)의 선조(先祖)와 시조(始祖)이다.
만약(萬若), 대륙(大陸)측에서 그렇게도 “한족(漢族)”에 대한 자부심(自負心)이 있었다면 분명(分明), 고전(古典)에 기록(記錄)되어 있어야만, 그것을 가지고 증거(證據)할 수 있는데, 그들이 스스로 말하고 있는 “황제(黃帝)”에 대한 기록(記錄)자체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주석(註釋)편에 있는가? 확인(確認)해 보자. 「없다.」
※ 「대륙왕조(大陸王朝)란 바로 조선왕조(朝鮮王朝)를 말하는 것이다.」 이 점을 생각하고 조선사(朝鮮史)를 푼다면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인간적(人間的)인 포근한 조선사(朝鮮史)가 전개된다.
주석(註釋)을 보면 : 〔伏 犧, 神 農, 黃 帝 為 三 皇. 少 昊, 高 陽, 高 辛, 唐, 虞 為 五 帝 : 복 희(伏犧). 신 농(神農). 황제(皇帝)는 삼황(三皇)이요, 소호(少昊). 고양(高陽). 고신(高辛). 당(唐). 우(虞)는 오제(五帝)이다.〕라 하였는데, 이 모두는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시조(始祖)들이 아닌가!!!!!!!!!!!!!!!!! 도대체 한족(漢族)이란, 생뚱맞게 어디에서 뛰어나온 말인가?
이것은 「1,900년대(年代) 초기에 정치적(政治的)인 구호(口號)였을 뿐이며, 그 후(後) 이것은 정책적(政策的)으로 채용(採用)되어 소위(所謂) “한족(漢族)화”가 되어 버린 것이다.」
2013년 10월 12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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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렇게 유추한 겁니다.
위의 사서들 말고..숫한 사서들엔...진한은 마한의 동부에 있고...마한의 왕이 진한을 다스린다.
그 진한은 후대 신라가 접수하고...마한은 대개 백제가 접수하는데...
그 남부에 변한을 서로 끼고 쟁투하다가...신라가 먹는다.
그러니 역사들 다 비교하면...변한은 중국 동남부인 신라와 중국 서남부인 백제의 남쪽에 낀 가야국이다.
고로 동남아가 가야국이다...가야는 곧 기자조선이나 삼국의 남진 이전엔...월지족의 최 동남부 속지이다.
전 그렇게 대입한 겁니다.
진국에서 진(辰=震)이란 글자는 동방을 뜻하는 글자이니, 동방지역의 패자가 곧 마한=진국으로 생각하고, 백제는 그 속국 중의 하나이며, 신라의 선대 진한 역시 마한의 속국중의 하나였다 이렇게 풀면 이해가 쉽습니다. 고구려는 마한의 적지격이구요. 그래서 후대 사가들이 마한은 고구려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거지요. 고구려의 이름도 여러 이름이 있는데, 이는 시대적으로 다르게 호칭했다는 증거입니다.
가야는 진한과 변한과 더 관계가 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러니까 문무님은...월지와 목지는 엄연히 다른데...
후대의 사가들이 월지를 목지라 잘못 표기한 연유로...엄연히 다른 두 나라가 한 나라로 오인 해석돼고...
후대 왜곡자들이 그를 적극 이용했다란 말씀같습니다...?
그럼 또 얘기가 달라지는군여...다시 연구해 봐야 겠습니다...ㅡ. .ㅡ
지도 감사합니다.
다시 정리해 보니...
삼한(三韓)은 본디...진국(辰國)이고 이전부터 조선의 남쪽에 존재했다.
이 진국을 그 진의 삼국 중 마한(馬韓)의 왕이 지배했는데...그 도읍지는 목지국(目支國)이다.
마한의 도읍지를 월지국(月支國)이라 함은...목지(目支)의 잘못됀 표기다.
아님 그 반대다.
고로 목지국이라 표기한 월지국은...그 근본이 총령 서쪽의 월지국관 다르다...이것 같습니다...?
다시 연구해 보겠습니다.
진국(辰國)인 삼한을 잠시 기자조선의 기준이 점거하긴 했으나...
후대엔 기자씨의 자손은 끊어지고...다시 원주족인 진국(辰國)중...마한의 족속이 삼한을 통치하다...
마한의 동북쪽에 다다른 부여의 유종인 백제가 망명했다 접수한다.
고구려도 유사하고여...이렇게 정리돼는군요...
진국(辰國)..진한을 물론 변한 마한까지 다 포함한 국명 진국(辰國)...새로운걸 발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문무님...
문제는 대륙사와 조선사에서 이러한 것들을 아주 혼란스럽게 기록되고 있어, 후대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아주 어럽도록 해 놓았다는 점입니다. 대체적으로 삼한에 관한 것이나 조선사의 것들은 삼국지 위서 위략을 참고하시면 무난할 것 같구요. 북사나 통전도 괜찮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망한 나라를 후대에 다시 접수하는 기록들이 있어 그것을 해설함에 아주 난감한 곳이 여러군데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은 우리들이 보고있는 역사서가 누군가에 의해 편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집니다. 동국이니 동한이니 하는 것도 이와같은 맥락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나라들을 별도의 나라로 생각하면 도무지 풀리지 않습니다.
네. 동국이나 동한이 어떤 특정의 나라이름이 아닌 상대적 개념이겠져...
서토개념에선 조선이 동국일 수 있고...조선개념에선 또 동쪽의 번국이 동국일 수도 있고...
제가 또 실수하고 있는 걸까요...?..이젠 조심스러워서 원...ㅡ. .ㅡ
사가 시문집에 따르면 "마한"이 있었을때 신라가 있었는데 신라사람들은 마한을 "서한"이라고도 불렀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