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햅틱 이론' 주창 日 대표 디자이너 하라 켄야 교수
해외 유학파 많은 한국 디자인 스타일링은 일본보다 앞서
이제는 한국다움이 무엇인지 정체성을 고민해야할 시기
그에게 삼성전자의 휴대전화인 '햅틱폰'을 아는지 물어본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이른바 '햅틱 이론'을 집대성한 인물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중 한 사람인 하라 켄야(原硏哉·51) 일본 무사시노 미술대학 교수.햅틱(haptic)은 촉각(觸覺)을 뜻하는 영어 단어로 국내 소비자들에겐 휴대전화 이름을 통해 널리 알려졌지만, 디자인 분야에선 이미 몇 해 전부터 각광받기 시작한 개념이다. 시각과 청각뿐만 아니라 촉각까지 디자인의 영역으로 끌어넣어 제품을 개발하는 것을 말한다. 마케팅의 초점이 '소비자의 눈을 사로잡는 시대'에서 '소비자의 오감(五感)을 파고드는 시대'로 이동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핵심 개념이다.
그런 햅틱 이론의 주창자인 그의 대답은 뜻밖에도 "(햅틱폰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마침 기자가 갖고 있던 햅틱폰을 건넸다. 그런데도 첫 반응은 심드렁했다. "(애플의) 아이폰 비슷하네…."
그러던 그가 진동 터치를 요리조리 누르고, 햅틱의 야심작인 '주사위 게임'에 도달했을 때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와, 이거 갖고 싶은데요. 인터랙션(interaction)이 꽤 훌륭해요. 소니가 분발해야겠는데…." (그는 소니가 분발해야겠다는 말을 뒤에도 여러 번 반복했다.)
- ▲ 좋은 디자인이란 어떤 것인지 묻자 하라 켄야는 자신의 배를 두드렸다.“ 배가 나온다고 벨트에 구멍을 뚫으면 몸은 더 뚱뚱해져요. 벨트도 구멍이 숭숭 뚫려 보기 싫어지고요. 긴장을 주는 디자인이 좋죠. 내 배는 이미 나왔지만…(웃음).”/정경렬 기자 krchung@chosun.com
하라 교수는 "삼성전자의 햅틱폰은 사람의 감각에 대응하는 새로운 디자인 분야를 제안하고 있는 나에겐 바람직하고 재미있는 시도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다만 터치 패널이 진동하는 것은 기술적인 측면의 햅틱으로 커다란 단서의 시작일 뿐이며, 감성적으로 햅틱의 개념을 확장시켜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지난 2004년 '햅틱전(展)'이라는 이름의 전시회를 기획했다. 재스퍼 모리슨(Jasper Morrison)과 구마 겐코, 후카사와 나오토(深澤直人) 등 세계 톱 수준의 제품 디자이너들을 그러모아 오감(五感)에 소구하는 새로운 디자인 개념을 제안했다.
디자인 회사인 일본디자인센터㈜ 대표를 겸임하고 있는 그의 디자인 철학은 '담백(淡白)'이나 '아날로그적인 감성'과 같은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디자인 철학이 구현된 대표작 중 하나가 신개념 패션 브랜드인 무인양품(無印良品·일본 발음은 '무지루시료힌'·MUJI)이다. 그는 실용 스타일의 정점을 보여주는 '무지 스타일'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 저서 '디자인의 디자인', '리디자인', '햅틱'은 디자인 전공자들의 필독서 중 하나다.
'발상 전환의 아이콘' 같은 그가 지난달 말 열린 '서울리빙디자인페어'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다. 박람회가 열린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하라 교수를 만나 단독 인터뷰했다.
첫인상은 무뚝뚝했다. 통역사가 같은 대학 출신인 것을 밝히자 바로 반말로 자신의 애플 컴퓨터를 연결해 달라고 했고, 고저가 없는 모노톤의 음성으로 질문에 답했다. 그랬던 그가 굳은 표정을 허물기 시작한 것은 햅틱폰과 아이리버의 USB 등 한국의 IT 제품이 화제로 올랐을 때였다. 두 눈 가득 호기심을 채우고 자신의 대표 이론 '햅틱 론(論)'과 '리디자인 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 “바나나야, 우유야?”바나나 자체를 눌러 만든 것 같은 바나나 우유 패키지. 맛을 촉감으로 표현해 햅틱을 구현했다. 후카사와 나오토가 햅틱전에서 선보인 작품.
―촉각을 중요한 디자인 요소로 포함해 디자인의 지평을 넓혔다. 당신이 주창한 '햅틱 이론'을 쉽게 설명해달라.
"색깔과 형태뿐만 아니라 '소비자가 어떻게 느끼게 할 것인가'도 디자인의 영역이다. 인간은 아주 섬세한 '감각의 다발'이다. 이 감각을 활용해 세상을 새롭게 느끼고 보다 풍부하게 만들어가자는 것이 햅틱 이론이다."
"개념이 좀 추상적이다"라고 하자, 하라 교수는 햅틱전에 참여한 디자이너 중 한 명인 재스퍼 모리슨이 한 말을 전해주었다. "모리슨에게 전시 기획 의도를 설명하자 그는 '오감(五感)으로 느끼고 저절로 침이 나오게 만드는 디자인이 맞느냐'라고 반문하더라. 고기를 맛있게 굽고 있는 모습을 보면 저절로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처럼 햅틱은 보이지 않는 감각을 자극하는 것이다."
지난해 한국에서도 열린 햅틱전은 규모는 작지만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획기적인 전시로 평가받았다. 바나나 껍질의 모양과 질감을 살린 바나나 우유팩〈사진〉, 두부의 촉감을 살린 두부 모양 두유팩, 이끼가 깔려 있어 보기만 해도 폭신해 보이는 게다(げた·일본 나막신) 등 오감을 일깨우는 디자인들이 선보였다.
- ▲ 빨래가 아니다. 가만히 보면‘여자 화장실’이란 표기가 보인다. 하라 켄야가 빨래처럼 빨 수 있는 천으로 만든 우메다 병원의 안내 사인.‘ 최고의 청결’이라는 메시지를 하얀 천에 담았다. /하라 켄야 제공
―구체적으로 당신의 작품에서는 어떻게 햅틱을 구현했는가.
"산부인과·소아과 병원인 우메다(梅田) 병원의 사인(sign)시스템 의뢰를 받았을 때다. 임산부가 출산 후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청결 상태가 좋지 않은 민박처럼 느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새하얀 면(綿)으로 양말이나 샤워 캡 형태의 사인을 만드는 것이었다. 줄에 매달거나 벽에 붙여서 때가 묻으면 벗겨서 빨 수도 있다.〈사진〉 물론 귀찮은 방법이다. 애초에 쉽게 더러워지지 않는 비닐을 쓰거나, 흰 색 대신 짙은 색으로 사인을 만드는 것이 당연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발상을 반대로 바꾸어봤다. '더러워지기 쉬운 것을 항상 청결하게 한다'는 것을 실천해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치 고급 레스토랑이 하얀색 테이블보를 사용하는 것처럼 최고의 청결함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긴자의 마쓰야 백화점을 리뉴얼 할 땐 '공간의 감촉'을 디자인했다. 백색 건물 외벽에 반구(半球) 형태의 물방울 무늬를 요철 모양으로 찍었다. 쇼핑백도 건물 외벽처럼 백색에 물방울 패턴을 넣어 VI(비주얼 통합·Visual Identification) 작업을 했다. 또 리뉴얼 오픈 광고용 포스터엔 자수를 놓고 지퍼를 달아 촉감을 마케팅의 새로운 수단으로 활용했다."
- ▲ 건물의 외벽이 열린다? 하라 켄야는 마쓰야 백화점 리뉴얼 공사 기간 동안 지퍼가 조금씩 열리는 형태로 가림막을 바꿨다. 리뉴얼에 대한 기대감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발상이다. /하라 켄야 제공
두 사례는 하라 켄야식 '발상의 전환'의 정수를 보여준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기업 전략 역시 경쟁 기업과 다른 새로운 시각의 접근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그에게 비법을 물었다.
"'새로움'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현재의 물건이 낡은 것처럼 보이도록 해서 새 것을 사도록 강요하고 과도한 소비를 부추기는 문화는 머지않아 반드시 쇠퇴한다. 익숙해져 있는 일상에서 신선한 빛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로(zero)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도 창조지만, 분명히 알고 있을법한 것에 대해 '얼마나 알지 못했었나'를 다시 인식하는 것, 기존의 것을 미지화(未知化)해서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도 창조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햅틱과 함께 그의 디자인 이론의 양대 축을 이루는 '리디자인(redesign·다시 디자인한다)'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리디자인은 '합리적인 물건 만들기'를 위해 그가 제안한 사고방식으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을,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디자인해 보는 것이다. 지난 2000년 그가 건축가와 디자이너, 패션디자이너 등 각 분야 전문가 32명과 함께 개최한 같은 이름의 전시회 '리디자인전(展)'은 디자인의 새로운 가능성을 일상의 재발견에서 모색한 전시였다.
- ▲ 가운데 심이 사각형으로 된 화장지. 한번에 휙 풀리지 않아 쓸데없는 자원 낭비를 막았다. 리디자인전에 출품된 반 시게루 작품.
그 전시회에서 종이 건축으로 유명한 건축가 반 시게루(坂茂)는 심이 사각형으로 생긴 화장지를 만들었다.〈사진〉 사각형이기 때문에 화장지를 당길 때 휙 풀리는 게 아니라 작은 저항이 생겨 오히려 불편하다. 하지만 불필요하게 종이가 많이 풀리는 것을 막아 '자원 절약'을 실현한 디자인이다. 후카사와 나오토는 홍차 티백 손잡이를 홍차가 제일 맛있어지는 시점의 색깔로 된 고리로 디자인했다.〈사진〉
- ▲ 왼쪽부터 리디자인전에서 후카사와 나오토가 선보인 홍차 티백. 홍차가 가장 맛있게 우러났을 때 티백의 고리와 같은 색이 된다.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인지 행위를 포착한 디자인, 나뭇가지 모양의 성냥. 멘데 카오루 작품.
하라 교수는 이 작은 전시회에서 디자인의 과잉에서 탈피해 본질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구현했다. 그는 "홍콩, 밀라노, 상하이 등 전 세계 10여 개 도시를 순회 전시했고, 글래스고에서는 2만 명이 넘는 관객이 전시장을 찾았다"면서 "디자인이 지니고 있는 '합리성'이라는 본질에 세계가 다시 주목하고 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디자인은 가까운 미래의 산업을 예견하고 보여주는 작업
―당신이 생각하는 디자인은 무엇이고, 디자이너의 역할은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디자인이 형태나 색깔에 신경 썼다면, 이제는 감각의 내부를 자극하는 디자인의 시대다. 디자인은 브랜딩이 아니라 가까운 미래(近未來)의 산업을 예견하고 보여주는 작업이다. 디자이너의 역할은 그 산업의 미래를 비주얼라이즈(visualize·시각화) 하는 것이다."
- ▲ 비행기의 방향을 달리해 입·출국을 표시한 여권 스탬프. 작은 차이로 사람을 웃게 만든다. 리디자인전에 전시된 사토 마사히코 작품.
―저성장 시대, 경기 침체기에 기업들은 디자인 전략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
"디자인은 단순히 소재나 기술 개발로 차별화해서 매력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본질'을 바꿈으로써 가까운 미래의 산업을 제시하는 것이다. 예컨대 휴대전화를 디자인할 경우, 휴대전화를 '제품'으로 접근하지 말고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로 생각해야 한다. '휴대전화로 어떻게 소통이 일어날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제품을 알리는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지금의 휴대전화 광고는 하나같이 제품에 탑재된 첨단 기술을 보여주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만약 휴대전화 신제품 광고 담당자라면 어떤 광고를 하겠는가.
"콩트 형태로 전화받는 장면만 50~100컷을 모아서 보여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등장 인물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상상해 보도록 하겠다. 50대 여성이 울고 있는 장면을 아무 소리 없이 보여줬을 때, 그 여성이 왜 울고 있을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형태보다는 소통 방식을 어떻게 해석해서 디자인을 반영할 것인가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한국과 일본 제품의 디자인 차이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한국은 '스타일링'에 관해서는 일본보다 훨씬 앞서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학생은 해외로 유학을 많이 간다고 하더라. 반면 일본은 국내파가 많다.
유학을 많이 간다는 것은 '글로벌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글로벌은 생산·유통·금융 등 경제의 영역에 해당되는 용어이고, 문화는 글로벌한 가치가 아니다. 문화의 본질은 로컬리티(locality·지역성)에 있다. 자신의 문화를 자신의 언어로 고민하고, 그것을 세계적인 문맥으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자국의 문화를 다듬어서 외국 사용자들이 그들의 환경에서 해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세계 시장에서 '저팬 디자인(Japan design)'은 하나의 브랜드가 됐다. 당신이 생각하는 일본 디자인의 정체성은 어떤 것인가.
"역사적으로 일본은 15세기 후반, 세계 모든 양식의 영향에서 피하려는 듯 평범하고 단순한 형태를 추구했다. 이 단순함은 서양의 '심플(simple)'과는 다르다.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을 담아내는 '빈 그릇'과 같은 것이다. 강한 메시지를 표현하지 않고, 다양한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는 '엠티니스(emptiness)'를 내보이는 것, 이것이 일본 디자인의 독창성이다. 내가 아트디렉터를 맡고 있는 '무지(MUJI)'의 콘셉트도 바로 이 엠티니스다."
―일본에 비해 한국은 고유의 정체성을 아직 정립하지 못했다는 자성이 있다.
"솔직히 한국다움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한국도 이제 스스로 한국다움에 대해 되돌아보고 정체성을 고민해봐야 할 시기다. 이미 지난 과거에서 놓친 부분이나 모르고 넘겼던 가치를 재발견해 한국다움을 찾아내야 한다. 일본도 그랬지만, 20세기 후반에는 모던한 것에 대한 강박으로 기술, 산업, 기능만 강조됐다. 이제는 그 과정에서 놓쳤던 가치를 되살려야 한다. 과거에서 현대적인 디자인의 소스를 발견할 수 있다. 이번에 한국에 와서 뭘 살까 한참 고민하다가 다기(茶器) 세트를 사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현대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디자인 소스가 많은 것 같기 때문이다."
그가 머릿속에 한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뭘까. 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세 문장을 뱉었다.
"의욕적(意欲的)이다."
"하이테크스기루(ハイ-テク過ぎる·지나치게 첨단 기술을 좋아한다)."
"(디자인적으로) 소니를 이겼다(?)"
단정적인 앞의 두 문장에 비해, 소니를 언급하는 부분에는 끝이 살짝 올라갔다. "소니와 비교하는 부분은 어떤 의미냐"고 되물었다. "삼성, LG 같은 회사들을 필두로 한국 기업들이 세계적인 디자인상도 많이 받고, 정책적으로도 디자인을 강화하고 있어 소니를 이긴 것 같다. 그런데 이게 너무 지나쳐 스타일링만 강조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디자인으로 시장이라는 토양을 비옥하게 하라
―현실에서 '좋은 디자인'과 '잘 팔리는 디자인'은 다른 것 같다. 무엇이 바람직한 디자인인가.
"인기 디자인을 무턱대고 쫓아가기보다는 장기적으로 어떻게 될지 생각해봐야 한다. 과식을 했다고 생각해보자. 부른 배에 맞춰 벨트 구멍을 하나 더 뚫어 늘리고, 이것을 몇 번 반복하면 몸은 편안해진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몸은 그 편안함에 길들여져 뚱뚱해져 있고, 벨트는 구멍이 뻥뻥 뚫려 보기 흉해질 것이다.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것, 인기 있는 디자인을 지향했을 때 결과적으로 불필요한 장식이나 요소가 덕지덕지 붙은, 좋지 않은 디자인을 양산할 수 있다. 디자인은 씨에서 싹이 트는 부분을 건드려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씨가 멋진 싹을 틔울 수 있도록 '시장'이라는 토양 자체를 일구는 역할을 해야 한다."
―'시장'이라는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기 위해 '(소비자에 대한) 욕망의 에듀케이션(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어떤 개념인가.
"오늘날 소비자들의 욕구는 마케팅에 의해 빈틈없이 '스캔'된다. 지금 일본에서 팔리는 자동차는 일본인의 자동차에 대한 욕망을 정밀하게 스캔해서 제품에 반영한 결과다. 결국 상품의 모태가 되는 시장의 '욕망 수준'이 글로벌 시장에서 상품의 성패를 좌우한다.
감각이 뒤떨어진 나라의 시장 눈높이에 맞춰 만든 상품은 그 나라에서는 잘 팔리지만, 글로벌 시장에선 팔리지 않는다. 반면 감각이 뛰어난 나라의 수준에 맞춰 만든 상품은 그 나라뿐만 아니라 후진국에서도 잘 팔린다. 결국 디자인은 단순히 마케팅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고, 궁극적으로 사용자의 욕망 수준을 '에듀케이션' 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보니까 "소니가 빨리 분발해야 하는데…"라고 여러 번 말했는데, 소니의 분발을 촉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혁신 제품의 상징과도 같았던 소니가 지금과 같이 정체된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보는가.
"테크놀로지의 성과를 일본의 미의식을 통해 표현한 소니와 같은 기업에는 항상 가능성을 느끼고 있다. 일본의 미의식은 '섬세, 정중, 정밀, 간결'로 요약된다. 이것을 현재나 미래의 문맥으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소니는 자칭 '글로벌 기업'이지만, 일본인인 내게 소니는 늘 일본적인 기업으로 비쳐져 왔다. 글로벌을 대상으로 사업을 전개한다고 해서 일본적인 문화의 근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지금의 소니는 문화에 대한 의지와 미의식이 부족해졌다."
―경영자들은 좋은 디자인과 나쁜 디자인을 구별하는 안목을 어떻게 가져야 하며, 디자이너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
"디자인이 단순히 제품 외관을 스타일링 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이는 위험한 접근법이다. 기업의 비전을 담은 디자인을 해야 한다. 경영과 마찬가지로 디자인도 단기 사이클로 보지 말고, 긴 스팬(span)으로 생각해야 한다. 단기적인 이윤 추구를 위해 디자인을 도구로 삼을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에서 시장과 사용자의 수준을 끌어올려 세계적으로 우위성을 발휘할 수 있는 디자인을 해야 한다."
―세상이 요구하는 디자인은 끊임없이 변화해 가고 있다. 세상의 변화를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가?
"디자이너는 어느 정도 경험과 연령을 쌓지 않으면 디자인할 수 없다. 순발력과 미성숙도 매력이 될 수 있지만, 원숙과 성숙, 세련과 억제도 디자인의 중요한 요소다. 우아함은 '절제'라고 하는 태도에서만 탄생된다. 나는 20대엔 디자인을 하고 싶어 발버둥치며 돈을 모았다. 그땐 허공에 둥둥 떠서 지내던 시절이다. 두 발을 땅에 붙일 수 있게 됐다고 느낀 건 최근이다."
―화제를 좀 바꾸자. 오세훈 서울시장은 간판 정비와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신축 등을 통해 서울의 이미지를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디자인적 관점에서 서울을 어떻게 보는가?
"도시의 매력 중 하나는 '혼돈'에 있다. 도쿄나 서울은 전통과 서양 문화가 혼란스럽게 뒤섞인 도시다. 전통이나 현대, 둘 중 어느 하나에 초점을 맞춰서는 혼돈의 매력을 살릴 수 없다. 일본은 행정적 규제가 느슨하기 때문에 어디에 어떤 건축을 지어도 대부분 허용이 된다. 결과적으로 혼돈이 생겨나지만, 동시대의 활력이 만들어진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건축물이 탄생돼 세계 건축 트렌드를 리드하기도 한다. 도시 만들기는 조급해서도 안 될 문제이며, 결론을 급하게 내려서도 안 된다."
인터뷰 말미, 기자는 그에게 조그만 선물 하나를 건넸다. 하라 교수의 '엠티니스'를 디자인 철학으로 삼고 있는 국내 IT업체 아이리버에서 그에게 꼭 주고 싶다며 기자에게 전달을 부탁한 '도미노'라는 USB메모리였다. 포장과 제품 디자인을 꼼꼼히 살펴보던 그의 입에서 후렴구처럼 또 한번의 탄성이 새나왔다. "야, 소니가 진짜 분발하지 않으면 안 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