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거의 볼 수 없는 천수답. 오로지 빗물에 의존하는 천수답은 극복해야 할 우리의 후진성 중의 하나라고 배웠다. 장마철 중심의 여름철에 비가 집중되는 우리나라는 경사가 급한 산악국가다. 한해 강수량은 적지 않아도 한꺼번에 내리니 금세 강을 따라 바다로 빠져나가기에 천수답은 어려움이 많았다. 따라서 농부들은 논 가장자리에 물웅덩이를 반드시 파놓았고, 곳곳의 물웅덩이는 가뭄과 홍수를 저수지 이상으로 막을 뿐 아니라 많은 생명들을 보듬어왔다. 우리 농촌의 오랜 생태계였다.
아무리 천수답이라 해도 빗물 아니라면 물을 전혀 구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농부는 지하수가 스미어 나오는 땅을 찾았고, 바닥을 편평하게 골라 논배미를 만들었다. 논배미에 고인 물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논둑도 쌓았을 것이다. 논배미의 물이 넘쳐도 곤란하다. 농부는 논둑에 물꼬를 만들어 물높이를 유지했고, 물꼬는 아무나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천수답의 논둑은 대개 삐뚤빼뚤했다. 물꼬를 빠져 내려오는 물을 아래 논배미가 받아야 했기 때문인데, 물웅덩이가 벌써 비었어도 비가 내리지 않을 때, 아래 논배미의 농부는 위 논배미의 물꼬를 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을 것이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 모내기를 마친 논은 물이 절실하다. 모내기를 위해 물을 퍼낸 웅덩이는 진작 비었는데 비는 내리지 않고, 뜨거워지는 햇볕에 수분을 잃은 논배미가 갈라질 태세인 까닭이다. 그때 논둑은 멀쩡한데 논배미의 물이 사라진 걸 보는 농부는 물이 고인 아래 논배미의 농부를 의심하고, 모내기에 힘을 합쳤던 이웃은 멱살잡이로 서로 언성을 높일지 모른다. 가난한 농촌에서, 아이 입에 흰 쌀밥 들어갈 때와 내 논에 물 들어갈 때 가장 뿌듯하다고 했는데, 사실 아래 논배미의 농부는 억울할지 모른다. 위 논배미의 물이 내 논으로 흘려들게 만든 건 간밤의 드렁허리였으므로.
드렁허리라. 이름으로 보아 자태가 그리 고울 것 같지 않은 드렁허리는 주로 천수답에 사는 물고기다. ‘논두렁 헐이’에서 이름이 생긴 드렁허리는 뱀장어처럼 가늘고 긴 몸을 가졌지만 뒤로 가면서 조금 납작해지는 원통형인데, 생기다 만 것 같이 짧고 뾰족한 꼬리지느러미를 빼면 40센티미터 정도의 미끌미끌한 몸에 지느러미와 비늘이 전혀 없다. 점액을 분비하니 커다란 미꾸라지 같지만 아가미가 발달하지 않아 다르다. 움직이는 모습이 얼핏 물뱀으로 착각하게 만들지만 뒤로 움직일 수 있으니 다르다.
갈색의 논흙을 발라 놓은 듯, 자잘한 짙은 점이 머리에서 등을 타고 꼬리까지 이어지는 드렁허리는 대가리가 범상치 않다. 이른 여름이면 흙에 굴을 판 뒤 200개 가까운 알을 낳는 드렁허리는 습기를 머금은 흙을 이리저리 뚫거나 파헤치며 돌아다니는 습성에 걸맞다. 뱀처럼 볼록한 대가리는 끝이 뾰족한 커다란 입술을 가졌고 눈은 조그마한데, 넘기지 않은 먹이를 입 안에 남긴 듯, 턱 아래가 부풀어 오른다. 공기호흡을 하기 때문이다. 논둑에 파고들어가 있다 작은 물고기나 지렁이, 곤충의 애벌레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드렁허리는 볼을 잔뜩 부풀려 압 안에 공기를 머금는다. 산소를 교환할 실핏줄이 입 안에 발달되었다.
숨을 쉬고 먹이를 찾아야 하니 논둑을 드나드는 건 당연한데, 그러다 가끔 폭이 좁은 논둑에 구멍이 뚫리기도 한다. 본의가 아니었지만, 아래 논배미의 농부를 의심했던 이웃은 울화가 치밀 터. 조금만 참으면 장맛비가 쏟아지고 말라가던 논배미에 물이 가득할 텐데, 부아가 치민 농부는 부쩍부쩍 자라는 벼에 달라붙으려는 곤충과 애벌레들을 개구리와 힘을 합쳐 열심히 먹어치우는 드렁허리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삽날을 치켜세운다. 미꾸라지와 더불어 장구벌레를 열심히 먹어치우던 드렁허리는 장마철 직전이 가장 두려울 수밖에 없다.
범상치 않게 생기면 다 사람의 몸에 좋은 걸까. 동의보감이 관절통에 좋다고 한 드렁허리를 중국인들은 백발을 검게 만들고 이빨을 다시 나오게 할 정도의 고단위 정력제로 여긴다고 한다. 특히 여름철의 드렁허리는 인삼보다 좋다며 반긴다는데, 모내기 마치고 기진맥진한 천수답의 농부에게 양질의 단백질을 제공한 건 틀림없겠지만 그렇다고 정력까지 책임졌을까. DHA와 레시틴이 풍부해 뇌 기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드렁허리를 산후조리를 위해 가끔 잡아먹던 우리네와 달리 고급 요리의 재료로 대접하는 중국은 수요가 얼마나 많은지 양식으로 대량 생산한다고 한다. 통조림에 넣어 한국에 수출도 하는 모양이다.
관개농업으로 물웅덩이가 사라지고 기계화를 위해 삐뚤빼뚤한 논배미가 커다란 사각 논으로 바뀐 요즘, 우리 농촌에서 드렁허리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화학농업으로 먹이가 사라진 논은 무거운 농기계에 눌려 단단해졌을 뿐 아니라 논둑이 콘크리트로 바뀌면서 깃들 공간마저 없어졌지 않던가. 부화했을 때 전부 암컷이지만 2년 뒤 몸이 30센티미터 쯤 자라면 수컷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4년 뒤 40센티미터가 되면 모두 수컷으로 바뀌는 드렁허리는 생긴 모습이 이상스러워 그런지, 보호대상종도 아니다. 콘크리트 논둑을 헐어낼 수 없을 뿐 아니라 농약에 약한 드렁허리는 앞으로 중국산 통조림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걸까.
친환경 농산물이 인기를 얻어가면서 드렁허리가 모습을 드러내는 지역이 서서히 늘어난다. 드렁허리를 처음 본 어떤 마을의 사람들은 친환경 농사를 짓는 농부에게 내린 하늘의 선물로 여겼고, 효자인 농부는 암으로 입원한 어머니에게 고아드리겠다고 반겨했다는데, 장마철을 앞둔 드렁허리는 터전을 만들어주는 사람에게 모처럼 고마워해야 할지, 무서워 논둑을 파고들어야 할지 헷갈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논이 있고 그 자리에 농약 대신 송사리와 거머리와 물벼룩과 장구벌레들이 들어온다면 힘겹게 살아남은 드렁허리는 식구를 조금씩 늘릴 수 있겠다.
2008년 10월 창원에서 열린 제10차 람사총회에서 회원국은 사람이 만든 습지인 논, 그 논의 가치를 인정했다. 70억을 돌파한 세계 인구의 40퍼센트가 먹는 쌀을 생산할 뿐 아니라 다양한 생명들의 서식공간이다. 그뿐인가. 홍수와 가뭄을 예방하며 지하수를 보존하지 않은가. 람사총회 소식을 진작 알았다면 청원 근처 우포늪의 드렁허리는 “거기에 하나 더!” 논둑의 보전을 외쳤을 것이다.
첫댓글 드렁허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제 천수답 예찬론입니다. 생태계 보고였고 수해도 예방하며 마을에서 어느 정도 자급자족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천수답. 미개한 농법이라고 교과서는 주장했지만, 따지고 보면 천수답을 잃으면서 우리가 잃은 게 더 많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건 이웃 간의 따뜻한 우정, 그리고 내 지역에 대한 관심과 정주의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드렁허리가 보고 싶습니다. 요즘은 모 심을 때 논두렁에 제초제 치고 풀 죽으면 콩을 심습니다. 이번 비에 마을 논두렁이 쉬 무너진 것도 풀이 없어서이지 싶습니다.
드렁허리..., 저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네요. 이름의 어원이 사라지면 존재도 사라질 수밖에 없는 삶이란 것도 새삼스럽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