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통기간 / 윤이나
터줏대감과 새내기의 자리바꿈을 위해 냉장고를 앞으로 당긴다. 숨 가쁘게 달려왔던 오래된 냉장고가 끌려나온다. 판판한 냉가슴에 두 손을 얹고 문을 연다. 찌그덕 열리더니 서늘한 기운이 훅 끼친다. 나 아직 싱싱하다며 냉기를 뿜어 빈속을 달래고 있다. 전원 플러그를 잡으니 손이 떨린다. 시적거리다 플러그를 뽑는다. 드르륵 드르륵 소리를 내며 심장이 멈춘다.
수리 한 번 한 적 없던 냉장고였다. 십육 년을 버티기에는 무리였던지 여러 번 열고 닫아야 제자리를 찾았다. 수시로 문틈으로 냉기가 새어 나왔다. 고무만 바꾸면 될 듯싶어 서비스센터에 문의했더니, 오래된 제품이라 부품을 구할 수 없다고 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새 냉장고를 주문했다. 우리를 위해 뜨겁게 펌프질해댄 가족을 보내려니 생각이 엉켜돌았다.
세월이 곤곤히 흐르는 동안 제 몸을 달궈 음식을 지켰다. 자기보다 큰 욕심에 울부짖는 아들을 시원한 물 한잔으로 달랬다. 세상에 우뚝 서고 싶어 용을 쓰다가 결국엔 내가 약자라는 사실을 알아버렸을 때, 몸속에서 크고 작은 파장이 일어 요동쳤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화를 가라앉힌 것도 냉장고가 얼려놓은 얼음 몇 조각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얼얼한 얼음을 녹이면서 치솟는 감정을 억눌렀다.
냉장고와 함께 한 기간은 내 인생 열정의 시간이었다. 삼십 대였던 나는 딸이며 며느리였고, 아내이며 엄마였다. 역할 그 어디에서도 내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공허를 메우려 대학에 들어갔다. 공부는 기회조차 주지 않던 사회로 나갈 디딤돌이 되어주었다. 품이 넉넉해지고 이름 불러주는 곳이 생겨 하루하루 신이 났다. 학생을 가르치는 일도, 엄마로서도 부족함 없이 당당하고 싶어 애를 썼다. 뭐든 열심히 하면 정성에 대한 보람은 있다며 심장을 펌프질해댔다.
모두 잡고 싶었다. 그저 되는 일은 바라지 않고 빠르게 오래 뛰었다. 학원 시간표가 분 단위 저학년 수업에서 중고등부 수업으로 바뀌면서 밤이 이슥해서야 일이 끝났다. 과부하 걸린 몸이 삐꺽댔다. 특히 발목을 자주 접질렸다. 붓고 화끈거리던 통증이 다행히 밤을 넘기면 덜해 그렇게 참고 버텼다. 참을 수 없어 병원에 갔을 때는 수술밖에 방법이 없었다. 수술 후 재활기간이 길다는 말에 힘들게 쌓아놓은 성이 무너질까 염려했다.
우정도 미루었다. 친구도 자주 만나야 막역해지는데 코앞에 있어도 만나기 어려웠다. 한번은 일터로 가는 길목에 모임 장소가 있었다. 유리창 너머 친구들 모습이 훤히 보였다. 나도 그들과 어울려 웃고 싶었다. 마음이 먼저 그곳으로 내달렸지만 수업 시간을 맞추기 위해 가던 길을 재촉했다. 가까이 사는 친구도 이러한데 멀리 있는 친구는 더했다. 오죽하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을까.
내가 바쁜 만큼 냉장고도 함께 꿀러덩 덜컹 뛰돌았다. 믿을 게 냉장고 밖에 없어 한꺼번에 많이 사고 구석구석 쟁였다. 언제 먹을지 모르는 건 무조건 얼려두었다. 냉동실 구석에 뭐가 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욱여넣었다. 더 들어갈 공간이 없으면 묵은 것을 정리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꽉 들어차곤 했다.
냉장고에 대한 믿음이 컸던 때문일까. 아이들에게 줄 사랑도 냉장고에 넣었다. 어느 여름, 아이들이 밖에 둔 간식을 먹고 탈이 난 후로는 더했다. 흔히 사랑이 뜨겁다고 하는데, 냉장고 안을 차갑게 하기 위해 뒤에 뜨거운 몸을 숨기고 있는 냉장고처럼 내 사랑도 차가웠다. 주말도 방학도 없던 나는 아이들과 놀 시간이 없었다. 주말에는 물놀이를 가고, 방학이면 여행을 가는 제 친구들을 보면서도 아이들은 조르지 않았다. 나도 모른척했다. 나중에, 나중에는 다 해주리라 다짐하며 미안한 마음까지 꽁꽁 얼렸다.
마치 꿈을 꾼 것처럼 긴 시간이 지났다. 바쁘고 피곤해서 다하지 못한 마음을 그제야 꺼내 해동했다. 꽝꽝 얼려두고 동동거리는 사이 두 아들은 내 키보다 더 커 있었다. 나만 바라보던 아이들은 내가 아니어도 되었고 엄마 손길이 필요했던 일은 스스로 해내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나는 늘 바쁜 엄마였다. 말결에 자기들 보다 학생들이 먼저라고 투덜거리더니 모자간 사랑도 곰팡이가 슬었다. 아이들 생각으로 꽉 차 있던 가슴에 구멍이라도 난 듯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꽁꽁 싸 놓았던 우정도 풀어보았다. 못다 한 친구들과 정도 나누고 손 내밀면 맞잡아줄 온기를 기다렸는데, 이미 몇 몇 우정은 유통기간이 지났고 또 몇은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 옆에서 내 자리가 사라지는 중이었다.
시계는 나에게만 멈춰있었다. 신선할 때 넣어두고 필요할 때 꺼내면 될 줄 알았는데 냉동한 것은 색이 변했고 묶어 놓은 봉지는 비닐을 벗기기 전에는 변화를 몰랐다. 묵혀 둔 사이 입맛이 변하고 쓰임도 잃고 정도 사라졌다. 목적지를 향해 맹렬히 달리려고 내가 얼려둔 것들도 그랬다. 붙잡고 싶었으나 붙잡지 못했던 사랑도, 머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마음도 멀리 떠났다. 때를 기다리다 이제야 꺼내 놓은 후회가 삐적삐적 딸려 나온다.
새 냉장고 전원을 켠다. 시원한 공기가 서서히 돌더니 차가운 기운이 냉장고 안을 누빈다. 이곳은 느리게 채우고 급히 비우리라. 삶의 여유를 가져와 맨 위 칸에 얹는다. 신선하게 유지하는 싱싱 칸에는 변함없는 사랑을 넣는다. 오래 보관하고 얼려둘 생각일랑 말고 인정은 신선할 때 봉지봉지 나누고, 멀리 간 우정에는 미루지 말고 짭짤하고 달달한 마음 실어 보낸다. 내 진심이 전해지도록 고소한 참기름 몇 방울도 잊지 않는다.
열정의 시간을 지나 이제는 삶을 식히는 시간이다. 내 생의 유통기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남은 기간, 삶의 잉여를 즐길 계절은 또 몇 바퀴나 남았을까. 가만히 꼽아보니 뭐든 얼려두고 미룰 시간이 많지 않다. 더는 오늘을 저장하고 마음을 냉동해 묵혀 두지 않겠다.
꽃이 피면 사진으로 저장하려 하지 말고 그 향기를 즐기겠다. 낙엽을 책갈피에 끼우지 말고 그 의미를 사색하겠다. 눈이 오면 그 순백의 향연을 마음껏 소비하겠다. 나는 싱싱한 삶을 소비할 권리가 있으므로.
-- 제35회 [신라문학대상] 수상작 --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송선생님 잘 계시지요.
꾸준한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이득주 예 잘지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