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불자여!!! 미래의 등불을 밝히자!"
오는 2005년 6월 11일~12일 양일간 전남 순천 청소년수련원에서 개최되는 '제24차 전국불교청년대회'를 즈음하여 대한불교청년회(창립 85주년)의 근간인 '조선불교청년회(1920년 6월만해 한용운스님은 청년불교운동에 뜻있는 분들과 함께 결성)'를 창설한 만해스님에 대해 올립니다. 큰 서점이 없는 지방에 계시는 법우님들! '나의 꽃밭에 님의 꽃이 피었습니다.(고명수 저)와 '한용운 평전(고은 저)'을 구입하시지 못하는 법우님들~~~'퀴즈! 불청~범종을 울려라' 공부하시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만해(卍海) 한용운스님(1879∼19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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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해 한용운 스님 연보 및 만해기념사업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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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월일 |
내 용 |
비고 |
1879 |
8. 29 |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한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다.
(乙卯, 음 7월 12일), 본관은 청주, 자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이며, 득도(得度) 때의 계명은 봉완(奉玩),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卍]海)이다. 어머니는 온양 방씨 (方氏)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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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
(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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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움. 서상기(西廂記)를 읽고, 통감, 서경기삼주를 통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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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
(1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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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리에서 천안 전씨(全氏)와 결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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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11월~ 1897년 1월
(18세~19세) |
호론(湖論)의 영수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학통을 따르는 文人志士 김복한, 이설, 임한주 등이 일으킨 홍주의 을미 의거에 가담. 내포 지방에서는 을미 의거를 위한 모병을 일년 전부터 전개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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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
(19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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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 의거가 실패로 돌아가자 고향을 떠나 출가하다.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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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
(2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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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인제군 설악산의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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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
(2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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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다시 고향인 홍성으로 내려가 수개월간 머물다. 다시 출가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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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1 |
맏아들 '보국' 태어나다. (보국 내외 북한에서 사망, 손녀 셋이 북한에 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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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
(27세) |
1. 26 |
백담사에서 김연곡사(金蓮谷師)에게서 득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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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
백담사에서 전영제사(全泳濟師)에 의하여 수계(受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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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
백담사에서 이학암사(李鶴庵師)에게 [기신론], [능가경],[원각경]을 수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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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28세)
1907
(29세) |
4. 15 |
은사인 연곡스님이 건봉사에서 구해 건네준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 서계여의 <영환지략(瀛環志略)>을 접하고, 새로운 세계정서와 드넓은 세계의 존재에 자극받아 세계여행을 계획하고 설악산에서 하산,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으나, 일진회로 오인한 거주민들에 의해 박해을 입고 돌아와 안변 석왕ㅏ에서 첨선수업에 몰두함.
강원도 건봉사에서 수선안거(최초의 禪수업)를 성취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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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30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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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유점사에서 서월화사(徐月華師)에게 [화엄경]을 수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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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
일본의 마관·궁도·경도·동경·일광 등지를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하다. 淺田교수와
교유하여 유학 중이던 최린(崔麟)과도 사귀고 10월 귀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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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
건봉사 이학암사에서 [반야경]과 [화엄경]을 수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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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0 |
서울에 경성명진측량강습소를 개설, 소장에 취임(국토는 일제에 빼앗길지라도 개인 소유 및 사찰 소유의 토지를 수호하자는 이념 때문이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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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
(31세) |
7. 30 |
강원도 표훈사 불교강사에 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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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32세) |
9. 20 |
경기도 장단군 화산강숙 강사에 취임. {조선 불교 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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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
(3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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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영·진진웅·김종래·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일불교동맹 조약 체결을 분쇄하다. 만주를 주유하면서 동북아 정세를 살펴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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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5 |
범어사에서 조선 임제종 종무원을 설치하여 서무부장 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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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6 |
조선임제종 관장에 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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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3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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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을 대중화하기 위해 [불교대전] 편찬을 계획하고 경남 양산 통도사의 고려대장경 1,511부, 6,802권을 열람하기 시작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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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
(3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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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강연회 총재에 취임. 박한영·장금봉 등과 불교종무원을 창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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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9 |
통도사 불교강사에 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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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
{조선불교 유신론}을 불교서관에서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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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
(36세) |
4. 30 |
{불교대전}을 범어사에서 발행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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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
조선불교회 회장으로 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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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
(37세) |
10월 |
영남·호남 지방의 사찰(내장사·화엄사·해인사·통도사·송광사·범어사·쌍계사·백양사·
선암사 등)을 순례하며 곳곳에서 강연회를 열어 열변으로써 청중들을 감동시키다. 조선선종 중앙포교당 포교사에 취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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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39세) |
4. 6 |
{정선강의 채근담}을 신문관에서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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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3 |
밤 10시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정돈석
(擬情頓釋)이 되어 진리를 깨치다. [오도송] 남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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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
(40세) |
9월 |
서울 계동 43번지에서 월간지 [유심](惟心)을 창간하여 편집 겸 발행인이 되다(12월
까지 3권을 발행하고 중단됨). 동지 창간호에 논설 [조선청년과 수양]·[전로(前路)를 택하여 나아가라]·[고통과 쾌락]·[고학생]을 비롯하여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 [심](心)을 발표하다(일반적으로 신시의 선구를 주요한의 [불놀이]로 보지만 만해의 이[심]은 그보다 1년 앞서서 발표됨). 이때부터 더욱 문학 창작에 힘을 기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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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
[마(魔)는 자조물(自造物)이다]를 [유심]지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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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
[자아를 해탈하라]·[천연(遷延)의 해(害)]·[훼예](毁譽)·[무용(無用)의 노심(勞心)],
수필[전가(前家)의 오동(梧桐)을 [유심]지에 발표하다. 중앙학림 강사에 취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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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
(41세) |
1월 |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과 관련하여 최린·오세창 등과 조선독립을 숙의. 3.1운동을 주도,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고 공약삼장
을 첨가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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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
경성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 연설을 하고 투옥될 때에는
변호사·사식·보석을 거부할 것을 결의하고 거사 후에 일경에게 체포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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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0 |
서대문 형무소에서 일본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으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기초하여 제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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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9 |
경성지방법원 제 1형사부에서 유죄판결을 받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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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4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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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옥 중 일제가 3·1운동을 회개하는 참회서를 써내면 사면해주겠다고 회유했으나
이를 거부하다. 가을, 감형되어 출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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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
(44세) |
3. 24 |
법보회를 발기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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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
조선불교청년회 주최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철창철학]이라는 연제로 강연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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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
조선학생회 주최로 천도교 회관에서 [육바라밀]이라는 연재로 독립사상에 대한 강연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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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45세) |
2월 |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지원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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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지원하는 강연에서 [자조]라는 연제로 청중을 감동시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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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
(46세) |
10. 24 |
장편소설 [죽음]을 탈고하다(미발표). '조선불교청년회' 총재에 취임하다. 이때를 전후하여 민중계몽과 불교대중화를 위해 일간신문의 발행을 구상했으며,
마침 시대일보가 운영난에 빠지자 이를 인수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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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47세) |
6. 7 |
오세암에서 {십현담주해}를 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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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29 |
[님의 침묵] 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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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48세) |
5. 15 |
{십현담주해}를 법보회에서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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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0 |
시집 {님의 침묵}을 회동서관에서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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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
[가갸날에 대하여]를 동아일보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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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
(49세) |
1월 |
신간회를 발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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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에 뽑히다. 조선불교청년회의 체제를 개편하여 조선불교총동맹으로 개칭하고 제자들인
김상호·김법린·최범술 등과 일제의 불교 탄압에 맞서서 불교 대중화에 노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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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
수필 [여성의 자각]을 동아일보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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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
회고담 [죽었다가 살아난 이야기]를 [별건곤]지에 발표하다. 동년 경성지회장 사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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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
(50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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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 및 건봉사 말사 사적}을 편찬, 건봉사에서 발행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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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
수필 [천하명기 황진이]를 [별건곤]지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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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
논설 [전문지식을 갖추자]를 [별건곤]지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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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51세) |
11월 |
광주학생의거를 조병옥·김병로·송진우·이인·이원혁·이관용·서정희 등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고 민중대회를 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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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52세) |
1월 |
논설 [소작농민의 각오]를 [조선농민]지에 발표하다. 수필 [남 모르는 나의 아들]을
[별건곤]지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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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
(53세) |
6월 |
{불교}지를 인수하여 불교사 사장으로 취임하고 많은 논설을 발표. 7월 9월 9월 24일
10월부터 10월 논설 11월 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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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
전북 전주 안심사에 보관되어 있던 한글 경판 원본(금강경, 원각경, 은중경, 및 유합,
천자문)을 발견 조사하다. [만화]를 7월부터 9월까지 [불교]지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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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
논설 [정교를 분립하라]·[인도 불교운동의 편신](片信)·[국보적 한글 경판의 발견
경로]를 [불교]지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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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24 |
윤치호·신흥우 등과 나병 구제연구회를 조직하고 여수, 대구, 부산 등지에 간이수용소
설치를 결의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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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
시론 [한갈등](閒葛藤)을 [불교]지에 발표하기 시작하다.(다음해 9월에 끝냄). 논설 [중국불교의 현상]·[조선불교의 개혁안]·[불교개신에 대하여] 등을 [불교]지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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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
[타이의 불교]를 {불교}지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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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
시론 [중국혁명과 종교의 수난] 및 [우주의 인과율] 등을 {불교}지에 발표하다. 수필 [겨울 밤 나의 생활]을 {혜성}지에 발표하다. 김법린, 김상호, 이용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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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5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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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선불교 대표인물 투표에서 최고득점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다(한용운 422표,
방한암 18표, 박한영 13표, 김태흡 8표, 이혼성 6표, 백용성 4표, 송종헌 3표, 백성욱
3표, 3표이하는 생략. [불교]지 93호에 발표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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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
수필 [평생 못 잊을 상처]를 조선일보에 발표하였다. [원숭이와 불교]를 [불교]지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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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
논설 [선과 인생]을 [불교]지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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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
[사법개정에 대하여]·[세계종교계의 회고] 등을 [불교]지에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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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
[신도의 불교사업은 어떠할까]를 [불교]지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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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
[불교 신임간부에게]를 [불교]지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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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
[조선불교의 해외발전을 요망함]을 [불교]지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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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
[신앙에 대하여]·[교단의 권위를 확립하라]등을 [불교]지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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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
[불교청년 운동에 대하여], 기행문 [해인사 순례기] 등을 [불교] 지에 발표하다. [월명야에 일수시] (月明夜에 一首詩)를 [삼천리]지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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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
전주 안심사에서 발견한 한글 경판을 보각 인출(印出)하다(당시 총독부에서 인출
비용을 대겠다고 제의해 왔으나 강경히 거절, 유지 고재현 등이 출연한 돈으로 간행
하다). 이때를 전후하여 일제의 사족을 받은 식산은행이 일본화정책으로 조선 명사를
매수하기 위하여 선생에게 성북동 일대의 국유지를 주겠다고 했으나 이를 거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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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5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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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숙원씨와 재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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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
논설[불교사업의 개정방침을 실행하라] 및 [한글경 인출을 마치고]를 [불교]지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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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
[현대 아메리카의 종교]·[교정(敎政)연구회 창립에 대하여] 등을 [불교]지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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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
[선과 자아]·[신러시아의 종교운동] 등을 [불교]지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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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
수필 [시베리아 거쳐 서울로]를 [삼천리]지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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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
[자립력행의 정신을 보급시키라]는 논설을 [신흥조선]지 창간호에 발표하다. 이때를 전후하여 [유마힐소설경]을 번역하기 시작하다. 이 해 벽산 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방응모, 박광 등 몇 분의 성금으로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짓다. 이때 총독부 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짓도록 하였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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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
(56세) |
9. 1 |
딸 영숙(英淑) 태어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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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
(57세) |
3. 8~13 |
회고담 [북대륙의 하룻밤]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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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9 |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하다. (다음해 2월 4일까지 연재함). 이때를 전후하여 대종교 교주 나철 유고집 간행을 추진하다.(미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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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5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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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후회]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다가 이 신문의 폐간으로 50회로써 중단
되다. 단재 신채호의 묘비를 세우다(글씨는 오세창). 비용은 조선일보에서 받은
원고료로 충당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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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6 |
정인보, 안재홍 등과 경성 공평동 태서관에서 다산 정약용의 서세(逝世) 백년기념회
를 개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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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
수필 [모종신범무아경](暮鐘晨梵無我境)을 [조광]지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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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59세) |
3. 1 |
재정난으로 휴간되었던 {불교}지를 속간하여 {신불교} 제 1집을 내다(논설'[불교]
속간에 대하여'를 발표). 소설 [철혈미인]을 [불교]신집에 연재하기 시작하다(2호
까지 연재하고 중단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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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 |
광복운동의 선구자 일송 김동삼이 옥사하자 유해를 심우장에 모셔다 오일장을 지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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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
논설 [조선불교 통제안]을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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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
[역경(譯經)의 급무]를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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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
[주지 선거에 대하여], 수상 [심우장설] 등을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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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
[선외선](禪外禪)을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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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
[정진]을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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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
[불교] 신집에 연재하기 시작하다 (이듬해 9월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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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
[제논의 비시부동론(飛矢不動論)과 승조(僧肇)의 물불천론(物不遷論)을 [신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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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
논설 [조선불교에 대한 과거 1년의 회고와 신년의 전망]을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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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60세) |
2월 |
논설 [불교청년 운동을 부활하라]를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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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
[공산주의적 반종교이상(反宗敎理想)을 [불교]신집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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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8 |
장편소설 [박명](薄命)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하다(이듬해 3월 12일까지 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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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
논설 [반종교 운동의 비판]·[불교와 효행]·[나찌스 독일의 종교]를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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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
[인내]를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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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
[31본산회의를 전망함]을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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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
[총본산 창설에 대한 재인식]을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만당(卍黨) 당원들이 일제에 피검되자 더욱 감시를 받다. 이때를 전후하여 조선불교
사를 정리하려는 구상의 일단으로 [불교와 고려제왕]이란 제명으로 연대별로 고려
불교사의 자료를 정리 편찬하려고 자료를 뽑기 시작하다(미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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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6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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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갑을 맞아 박광·이원혁·장도환·김관호씨가 중심이 되어 서울 청량사에서 회갑연을
베풀다. 이때 오세창· 권동진· 홍명희· 이병우·안종원 등20여 명이 참석하다.(음, 7월
12일) 사흘 뒤 민족독립운동의 비밀집회장소인 경남 사천군 다솔사에서 김법린·최범술 등 몇 명의 동지와 후학들이 베푼 회갑 축하연에 참석하여 기념 식수를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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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 |
{삼국지}를 번역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하다9이듬해 8월 11일 중단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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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62세) |
2월 |
논설 [<불교>의 과거와 미래]를 [불교] 신집에 발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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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0 |
수필 [명사십리]가 [반도산하](半島山河)에 수록되다. 창씨개명에 대하여 박광·
이동하 등과 반대운동을 벌이다. 이때를 전후하여 [통도사사적]을 편찬하기 위하여
수백매의 자료를 수집하다(미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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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6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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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백우·박광·최범술 등과 신채호선생 유고집을 간행하기로 결정하고 원고를 수지
하다. 이때를 저후하여 {태교}(胎敎)를 번역 강의하다(프린트 본으로 간행하였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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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
(6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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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학병의 출정을 반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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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
(66세) |
6. 29 (5. 9) |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 유해는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다. 세수 66. 법랍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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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
5월 |
만해 한용운 전집 간행위원회가 최범술·박광·박영희·박근섭·김법린·김적음·장도환·
김관호·박윤진·김용담에 의하여 결성되어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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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
6월 |
6·25 사변이 일어나 전집간행 사업이 중단되었으나, 전란이 끝난 뒤 간행위원으로서
조지훈·문영빈이 새로 참가하여 제2차 간행사업을 계속하다. 사회 사정으로 중단되
었다가 최범술·민동선·김관호·문후근·이화행·조위규 등이 제3차 간행위원회를 조직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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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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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준, 인권환이 {한용운연구}(통문관)을 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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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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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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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
10월 |
{용운당 만해 대선사비 건립추진회}가 발족되어 파고다 공원에{용운당 대선사비}가
건립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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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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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한용운전집}간행을 위하여 신구문화사는 만해 한용운전집 간행위원회에서
수집 보관중인 원고를 인수하고, 김영호의 적극적인 협조로 누락돤 원고를 다수
수집하였으며, 최범술·조명기·박종흥·서경보·백철·홍이섭·정병욱·천관우·신동문·등을
위원으로 한 편찬위원회를 구성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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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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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전집} 전 6권 (신구문화사) 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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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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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문학상이 창작과비평사에서 제정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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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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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호, 전보삼 등이 중심이 되어 신구문화사에서 '만해사상연구회'를 결성하고
{만해사상연구} 제1집 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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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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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동상이 홍성에 건립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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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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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전이 중심이 되어 '만해학회' 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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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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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오도송이 새겨진 시비가 백담사에 세워지다. 만해 생가가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 부락에 복원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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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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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학보} 제 1집이 간행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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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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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회 '만해제'가 만해학회 및 홍성문화원 주최로 홍성에서 열리고 생가지에 만해
추모 사당 '萬海祠'가 준공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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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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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사상실천선양회(회장, 조오현 신흥사 회주)가 결성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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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5 |
독립기념관에서 불교청년회 주최로 만해어록비 다시 세움. 기념관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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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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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기념관이 백담사와 남한산성에 세워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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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
8. 13~16 |
제1회 만해축전이 만해학국제학술대회가 설악산 백담사에서 개최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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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기 연보는 전보삼, [한용운연보](신동욱 편, 한국현대시인연구-⑧ 한용운, 문학세계사, 1993)와 한계전 편, {님의 침묵}(서울대 출판부, 1996)의 만해 연보를 참조하고 누락된 사항들을 보완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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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manhae.or.kr/who.htm
■ 만해 한용운스님의 일대기
1. 역사 앞에서
만해 한용운 스님은 조선 왕조 말 국운이 기울어가던 1879년 8월 29일 충청도 홍주땅(지금은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한응준(韓應俊)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온양 방씨이며, 어렸을 때의 이름은 유천(裕天)이었다.
어린 유천은 6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 공부를 시작하여 9살리 되던 해에 《서상기 西廂記》와 《통감 通鑑》을 독파하고 《서경 書經》에도 능통할 정도의 실력을 쌓았다. 이렇게 뛰어난 유천의 재능에 대하여 조용한 두메산골에서는 칭찬이 자자하게 퍼져 나갔다.
그 무렵 개화파 주도의 갑신정변(1884)이 삼일천하의 비극적 막을 내린 후일담이 충청도 땅에까지 퍼지더니, 박영효의 《건백서 건백서》가 올려지고, 자유민권사상이 대두되면서 국운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 아버지 한응준은 어린 유천을 불러놓고 세상 형편과 국내외 돌아가는 정세를 소상히 설명하여 주었다. 그는 후에 선친의 교훈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나는 선친에게서 조석으로 좋은 말씀을 들었다. 선친은 서책을 읽다가 가끔 어린 나를 불러놓고 역사상 빛나는 의인결사의 언행을 가르쳐주시며 세상 형편, 국내외 정세를 알아듣도록 타일러 주셨다. 이런 말씀을 한 번 두 번 듣는 사이에 내 가슴에는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고, ' 나도 그 의인 결사와 같은 휼륭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이 글은 〈시베리아 거쳐 서울로〉란 글의 한 구절이다. 여기에서 훗날의 만해 스님을 이해하는 데 선친의 가정교육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선친으로부터의 감화와 더불어 당시 국내외의 불안한 정세도 만해로 하여금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에 눈떠가게 하였다.
한편 국내 사정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외국 세력이 점차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는 일본, 청 러시아의 싸움터가 되었고 조정에서는 수구파와 개화파, 여기에 겹쳐 친일파, 친청파, 친러파 등의 정권 싸움으로 백성들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는 혼돈의 연속이었다.
급기야는 1894년에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그 기세는 삽시간에 정읍, 태인, 김제, 전주를 함락했다. 전라도를 거의 손에 넣은 동학군은 충청도 땅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전 충훈부도사 한응준의 재등용을 요청하는 교지를 내렸고, 청나라 군이 조정의 요청에 의하여 출병하자, 일본군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리하여 청일전쟁은 이땅을 무대로 참화의 비극을 토해내고 말았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한학에 정진해 온 유천은 16세 되던 해에 서당의 훈장을 하고, 또 전정숙이라는 여인과 결혼을 하여 세속적인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급박한 시대상황은 그에게 삶의 전환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16살의 유천도 동학란과 청일전쟁의 격동기에 이땅에 살면서, 민중과 함께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통 속에서 그는 역사의 현실을 통감했고, 나아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같은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야 하는 인생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덧없는 것이 아닌가. 밤낮 근근 살자 하다가 생명이 가면 무엇이 남는가. 명예인가, 부귀인가, 모두가 다 아쉬운 것이 아닌가. 결국 모든 것이 공(空)이 되고, 무색(無色)하고 무형(無形)한 것이 되어 버리지 않는가.
그는 깊은 늪 속에서 길을 잃었다. 전에 읽었던 책의 내용을 회상하여 보았으나 회의의 늪에서 나오는 길은 오히려 더 막막하기만 했다.
이렇게 유천이 회의의 늪에서 방황하고 있는 동안에도 세상은 점점 어두운 먹구름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으니, 갑오경장을 통해 수구세력으로서 귀족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자는 귀족들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오백년의 조선 왕조는 몰락의 길을 재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혼란과 갈등은 드디어 을미사변(1895)이란 거센 소용돌이로 이어지고 나라는 온통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지경이 되어갔다. 그럴수록 유천의 심중에 일어나는 갈등과 회의도 커져만 갔다. 자고 나면 소란스러움은 더해갔고,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나라가 망한다고까지 하는데, 그것은 도대체 지금까지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란 말인가? 그는 참으로 답답한 심정이 아닐 수 없었다.
2. 지견(知見)을 세우다.
남달리 모험심과 개혁의지가 강한 유천으로서는 가만히 앉아서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그런 소문이 흘러 나오는 중심지인 한양을 향해 집을 나서기로 하였다. 무작정 집을 나와 한양으로 가던 중 오랜 노독과 굶주림에 지쳐 수원쯤의 어느 주막에 들어 하루밤을 묵기로 했다. 여기서 그는 다시 회의에 빠져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빈손에 한학의 소양밖에 없는 내가 무슨 힘으로 나라 일을 도우며 큰 뜻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한양만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단 말인가? '
궁리 끝에 그는 발길을 돌려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름난 도사가 있다는 오대산 월정사로 가기로 했다. 그리하여 월정사에 도착했지만 거기서 그가 만나고자 했던 도사는 만나지 못하고 허기와 실망을 안은 채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발길을 돌려 백담사를 찾아가기로 했다.
70리 대관령 굽이길을 넘고 넘어 당도한 곳이 내설악 백담사였다. 백담사는 내설악의 절경을 병풍처럼 두르고 나즈막히 앉아 있는 고찰이다. 그때 백담사의 주지 연곡(筵谷) 스님은 유천을 따뜻이 맞이하여 불문에 귀의시켰다. 이때가 1904년, 유천의 나이 26세 되던 해이다. 여기서 만해는 본격적으로 승려의 길에 들어섰다. 1905년 1월 26일 백담사 연곡 스님을 은사로, 영제(永濟) 스님에 의하여 수계를 하니, 득도 때의 계명(戒名)은 봉완(奉玩), 법명이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였다. 그는 이제 출가의 길을 걷는 승려가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수도생활을 시작한 만해 스님은 1970년대에 소실되어 지금은 없어진 오세암 장경각에 쌓여있는 불교경전은 물론 외전과 내전을 비롯하여 매월당 김시습이 들춰본 뒤로 먼지 속에 묻혀있던 귀중한 고서들을 꺼내 오랫동안 굶주린 사람처럼 읽기 시작했다. 이때 세속에서 배웠던 한학이 그의 경전 공부에 큰 힘이 된 것은 물론이었다.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된 그는 학암(鶴庵) 스님을 모시고 《기신론》, 《능가경 楞伽經》, 《원각경》을 공부하는가 하면, 금강산 유점사에서 월하(月華) 스님을 모시고 《화엄경》을 공부하였다. 백담사와 오세암을 오르내리며 경전 공부와 선수업(禪修業)을 겸해 나간 것이다. 특히 장경각의 경전들은 그동안 쌓여있던 만해의 지적 갈증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니 더욱 경전 속에 파묻히고 선정삼매에 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 가슴 가득 불꽃이 튀는 듯한 뿌듯함으로 책을 읽으면서 이만하면 나도 많은 공부를 했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에 이제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백담사 연곡 스님에 의하여 또 다른 눈을 뜨게 되었다. 연곡 스님은 셋째 상좌인 만해 스님의 뛰어난 한학 실력에 큰 기대를 가지면서 뒷바라지를 정성껏 해주었던 분이다. 그는 금간산 일대의 가장 큰 절이며 당시 유학승들의 왕래가 많았던 백담사의 본사인 건봉사에서 그때 널리 읽히던 두 권의 책을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것이 곧 《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과 《영환지략 瀛環之略》이었다. 이 책을 받아본 만해는 새로운 충격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음빙실문집》은 청조 말 구국의 큰 뜻을 품은 대학자 양계초(梁啓超)의 계몽서적이자 혁명서적이요, 《영환지략》은 세계의 지리를 소상히 설명라고 있는 지리서였다.
이제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하던 만해 스님은 그 책을 펼쳐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겨우 조선과 중국, 그리고 일본 등 몇 나라밖에 몰랐던 그에게 아메리카와 아프리카가 있고 유럽 등 이렇게 넓은 세계와 많은 나라에 무한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새로운 사실은 가히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유신론에 다 흡수가 되기는 했지만 이 책을 통하여 칸트와 루소, 베이컨 등 서양철학에까지 접하게 된 그는 이제 산중에 묻혀 경전만 읽을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많은 이야기가 있는 넓은 세계를 직접 알아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몸집은 작으나 어릴 때부터 담력이 크고 모헌심이 강했던 만해는 드디어 세계일주의 장도에 오를 계획을 세웠다. 얼마 후 그는 금강경과 목탁을 담은 걸망 하나를 짊어지고 세계여행의 장도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스님은 원산 항구에서 배를 타고 떠나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海參威)의 신항구에 도착하였다. 세계정세는 물론 조선의 정세에도 어두웠던 스님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뜻하지 않던 봉병을 당하게 되었다. 이상스러운 중의 옷차림을 수상히 여긴 블라디보스토크 동포들이 그를 일진회(一進會) 회원으로 오인하여 다짜고짜 죽이려 들이려 들었던 것이다. 일진회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세력과 일본세력이 각축전을 벌이다가 다시 소련세력이 대치해 들어왔을 때 을사보호조약 이후 양 세력 중에 일본을 지지한 무리들이 규합한 단체였는데,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의 동포들 중에는 의심이 가는 조선 사람만 보면 무조건 일본의 첩자(일진회원)로 알고 잡아 죽이려 들던 때였다. 뜻하지 않은 봉변 앞에 그는 침착한 모습을 보이면서 살기를 원하면 죽고, 죽기를 원하면 살 수 있다는 신념으로 당당히 맞서 기지와 담력으로 담판을 벌였다. 죽더라도 뼈만은 조선땅에 묻어달라는 청에 오히려 그들이 당황하였다.
북대륙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스님은 세계여행을 포기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두만강을 건너 고국땅으로 다시 돌아와 안변 석왕사에서 참선 수업을 쌓았다.
그러나 끝내 마음 속에 타오르는 새로운 것에 대한 열망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리 속은 넓은 세상과 조선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그래서 생각 끝에 그는 국내의 사정부터 먼저 알아보아야 되겠다는 마음을 먹고 한양으로 들어갔다. 한양으로 들어온 스님은 세계정세와 조선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또 새로운 문화가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세계정세를 더 널리 알기 위해 1908년 4월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경도(京都), 동경(東京), 마관(馬關), 궁도(宮島) 등지를 시찰하며 신문물을 접하였다. 일본인 아사다 교수가 동경 조동종대학에서 불교와 서양철학을 청강하도록 배려하여 주었고, 유학 중이던 최린을 만나 사귀게 되었다.
만해는 그곳에서 일본인들이 현대문명의 이기(利器)를 수입하여 껏을 익혀 조선땅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손에는 하나 같이 측량기계가 들려 있었고 조선땅으로 들어가는 측량기계가 토지수탈의 도구로 쓰여질 것을 생각하니 만해는 한없이 안타웠다. 당시 최첨단 기술인 측량술을 공부한 일인들이 조선땅으로 와서 하는 것은 바로 토지수탈이었기 때문이다. 농본사회이면서도 토지개념이 희박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지은 것이니까 그대로 내가 지으면 된다는 생각이 고작이었는데, 그들은 측량해 주겠다고 해놓고는 3000평 땅을 2500평으로 기록해버리고 2∼3년 후쯤 다시 와서 당신은 국가의 땅을 허락도 없이 500평 더 경작해 왔으니 세금을 내라는 식으로 토지를 수탈하는 것이었다. 숫자에 대한 개념이나 지식이 부족했던 우리 민족은 눈 뜬 채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우리 땅덩어리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일본인의 수중으로 다 넘어가겠다고 생각한 스님은 도일할 때에 마음 먹었던 일들을 그만두고 측량술을 공부하기로 하였다. 그는 서둘러 측량술을 배워 일본 생활 6개월을 청산하고 그 해 가을(10월), 손에 측량기계 하나를 사들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12월 10일 그는 서울 청진동에 경성명진측량강습소를 개설하고 측량기술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며 사찰이나 개인 소유의 토지를 수호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그러나 국내정세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러일전쟁(1904∼1905)이 끝난 후 한반도의 정세는 날로 악화되고 국운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군국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굴욕적인 을사조약(1908)이 강제로 체결될 때 2천만 민족의 분노는 하늘에 닿았다. 우리 역사에 씻지 못할 치욕의 경술국치는 일본군의 총칼에 의해 강요되고 이에 분을 못 이겨 선비 매천 황현(黃玹)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을 통쾌하게 사살했다. 이 소식을 접한 만해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만 섬의 끓는 피여! 열 말의 담력이여!
벼르고 벼른 기상 서릿발이 시퍼렇다.
별안간 벼락치듯 천지를 뒤흔드니
총탄이 쏟아지는데 늠름한 모습이여!
독립투사들은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꾀하기 위해 해외로 망명을 하는가 하면 국내에서 생명을 걸고 투쟁을 벌였다.
3. 불교인으로의 지향
국맥마저 끊어지는 비운의 1910년 한일합방이 된 이후 해인사 주지로 있던 이회광은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의 지배하에 얽어맬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ㅇ른바 일본 조동종과 '연합맹약'을 체결한 것이 그것인데, 그 내용은 조선의 사찰은 전부 일본 조동종의 예속하에 둔다는 것이었다. 만해는 이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민족종교의 말살책동은 측량술보다 더 급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분연히 일너난 만해는 1911년 1월 전남 송광사에서 승려대회를 주도하여 종문난적 이회광을 몰아내는 데 앞장을 섰다. 한영, 진응, 종래, 금봉 스님들과 함께 송광사, 범어사 등지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일불교동맹조약'을 분쇄하는 데 전력을 쏟았다. 범어사에 임제종 종무원을 설치하여 33세의 젊은 나이에 그는 임제종 관장서리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 총독부는 모든 사찰의 주지와 재산에 관한 권한은 총독이 가진다는 내용의 '조선사찰령'을 반포하였다. 이리하여 30본산이 모두 총독의 수중으로 들어가버리자 스님은 망국의 비애를 안고 국경을 넘어 만주로 발길을 돌렸다.
당시 만주에서는 독립지사 이시영, 김동삼, 박은식, 이동녕 등이 조국광복을 위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스님은 그들을 방문,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신흥무관학교 등 여러 곳을 돌아보던 중 밀정으로 오해받아 통화현에 있는 굴라재를 넘다가 독립군 청년의 총격을 받았다. 피투성이의 혼수상태 속에서 여인으로 나타난 관세음보살을 따라 마을까지 기어온 스님은 수술을 받아 겨우 다시 살아날 수 있었고, 마취도 하지 않고 수술을 받으면서 나라 잃은 슬픔이 이 육신의 아픔에야 비교될 것인가를 생각하였다. 오히려 부처님의 인욕바라밀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 훗날 잘못된 일임을 안 청년들이 찾아와 사죄했을 때 그는 담담한 어조로 조선의 혼을 간직한 청년들의 기개를 오히려 칭찬하며 만주의 많은 동포들을 잘 조직하고 교육시키는 데 온 힘을 다해 달라고 격려까지 했다.
만해의 기상은 이렇듯 생사를 뛰어넘었다. 고된 시련을 겪어낸, 오히려 고난의 칼날 위에 분연히 일어선 통쾌하고 장엄한 발걸음으로 만해는 고국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돌아와보니 우리 불교계는 너무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비장한 각오로 다시 백담사로 들어간 스님은 그 유명한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 1913년 5월 25일 불교서관에서 발행한다. 이 유신론에서 유신운동의 기본적인 목표와 방향이 정신문화의 혁명에 있다고 주창한 그는, 불교인이건 아니건 인간에게는 누구나 정신의 유신을 하여야 하며, 그 길만이 조선이 살아갈 수 있는 길임을 강조했다. 스님은 온 정열을 바쳐 중생구제를 위한 승려교육문제, 포교문제, 경전의 해석 등을 유신론을 통해 불교개혁의 의지를 천명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당시 불교계의 풍토를 좀먹고 있는 비종교적, 비사회적, 비합리적, 토속적, 미신적인 요소와 인습을 타파하고 혁신해서 불교계도 시대적 변화에 부응한 새로운 진로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순수한 신앙에 바탕을 둔 윤리관을 확립하여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재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역사적 사회적인 요청에 부응할 대중불교 실현의 사면감을 고취, 촉구하였다. '유신이란 무엇인가, 파괴의 아들이다. 파괴란 무엇인가, 유신의 어머니이다. 천하에 어머니 없는 아들이 없다는 말은 하되 파괴 없는 유신이 없다는 것은 간혹 알지 못한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한 유신론은 당시 조선불교의 난후성과 은둔성을 대담하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제1장에서 제4장까지는 유신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제5장부터 제16장까지는 당시의 조선불교가 직접 부딪치고 있고 또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구체적 문제들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다. 이 논설에 나타난 그의 사상은 첫째 문명의 진보론, 둘째 자유주의와 평등주의, 셋째 불교를 현실과의 적극적 관계 속에서 해석하려는 점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승려교육에 대한 체험적 이론과 확고한 방법론을 피력했다.
그런데 《조선불교유신론》은 한문으로 씌어졌기 때문에 한문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들은 읽기가 힘들었다. 스님은 다시 불경 대중화를 위한 작업으로 양산 통도사에서 그 방대한 팔만대장경을 모두 열람하여 《불교대전 佛敎大典》을 편찬하였다. 《불교대전》은 재래식 장경 위주의 편찬방법에서 벗어나 주제별로 엮어진 최초의 책이다. 여기서도 불교 근대화 작업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 대전은 1914년 4월 30일 범어사에서 찬술, 발행되었다.
이같은 저술활동을 통하여 그는 포교면에서는 ㄹ렬한 실천론을 주장하였고, 교리면에서는 선(禪), 교(敎) 일치를 제창했다. 만지풍설 같은 일제 치하의 암흑시대에 스님은 그 많은 일을 하셨던 것이다. 그 속에서 스님은 역사 현실을 외면한 불교, 시대정신이 없는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단호히 얘기했다. 그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중생과 함께 하며 보살정신으로서 불교의 이상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실천한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설악산 오세암에서 피나는 선정삼매에 몰입했다. 설악의 대자연과 함께 호흡하다가 자신의 깊은 세계를 관조하면서 그는 '구름이 흐르거니 누군 나그네 아니며, 국화 이미 피었는데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화두를 들기도 했다. 1917년 12월 3일 밤 10시경 좌선중에 갑자기 바람이 불어 무슨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심하던 마음이 씻은 듯 풀렸다. 그래서 오도송을 남겼다.
男兒到處是故鄕 남아란 어디메나 고향인 것을
幾人長在客愁中 그 몇 사람 객수 속에 길이 갇혔나.
一聲喝破三千界 한 마디 큰소리 질러 삼천대천 세계 뒤흔드니
雪裡桃花片片飛 눈 속에 복사꽃 붉게 붉게 피네.
시대정신을 꿰뚫어 본 한용운은 붉게 붉게 피어나는 그의 마음을 천봉만학이 우쭐대는 설악의 깊은 골짜기에 파묻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봄눈이 미처 녹기도 전에 그는 다시 대중의 품으로 달려왔다.
4. 3 1운동의 선봉에 서서
스님은 늘 마음 속에 세 가지의 커다란 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부처님 정신으로 철저하게 살기 위해 혜초처럼 부처님 땅을 가보는 것이었고, 둘째는 중생제도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언론매체를 생각하고 잡지사와 신문사를 하나 경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것이었다. '이순신 사공 삼고 을지문덕 마부 삼아 파사검 높이 들고 남선북마 하여볼까'하는 시의 내용처럼 남아의 이상을 마음껏 펼쳐보고 싶은 그런 원이었다. 그런 원을 거진 스님이었기에 우리 민족 전체를 다 들어 올릴 수 있는 저울추의 역할을 기미년에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조선총독부는 무단정치 10년을 통하여 민중의 귀와 눈과 입을 다 막아버렸다. 서울로 되돌아온 그는 먼저 민중의 입과 눈과 귀를 열게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종합교양잡지 《유심 惟心》(1918년 9월 1일)을 창간하였다. 불교 근대화와 신문화 운동의 전개로서 주로 민족의 정통성과 자존성을 가진 우리 청년들에게 용기와 신념을 잃지 말라는 내용의 잡지였다. 여기에 기미 3 1운동에 동지로 규합될 육당 최남선, 최린 등이 글을 기고했다. 많은 원고를 총독 검열에서 삭제당하는 아픔을 겪으면서 스님은 굴하지 않고 언론활동에 필요한 세계정세에까지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기고했다. 《유심》 잡지 제2호를 내고 제3호를 만들 무렵, 세계정세는 급걱히 변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1918년 12월 초에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었는데 때마침 기사가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되었다. 약소민족은 모두 일어나서 독립운동을 하라는 기사의 내용은 바로 만해 스님의 끓는 가슴에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에 그는 구황실의 귀족들과 종교계 인사는 물론 재력 있는 사람들까지 다 끌어모아 200명 정도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거국적인 행사로서 민족의 자존심을 세계만방에 외치자는 의논울 하기로 마음먹었다.
동년 12월 26일 그는 최린을 은밀히 만나 그간의 결심을 텅어 놓으면서 우리도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최린의 동의를 얻은 후 권동진, 오세창도 적극 참여한다는 뜻을 확인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는 자주독립해야 한다는 사실은 자명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모으기란 그렇게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대해 소상히 설명하자 그는 잘못하면 폭동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다칠 것이니 일본 초옫ㄱ부에 독립청원서를 내자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때 스님은 "조선독립이라고 하는 것은 제국주의에 대한 민족운동이요 침략주위에 대한 약소민족의 해방투쟁인데 청원에 의한 타의의 독립운동이 웬말이냐, 민족 스스로의 결사적인 힘으로 나가지 않으면 독립운동은 불가능한 것이다"라고 반박하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스님은 그 이후 월남과 영원히 결별해 버리고 말았다.
또한 박영효, 한규설, 윤용구 등 귀족들과 접촉했으나 가진 자들은 한결같이 꽁무니를 뺐다. 처음 200명으로 계획했던 거사가 실패할 지경에 이르렀다. 귀족들과 재력있는 사람들은 다 빠지고 종교운동가들만 남게 되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기독교 세력을 규합하던 월남이 빠져나가자 남강 이승훈 선생이 평양 사람들을 중심으로 기독교인 15명을 모으고 천도교에서 16명, 불교에서 2명으로 33인이 구성되었다. 그리하여 손병희 선생의 승낙을 받고 당시의 거부 민영휘를 찾아가서 거사자금을 마련하여 이를 계획하였다.
손병희 선생을 33인의 대표로 추대하고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에 한용운 스님의 '공약 3장'이 첨가되었다. 기미년 3월 1일, 종로 태화관에서 최린의 사회로 "이제 우리는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는 만해 스님의 축사와 대한독립만세 세번을 선창하고 일경에 피습당해 마포경찰서로 잡혀가게 되었다.
붙잡혀간 독립지사들은 말할 수 없이 심한 고초를 당해야 했는데, 국가내란죄로 사형된다는 소문에는 모두 마음이 약해졌다. 미결수로 있는
동안 너무 힘들어 눈물 흘리는 그들에게 똥통을 둘러 엎으며 스님은 "나라 잃고 죽는 것이 서럽거든 당장에 취소하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스님은 옥중에서 옥중투쟁 3대원칙을 정하고는 몸소 실천에 옮겼다.
첫째는 변호사를 대지 말자는 것이었다. 내 나라를 내가 찾는데 누구에게 변호를 부탁할 것이냐, 변호해 줄 사람도 받을 사람도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사식을 받지 말자는 것이었다. 온 천지가 다 감옥인데 호의호식하려고 독립운동하지 않은 이상, 밖에서 넣어 주는 사식을 먹지 말자는 것이었다.
셋째는 보석을 요구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스님은 이렇게 3대원칙을 정해놓고 옥중에서까지도 철저하게 항거했다.
공판할 때 33인을 한 사람씩 불러 취조가 시작되었다.많은 사람들이 이에 관심을 가지고 몰려들어 방청석은 꽉 찼다. 그 중 당시 가장 엘리트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최린 선생이 아주 명쾌한 논리로 일본의 무단정치 10년을 고발했다. 시대적인 배경과 함께 일본 정치의 잘목된 점을 낱낱히 고발해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 그때 스님은 최린의 진술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최린의 논리에 의하면 만약 일본이 정치를 잘했다면 오늘의 독립운동 같은 것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과 같았다.스님은 당장 그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고우(古友), 내가 내 나라 찾자는 일에 일본 정치 잘하고 못하고가 무슨 소리요"하며 최린 선생을 크게 꾸짖었다.
스님의 취조 차례가 왔지만 처음부터 입을 열지 않았다. 몇 번 반복해 보아도 재판장의 인정신문부터 묵살해 버렸기 때문에 재판은 조금도 진행되지 못했다. 하루는 재판장이 피고는 왜 말이 없느냐고 다그치자 그는 "조선인이 조선 민족을 위하여 스스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백번 마땅한 노릇인데 일존인이 어찌 감히 재판하려 하느냐"고 오히려 호령을 했다.
또 독립선언서 공약삼장에는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폭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자 스님은 "조선 사람은 단 한 사람이 남더라도 독림운동을 하자는 뜻이다"라고 당당히 말했다. 최후의 일인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발표하라는 공약삼장은 광명, 정대, 화합이라는 바로 불, 법, 승 삼보정신을 말한 것이었다.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스님은 "육신이 다하면 저 신만이라도 남아 영세톨고 독립운동을 할 것이다"라고 당당히 말하였다. 또 그는 "나는 할 말이 많다.
서면으로 할테니 종이와 펜을 달라"고 요구하여 그 유명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란 조선 독립 이유서를 써내려갔다. 53장의 논문을 옥중에서 참고서적이나 자료 하나 없이 완성할 만큼 만해의 독립에 대한 신념은 확고했다. 평화를 획득하고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회복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희생하는 것이 사람으로서 얼마나 가치 있고 고귀한 행동인가를 주장했다.
탁월한 식견과 정연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목적을 옥중에서 당당하게 주장함과 동시에 침략 강점의 일본 군국주의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더욱 놀랄 만한 점은 1919년에 벌써 군국주의 일본군도 제1차 세계대전 때의 독일처럼 반드시 패망의 쓴 잔을 마실 날이 올 것이라고 확언한 사실이다. 그의 통찰력은 이미 세계 대세의 흐름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자유, 평등, 평화, 정의에 입각한 민족자결원칙에 의한 조선 독립은 시간 문제일 뿐,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다.
그는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첫째, 민족 자결의 원칙은 정의이며 인류가 누릴 행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어떠한 무력도 감히 자결의 원칙과 독립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공언했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 압박을 당하는 사람의 주위는 무덤으로 바뀌고 쟁탈을 일삼는 자의 주위는 지옥이 되는 것이니...... 자유를 위해서는 생명을 터럭처럼 여기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을 달게 받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의 권리인 동시에 또한 의무이기도 하다. ...... 자유와 평화는 전 인류의 요구일지로다. ...... 전 세계를 대표할 만한 군국주의는 서양에 독일이 있고 동양에 일본이 있도다. ...... 오호라, 총칼이 어찌 만능이며 무력이 어찌 승리이리요.
정의가 있고 사람의 도(道)가 있도다. 극악한 군국주의는 독일로써 최종막을 나타내지 아나하였는가. ...... 독일의 총칼이 적지 아니하거늘 전쟁의 종극을 고함은 무엇 때문인가. 정의 인도의 승리요 군국주의의 실패니라.
둘째, 조선 독립 선언의 동기에서 조선 민족의 실력과 세계 대세의 변천과 민족 자결 조건에 대하여 역사적 현실성과 미래의 이상을 분석하여 설명하고 있다.
셋째, 조선 독립 선언의 이유를 4개 항목으로 밝히면서 참으로 침통하고 부끄러움을 그치 못하겠다고 비분강개했다. (1) 민족적 자주성과 회복 때문에 독립 목적을 달성치 아니하면 저항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밝히고 있다. (2) '남쪽 나라 새도 옛 보금자리가 그리워 남쪽 가지에 집을 짓고, 호마(胡馬)가 저의 깃든 곳이 그리워 북녘 바람을 향하여 우는 것은 그 근본을 잊지 아니한 것이다. 동물도 이렇거니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어찌 근본을 잊겠는가라고 하며 조선의 독립은 당연한 일임을 주장하고 있다. (3) 민족 독립의 원동력은 자유주의에 있음을 지적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념을 표현하고 있다. (4) 만주와 중국 본토까지 넘보는 침략중의 군국 일본의 야심을 폭로하고 조선 독립은 곧 신성한 역사적 의무라고 천명하고 강조하였다.
넷째, 조선은 독립 국가의 필수요소인 토지, 백성, 문화가 구비된 당당한 독립국임을 인식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조선 독립은 산꼭대기에서 굴러 내려오는 바위와 같아서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으면 멈추지 않는다. "일본인은 기억하라! 마관조약, 포오츠머드조약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갖은 흉계와 폭력으로 조선 독립을 유린한 것은 어떠한 배신인가. 오직 평화만이 상호공존을 가능케 하니 일본은 깊이 각성하라"고 경고했다. 생사를 초월한 그는 붕의와 대한하며 정의의 화신으로 끝끝내 굴하지 않았고, '공약삼장'에 나오는 그대로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투쟁했다. 그에게는 따뜻한 동포애와 진한 인류애가 있었다. 독립을 선언한 직후 마포경찰서로 붙들려 가는 우국지사를 향하여 목이 터져라 부르는 어린 학생들의 만세소리를 들었을 때, 그의 눈애서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눈물이 쏟아졌다 한다. 그때 그 소년들의 모습과 소리는 일생에 잊혀지지 않는다고 술회하였다.
그리고 옥중 심문이 진행되었을 때 한 친구가 일본 경찰이 우리나라 사람을 차별대우할 뿐 아니라 압박하고 있다면서 총독 정치를 비난한 일이 있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그는 버럭 소리를 질러, "이 친구야, 총독이 정치를 잘하면 독립운동을 안 하겠다는 말인가? "라고 꾸짖었다. 그는 옥중에서 극심한 아픔을 겪으면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내 나라에 비친 달아
쇠창을 넘어와서 나의 마음 비친 달아
계수나무 베어내고 무궁화 심으고저
라는 애끓는 호곡의 소리를 남겼다.
재판정에서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재판장의 물음에 대하여 그는 "그렇다.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 몸이 없어지면 정신만이라도 남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 너희 나라에 승려 월조대사가 있지 않느냐, 조선에도 한용운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대답했다.
스님은 그 당시 최고형이던 3년 징역의 유죄 선고를 받고 복역중 1년 6개월 만에 풀려나게 되었다. 출옥 후에도 스님은 자항자세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고 기독교 청년회, 불교 청년회 등에서 강의를 하는 등 많은 활동을 했다. 강연 마당에서 스님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진정한 자유는 누구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다. 또 주는 것도 아니다. 서양인들은 하나같이 '신이여 자유를 주소서! '라고 자유를 구걸하지만 자유를 가진 신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필요도 없다. 사람이 부자유할 때는 부자유할 것이고, 신이 자유로울 때는 사람도 자유로울 것이다. 신이 만약에 있다면 '신이여 자유를 주소서! '가 아니라, '신이여 자유를 받으소서! '라고 얘기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불교의 진아에서 향유되어지는 자유권을 제시하고 그것이 인간의 본성, 민족의 자존성에 연결되어 조선의 독립이야말로 자유의 광범위한 의미임을 크게 가르친 것이다.
'철창철학'이라는 연제로 강연을 하던 어느날, 청중의 가슴에 민족혼을 불어넣기 위하여 비장한 어저로 "개성 송악산(松岳山)에 흐르는 물은 선죽교의 피를 못 씻고, 남강(南江)에 흐르는 물이 촉석루의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義岩)에 서려 있는 논개(論介)의 이름은 못 씻는다"라고 끝맺었을 때, 장내에는 떠나갈 듯한 박수와 함성이 가득 찼고 그 자리에 임석했던 일본 경찰까지도 박수를 쳤다고 한다.
또 다른 강연회에서는 "여러분! 얼큰한 된장찌개 맛보는 기분으로 내 말을 들어보소.
우리들의 가장 큰 원수는 대체 누구일까요. 소련입니까, 미국입니까? 아닙니다. 소련도 미국도 우리의 원수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대체 누구입니까? 일본이라고 남들이 그럽디다. 모두들 일본이 가장 큰 원수라고......" 연설을 하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석한 경찰이 연설 중지를 외쳤다. 하지만 그는 태연하게 연설을 계속 하였다. "우리의 원수는 일본이 아닙니다. 일본이 어째서 우리의 원수이겠습니까? 우리의 원수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게으름,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큰 원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말을 다했다. 그의 음성은 시냇물처럼 흐르다가도 폭포수가 되어 떨어졌다.
그의 생활은 옥중에 있을 때나 민중들의 곁에 있을 때나 언제나 한결같았다.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고통하며 호흡하고 있었다. 변절한 동지들을 질타하며 옥중에서도 옥밖에서도 굴하지 않고 투쟁한 스님의 자유 평등 독립 사상은 바로 우리 민족의 저울추로서 영원한 역사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1932년 2월에는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주도하였다. "인류는 향상적 동물이다. 향상이 자기의 실력에 의해서 한 단계 두 단계 뻗어나가야지 그렇지 목할 때에는 파괴와 멸망만이 있다"고 하며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통하여 우리 경제의 힘을 기르자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교육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표명했다. 그해 4월 20일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지원하는 민립대학 기성회 주최의 기념강연회에서 "다같이 조선 민족이 된 의무감으로 일치단결하여 우리 2천만의 피와 정성을 모아 민립대학을 설립하자"고 했다. 그리고 오늘보다 내일의 삶을 위해 철저한 교육으로 내일을 준비하자고 역설했다.
5. 침묵의 미학
그는 다시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지난 날을 정리하면서 출가사문의 길을 처음 밟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오세암 장경각의 책 속에 파묻혔다. 자신보다 400년 앞서 이곳을 지나갔던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흔적을 바 견하고 시대는 많이 흘렀어도 느끼는 바는 오히려 새로움이 있었다. 그는 중국 동안(同安) 상찰선사(常察禪師)의 선화게송인 《십현담 十玄談》에 주(註)를 달았던 《십현담주해》를 읽고 마음에 새로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도 직접 매월당의 주와 비교, 대조하면서 주(註)와 해(解)를 달았다. 선의 오묘한 이치에 이해가 깊었던 그는 선(禪)에서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솟아나와야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모국어로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하고 싶었다. 그의 시집 《님의 침묵》은 설악의 영상과 그의 심혼이 담긴 노래다. 1925년 8월 《님의 침묵》을 탈고한 그는 노도광풍이 지난 후의 잔잔함에 비유할 만한 마음의 평안을 느껶다. 자유, 평등, 평화의 사상을 침묵 속에 담고 그 침묵의 노래를 상징적 님을 향하여 투영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 너에게도 님이 있더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기 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글을 쓴다.
여기에서 말한 기리운 존재가 바로 니 의 정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기룹다"는 말을 어느 국문학자는 "그립다"는 말이 변형된 말이라고 하지만 시의 전체적인 내용으로 봤을 때 단순한 문자풀이로서 변형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기리운 것은 바로 보살의 원(願)사상이다. 우리에겐 많은 원하는 것이 있다. 욕망도 있고 갈망도 다 원하는 것이다. 그런 것은 "나"라고 하는 소아적 집착으로 바라는 원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원은 나보다 당신에게 비중을 두었을 때 참다운 님의 얼굴이 보인다는 소살사상으로 나타난다.
만해의 시는 시이면서 철학적인 시이고, 종교적인 분위기가 가미된 시이다, 눈물을 분석해서 슬픔의 농도를 알 수 없듯이 "님"이ㅣ라는 다 어 자ㅏ체에 집착하는 것으로는 만해의 세계를 알 수 없다. 침묵의 세계에 바로 접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세계이다. 팔만대장경이라는 수많은 경전은 모두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설해진 이야기이다. 그런데 화엄의 세계에 와서는 근기 자체가 부정되어 버린다. 그래서 논리적 사고로 분별이 가능하지 않는 세계, 지혜 그 자체인 비로자나 법신사상으로 침묵의 세계를 해석할 수밖에 없다. 비로자나는 바로 광명 자체, 곧 "공"이라는 그 설명의 세계를 뛰어넘어 존재하는 바로 그것이다.
새봄이 "내가 지금 갈테니 너희들 잘 맞이하라"고 말하면서 오는 것은 아니다. 아지랭이가 움을 틔우는 현상 그 자체로 존재되어지는 것일 뿐이다. 보이는 현상 그 자체가 바로 침묵의 세계인 것이다. 보살은 그것을 보고서 봄이라고 느끼고 중생은 그것을 보고서도 자신의 무명 때문에 바로 느끼지 못하는 슬픈 존재이다. 보살은 그 슬픔을 대신하며 끊임없이 부처의 세계를 비추어 제도한다.
침묵의 세계를 비로자나 법신세계로 보았을 때 보살의 할 일은 무한한 것이다. 이 사회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실천덕목이 끝없이 나열되는 것이다.
기리운 것은 다 님이라고 했다. 유정이든 무정이든 존재하는 것 그 자체는 모두가 님이다. 불성이 있는 부처님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고 하여 님과 나의 일체를 설명하고 있다. 보살의 입장에서 중생의 문제는 자신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너희에게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허상을 진상이라고 떠들지만 말고 이 사회와 중생을 위하여 무슨 일을 했는지 행위 그 자체를 반성해 보라는 것이다.
"나는 해저문 들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리워서 이 시를 쓴다"에서 우리는 중생을 구원하려는 스님의 대비원력을 볼 수가 있다.
이렇듯 우리 문학사상 유례없이 순화된 정서로 엮어진 88편의 시는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님이란 다름 아닌 생명의 근원이고, 영혼이고, 또 종교적 신념의 결정이다. "장차 이 나라의 시인들은 시학(詩學)을 배우려고 《님의 침묵》을 읽는 일을 드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전통을 생생하게 몸에 지니고 어떻게 미래를 개척하며 사느냐'하는 문제와 맞설 때마다 《님의 침묵》이 지닌 사자후에 귀를 기울이이라"고 송욱 교수는 지적하였다.
깨달음의 증험을 내용으로 한 시를 증도가(證道歌)라고 하는데, 시집 《님의 침묵》은 전체가 하나의 증도가다. 그의 시는 사랑의 시이므로 우리는 이 시집을 '사랑의 증도가'라고 부를 수 있다. 그는 이 시집을 통하여 성의 세계를 구체화하고 현대화하는데 성공했다. "이 나라의 신문학은 한문과 작별하여 모국어로써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신문학은 한문과 함께 사상까지 작별하고 말았다. 신문학사 전체를 통해서 오직 하나의 예외는 시집 《님의 침묵》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시집처럼 불교 전통이 우리 말로써 시화된 사례도 이 나라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라는 송욱 교수의 탁견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시집은 예술적인 면으로는 20세기 모국어가 이룩한 석굴암이다.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은이지만 이 금으로 자유의 꽃을 몽땅 사고 싶어라 雄辯銀 沈默金 此金買盡自由花'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중생에게 새벽을 알리는 보살로서, 어둠 속의 중생을 싣고 물을 건너야 하는 나룻배의 역할을 원하였다. 그는 시를 쓰되 영원 속으로 도피하지 않았다. 시를 쓰되 조국의 역사와 우리의 전통을 한 순간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 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의 전문이다. 부처님의 세계가 억만겁이 지나도 영원하듯이 만해의 침묵의 세계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소월 등 우리 근대시가 대부분 감성의 세계를 표출하고 있는데 비해, 만해의 시에 와서는 감성과 이성의 세계가 강하게 마주쳐 조화된다. 서양에는 초월이나 명사으이 시는 있지만 이와같이 깨달음의 세계를 노래한 시는 없다.
현상의 님은 갔다. 현상이 영원하지는 못하다는 자각은 날카로운 첫키스의 대전환으로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사라졌다. 그러나 만날 때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는 회자정리의 내용이 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원래 무상한 인생 자체에 있어 님은 갈 수도, 가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다. 단지 우리들의 착각된 생각에 의해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가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돌 뿐이다. 님의 침묵은 바로 팔만대장경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널리 애송하는 시 〈알 수 없어요〉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람도 없는데 어떻게 수직의 파문이 생기며, 떨어지는 오동나무가 발자취를 남길 수 있을까. 논리를 떠난 시적인 파격일 뿐 아니라 바람도 없는 공중은 바로 우주의 적멸이다. 부처님의 세계인 적멸보궁이다. 법성은 본래 원융해서 두 가지 모습이 아니고 일체만법, 그것은 본래 고요하다. 적멸의 세계며 근원의 세계인 것이다. 여기에 현실의 세계로 변화를 가져온 것이 수직의 파문, 인간사의 첫 페이지가 기록된다는 것이다. 사라밍 살아가는 곳엔 기쁨도 있지만 슬픔도 있고 영광과 번민도 함께 있다. 이 두 가지가 항상 우리에게 공존하고 있다. 지리한 장마와 무서운 검은 구름에 대칭되는 것이 서풍,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언뜻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우리의 이상세계이며 부처의 세계이다. 검은 구름과 푸른 하늘은 인간생활의 두 가지 면을 말한 것이다.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와 근원을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흐르는 작은 시내는 길게 길게 이어져 오늘에 이르는 우리의 역사이다. 연꽃 같은 발꿈치와 옥 같은 손으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바로 창조의 정신이다. 뿌리 깊은 전통을 가진 오늘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것을 재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은 바로 어제의 모임이며, 오늘이란 내일을 향해 가는 출발인 것이다. 오늘의 행위에 의해서 내일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렇게 새역사를 창조해 가는 마당에 있어서 타고 남은 재는 다시 기름이 된다. 타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바로 거기에 시작이 있다. 재가 된 일체만법이 그대로 기름ㅇㄴ 것이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스믕ㄴ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이는 중생이 존재하는 영원 속의 현장에 바로 서야겠다는 다짐이다. 진흙 속에서 깨끗한 꽃을 피워내는 연꽃처럼 중생의 현장에서 동체대비의 마음으로 새로운 역사를 구현해 가야겠다는 이야기이다.
그가 남긴 《님의 침묵》 중 〈찬송〉의 시를 다시 생각해 본다.
님이여 당신은 백번百番이나 단련된 금金결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珊瑚가 되도록 천국天國의 사랑을 받으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아침 별의 첫걸음이여
님이여 당신은 의義가 무서웁고 황금黃金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거지의 거친 밭에 복福의 씨를 뿌리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옛 오동梧桐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光明과 평화平和를 좋아하십니다.
약자弱者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慈悲 보살菩薩이 되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바다여 봄바람이여
누구를 위한 찬송인가? 만해 그 자신인가! 민족을 위한 만해의 비전인가! 불교는 완료형이 아니라 영원히 진행형이어야 한다. 최고를 향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갈 뿐이다. 바로 저 부처의 세계가 바로 내 속에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일상 모든 행동을 통하여 자신의 껍질을 벗기며 끝없이 가는 길, 보살의 길이 불도인 것이다.
만해 스님은 〈독자에게〉라는 시에서 시인으로서 여러분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새벽종을 기다리며 붓을 던진다고 했다. 여명의 순간을 바라보며 우리의 어둠을 사랄버릴 태양을 기대하며 새벽종을 기다리는 것이다. 수십 겁이 지나야 미륵부처가 온다고 한다. 무한한 시간, 한계를 벗어난 시간을 설명하기 위해 순간을 말하며 붓을 던진 것이다. 님의 침묵으로 새벽종 역할을 하던 비원이 여기 있는 것이다. 스님의 시는 문학지상주의나 피상적인 계몽주의가 아니라 바로 민중과 민족의 철학적 각성의 노래였던 것이다.
6. 설 중 매 화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류의 행복이라고 주장하며 옥중투쟁을 하다가 1922년 남기 복역을 마친 스님은 물속에 피어나는 신비로운 연꽃 같은 시세계를 통하여 미묘한 법문의 세계를 열었다.
시집 《님의 침묵》을 내놓은 이후 스님은 낙산사 홍련암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총독부에서 새로 부임한 군수가 관광차 홍련암에 오게 되었는데 도로 정비까지 해가며 다른 스님들은 모두 나가 영접을 하는데 스님은 요지부동 관음정근만 하고 있었다. 약이 오른 군수가 저 자를 끄집어 내라고 하자 "네가 군수면 네 나라 군수지 내 나라 군수는 아니다"라고 스님은 벽력 같은 소리로 호령했다. 그에 대해 군수는 할 말이 없었다.
1927년 49세가 된 스님은 서울에 올라와 민족운동에 가담했다. 민족항일전선인 신간회 창립위워능로 활약하여 5월에는 이 모임의 중앙집행위원, 7월에는 서울지회장이라는 막중한 위치에 올라 좌파 우파로 가랄져 있던 그들의 사상을 하나로 모으려고 노력했다. 바쁜 생활 중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신간회에서 전국에 돌려야 할 공문이 있었다. 그런데 인쇄된 봉투 뒷면에 일본 연호인 소화(昭和) 몇 년 몇 월 몇 일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이것을 본 그는 아무 말 없이 천여 장이나 되는 그 봉투를 아궁이 속에 넣고 불태워 없애버렸다.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란 사람에게 가슴이 후련한 듯 "소화(昭和)를 소화(燒火)해 버리니 가슴이 시원하군! "하는 한마디만 남겼다. 참으로 만해가 아니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1929년 겨울에는 조병옥 박사와 함께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 여론화에 앞장서고자 당대 유수의 민족운동과들과 민중대회를 계획했으나 총독부의 탄압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스님은 젊은이들을 사랑하며 모든 기대를 늘 그들에게 걸었다. 따라서 청년들이 좀 더 열심히 정진하기를 마음 깊이 바라고 있었다.
그러다가 소심(小心)하고 무기력한 젊은이를 보면 사정없이 호통을 쳤다. "이놈들아, 나를 매장시켜 나 같은 존재는 독립운동에 필요도 없을 정도로 네놈들이 앞서 나가 일해봐! "라고 말하며 젊은이들 가운데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는 이가 있으면 그는 오히려 축하한다는 격려의 말로 위로하였다. 그를 따르던 젊은이들을 대하면 엄격한 반면 따뜻한 마음으로 맞아주었다. 스님의 방에서 밤 늦도록 이야기하다가 방 한구석에 쓰러져 잠이 들어 깨어보면 어느 틈에 옮겨졌는지 따뜻한 아랫목에 눕혀져 이불이 잘 덮여 있었으며 그 자신은 웃목에서 꼼짝않고 앉아 참선을 하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고 김관호 선생은 술회하고 있다.
만해는 민중들을 지도하고 계몽하려면 역시 언로느이 힘이 필요하다고 절실히 생각하였다. 그래서 늘 신문사 경영의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눈치챈 총독부에서는 식산은행을 통하여 서류 뭉치를 들고 그를 찾아왔다. 도장을 찍어 달라는 것이었다.
"왜 도장을 찍으라는 거요? "
"성북동 일대의 산림 20여만 평을 무상으로 드리려는 겁니다. 도장만 찍으시면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그는 돌아앉았다.
"난 그런 거 모르오! 어서 나가보시오."
그는 그것이 무엇하자는 것이며 어디에서 나온 돈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어렵고 힘들지만 옳은 일이 아니면 사정없이 통박을 가했다. 고난의 칼날 위에 올라서는 고통이 있더라도 사람으로서 사람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우리들의 가슴 속에 심어주었다.
조선불교총동맹 조직으로 일제의 종교 억압에 맞서서 불교 대중화의 선봉이 된 스님은 1931년 6월에 당시 유일한 불교 잡지인 《불교》지를 인수하여 《유심》지에서 못 이룬 종교개혁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84호부터 시작하여 108호에 이르기까지 종교에 관한 글뿐 아니라 청년의 교육문제, 민족의 진로문제 등 다양하고 깊이 있는 내용으로 스님의 혼을 실어 발표했다. 그 뿐 아니라 전주 안심사에 내려가 그동안 쌓여있던 한글경파 을 하나하나 조사하고 손질하여 책으로 만들어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토끼전》이나 《별주부전》 등 이조 500년 동안 박해받아 오던 불교가 민중에게 전달하는 수단으로 부처님의 전생담을 옮겨놓은 이야기들이었으나, 그 출처를 모르는 채로 묵혀 두었던 것들이었다.
그해 9월에는 윤치호, 신흥우 등과 나병구제연구회를 조직하고 여수, 대구, 부산 등지에 간이 수용소 설치를 결의하여 나병구제에 온 정력을 쏟았다. 그러나 사실 자신은 방 한 칸 없는 생활을 하며 떠돌아 다니는 외토리 신세였다.
스님이 법린, 상호, 범술 등 청년 승려들이 조직한 비밀결사 만당의 영수로 추대받은 사실이나 54세의 나이로 당시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지목된 사실들은 바로 그의 지조와 기개, 이미 감춰질 수 없는 설중매화의 법향으로 만인을 감화시킨 것에 기인한다. 그러나 식민지 치하의 스님에겐 소망스런 활동의 터전이 주어질 리 없고, 만들어도 곧 단절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인도의 유마거사처럼 중생의 질환을 도맡아 앓을 수밖에 없었다.
요시찰 인물이었던 스님은 늘 갈 곳이 없었다. 주로 가있던 곳이 안국동 선학원이었는데 무슨 사건만 생기면 일차로 잡혀갈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괴롭혀야 했기 때문에 늘 불편한 처지였다. 그때 경봉 스님의 은사이신 구하 스님께서 서울에서 고생하지 말고 통도사에 내려와 조그만 암자나 하나 맡아 편히 지내라는 간곡한 권유를 받고 통도사로 내려가게 되었다.
스님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구하 스님은 신바람이 났다. 도량 청소며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기다렸다. 스님을 흐뭇하게 해드리려는 마음에서 통도사 일주문 옆 큰 바위에다 기념글자를 새겨 넣어야겠다고 했다. 그러나 스님은 "나는 돌에다가는 내 이름을
안 새깁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나의 이름을 새기면 새겼지 돌에다가 이름을 새기지 않겠습니다"라고 거절했다.
그런데 양산경찰서에서 만해를 떠나게 하려고 통도사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어느 곳을 가든지 조선인 경찰이 뒤를 따랐다. 그는 펜을 들었다. '모기 너는 영웅호걸의 피를 빨고 어린아이의 피도 빨고 지조가 없는 얄미운 놈이다. 하지만 너에게 두 손 합장하고 크게 배울 것 하나는 동족의 피는 빨지 않는다는 점이다'라는 내용의 시를 썼다. 이것은 〈모기〉라는 제목으로 조선일보에 발표되었다. 이 시를 보자 일본 앞잡이로서 스님의 뒤를 쫓던 그 조선인 경찰은 그만 그곳을 떠나고 말았다.
풍난화의 매운 향내를 토하듯이, 설중매화와 같이 찬바람 눈비를 원망할 것이 없이 그는 당당한 모습으로 그렇게 버티고 섰다.
7. 심우장의 정절
만해는 말년에 이르러 비로소 성북동 막바지에 집 한 칸을 갖게 되었다. 마음놓고 기거할 방 한 칸 없는 생활을 보다 못한 몇몇 뜻있는 분들이 마련해 준 것이었다.
당시 조선일보사 사장이던 방응모 선생이 다시 서울로 돌아온 스님께 거처를 마련해주려 하자 벽산 스님이 토굴을 지으려고 성북동에 마련해 놓았던 54평의 땅을 기꺼이 내놓았다. 거기에 60여평을 더 보태어 20칸 정도의 한옥을 지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집을 지을 때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볕이 잘 드는 남향으로 주춧돌을 놓았다. 이것을 본 그는 "그건 안되지, 남향이면 바로 조선총독부를 바라보게 될터이니 차라리 좀 볕이 덜 들고 여름에 좀 덥더라도 북향하는 게 낫겠어" 하며 주춧돌을 돌려놓아 북향집이 되었다. 보기 싫은 총독부 청사를 자나 깨나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것이 여간 불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북향으로 주춧돌을 놓고 집을 지으니 이 집이 돌아가시는 날까지 몸 담았던 심우장(尋牛莊)이었다. 손수 지은 이 택호(宅號)는 소를 찾는다는 뜻이다. 소는 마음에 비유한 것이므로 마음자리 바로 찾아 무상대도(無上大道)를 깨치기 위해 공부하는 집이란 뜻이다. 이곳에서 만해는 마지막까지 몸과 마음을 닦았다. 조선의 땅 어디라도 왜놈의 발 아래 짓밟히지 않은 곳이 없어도, 이곳 심우장만은 민족의 혼을 간직하고 조국을 지켜준 마지막 보루였다. 조선의 땅에 핀 한 그루의 무궁화였다.
그 심우장에서 스님은 당시 금서로 묶여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부도 속에 넣어 단재탑을 만들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으며 〈흑풍〉〈박명〉〈후회〉 등의 신문 연재 소설을 남겼고,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비명을 썼다. 우리의 역사를 지키고 보존하겠다는 눈물어린 노력이었다.
1937년에 스님은 크게 한 번 울었다. 우리의 애국지사 일손 김동삼 선생께서 서대문 구치소에서 돌아가신것이다. 조선은 앞으로 꼭 해방이 될 것인데 해방 이후 혼란이 있을 경우 그 혼란을 수습할 사람은 김동삼뿐이라고 믿고 있던 스님은 천지가 무너지는 듯했다. 연고자는 김동삼의 시신을 인수해 가라는 공고가 나왔는데도 총독부의 눈이 무서워 어느 누구도 그 시신을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스님이 달려가 그 시신을 업고 심우장까지 거 어와서 크게 울며 5일장을 지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총독부 회의실에서 31본산 주지 회의를 주최한 남차량 총독을 호령한 만공 스님을 만나
"호령만 하지 말고 스님이 가지신 주장(주仗)으로 한 대 갈길 것이지" 하였다.
이에 만공 스님은
"곰은 막대기 싸움을 하지만 사자는 호령만 하는 법이지"라고 응수했다. 그러고보니 만공 스님은 사자가 되고 만해 스님은 곰이 되어 버린 셈이다. 그러나 만해 스님은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새끼 사자는 호령을 하지만 어미 사자는 그림자만 보이는 법이지"
다 대의 고승인 이 두 분이 주고 받은 격조 높은 이 대화는 길이 남을 만한 일화다.
지사답게, 법사답게, 시인답게 일관된 길을 한 치도 흔들림 없이 걸은 스님은 변절한 동지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창씨개명한 당시 식자들을 똥보다 죽은 시체보다 더 더럽게 여겼다. 변절한 최린, 이광수, 윤치호 등을 일러 주인에게 충복하는 개만도 못한 놈들이라고 말했다.
1939년 세수로 61세 회갑을 맞으니 감회가 새로웟다. 총총히 지나간 예순 한 해가 짧은 생애 같았다. 그는 이렇게 술회하였다.
가난과 병을 마음대로 하니 누가 묘방 얻은 줄 알겠지만 그러한 문제들이 나의 마음을 바꿔 놓을 수 없으며 이미 한 모습 변하여 님께 향하는 마음 속에서 물같이 흐르는 여생을 그대여 묻지 마라. 다만 매미 소리가 석양을 맞았을 뿐이다.
동대문 밖 청량사에서 마련된 회갑날 오세창, 권동진, 안종권, 박광, 장도환, 김관호 등이 스님의 송수 만년을 기원하는 송수첩에 한 수씩 시를 지었다.
스님은 일제 말기 혹독한 무단정치 아래서 일제의 황민화 운동은 전 조선이 전개하며 강요할 때 끝까지 굴하지 않고 버티면서 비타협의 정신으로 나갔다. 창씨개명반대운동을 벌이고 조선인학병출정을 반대하면서 한편으로는 《유마경》을 번역하였다. 중생이 아프기에 내가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민족의 아픔을 당신의 아픔으로 아파했다. 만지풍설(萬地風雪) 차고 거친 뜰에 쌓인 눈, 찬바람에 아름다운 향기를 토하려는 매화, 그는 매화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조국 청년들아! 너희들은 시대적 행운아다. 현대는 조국 청년들에게 행운을 주는 득의(得意)의 시대이다. 만지풍설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매화, 이것은 너희희 모습이다"라고 말하면서 청년들에게 저 매화의 정절을 닮으라고 역설하였다. 주위가 어떻고 환경이 어떻고 불우하다 슬프다 말하지 말고 눈보라 속에서 꽃피우는 매화의 정절을 닮으라 하며 일진의 청풍을 불어 넣기를 잊지 않았다.
민족운동가, 불교사상가, 근대시인으로 집약되는 만해는 청정심으로 극락정토를 지상에 꾸미려는 깊은 뜻을 버리지 않은 채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66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학병 징병을 거부하고 일체의 배급을 거부하며 영양실조가 되었던 스님의 육신은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법신은 영원히 이 조국 땅에 남아 역사의 등불이 된 것이다. 민족사의 암흑기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부처님의 금본정신과 가르침을 이땅에 심고자 노력한 이가 어디에 또 있는가.
그는 민족의 갈망을 절실하게 노래한 시인이었고 또 구국 일념으로 살아온 독립지사였고, 가혹한 고난과 탄압 속에서도 위연함을 보여 지조를 꺽음이 없었다. 불굴의 투지로써 겨레를 이끌었다.
스님을 추모하여 쓴조종현의 시는 만해 스님의 큰 삶을 잘 집약시키고 있다.
만해는 중이냐?
중이 아니다.
만해는 시인이냐?
시인도 아니다.
만해는 한국 사람이다. 뚜렷한 배달민족이다. 독립지사다. 항일투사다.
강철 같은 의지로 불덩이 같은 정열로 대쪽 같은 절조로 고고한 자세로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최후 일각까지 몸뚱이로 부딪쳤다.
마지막 숨 거둘 때까지 굳세게 결투했다.
꿋꿋하게 걸어갈 때 성역(聖域)을 밟기도 했다.
보리수의 그늘에서 바라보면 중으로도 선사(禪師)로도 보였다.
예술의 산허리에서 돌아보면 시인으로도 나타나고 소설가로도 등장했다.
만해는 어디까지나 끝까지 독립지사였다. 항일투사였다.
만해의 진면목은 생사를 뛰어넘은 사람이다. 뜨거운 배달의 얼이다.
만해는 중이다. 그러나 중이 되려고 중이 된 건 아니다.
항일투쟁하기 위해서다.
만해는 시인이다. 하지만 시인이 부러워 시인이 된 건 아니다.
님을 뜨겁게 절규했기 때문이다.
만해는 웅변가다. 그저 말을 뽐낸 건 아니고 심장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피로
뱉았을 뿐이다.
어쩌면 그럴까? 그렇게 될까? 한 점 뜨거운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도사렸기 때문이다.
공약삼장(公約三章)
■ 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 人道 生存 尊榮을 爲하는 民族的 要求니, 오즉 自由的
精神을 발휘할 것이요 決코 排他的 感情으로 逸走하지 말라.
■ 最後의 一人까지 最後의 一刻까지 民族의 정당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 一切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光明正大하게 하라.
□ 금일 오인의 차거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니, 오즉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
□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광명정대하게 하라. (출처: http://www.buljahome.com/nim_han/main_p1.htm)
朝鮮獨立에 對한 感想의 槪要 - 한용운(韓龍雲)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1. 개론(槪論)
自由는 萬有의 生命이요 平和는 人生의 幸福이라, 故로 自由가 無한 人은 死骸와 同하고 平和가 無한 者는 最苦痛의 者라 壓迫을 被하는 者의 周圍의 空氣는 墳墓로 化하고 爭奪을 事하는 者의 境涯는 地獄이 되느니 宇宙의 理想的 最幸福의 實在는 自由와 平和라. 故로 自由를 得하기 爲하여는 生命을 鴻毛視하고 平和를 保하기 爲하여는 犧牲을 甘飴嘗하느니 此는 人生의 權利인 同時에 또한 義務일지로다. 그러나 自由의 公例는 人의 自由를 侵치 아니함으로 界限을 삼느니 侵掠的 自由는 沒平和의 野蠻 自由가 되며 平和의 精神은 平等에 在하니 平等은 自由의 相敵을 謂함이라. 故로 威壓的 平和는 屈辱이 될 뿐이니 眞自由는 반드시 平和를 保하고 眞平和는 반드시 自由를 伴할지라.
自由여 平和여 全人類의 要求일지로다. 그러나 人類의 智識은 漸進的이므로 草昧로부터 文明에, 爭奪로부터 平和에 至함은 歷史的 事實에 證明하기 足하도다. 人類 進化의 範圍는 個人的으로부터 家族, 家族的으로부터 部落, 部落的으로부터 國家, 國家的으로부터 世界, 世界的으로부터 宇宙主義에 至하도록 順次로 進步함이니 部落主義 以上은 草昧時代의 落謝塵에 屬한지라 回首의 感懷를 資하는 外에 論述할 必要가 無하도다. 幸인지 不幸인지 十八世紀 以後의 國家主義는 實로 全世界를 風靡하여 騰奔의 絶頂에 帝國主義와 其實行의 手段 卽 軍國主義를 産出함에 至하여 所謂 優勝劣敗, 弱肉强食의 學說은 最眞不變의 金科玉條로 認識되어 殺伐强奪 國家 或 民族的 戰爭은 자못 止息될 日이 無하여 或幾千年의 歷史國을 丘墟하며 幾十百萬의 生命을 犧牲하는 事가 地球를 環하여 無한 處가 無하니 全世界를 代表할 만한 軍國主義는 西洋에 獨逸이 有하고 東洋에 日本이 有하였도다.
그러나 所謂 强者 卽 侵掠國은 軍艦과 鐵砲만 多하면 自國의 野心壑欲을 充하기 爲하여 不人道 蔑正義의 爭奪을 行하면서도 그 理由를 說明함에는 世界 或 局部의 平和를 爲한다든지 爭奪의 目的物 卽 被侵掠者의 幸福을 爲한다든지 하는 等 自
欺欺人의 妄語를 弄하여 儼然히 正義의 天使國으로 自居하느니 例하면 日本이 暴力으로 朝鮮을 合倂하고 二千萬 民族을 奴隸待하면서도 朝鮮을 合倂함은 東洋平和를 爲함이며, 朝鮮民族의 安寧 幸福을 爲함이라 云云함이 是라.
嗚呼라 弱者는 從古의 弱者가 無하고 强者는 不盡의 强者가 無하니 曝寒의 大運이 其輪을 轉하는 時는 復讐的 戰爭은 반드시 侵掠的 戰爭의 踵을 * 하여 起할지니 侵掠은 戰爭을 誘致하는 事라 어찌 平和를 爲하는 侵掠이 有하며 또한 어찌 自國幾千年의 歷史는 他國侵掠의 劍에 斷絶되고 幾百千萬의 民族은 外人의 虐待下에 奴隸가 되고 牛馬가 되면서 此를 幸福으로 認할 者가 有하리요. 何民族을 莫論하고 文明程度의 差異는 有할지나 血性이 無한 民族은 無하니 血性을 具한 民族이 어찌 永久히 人의 奴隸를 甘作하여 獨立自存을 圖치 아니하리요. 故로 軍國主義 卽 侵掠的主義는 人類의 幸福을 犧牲하는 最魔術일 뿐이니 어찌 是와 如한 軍國主義가 天壤無窮의 運命을 保하리요. 理論보다 事實, 嗚呼라 '劍'이 어찌 萬能이며 '力'이 어찌 勝利리요. 正義가 有하고 人道가 有하도다. 侵掠又侵掠 惡極慘極의 軍國主義는 獨逸로써 最終幕을 演치 아니하였는가? 血耶肉耶 鬼哭神愁의 歐洲 大戰爭은 大略 一千萬의 死傷者를 出하고 幾多億의 金錢을 *費한 後에 正義人道를 標榜하는 旗幟下에서 講和條約을 成立하게 되었도다. 그러나 軍國主義의 終極도 實로 色彩를 莊嚴함에 遺憾이 無하였도다. 全世界를 蹂躪하려는 海欲을 充하기 爲하여 苦心焦思 三十年의 準備로 幾百萬의 健兒를 數百*의 戰線에 立하고 鐵騎飛船을 鞭馳하여 左衝右突 東聲西擊 開戰 三個月 內에 巴里를 陷落한다고 自期하던 카이제르의 聲言은 一時의 壯絶을 極하였도다. 그러나 그것도 軍國主義的 訣別의 終曲일 뿐이며, 理想과 聲言 뿐 아니라 作戰計劃의 事實도 卓越하여 休戰을 開議하던 日까지 聯合國側 兵馬의 足跡은 獨逸國境의 一步地를 踰越치 못하였으니 航空機는 空에서 潛航艇은 海에서 自動砲는 陸에서 各各 其 妙를 極하여 實戰의 作略에 絢爛한 色彩를
發하였도다. 그러나 그것도 軍國主義的 落照의 反射일 뿐이다. 噫, 一億萬 人民의 上에 君臨하고 世界 一括의 雄圖를 自期하여 對世界에 宣戰을 布告하고 百戰百勝의 槪를 有하여 神耶人耶의 間에서 縱橫自在하던 獨逸皇帝가 一朝에 自己生命의 神으로 認하는 '劍'을 解하고 *凉落拓, 天涯淪落의 知蘭 遐*에 殘喘을 僅保함은 何等의 突變이냐? 此는 곧 카이제르의 失敗 뿐 아니라 軍國主義의 失敗니 一世의 快事를 感하는 同時에 其人을 爲하여는 一線의 同情을 禁치 못하리로다. 그러나 聯合國側도 獨逸의 軍國主義를 打破한다고 聲言하였으나 其 手段 方法의 實用은 亦是 軍國主義의 遺物인 軍艦 鐵砲 等의 殺人具인즉 是는 蠻夷로 蠻夷를 攻함이니 何의 別이 有하리요. 獨逸의 失敗가 聯合國의 戰勝이 아닌즉 數多한 强弱國의 合致한 兵力으로 五年間의 持久戰에 獨逸을 制勝치 못함은 此는 또한 聯合國側 準軍國主義의 失敗가 아닌가. 그러면 聯合國側의 砲가 强함이 아니요, 獨逸의 劍이 短함이 아니거늘 戰爭의 終極을 告함은 何故뇨? 正義 人道의 勝利요 軍國主義의 失敗니라. 然하면 正義 人道 卽 平和의 神은 聯合國의 手를 借하여 獨逸의 軍國主義를 打破함인가. 曰 否라. 正義 人道 卽 平和의 神은 獨逸人民의 手를 假하여 世界의 軍國主義를 打破함이니 곧 戰爭中의 獨逸革命이 是라. 獨逸革命은 社會黨의 手에서 起하였은즉 其 由來가 久하고 또한 露國革命의 刺戟을 受한 바 有하나 統括的으로 말하면 戰爭의 苦를 感하여 軍國主義의 非를 痛切히 覺悟한 故로 談笑容從의 間에서 戰爭을 自破하고 怒濤驚浪의 軍國主義를 發揮하려던 劍을 倒하여 軍國主義의 自殺을 遂하고 共和革命의 成功을 博하여 平和的 新運命을 開拓함인즉 聯合國은 其隙을 乘하여 漁父의 利를 得함이라. 今番 戰爭의 終極에 對하여는 聯合國의 勝利 뿐 아니라 또한 獨逸의 勝利라 하리로다.
何故오? 今般戰爭에 獨逸이 孤注一擲의 最後 一戰을 決할지라도 勝負를 可히 知치 못할지요. 假使 獨逸이 一時의 勝利를 得한다 할지라도 聯合國의 復讐戰爭이 一起再起하여 獨逸
의 滅亡을 見치 아니하면 兵을 解할 日이 無할지라. 故로 獨逸이 戰敗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戰勝이라고 할 만한 境遇에 在하여 斷然히 屈辱的 休戰條約을 承諾하고 講和를 請함은 곧 機를 見하여 勝을 制함이니 講和會議에 對하여도 可及의 屈辱的 條約에는 無條件으로 承諾함을 推知하기 不難하도다 (三月 一日 以後의 外界消息은 不知). 그러하면 現今主義로 見하면 獨逸의 失敗라 할지나 遠視的으로 見하면 獨逸의 勝利라 하리로다.
噫라 曠古 未曾有의 歐洲戰爭과 奇怪 不思議의 獨逸의 革命은 十九世紀 以前의 軍國主義 侵掠主義의 餞別會가 되는 同時에 二十世紀 以後의 正義 人道的 平和主義의 開幕이 되어 카이제르의 失敗가 軍國主義的 各國의 頭上에 痛棒을 下하고 威日遜의 講和基礎 條件이 各領土의 古査에 春風을 傳하매 侵掠國의 壓迫下에서 呻吟하던 民族은 騰空의 氣와 決河의 勢로 獨立自決을 爲하여 奮鬪하게 되었으니 波蘭의 獨立이 是며 체코의 獨立이 是며 愛蘭의 獨立宣言이 是며 印度의 獨立運動이 是며 比律賓의 獨立經營이 是며 朝鮮의 獨立宣言이 是라 (三月 一日까지의 狀態). 各民族의 獨立 自決은 自存性의 本能이며 世界의 大勢며 神明의 贊同이며 全人類의 未來 幸運의 源泉이라. 誰가 此를 制하며 誰가 此를 防하리요.
2. 조선 독립 선언의 동기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후 자존성이 강한 조선인은 그 주위에서 일어나는 어느 한 가지 사실도 독립과 연관시켜 생각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최근의 동기로 말하면 대략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1) 조선 민족의 실력
일본은 조선의 민의를 무시하고 암약(闇弱)한 주권자를 속여 몇몇 아부하는 무리와 더불어 합방이란 흉포한 짓을 강행하였다. 그 후로부터 조선 민족은 부끄러움을 안고 수치를 참는 동시에 분노를 터뜨리며 뜻을 길러 정신을 쇄신하고 기운을 함양하는 한편 어제의 잘못을 고쳐 새로운 길을 찾아왔다. 그리하여 일본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외국에 유학한 사람도 수만에 달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독립 정부가 있어 각방면으로 원조 장려한다면 모든 문명이 유감없이 나날이 진보할 것이다.
국가는 모든 물질 문명이 완전히 구비된 후에라야 꼭 독립 되는 것은 아니다. 독립할 만한 자존(自存)의 기운과 정신적 준비만 있으면 충분한 것으로써 문명의 형식을 물질에서만 찾음은 칼을 들어 대나무를 쪼개는 것과 같으니 그 무엇이 어려운 일이라 하겠는가.
일본인은 항상 조선의 물질 문명이 부족한 것으로 말머리를 잡으나 조선인을 어리석게 하고 야비케 하려는 학정과 열등 교육을 폐지하지 않으면 문명의 실현은 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어찌 조선인의 소질이 부족한 때문이겠는가. 조선인은 당당한 독립 국민의 역사와 전통이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문명을 함께 나눌 만한 실력이 있는 것이다.
(2) 세계 대세의 변천
20세기 초두부터 전인류의 사상은 점점 새로운 빛을 띠기 시작하고 있다. 전쟁의 참화를 싫어하고 평화로운 행복을 바라고 각국이 군비를 제한하거나 폐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만국이 서로 연합하여 최고 재판소를 두고 절대적인 재판권을 주어 국제 문제를 해결하며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설도 나오고 있다. 그밖에 세계 연방설과 세계 공화국설 등 실로 가지가지의 평화안을 제창하고 있으니 이는 모두 세계 평화를 촉진하는 기운들이다.
소위 제국주의적 정치가의 눈으로 본다면 이것은 일소에 붙일 일일 것이나 사실의 실현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최근 세계의 사상계에 통절한 실제적 교훈을 준 것이 구라파 전쟁과 러시아 혁명과 독일 혁명이 아닌가.
세계 대세에 대해서는 위에 말한 바가 있으므로 중복을 피하거니와 한마디로 말하면 현재로부터 미래의 대세는 침략주의의 멸망, 자존적 평화주의의 승리가 될 것이다.
(3) 민족 자결 조건
미국 대통령 윌슨 씨는 독일과 강화하는 기초 조건, 즉 14개 조건을 제출하는 가운데 국제 연맹과 민족 자결을 제창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 프랑스 일본과 기타 여러 나라가 내용적으로 이미 국제 연맹에 찬동하였으므로 그 본바탕, 즉 평화의 근본 문제인 민족 자결에 대해서도 물론 찬성할 것이다.
이와 같이 각국이 찬동의 뜻을 표한 이상 국제 연맹과 민족 자결은 윌슨 한 사람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라 세계의 공언(公言)이며, 희망의 조건이 아니라 기성(旣成)의 조건이 되었다. 또한 연합국측에서 폴란드의 독립을 찬성하고, 체코의 독립을 위하여 거액의 군비와 적지 않은 희생을 무릅써 가며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시베리아에 보내되 특히 미국과 일본이 크게 노력한 것은 민족 자결을 사실상 원조한 사례일 것이다. 이것이 모두 민족 자결주의 완성의 표상이니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
3. 조선 독립 선언의 이유
아아, 나라를 잃은 지 10년이 지나고 지금 독립을 선언한 민족이 독립 선언의 이유를 설명하게 되니 실로 침통함과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겠다. 이제 독립의 이유를 네 가지로 나누어 보겠다.
(1) 민족 자존성
들짐승은 날짐승과 어울리지 못하고 날짐승은 곤충과 함께 무리를 이루지 못한다. 같은 들짐승이라도 기린과 여우나 삵은 그 거처가 다르고 같은 날짐승 중에서도 기러기와 제비 참새는 그 뜻을 달리하며, 곤충 가운데서도 용과 뱀은 지렁이와 그 즐기는 바를 달리한다. 또한 같은 종류 중에서도 벌과 개미는 자기 무리가 아니면 서로 배척하여 한 곳에 동거하지 않는다.
이는 감정이 있는 동물의 자존성에서 나온 행동으로 반드시 이해 득실을 따져 남의 침입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리가 자기 무리에 대하여 이익을 준다 해도 역시 배척하는 것이다. 이것은 배타성이 주체가 되어 그런 것이 아니라 같은 무리는 저희끼리 사랑하여 자존을 누리는 까닭에 자존의 배후에는 자연히 배타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배타라 함은 자존의 범위 안에 드는 남의 간섭을 방어하는 것을 의미하며 자존의 범위를 넘어서까지 배척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존의 범위를 넘어 남을 배척하는 것은 배척이 아니라 침략이다.
인류도 마찬가지여서 민족간에는 자존성이 있다. 유색 인종과 무색 인종간에 자존성이 있고, 같은 종족 중에서도 각민족의 자존성이 있어 서로 동화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컨대 중국은 한 나라를 형성하였으나 민족적 경쟁은 실로 격렬하지 않았는가. 최근의 사실만 보더라도 청나라의 멸망은 겉으로 보기에는 정치적 혁명 때문인 것 같으나 실은 한민족과 만주족의 쟁탈에 연유한 것이다. 또한 티베트족이나 몽고족도 각각 자존을 꿈꾸며 기회만 있으면 궐기하려 하고 있다. 그밖에도 아일랜드나 인도에 대한 영국의 동화 정책, 폴란드에 대한 러시아의 동화 정책, 그리고 수많은 영토에 대한 각국의 동화 정책은 어느 하나도 수포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 없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으려 하는 것은 인류가 공통으로 가진 본성으로써 이 같은 본성은 남이 꺾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 자기 민족의 자존성을 억제하려 하여도 되지 않는 것이다.
이자존성은 항상 탄력성을 가져 팽창의 한도 즉 독립 자존의 길에 이르지 않으면 멈추지 않는 것이니 조선의 독립을 감히 침해하지 못할 것이다.
(2) 조국 사상
월나라 (남쪽 나라: 편집자 주)의 새는 남녘의 나뭇가지를 생각하고 호마(胡馬)는 북풍을 그리워하는 것이니 이는 그 본바탕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도 이러하거든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어찌 그 근본을 잊을 수 있겠는가.
근본을 잊지 못함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천성이며 또한 만물의 미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류는 그 근본을 못 잊을 뿐 아니라 잊고자 해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가 오직 군함과 총포의 수가 적은 이유 하나 때문에 남의 유린을 받아 역사가 단절됨에 이르렀으니 누가 이를 참으며 누가 이를 잊겠는가. 나라를 잃은 뒤 때때로 근심 띄운 구름, 쏟아지는 빗발 속에서도 조상의 통곡을 보고, 한밤중 고요한 새벽에 천지신명의 질책을 듣거니와, 이를 능히 참는다면 어찌 다른 무엇을 참지 못할 것인가. 조선의 독립을 감히 침해하지 못할 것이다.
(3) 자유주의 (자존주의와는 크게 다름)
인생의 목적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려면 여러 가지 설이 구구하여 일정한 정의를 내리기 어렵다. 그러나 인생 생활의 목적은 참된 자유에 있는 것으로써 자유가 없는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으며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도 아까워할 것이 없으니 곧 생명을 바쳐도 좋을 것이다.
일본은 조선을 합병한 후 압박에 압박을 더하여 말 한 마디, 발걸음 하나에까지 압박을 가하여 자유의 생기는 터럭만큼도 없게 되었다. 피가 없는 무생물이 아닌 이상에야 어찌 이것을 참고 견디겠는가. 한 사람이 자유를 빼앗겨도 하늘과 땅의 화기(和氣)가 상처를 입는 법인데 어찌 2천만의 자유를 말살함이 이다지도 심하단 말인가. 조선의 독립을 감히 침해하지 못할 것이다.
(4) 세계에 대한 의무
민족 자결은 세계 평화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민족 자결주의가 성립되지 못하면 아무리 국제 연맹을 조직하여 평화를 보장한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민족 자결이 이룩되지 않으면 언제라도 싸움이 잇달아 일어나 전쟁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의 책임을 조선 민족이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조선 민족의 독립 자결은 세계의 평화를 위한 것이요, 또한 동양 평화에 대해서도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것은 조선 자체의 이익을 위함이 아니라 조선 민족을 몰아내고 일본 민족을 이식코자 한 때문이요, 나아가 만주와 몽고를 탐내고 한걸음 더 나아가 중국 대륙까지 꿈꾸는 까닭이다. 이 같은 일본의 야심은 누구도 다 아는 사실이다.
중국을 경영하려면 조선을 버리고는 달리 그 길이 없다. 그러므로 침략 정책상 조선을 유일한 생명선으로 삼는 것이니 조선의 독립은 곧 동양의 평화가 되는 것이다. 조선의 독립을 감히 침해하지 못할 것이다.
4. 조선 총독 정책에 대하여
조선을 합방한 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시정 방침은 무력 압박이라는 넉 자로 충분히 대표된다. 전후의 총독, 즉 테라우치(寺內)와 하세가와(長谷川)로 말하면 정치적 학식이 없는 한낱 군인에 지나지 않아 조선의 총독 정치는 한마디로 말해 헌병 정치였다. 환언하면 군력(軍力) 정치요 총포(銃砲) 정치로써 군인의 특징을 발휘하여 군력 정치를 행함에는 유감이 없었다.
그러므로 조선인은 헌병이 쓴 모자의 그림자만 보아도 독사나 맹호를 본 것처럼 피하였으며, 무슨 일이나 총독 정치에 접할 때마다 자연히 5천년 역사의 조국을 회상하며 2천만 민족의 자유를 기원하면서 사람이 안 보는 곳에서 피와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이것이 곧 합방 후 10년에 걸친 2천만 조선 민족의 생활이었다. 아아, 진실로 일본인이 인간의 마음을 가졌다면 이 같은 일을 행하고도 꿈에서나마 편안할 것인가.
또한 종교와 교육은 인류 생활에 있어 특별히 중요한 일로써 어느 나라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가 없거늘 조선에 대해서만은 유독 종교령을 발포하여 신앙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 교육으로 말하더라도 정신 교육이 없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과학 교과서도 크게 보아 일본말 책에 지나지 않는다. 그밖의 모든 일에 대한 학정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인은 이 같은 학정 아래 노예가 되고 소와 말이 되면서도 10년 동안 조그마한 반발도 일으키지 않고 그저 순종할 뿐이었다. 이는 주위의 압력으로 반항이 불가능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그보다는 총독 정치를 중요시하여 반항을 일으키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총독 정치 이상으로 합병이란 근본 문제가 있었던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언제라도 합방을 깨뜨리고 독립 자존을 꾀하려는 것이 2천만 민족의 머리에 박힌 불멸의 정신이었다.
그러므로 총독 정치가 아무리 극악해도 여기에 보복을 가할 이유가 없고 아무리 완전한 정치를 한다 해도 감사의 뜻을 나타낼 까닭이 없어 결국 총독 정치는 지엽적 문제로 취급했던 까닭이다.
5. 조선 독립의 자신
이번의 조선 독립은 국가를 창설함이 아니라 한때 치욕을 겪었던 고유의 독립국이 다시 복구되는 독립이다. 그러므로 독립의 요소 즉 토지 국민 정치와 조선 자체에 대해서는 만사가 구비되어 있어 다시 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리고 각국의 승인에 대해서는 원래 조선과 각국의 국제적 교류는 친선을 유지하여 서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바다. 더욱이 개론에서 말한 것과 같이 지금은 정의 평화 민족 자결의 시대인즉 조선 독립을 그들이 즐겨 바랄 뿐 아니라 원조조차 아끼지 않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일본의 승인 여부뿐이다. 그러나 일본도 승인을 꺼려하지 않을 줄로 믿는다.
무릇 인류의 사상은 시대에 따라 변천되는 것으로써 사상의 변천에 따라 사실의 변천이 있음은 물론이다. 또한 사람은 실리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명예도 존중하는 것이다. 침략주의 즉 공리주의 시대에 있어서는 타국을 침략하는 것이 물론 실리를 위하는 길이었지만 평화 즉 도덕주의 시대에는 민족 자결을 찬동하여 작고 약한 나라를 원조하는 것이 국위를 선양하는 명예가 되며 동시에 하늘의 혜택을 받는 길이 되는 것이다.
만일 일본이 침략주의를 여전히 계속하여 조선의 독립을 부인하면, 이는 동양 또는 세계 평화를 교란하는 일로써 아마도 미 일, 중 일 전쟁을 위시하여 세계적 연합 전쟁을 유발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일본에 가담할 자는 영국 (영 일 동맹 관계 뿐 아니라 영령 문제로) 정도가 될는지도 의문이니 어찌 실패를 면할 것인가. 제2의 독일이 될 뿐으로 일본의 무력이 독일에 비하여 크게 부족됨은 일본인 자신도 수긍하리라. 그러므로 지금의 대세를 역행치 못할 것은 명백하지 아니한가.
또한 일본이 조선 민족을 몰아내고 일본 민족을 이식하려는 몽상적인 식민 정책도 절대 불가능하다. 중국에 대한 경영도 중국 자체의 반항 뿐 아니라 각국에서도 긍정할 까닭이 전혀 없으니 식민 정책으로나 조선을 중국 경영의 징검다리로 이용하려는
정책은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무엇이 아까워 조선의 독립 승인을 거절할 것인가.
일본이 넓은 도량으로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고 일본인이 구두선(口頭禪)처럼 외는 중 일 친선을 진정 발휘하면 동양 평화의 맹주를 일본 아닌 누구에게서 찾겠는가. 그리하면 20세기 초두 세계적으로 천만년 미래의 평화스런 행복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천사국이 서반구의 미국과 동반구의 일본이 있게 되니 이 아니 영예겠는가. 동양인의 얼굴을 빛냄이 과연 얼마나 크겠는가.
또한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앞장서서 승인하면 조선인은 일본인에 대하여 가졌던 합방의 원한을 잊고 깊은 감사를 표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문명이 일본에 미치지 못함은 사실인즉 독립한 후에 문명을 수입하려면 일본을 외면하고는 달리 길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서양 문명을 직수입하는 것도 절대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나 길이 멀고 내왕이 불편하며 언어 문자나 경제상 곤란한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일본으로 말하면 부산 해협이 불과 10여 시간의 항로요, 조선인 가운데 일본 말과 글을 깨우친 사람이 많으므로 문명을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는 것은 지극히 쉬운 일이라 하겠다.
그러면 두 나라의 친선은 실로 아교나 칠같이 긴밀할 것이니 동양 평화를 위해 얼마나 좋은 복이 되겠는가. 일본인은 결코 세계 대세에 반하여 스스로 손해를 초래할 침략주의를 계속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고 동양 평화의 맹주가 되기 위해 우선 조선의 독립을 앞장서서 승인하리라 믿는다.
가령 이번에 일본이 조선 독립을 부인하고 현상 유지가 된다 하여도 인심은 물과 같아서 막을수록 흐르는 것이니 조선의 독립은 산 위에서 굴러내리는 둥근 돌과 같이 목적지에 이르지 않으면 그 기세가 멎지 않을 것이다. 만일 조선 독립이 10년 후에 온다면 그동안 일본이 조선에서 얻는 이익이 얼마나 될 것인가. 물질상의 이익은 수지상 많은 여축을 남겨 일본 국고에 기여함이 쉽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조선에
있는 일본인의 관리나 기타 월급 생활하는 자의 봉급 정도일 것이니 그렇다면 그 노력과 자본을 상쇄하면 순이익은 실로 적은 액수에 지나지 않으리라.
또한 조선 독립 후 일본인의 식민(殖民)은 귀국치 않으면 국적을 옮겨 조선인이 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므로, 그렇다면 10년 간에 걸친 적은 액수의 소득을 탐내어 세계 평화의 대세를 손상하고 2천만 민족의 고통을 더하게 함이 어찌 국가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아아, 일본인은 기억하라. 청일 전쟁 후의 마관 조약(馬關條約)과 노일 전쟁 후의 포오츠머드 조약 가운데서 조선 독립을 보장한 것은 무슨 의협이며, 그 두 조약의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곧 절개를 바꾸고 지조를 꺾어 궤변과 폭력으로 조선의 독립을 유린함은 또 그 무슨 배신인가. 지난 일은 그렇다 하고라도 앞일을 위하여 간언(諫言)하노라. 지금은 평화의 일념이 가히 세계를 상서롭게 하려는 때이니 일본은 모름지기 노력할 것이로다.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1910년에 탈고하여 1913년 회동서관(匯東書館)에서 출간하였다. 불교의 교리부터 시작
하여 승단의 제도·의식, 사찰의 조직, 승려의 취처(聚妻) 문제에 이르기까지, 서론을
포함해서 모두 17장으로 이루어진 각 항목에서 당시의 한국불교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그는 훌륭하게 유신하는 자는 훌륭하게 파괴하는 자라 하여, 기존의 모든 것을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는 아주 깨뜨려 없애자는 것이 아니고 낡은 습관을 새로운 세대
에 맞도록 고치는 것이 바로 개혁임을 역설하였다.
내용은 불교성질론·불교주의론·불교유신 의선파괴론(宜先破壞論)·승려교육론·참선론(參
禪論)·염불당 폐지론·포교론·사찰 위치론·불가 숭배의 소회론(塑繪論)·불교의식론·사찰주
지 선거론·승려단체론·사찰통할론 등이다. 이 책은 조선불교 전반에 걸쳐 다각적인 비판을
가했다는 점, 당시로서는 개화된 문장체인 국한문을 병용하여 논리정연하게 서술하였다
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 출처:두산 세계 대백과
조선불교유신론-역문
나는 일찌기 우리 불교를 유신 하는 문제의 뜻을 두어 얼마간 가슴속에 성산을 지니고도
있었다. 다만 일이 뜻 같지 않아 당장 세상에서 실천에 옮길 수는 없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시험삼아 한 무형의 불교를 새 세계를 자질구례한 굴 속에 나타냄으로써, 스스로 쓸쓸함을
달래고자 한 것뿐이다.
무릇 매화나무를 바라보면서 갈증을 멈추는 것도 양생의 한 방법이긴 할 것인바, 이 논설
은 말할 것도 없이 매화나무의 그림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목마름의 '불꽃'이 전신
을 이렇게 태우는 바에는, 부득불 이 한 그루 매화나무의 그림자로 만석의 맑은 샘 구실을
시킬 수밖에 없는가 한다.
요즘 불가에서는 가뭄이 매우 심한 터인데, 알지 못하겠다. 우리 승려 동지들도 목마름을
느끼고 있는지. 과연 느끼고 있다면 이 매화나무 그림자로 비쳐 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여섯
바라밀다 중 보시가 제일이라고 들었다. 나도 이 매화나무 그림자나마 보시한 공덕으로 지
옥쯤은 변하게 될까, 어떨까.
1910년 3월 8일 밤
저자 씀
서론
이 세상에 어찌 성공과 실패가 그 자체로서 존재하겠는가. 사람에 의거하여 결정될 뿐이
다. 모든 일이 어느 하나도 사람의 노력 여하에 따라 소위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는 것이니,
만약 사물이 자립하는 힘이 없고 사람에 의존할 뿐이라면, 일에 성패가 있는 것도 결국은
사람의 책임일 따름이다.
옛사람이 말했다.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고,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있다'고. 이
것을 따져서 말해 보면, 사람에게 성공하기에 족한 노력이 있어도 하늘이 이를 실패로 돌리
기도 하고,
사람에게 실패할 만한 노력밖에 없는데도 하늘은 이를 성공시키기도 한다는 뜻이 된다. 아,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람으로 하여금 흥이 깨지고 날담케 함이, 무엇이 이보다 더 하겠는가.
하늘이 이같이 사람이 꾀하는 일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하면,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지
닌 바 자유를 완전히 상실케 하는 결과가 된다. 그리고, 나는 삶으로 하여금 그 자유를 완전
히 상실케 한다는 것은 들어본 일도 없고 목격한 일도 없는 터이다.
저 소위 '하늘'이란 형태 있는 하늘을 말함인가. 아니면 형태 없는 하늘을 가리킴인가. 만
약 형태가 있는 하늘을 말함이라면, 어찌 저 위에 나타나 있어서 스 푸르고 푸른 모습이 우
리 눈에 비치는 그것이 아니겠는가. 이미 형태가 있고 보면, 하늘도 현상의 하나인 것이 되
고, 그렇다면 자유의 법칙을 따라 다른 것을 침범할 수 없는 점에서 딴 현상들과 조금도 차
이가 없다는 것은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생명을 지닌 것들이 엄청나게 많아 그 수효를 헤
아릴 수 없는 터에, 어찌 모두가 대단치도 않은 한 유형물에 의해 성패를 지배당하는 일이
있겠는가.
만약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는 하늘의 도리를 말함이요, 우리가 이르는 하늘은 아
닌 것이니, 하늘의 도리란 기실 진리의 뜻이 된다. 그리고 성공할 만한 이치가 있어서 성공
하고, 실패할 만한 이치가 있어서 실
패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진리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성공은 본래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한
것이며, 실패는 본디 스스로의 힘으로 실패한 것이 된다. 다시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있
다'는 따위를 입에 담을 여지가 있겠는가.
형태가 있는 뜻의 하늘이건 형태가 없는 의미의 하늘이건 그것이 다같이 해당되지 않음이
이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패가 하늘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늘 있음을 알고
사람 있음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그 성명이 이미 노
예의 명부에 오르고 마는 것이니, 어찌 스스로 저를 사랑하지 않음이 이같이 심한 것이랴.
만약 문명인으로 하여금 이런 말 하는 사람을 오래 된 무덤 속으로부터 끌어 내어, 자유룰
포기한 죄를 책망케 한다면 변호하고자 해도 변호할 길이 없을 터이다.
진실로 하늘이 일의 성패와 관계없음이 이와 같다면, 만물의 수효가 많다 해도 이런 이치
를 파악하면 될 뿐이다. '일을 꾀함이 나에게 있다'고만 이를 것이 아니라, '일을 이루는 것
도 나에게 있다' 고 해야 하리니, 이런 취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자기를 책망하되 남을 책망
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믿되 자기 아닌 다른 것(하늘 따위) 을 믿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서 사리를 논하는 사람들은 이런 도리를 가지고 종지를 삼음이 옳을 것이다.
오늘의 세계는 과거의 세계가 아니며 미래의 세계도 아니오, 어디까지나 현재의 세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천만 년 이전의 일을 연구하는 이가 있고, 천만 년 뒤의 일을
연구하는 이도 있어서, 천지 사이의 형이상·형이하의 문제 치고 연구하여 새로이 하지 않
음이 없어서 학술의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정치의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종교의 유
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그 밖에도 각 방면에서 유신을 부르짖는 소리가 천하에 가득하여,
이미 유신을 했거나 지금 유신을 하고 있거나 장차 유신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도록 접종하고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조선의 불교에 있어서는 유신의 소리가 조
금도 들리지 않으니, 모르겠구나, 과연 무슨 징조일까. 조선 불교는 유신할 것이 없는 탓일
까, 아니면 유신할 만한 것이 못 되는 까닭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나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
다. 아, 그러나 이것 역시 알 수 있는 일이다. 어디까지나 책임은 나에게 있을 것임에 틀림
없다.
조선 불교의 유신에 뜻을 둔 이가 없지 않으나 지금까지 드러남이 없는 것은 유독 무엇
때문일것인가. 하나는 천운에 돌리고, 하나는 남을 탓함이 그 원인일 것이 분명하다. 나는 '
일을 이룸이 하늘에 있다'는 주장에 의혹을 품게 된 후에 비로소 조선 불교 유신의 책임이
천운이나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런 후에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음을 갑자기 깨달은 나머지 유신해야 할 까닭을
얼마쯤 샐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 논을 써서 스스로 경계하는 동시에, 이를 승려인
형제들에게 알리는 터이다. 이 논이 문명국 사람의 처지에서 보기에는 실로 무용지장물로
비칠 것이다. 그러나 조선 승려의 전도를 생각하는 처지에 선다면 반드시 조금은 채택할 것
이 없지도 않으리라 생각된다. 대저 거짓 유신이 있은 후에 참다운 유신이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니, 이 논이 후일에 가서 거짓 유신의 구실을 하게 된다면, 필자의 영광이 이보다 더함
이 없겠다.
불교의 성질
오늘 불교의 유신을 논하고자 하는 사람은 마땅히 먼저 불교의 성질이 어떤지를 살피고,
이것을 현재의 상태와 미래의 상황에서 비추어 검토해야 하며, 그런 다음에야 이 문제를 다
룰 수 있다. 왜 그런가. 금후의 세계는 진보를 그치지 않아서 진정한 문명의 이상에 도달하
지 않고는 그 걸음을 멈추지 않을 추세에 있으며, 만약 불교가 장래의 문명에 적합치 않을
경우에는 죽음에서 살려 내는 기술을 터득하여 마르틴 루터나 크롬웰 같은 이를 지하에서
불러 일으켜서 불교를 유싱코자 한다 해도 반드시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가
종교로서 우수한지 어떤지와, 미래 사회에 적합할지 어떨지를 곰곰히 생각하게 되는데. 불교
는 인류 문명에 있어서 손색이 있기는커녕 도리어 특출한 점이 있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나는 이에 불교의 성질을 두 가지 면에서 말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들 것은 종교적인 성
질이다. 사람이 종교를 믿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들의 가장 큰 희망이 여기에 있기 때
문일 것이다. 희망은 생존과 진화의 밑천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니, 만약 희망을 지니지 않는
다면 우리는 아무렇게나 게으르게 살아서, 그날 그날을 편히 넘기는 것으로 만족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누가 정신과 육체를 괴롭혀 가면서 일을 하려 하겠는가. 따라서 희망이
라는 것이 없으면 사람이건 사람 아닌 것이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거의 없어질
것이며, 설사 존재한다 해도 황폐·음악에 흘러 전일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을 터이다. 필시
지옥을 연상시키는 생활과 야만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행위가 나타나 참담하고 추악하기 끝
이 없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소위 문명인들은 어느 외진 곳에 도피하여 숨을 죽이고, 생존
의 의욕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러기에 희망이 행여나 크지 못할까 걱정한 나머지 임시로 욕심낼 만한 달콤한 것을 무
형의 세계에 만들어 놓고, 답답한 중생들로 하여금 믿게 하고 희망을 걸게 한 것이 불교를
제외한 여러 종교의 발상의 온상이 되었다. 예수교의 천당, 유태교가 받드는 신, 마호멧교의
영생 따위가 이것이니, 다 깊이 세상을 근심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속임수의 말로 일관하여 천당이 과연 있는지 없는지, 받드는 신이 정
말인지 거짓인지, 영생의 약속이 사실인지 어떤지에 대해 조금도 냉정히 검토함이 없이 아
무것도 모르는 채 미신을 지녀 네려오니, 이는 사람을 이끌어 우매의 구렁으로 몰아넣는 것
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선 민중의 지혜에 부당한 제약을 주는 것이라는 비난
이 이미 철학가들 입에서 끊이지 않은 터라, 더 이상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구차스러운 말을 꾸며 미신을 변호하는 이도 없지 않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한다.
'미신인 점은 인정하나, 여러 사람의 정신을 하나로 통일하는 효능을 인정해야 한다. 2세기
이래 구미 각국에서 전개된 놀라운 업적을 보지 못했는가. 이것은 반이나마 그 미신이라는
종교의 힘이었던 것이니, 미신이 세계에 끼친 공로가 어찌 크다고 하지 않으랴'
그것은 그렇다. 그러나 정치가로서 역사상에 아주 저명하여 오늘까지 미담의 주인공이 되
고 있는 사람 치고 누구가 무수한 사람의 피를 흘린 끝에 그 공을 자기 한 몸에 거두어 들
이지 않은 자가 있다는 것인가. 저 정치가들이 만약에 미신으로 민중의 정신을 세뇌하지 않
았던들 생명에 대한 애착을 박탈하여 사지에 몰아넣어 버릴 수는 없는 터이었기에, 백방으
로 획책하여 미신으로 사람의 생명을 낚는 미끼를 삼고, 또 사람의 생명으로 적을 쓰러뜨리
는 총알을 삼았던 것이니, 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몇천만이 한두 개의 미신에 속아 두
번 누릴 수 없는 목숨을 잃었지만 그 수효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사람으로서 미신에
한 가닥의 희망을 걸 수밖어 없다는 것은 비애의 중의 비애임에 틀림없다. 미신은 인류에
공이 있는 듯도 보이지만, 기실 폐해가 너무나 큰 터이다. 불교는 그렇지가 않다
. 중생이 미신에서 헤어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까닭에, 경에 '깨달음으로 준칙을 삼는다'
하셨고, 또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의 바다에 들어가기 위함'이라 하셨으며, 정각·
정변의 주장이 다 그런 취지였으니, 이점에서 부처님이야말로 철저하셨다고 하겠다. 이 세상
에 태어나심으로부터 6년에 걸친 고행과 49년의 설법과 열반과 일상 생활에서의 모든 동정
과 한 말씀과 한 침묵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가 중생으로 하여금 미혹에서 떠나 깨달음에
이르게 하려는 뜻 아님이 있었겠는가.
그리고 천당·지옥의 주장과 불생 불멸의 말이 있기는 있는 터이나, 그 취지인즉 다른 종
교와 다르다. 무엇이 다른가. 경에 이르기를 '지옥과 천당이 다 정토가 된다'고 하셨고, 또 '
중생의 마음이 보살의 정토'라 하셨다. 이것으로 미루어 생각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천당은
상식으로 생각되는 그런 천당이 아니라 자기 마음 속에 건설되는 천당이며, 지옥도 죽어서
간다는 그런 뜻의 지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와 그 속에 있는 삼라만상이 다 중생들의 마음속에 갖추어
져 있는 터이므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8만 4천의 법문도 우리의 마음을 떠나 별것이 따로
있음은 아닌 것이니, 자기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천당이니 하는 따위를 받드는 소위 미신과
그 거리가 어떻다 하겠는가. 또 불생 불멸은 다른 종교의 영생 등속과는 다르다. 그것은 참
으로 원만한 깨달음의 세계의 주인공이며, 불교를 대표하는 유일무이한 개념이라 할 수 있
다. 저 죽은 자를 모두 살려 놓는다는 따위는 암우하기 그지없는 밥통이나 하는 소리다. 세
로는 삼세를 포함하되 오래다 하지 않고, 가로는 시방에 걸치되 크게 안 여겨서, 멀리 감각
기관과 그 대상을 초탈하여 고요하면서도 항상 작용하는 것을 진여라 이른다. 이 진여는 결
국 불변의 뜻이니, 이것이 어찌 생사와 관련이 있겠는가.
중생이 이런 더없는 보배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미
혹하여 알지 못하는 까닭에 우리 부처님께서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이들을 위해 설법하시었
다. 다만 중생의 근기가 각기 다르므로 쓰여진 방편이 여러 가지이긴 했으나 궁극의 목표는
각자가 지닌 진여를 때닫게 함에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목적에 도달하면 수단은 잊고 마는
것이매, 이것이야말로 고기를 잡고 통발을 잊음이요, 달을 보고 그것을 가리킨 손가락을 망
각함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통발과 손가락을 미신이라고는 못할 것이니 방편은 방편대로
역시 귀중함이 사실이다. 이에 중생들이 비로소 얼마 안되는 이 몸으로 수십 년 동안 이 세
상에 산다는 것이 다 허망함을 알아 불생 불멸의 경지를 영원한 참된 자아에서 구하게 된
다. 이런 희망이 과연 다함이 있겠는가, 없겠는가. 어찌 유독 미신을 지닌 뒤에야 희망을 가
질 수 있다고 하겠는가. 불교는 지혜로 믿는 종교요, 미신의 종교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둘째 불교의 철학적 성질이다. 철학자와 종교가가 왕왕 서로 충돌하여 상대를 용납하지
않는 것은 미신과 진리가 본래 상극인 까닭이다. 종교가들이 한결같이 미신에 얽매여 깨어
날 줄 모른다면 철학자들이 반드시 온 힘을 기울여 이에 항거함으로써, 소위 미신적인 종교
가로 하여금 지금부터 1세기 안의 천지로부터 종적을 감추게 만들 것이 확실하다. 불교가
어찌 이런 미신적인 종교들과 한 운명을 더듬겠는가.
불경에 '복과 지혜가 아울러 구족했다' 하셨고, 또 '일체 종지'라 하셨다. 일체 종지라 함
은 자기 마음을 깨달아 투철하고 막힘이 없어서 모르는 것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 이
것이 철학자들의 궁극 목표가 아니겠는가. 다만 철학자들은 포부는 크되 힘이 모자라 허덕
이고 있거니와, 우리 부처님에게 있어서야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 철학의 대가가 누군지 알
고자 하면 석가를 젖혀 놓고 다른 대가가 없을 것이니, 나를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다면 동
서양 철학의 불교와 합치되는 것을 들어 대략 검토해 보겠다.
중국인 양 계초는 이렇게 말했다.
'불교·기독교의 두 가지가 다 외국에서 발생한 종교로서 중국에 들어왔는데 불교가 널리
퍼진 데 대해 기독교가 퍼지지 못한 것은 무슨 때문인가. 기독교는 오직 미신을 주로 하여
그 철리가 천박해서, 중국 지식층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한 데 대해 불교의 교리는 본래
종교면서 철학인 양면을 갖추고 있었으니 그 증도의 이상을 깨닫는 데 있고, 도에 들어가는
법문은 지혜에 있고, 수도하여 힘을 얻음은 자력에 있으니, 불교를 예사 종교와 동일시해서
는 안 된다.
불교의 학문이 중국에 들어옴으로부터 그 가르침이 모두 갖추어지기에 이른 그 다음에야
중국 철학이 이채를 띠게 되었다.'
이것으로 보면, 중국 철학이 발전하게 된 것은 실로 불교의 덕택임을 알 수 있다.
아, 불교가 조선에 들어온 지도 지금에 1천 5백여 년이 지났다. 만약 사람이 있어서, 1천
5백여 년 동안 이 조선 땅에서 살다가 간 사람들에게 '중국은 저렇거니와, 불교를 들여온
후에 조선 철학은 얼마나 발전했는가'라고 묻는다면 무어라 할 것인가. 같은 손을 안 트게
하는 약이건만 한 사람은 이를 써서 장수가 되었고, 한 사람은 이것을 사용하면서도 솜빠는
일을 면치 못했으니, 생각컨대 이 약을 어떻게 쓰는가는 사람의 책임이매, 손을 안 트게 하
는 약에게야 무엇을 원망하겠는가.
독일의 학자 칸트는 말했다.
'우리의 일생의 행위가 다 도덕적 성질이 겉으로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 인간성이 자유에 합치하는가 아닌가를 알고자 하면 공연히 겉으로 나타낸 현상만으로 논
해서는 안 되며, 응당 본성의 도덕적 성질에 입각하여 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 도덕
적 성질에 있어서야 누가 조금이라도 자유롭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하겠는가. 도덕적 성질은
생기는 일도, 없어지는 일도 없어서 공간과 시간에 제한받거나 구속되거나 하지 않는다. 그
것은 과거도 미래도 없고 항상 현재뿐인 것인바, 사람이 각자 이 공간 시간을 초월한 자유
권(본성)에 의지하여 스스로 도덕적 성질을 만들어 내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나의 진정한 자
아를 나의 육안으로 볼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그러나 도덕의 이치로 미루어 생각하면 엄
연히 멀리 현상 위에 벗어나 그 밖에 서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 진정한 자아는 반
드시 항상 활발 자유로와서 육체가 언제나 필연의 법칙에 매여 있는 것과는 같지 않음이 명
백하다. 그러면 소위 활발 자유란 무엇인가. 내가 착한 사람이 되려 하고 악한 사람이 되려
함은 내가 스스로 선택하는 데서 생겨나는 생각이다.
자유 의지가 선택하고 나면 육체가 그 명령을 따라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의 자격을 만들
어 내는 것이니, 이것으로 생각하면 우리 몸에 소위 자유성과 부자유성의 두 가지가 동시에
병존하고 있음이 이론상 명백한 터이다.'
양 계초는 이 주장을 이렇게 해설했다.
'부처님 말씀에 소위 진여라는 것이 있는데, 진여란 곧 칸트의 진정한 자아여서 자유성을
지닌 것이며, 또 소위 무명이라는 것이 있는데, 무명이란 칸트의 현상적인 자아에 해당하는
개념이어서 필연의 법칙에 구속되어 자유성이 없는 것을 뜻한다.
또 부처님의 말씀에, "생각컨대 우리가 무시 이래로 진여·무명의 두 종자를 지니고 있어
서 그것이 성해와 식장 속에 포함되어 서로 훈습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범부는 무명으로
진여를 훈습하는 까닭에 반야지를 그르쳐 식을 삼고, 도를 배우는 자는 또 진여로 무명을
훈습하는 까닭에 식을 전환시켜 반야지를 이룬다" 하였다. 송대의 유학자는 이 범례를 따라
중국의 철학을 조직한 터이었으므로 주자는 의리의 성과 기질의 성을 나누어서 <대학>을
주하였다.
즉, 그는 말하기를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서 받은 것인바,허령 불매해서 모든 이치를 구비
하여 온갖 사물에 응해 작용하는 당체이다. 다만 기품의 구애와 인욕의 가림으로 인해 때로
어두워지는 수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진여가 일체 중생이 보편적으로 지닌 본체요, 각자가 제각기 한 진여
를 지니는 것은 아니라 했고, 칸트는 사람이 다 한 진정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 했다. 이것이
그 차이점이다. 그러므로 부처님 말씀에 "한 중생이라도 성불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나도
성불하지 못한다" 하셨으니, 모든 사람의 본체가 동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중
생을 널리 구제하자는 정신에 있어서 좀더 넓고 깊으며 더없이 밝다고 할 만하다. 이에 대
해 칸트는 "만약 선인이 되고자 하는 의욕만 있으면 누구나 선인이 된다"고 했으니, 그 본
체가 자유롭다고 믿었기 때문이어서, 수양이라는 면에서 볼 때 좀더 절실하고 행하기 쉬운
특징이 있었다. 이에 비겨 주자의 명실설 같은 것은 만인이 동일한 본체를 지니고 있는 상
황을 지적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부처님에게 못 미치는 점이라 하겠고, 또 말하기를 이 명덕
이 기품의 구애와 인욕의 가림을 받는다 하여,자유로운 진정한 자아와 부자연스러운 현상적
자아의 구분에 있어서 한계가 명료치 않았으니, 이것이 칸트에 비겨 미흡한 점이다. 칸트의
본의에 의하면, 진정한 자아는 결코 다른 무엇에 의해 구애되든지 가리어지든지 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구애를 받고 가림을 받는 이상 그것은 자유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믿어진
다.'
양 계초가 부처님과 칸트의 다른 점에 언급한 것을 보건대 반드시 모두가 타당하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천상천하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하셨는데 이것은
사람마다 각각 한 개의 자유스러운 진정한 자아를 지니고 있음을 밝히신 것이다. 부처님께
서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진정한 자아와 각자가 개별적으로 지닌 진정한 자아에 대해
미흡함이 없이 언급하셨으나, 다만 칸트의 경우는 개별적인 그것에만 생각이 미쳤고 만인에
게 보편적으로 공통되는 진정한 자아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못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부처님의 철리가 훨씬 넓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성불했으면서도 중생 탓으로 성불하시지 못한다면 중생이 되어 있으면서 부처님
때문에 중생이 될 수 없음이 명백하다. 왜 그런가.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셋이면서 기실은
하나인데, 누구는 부처가 되거 누구는 중생이 되겠는가. 이는 소위 상즉상리의 관계여서 하
나가 곧 만, 만이 곧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부처라 하고 중생이라 하여 그 사이에 한계를 긋
는다는 것은 다만 공중의 꽃이나 제2의 달과도 같아 기실 무의미할 뿐이다.
영국의 학자 베이컨이 말했다.
'우리의 정신은 울퉁불퉁한 거울과 같다. 그리하여 대상이 와서 비치는 경우, 혹은 뾰죽이
나온 곳에 비치기도 하고, 혹은 움푹 팬 데에 비치기도 한다. 이에 있어서 동일한 대상이라
도 비치는 데가 다르기에 주관의 관찰에 잘못이 없을 수 없으니, 이것이 오류를 범하는 첫
째 원인이다. 또 오관이 감각하는 것은 대상의 본바탕이 아닌 그것의 거짓 모습이니, 이것이
오류를 범하는 둘째 원인이다. 그리고 우리의 체질이 각기 다른바, 이것이 오류룰 범하는 세
째 원인이다,'
베이컨의 이 학설은 정력을 기울여 사색하고 실험을 통해 확인하고 난 뒤에 말한 이론이
어서 <능엄경>의 교리와 적젆게 유사한 데가 있다. 그 경에 이르되, '비유컨데, 만약 한 사
람이 있어서 깨끗한 눈으로 갠 하늘을 바라보면, 오직 맑은 하늘만이 보일 뿐, 다른 아무것
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람이 까닭 없이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고 응시한 끝에 피
로해지면, 하늘에 헛것의 꽃이 보이게 된다' 하셨다. 깨끗한 눈과 피로한 눈은 곧 베이컨의
울퉁불퉁한 거울의 뜻이 된다. 이와 같이 뾰죽이 나오고 움푹 들어간 거울인 까닭에 같은
물건도 비치는 것이 달라진다 는 베이컨의 이론은, 하늘이 깨끗한 눈에는 하늘로 비치고, 피
로한 눈에는 꽃으로 보인다는 경의 말씀과 같다고 할 것이다. 또 경에 이르기를
'몸과 감각이 둘이 다 허망하다' 하셨으니, 감각의 대상과 감각하는 여섯 기관이 다 가짜
모습일 뿐 실체가 아닌 까닭에 '둘이 다 허망하다'고 하신 것이었다. 베이컨은 감각의 대상
이 되는 객관이 실체가 아님을 알았으나, 감각하는 여섯 기관이 그 대상이 되는 객관이 실
체가 아님을 알았으나, 감각하는 여섯 기관이 그 대상과 한가지로 실체가 아님은 몰랐던 것
이니, 이는 베이컨이 부처님만 못한 점이다.
경에 또 이르기를 '한 물 속에 해 그림자가 비쳤는데 두 사람이 같이 물 속의 해를 보고
나서 각각 동서로 간다고 하면, 해도 각각 두 사람을 따라 간다. 그리하여 한해는 동으로 가
고 한 해는 서로 가서 햇빛에는 일정한 기준이 없다'고 하셨는데, 베이컨의 제3 원인이란
것도 같은 뜻으로 해석된다.
프랑스의 학자 데카르트는 이런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만일 각자가 자기 나름의 믿는 바 진리가 있을 경우, 그 진리를 견지하여 일가를 이루게
되고,자기 소신과 다른 용납할 수 없는 주장을 하는 자가 있으면 대항하여 공격하게 된다.
그리하여 주고받으며 서로 토론하면 상당한 시일이 지난 뒤에는 완전한 진리가 결국 그 사
이에서 생겨날 것이다. 왜 그런가. 지혜에 고하·대소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본성은 동
일하며, 진리의 성질이 또 순수하여 잡박함이 없는 까닭이다. 동일한 본성의 지혜로 순수하
여 잡박함이 없는 진리를 구함에 있어서 힘써 이 일에 종사하는 경우, 어찌 방법은 달라도
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처음에는 사람마다 이론이 다르다 해도 반드시 서
로 웃으며 손을 잡는 날이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이런 이론은 <원각경>의 내용과 완전 부합된다, 데카르트가 각기 믿는 바 진
리 운운한 것은 경에서 '견해가 장애 노릇을 한다' 한 것과 같고, 서로 대항 공격한다 한 것
은 경에서 '여러 환을 일으켜 환을 제거한다' 한 것에 해당하고, 완전한 진리 운운한 것은
경에서 '궁극의 진리를 얻는다' 한 것과 일치하고, 본성은 동일하다 운운한 것은 경에서 '중
생과 국토가 동일한 법성이다' 한 것과 합치하고, 방법은 다르나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한
것은 '지혜와 어리석음이 통틀어 반야가 된다'고 한 것과 같은 취지다.
출처: http://www.manhae.or.kr/library.htm
님의 침묵(寢默)
군 말 ♧ ♧ ♧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찌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예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 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님의 침묵 ♧ ♧ ♧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알 수 없어요 ♧ ♧ ♧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 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나의 길 ♧ ♧ ♧
이 세상에는 길도 많기도 합니다.
산에는 돌길이 있습니다. 바다에는 뱃길이 있습니다.
공중에는 달과 별의 길이 있습니다.
강가에서 낚시질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발자취를 냅니다,
들에서 나물 캐는 여자는 방초를 밟습니다.
악한 사람은 죄의 길을 쫓아갑니다.
의(義)있는 사람은 옳은 길을 위해서 칼날을 밟습니다.
서산에 지는 해는 붉은 놀을 밟습니다.
봄 아침의 맑은 이슬은 꽃 머리에서 미끄럼 탑니다.
그러나 나의 길은 이 세상에 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님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죽음의 품에 안기는 길입니다.
그것은 만일 님의 품에 안기지 못하면 다른 길은 죽음의 길보다 험하고
괴로운 까닭입니다.
아아, 나의 길은 누가 내었읍니까
아아, 이 세상에는 님이 아니고는 나의 길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의 길을 님이 내었으면 죽음의 길은 왜 내셨을까요.
길이 막혀 ♧ ♧ ♧
당신의 얼굴은 달도 아니건만
산 넘고 물 건너 나의 마음을 비춥니다.
나의 손길은 왜 그리 짧아서
눈앞에 보이는 당신의 가슴을 못만지나요.
당신이 오기로 못 올 것이 무엇이며
내가 가기로 못 갈 것이 없지마는
산에는 사다리가 없고, 물에는 배가 없어요.
뉘라서 사다리를 떼고 배를 깨뜨렸습니까.
나는 보석으로 사다리 놓고 진주로 배 모아요.
오시려도 길이 막혀서 못 오시는 당신이 기루어요 (=그리워요)
나룻배와 행인 ♧ ♧ ♧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 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앝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비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잠 없는 꿈 ♧ ♧ ♧
나는 어느 날 밤에 잠 없는 꿈을 꾸었습니다.
"나의 님은 어디 있어요 나는 님을 보러 가겠습니다.
님에게 가는 길을 가져다가 나에게 주셔요, 꿈이여."
"너의 가려는 길은 너의 님이 오려는 길이다.
그 길을 가져다 너에게 주면 너의 님은 올 수가 없다."
"내가 가기만 하면, 님은 아니 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너의 님이 오려는 길을 너에게 갖다주면 너의 님은 다른 길로 오게 된다.
네가 간대도 너의 님을 만날 수가 없다."
"그러면 그 길을 가져다가 나의 님에게 주셔요."
"너의 님에게 주는 것이 너에게 주는 것과 같다.
사람마다 저의 길이 각각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야 이별한 님을 만나 보겠습니까."
"네가 너를 가져다가 너의 가려는 길에 주어라. 그리하고 쉬지 말고 가거라."
"그러할 마음은 있지마는, 그 길에는 고개도 많고 물도 많습니다. 갈 수가 없습니다."
꿈은 "그러면 너의 님을 가슴에 안겨주마."하고 나의 님을 나에게 안겨 주었습니다.
나는 나의 님을 힘껏 껴안았습니다. 나의 팔이 나의 가슴을 아프도록 다칠 때에,
나의 두 팔에 베어진 허공은 나의 팔을 뒤에 두고 이어졌습니다.
생 명(生 命) ♧ ♧ ♧
돛과 키를 잃고 거친 바다에 漂流(표류)된 작은 생명의 배는 아직 발견도 아니 된
황금의 나라를 꿈꾸는 한 줄기 희망이 나침판이 되고 항로(船路;선로)가 되고
順風(순풍)이 되어서, 물결의 한 끝은 하늘을 치고, 다른 물결의 한 끝은 땅을 치는
무서운 바다에 배질합니다.
님이여, 님에게 바치는 이 작은 생명을 힘껏 껴안아 주세요.
이 작은 생명이 님의 품에서 으서(으스러)진다 하여도 환희의 靈地(영지)에서
殉情(순정)한 생명의 파편은最貴(최귀)한 보석이 되어서 조각조각이 적당히 이어져
님의 가슴에 사랑의 徽章(휘장)을 걸겠습니다.
님이여, 끝없는 사막에 한 가지의 깃들일 나무도 없는 작은 새인 나의 생명을
님의 가슴에 으서지도록 껴안아 주셔요.
그리고 부서진 생명의 조각조각에 입맞춰 주세요.
복 종(服從) ♧ ♧ ♧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산골 물 ♣ ♧ ♣
산골 물아
어디서 나서 어디로 가는가.
무슨 일로 그리 쉬지 않고 가는가.
가면, 다시 오려는가 아니 오려는가.
물은 아무 말도 없이
수없이 얼크러진 '등 · 댕댕이 · 칡덩쿨' 속으로
작은 담은 넘어가고, 큰 담은 돌아가면서
쫄쫄 꼴꼴 쏴소리가 양안(兩眼) 청산(淸山)에 반향(反響)한다.
그러면 산에서 나서 바다로 이르는
성공의 비결이 이렇다는 말인가.
물이야 무슨 마음이 있으랴마는
세간(世間)의 열패자(劣敗者)인 나는 이렇게 설법(說法)을 듣노라.
해촌(海村)의 석양(夕陽) ♣ ♧ ♣
석양은 갈대 지붕을 비춰서 작은 언덕 잔디밭에 반사되었다.
산 기슭 길로, 물 길러 가는 처녀는
한 손으로 부신 눈을 가리고 동동걸음을 친다.
반쯤 찡그러진 그의 이마엔
저녁 늦은 근심이, 가늘게 눈썹을 눌렀다.
낚싯대를 메고 돌아오는 어부는
갯가에 선 노파를 만나서
멀리 오는 돛대를 가리키면서
무슨 말인지, 그칠 줄을 모른다.
서천(西天)에 지는 해는 바다의 고별 음악을 들으면서
짐짓 머뭇 머뭇 한다.
산거(山居) ♧ ♣ ♧
티끌 세상을 떠나면, '모든 것을 잊는다' 하기에
산을 깍아 집을 짓고 돌을 뚫어 새암을 팠다.
구름은 손인 양하여 스스로 왔다 스스로 가고
달은 파수꾼도 아니언만 밤을 새워 문을 지킨다.
새소리를 노래라 하고 솔바람을 거문고라 하는 것은
옛사람의 두고 쓰는 말이다.
님 그리워 잠 못 이루는, 오고 가지 않는 근심은
오직 작은 베개가 알 뿐이다.
공산(空山)의 적막이여 어데서 한가한 근심을 가져오는가.
차라리 두견성도 없이 고요히 근심을 가져오는 오오 공산의 적막이여.
일경초(一莖草) ♧ ♣ ♧
나는 소나무 아래서 놀다가 지팡이로 한 줄기 풀을 분질렀다.
풀은 아무 반항도 원망도 없다.
나는 부러진 풀을 슬퍼한다.
부러진 풀은 영원히 이어지지 못한다.
내가 지팡이로 분지르지 아니 하였으면
풀은 맑은 바람에 춤도 추고 노래도 하며
은(銀) 같은 이슬에 잠자고 키스도 하리라.
모진 바람과 찬서리에 꺽이는 것이야 어찌 하랴마는
나로 말미암아 꺽어진 풀을 슬퍼한다.
사람은 사람의 죽음을 슬퍼한다.
인인(仁人) 지사(志士) 영웅 호걸의 죽음을 더 슬퍼한다.
나는 죽으면서도 아무 반항도 원망도 없는 한 줄기 풀을 슬퍼한다.
강 배 ♧ ♣ ♧
저녁볕을 배불리 받고 거슬러 오는 작은 배는
온 강의 맑은 바람을 한 돛에 가득히 실었다.
구슬픈 노 젓는 소리는 봄 하늘에 사라지는데
강가의 술집에서 어떤 사람이 손짓을 한다.
일 출 ♣ ♧ ♣
어머님의 품과 같이 대지를 덮어서
단잠 재우던 어둠의 장막이
동으로부터 서로, 서으로부터 다시
알지 못하는 곳으로 점점 자취를 감춘다.
하늘에 비낀 연분홍의 구름은
그를 환영하는 선녀의 치마는 아니다.
가늘게 춤추는 바다 물결은
고요한 가운데 음악을 조절하면서
붉은 구름에 반영되었다.
물인지 하늘인지 자연의 예술인지 인생의 꿈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가운데로 솟아오르는
햇님의 얼굴은 거룩도 하고 감사도 하다.
그는 숭엄 · 신비 · 자애의 화현(化現)이다.
눈도 깜짝이지 않고 바라보는 나는
어느 찰나에 햇님의 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디서인지 우는 꾸꾸기 소리가 건너 산에 반향된다
모 순 ♣ ♧ ♣
좋은 달은 이울기 쉽고
아름다운 꽃엔 풍우(風雨)가 많다.
그것을 모순이라 하는가.
어진 이는 만월(滿月)을 경계하고
시인은 낙화(落花)를 찬미하느니
그것은 모순의 모순이다.
모순이 모순이라면
모순의 모순은 비모순이다.
모순이냐 비모순이냐
모순은 존재가 아니고 주관적이다.
모순의 속에서 비모순을 찾는 가련한 인생
모순은 사람을 모순이라 하느니, 아는가.
<시집: 님의 침묵(沈默) : 한용운(韓龍雲)>
출처: http://www.buljahome.com/nim_han/main_p1.htm
만해(卍海)스님 (1879∼1944)
승려·시인·독립운동가. 본관은 청주(淸州).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海·卍海). 충청남도 홍성출신. 응준(應俊)의 아들이다.
대원군의 집정, 외세의 침략, 등 불행한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여건은 그 자신의 술회대로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게 하였다. 출가 직후에는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27세 때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하였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敎學的)관심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즉 불교의 대중화작업에 주력하였다.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36세 때 <불교대전(佛敎
大典)>과 함께 청나라 승려 내림(內琳)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채근담(菜根譚)>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40세 되던 해에 월간 <유심(惟心)>이라는 불교잡지를 간행하였다. 불교의 홍포
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목적으로 간행된 이 잡지는 뒷날 그가 관계한 <불교> 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만한 문화사업의 하나이다. <유심>지는 3호를 끝으로 폐간되었으나, 불교에
관한 가장 종합적인 잡지였다.
41세 때 3·1독립운동이 있었는데, 백용성(白龍城)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47세 때인 1926년 근대한국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
이곳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대체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서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52세 때 <불교>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그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전까지는 권상로(權相老)가 맡아오던 이 잡지를 인수하여 불교의 홍포에 온 정력을 기울
였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향상·기강
확립·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
그의 불교사상은 (1)불교행정조직혁신론, (2)사원운영의 혁신론, (3)청년불교의 제창,
(4)선교(禪敎)진흥론, (5)경전의 한역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대표작인 <조선불교유신론>은 불교중흥에 대한 그의 이론과 실천을 망라한 최대의
불교시론이다. 특히, 구태의연한 자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귀감이 될 수 있다. 사실 그의 주장은 50여년 후인 오늘에 이르러 빛을 보게 되었다.
종단행정의 단일화를 위한 노력이 곧 총무원으로 나타났고, 승려자질 향상은 오늘날 여러
방면으로 추진되고 있다. 또 국역(國譯)의 중요성 강조는 숱한 불교성전의 편찬과 함께,
역경원(譯經院) 등의 발족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는 과격한 부분이 없지 않아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의 불교사상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결국, 그는 악과 부조리의 사회현실을 타파하려는
노력의 결심으로 이 '불교유신'을 제창하게 된 것이다. 그 구체적 방법론으로서 무질서한
불교교단의 통제를 주장하였고, 이른바 불교현대화를 내세우게 된 것이다.
그의 실천적 불교정신의 응결이 바로 청년불교운동이었다. 따라서 비록 다음의 혁신적
사상이 가미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의 사상은 위대하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또, 불교인의 일반적 자세를 탈피하여 시나 소설 등을 통한 적극적인 대중교화도 특기
할만한 점이다. 불교인으로서 그만큼 조국수호에 대한 열의를 실천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특히 당시의 암울한 시대환경과 관련지어 생각할 때 그의 위대성은 한층 돋보인다.
그의 여러 주장들은 오히려 1960년대 이후부터 빛을 발하여 현대불교의 이론적 근거로서,
또 실천윤리의 강령으로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시공(時空)을 초월한 예언자적 가치를
부여받기에 충분한 불교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44년 5월 9일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
에서 중풍으로 입적하였다.
출처: 부다피아(www.buddha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