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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노래, 희망의 노래 | 아침나라 | 2004/02/04 17:46 |
http://blog.naver.com/goodlwh/80000761412 | |
'좌절과 분노를 넘어 희망을 찾아서' - 어제 그 심포지움에 갔었다. 거기서 불의 노래를 알게 되었다. 모처럼 정말 모처럼만에 가슴 뛰게 하는 사람을 만났고, 그 지성의 피를 토하는 듯한 노래를 들었다. 아름다웠다. 감동이었다. 혼자 품고 있기에는 너무 귀한... 여기 그 노래를 소개한다. 누구의 노래인가는 굳이 소개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심장의 노래이기도 할 테니까...
희망의 대안으로서 ‘개혁적 신보수’
Ⅰ. 문제의 제기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또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른바 대한민국호(號)가 항해의 목표로 삼고 있는 항구는 어디인가. 산업화의 열망도 시들해졌고, 민주화에 대한 추억도 환멸로 바뀌고 있다. 오로지 내 몫의 극대화에 대한 집착과 다툼이 있을 뿐, 공동체를 가꾸어 나가겠다는 어떤 공동의 열정, 이른바 ‘일반의지(general will)’가 남아 있는가. 우리사회는 ‘구심력(求心力)’보다는 ‘원심력(遠心力)’이 훨씬 강력하게 작용하는 사회가 되었다.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의 지적대로 ‘절대적 다수’가 없고, ‘다양한 소수파’, 그것도 적대적 관계에 있는 ‘소수파’들만 있는 것 같다. 주변 강국인 중국과 일본은 욱일승천의 기세로 떠올라 ‘넛츠 크래커’사이에 놓인 ‘호두’ 신세가 되고 있는데, 정작 한국은 내분으로 인하여 바깥을 내다보지 못하는 ‘우물 안의 개구리’ 신세다. 우리 공동체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전투구를 신선놀음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도끼자루가 썩고 있는 상황은 분명해 보인다. 통합보다 분열, 책임있는 담론보다 어지러운 중구난방(衆口難防), 이해집단들의 상호협력보다 상호갈등이 현재 우리사회의 자화상이라면, 정치권도 ‘스포츠맨십없는 스포츠맨’을 방불케하는 ‘리더십없는 리더’, 정체가 모호한 개혁코드, 무분별한 개혁 끌어안기, 부정부패 덤태기 씌우기, 젊음의 이미지 선점하기 등,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일관하고 있다. 동북아 중심국가를 만들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밝힌 지가 엊그제 같은데, 이러다가는 우리공동체가 번영하고 살아남기는커녕, 퇴행 내지 소멸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엄습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당위는 우리가 좌절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나라를 빼앗긴 비극은 한번으로 족하지 않은가. 국가적 비극을 피하려면 새롭게 떨쳐 일어나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정신적 르네상스와 이념적 각성이 필요하다. 본 논의에서는 이 정신적 르네상스와 이념적 각성의 단초를 보수주의 구모델을 새롭게 ‘리모델링’하는 차원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현 시기를 ‘탈이념의 시대’ 혹은 ‘이데올로기 종언시대’라고 규정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발표자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국가공동체를 바라보고 평가하며 미래의 국가비전을 조망하는 데는 진보냐 보수냐 하는 문제가 가장 유효하고 또 중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현 한국사회에서 불거지고 있는 북한핵문제, 이라크파병, 한미동맹의 성격 등, 일련의 쟁점에 대한 입장표명에는 이념적 성향이 주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탈이데올로기론’도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판단한다. 한 사회가 건강하고 번영하려면 다원주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 거기에는 아담스미스만이아니라 마르크스도 있어야 하고, 하이에크(F. A. Hayek) 뿐만 아니라 티트머스(R. Titmuss)도 있어야 한다. 또한 소로우(H. D. Thoreau)나 마틴 루터킹(M. Lutherking)도 있어야 하는가하면, 소크라테스도 있어야 한다. 다양한 이념과 가치들이 공존하고 경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들 ‘다원적 소수파’가 한 사회에 엇비슷하거나 꼭 같은 비율로 있어야할 당위는 없다고 생각한다. 즉 ‘무한대의 다원주의(unlimited pluralism)’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말이다. 나름대로 사회를 움직이는 주류적 가치나 이념들, 정치공동체를 굳건히 지탱해주는 ‘메인스트림’이 있어야 한다. 물론 정통적 가치가 배타적으로 하나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정통적 가치로 간주되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이나 허용되는 자유방임적인 사회가 되는 셈인데, 이러한 극단적인 가치상대적 사회를 롤즈(J. Rawls 1971)의 표현을 빌어 ‘좋은 질서를 가진 사회(a well-ordered society)’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관심의 초점은 ‘제한된 다원주의(limited pluralism)’나 ‘합리적 다원주의(reasonable pluralism)’로서 일정한 범주안에 드는 일련의 정통적 가치들이 정치공동체를 움직이는 지랫대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공동선을 위한 견제와 균형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본 논의에서는 ‘새로운 보수’의 개념을 제창하고자 한다. 과거 전통적 보수주의 구모델과는 일련의 공통점을 공유하면서도 개혁과 변화를 능동적으로 주도함으로써 ‘산업화’와 ‘민주화’를 아우르며 동시에 이를 뛰어넘는 ‘선진화’의 비전을 표방하는 ‘개혁적 신보수주의’야말로 문제의 ‘정통적 가치들’의 재정립을 위한 하나의 유의미한 대안이 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한다. 이 ‘개혁적 신보수’는 ‘선진화’의 목표를 위해 퇴행적 성향의 진보주의를 받아들일 수는 없으나, ‘합리적 진보’와는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경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개혁적 신보수’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선진화’의 비전을 구체화하려는 것이 본 논의의 핵심이다.
Ⅱ. 국가공동체 현실에 대한 평가 어떠한 국가공동체라도 영원한 생명력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국가공동체들이 명멸했다는 사실은 문명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이 점에 있어 최근 우리가 경청해야할 경고의 메시지가 있다. 서로우(Lester C. Thurow 1992)가 앞으로 100년 후에 살아남는 국가들을 예측한 걸 보면 한국이 빠져 있다. 한국은 어디로 간 것인가. 지금 한국은 비탈길에 서 있는 셈인가. 그런 예측과 관련하여 도발적 견해를 밝히는 것을 좋아하는 한 대학교수의 ‘지적유희’라고만 단정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100년 전 나라를 빼앗긴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고 신흥대국을 자부하는 중국의 기세와 10년 불황에도 기가 죽지않고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자처하는 일본의 야망이 부딪치는 틈새에 우리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국가공동체의 작동요건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국민, 영토, 주권이 있으면 국가가 되는 것이고, 또한 막스 베버(Max Weber)의 고전적 정의를 빌린다면 일정한 영토 내에서 강제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한다면 국가가 존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건은 형식논리적 의미에서의 ‘물리적 요건’일 뿐, 실제로는 소속감, 연대감, 정체성 등의 ‘도덕적 요건’이 중요하다. 한 국가공동체가 유의미하게 존속하고 번영하려면, 공권력에 의한 질서 이외에 구성원들 사이에 정체성 공유, 소속감, 응집력, 연대감의 형성 등이 요구된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소 닭쳐다보듯이” 삶을 영위한다든지 혹은 더 나아가 “적과의 동침”처럼 동상이몽(同床異夢)을 꿈꾸고 있다면, 본의적 의미에서 국가공동체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거대한 국가공동체가 가정이나 교회 같은 소규모의 따뜻한 공동체와 비교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공동체 구성원들사이에 불만, 불안, 불신의 요소들은 어느 때보다 도처에 팽배하고 있다. 또 가족 해체율이라고 할 수 있는 이혼율도 세계 1-2위를 다투고 있고, 자녀 출산율은 프랑스나 일본보다도 낮은 저출산국가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국가경쟁력이란 부분도 빼놓을 수 없다. 국가공동체라고 해서 안정과 번영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질을 끊임없이 개선할 필요가 있다. 물에도 1급수와 2, 3급수를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국가공동체도 1류국가, 2-3류국가 등 ‘질(質)’을 따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국가체제가 ‘협력체제’ 못지않게 ‘경쟁체제’라는 점을 감안하면 경쟁력, 특히 국가경쟁력 제고는 필수적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엄청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저성장율, 산업공동화현상, 부정부패, 빈부갈등, 이익집단들의 제몫챙기기 다툼 등의 현상을 볼 때 과연 지속가능한 발전이 가능할 까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최근의 국가경쟁력 지수를 보면, 정부의 경쟁력은 30위권, 기업의 경쟁력은 20위권이다. 특히 우리는 국가공동체의 질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이 맥락에서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약화되고 불효(不孝)가 만연하며 지하철에서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미풍양속이 사라지고 “도덕이 땅에 떨어졌다”는 유학자들의 진부한 하소연을 새삼스럽게 반복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구성원들간의 끈끈한 유대의 원천이었던 ‘유교적 공동체’는 무너졌는데, 이를 대체할 새로운 형태의 ‘민주적 공동체’의 모습이 출현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문제다. 다른 사람에 대해 반대의견을 당당히 말하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이 다원적 민주공동체의 한 특징이나, 관용보다 불관용의 정신이 풍미하고 있고 “내가 너하고 다른 것”만 따지고 “내가 너와 같은 것”이 있다는 점이 쉽게 망각되고 있다. 또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에 대해 “의견이 다르다”고 말하지 않고 “의견이 틀린다”고 말하며 아예 “종자가 다르다”고 단언하기 일쑤이다. 반대의견이나 이의표시가 너무 극단적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 데서나 상복을 입고, 장례식을 거행한다. 또 과잉감성과 이성결핍이 우리사회의 최근 특징이다. “좋아하지 않으면 싫어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이 극성이고 “내편이 아니면 적”으로 분류하는 천박한 피아(彼我)구분법이 유행이다. 또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감동의 눈물도 아끼지 않으나, 싫어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적대감과 살벌함 또한 넘친다. ‘컴맹’이 ‘문맹’ 못지 않게 냉소의 대상으로 취급받는 정보화시대와 인터넷 시대가 열렸는데, 익명성을 보장해주는 이른바 ‘기게스의 반지’를 낀 ‘네티즌’은 욕설과 비방, 험담도 개의치 않아 ‘욕티즌’으로 전락하였다. 특정 의견에 반대하여 수많은 ‘리플’을 다는 ‘네티즌’의 벌떼공격도 무섭다. 누가 정보화사회를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라고 지칭하고 네티즌을 ‘영리한 군중(smart crowd)’이라고 했던가. 우리사회에서 ‘멋진 신세계’는 ‘시시한 쉰세계’로 네티즌은 ‘영리한 폭도(smart mob)’로 변모하고 있다. 적대감이 흘러 넘쳐 서로간에 지켜야할 예의도 없어지고 “부끄러움을 팝니다”라고 외치는 원로들의 목소리가 “광야에서 외치는 외로운 목소리”로 전락한 상황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homo homini lupus)”가 되는 토마스 홉스의 ‘아나키(anarchy)’상태가 재현되고 뒤르깽(E. Durkheim)이 말하는 ‘아노미(anomie)’ 상태가 팽배하는 등, 한마디로 공동체의 질이 고약해졌다. 공동체의 질이 악화되면 그 결과는 무엇일까. 그것은 공동체의 붕괴다. 대제국이었던 로마의 멸망도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타락과 공동체 붕괴에서 비롯되었다는 고대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과 현대 토인비의 지적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 지금 주저앉으면 두고두고 민족적 회한으로 남을 것이고 변변치 못한 코리언으로 낙인찍혀 세계공동체에서 주변국 주민으로서 부끄러움과 고통, 치욕속에서 살아야한다. 그럴 수 없다면 국가적 ‘아나키’와 국민적 ‘아노미’ 상태를 빨리 끝내고 스스로 깨어나야 한다. 본 발표자는 이에 관한 해법의 단초를 ‘선진화’를 지향하는 ‘개혁적 신보수’라는 ‘이념적 르네상스’에서 찾을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Ⅲ. 새삼스럽게 ‘보수’의 이념을 말할 이유가 있는가 지금 많은 사람들이 ‘탈이데올로기’를 말하고 있다. 또 탈냉전의 시점에서 보수와 진보의 구분을 강조하면 오히려 분열을 부추기고 공동체의 통합을 깨트린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작지않다. 과연 그러한가. 먼저 ‘탈이데올로기론’을 검토해 보자. 실제로 후쿠야마(F. Fukuyama 1992)는 ‘역사의 종언’을 이야기하면서 이제는 자유주의가 승리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을 사용할 필요성이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헤겔에 의하면 역사의 마지막에 ‘소외된 절대정신들’이 하나의 완성된 절대정신으로 통일되어 역사의 완성에 이르는 것처럼, 자유주의나 사회주의 등, 다수의 경합하던 이데올로기들도 하나로 통일되어 진리로 자리잡으면서 ‘역사의 종언’에 이르게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80년대말 동구와 소련이 망하고 자유주의가 유일한 대안으로 회자되면서 한때는 ‘역사의 종언론’이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본 발표자는 ‘역사의 종언론’이나 ‘이데올로기 종언론’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치열하게 삶을 영위해나가는 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한민족인 남북한이 아직도 갈라져 있고 특히 탈냉전시대에 유독 한반도만이 냉전적 구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이념적 차이가 엄존하고 있다는 생생한 증거이다. 남북한의 분단과 갈등을 이념적 차이말고 다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권력 주도세력의 차이일까. 아니면 제도의 차이일까. 물론 제도가 다르고 또 정치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이 다르긴 하다. 하지만 각기 다른 제도나 정치권력에 정당성의 논리를 제공하는 것은 이념일 수밖에 없다. 지금 남한과 북한사이에 경제력이나 삶의 질, 혹은 인권보장의 차이가 현격한 것은 이념적 차이 이외에 설명할 길이 없다. 부지런하며 손재주있고 정(情)도 많은 같은 한민족으로서, 남한사람들은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고 6․10이나 5․18과 같은 ‘민주화의 기적’을 일구어냈는데, 왜 북한에는 ‘대동강의 기적’이나 ‘인간적 사회주의의 기적’이 없을까. 남한은 동남아 노동자들이 들어오려고 안간힘을 쓸 정도로 부강해졌는데, 왜 북한의 경제력은 주민들이 북한을 나가지 못해 안달하며 목숨을 걸고 탈북을 감행할 정도로 피폐해졌는가. 남한의 주민들은 대통령의 사진이 들어있는 신문지를 자리에 깔고 앉아도 무방할 정도로 인권개념이 발달해있는데, 왜 북한의 주민들은 김정일의 사진이 비를 맞는다고 아우성치며 현수막을 떼어낼 정도로 개인숭배사상에 젖어 있을까. 이러한 남북한의 차이는 사람의 차이가 아니라 이념의 차이며, 또한 이념의 차이에서 비롯된 제도의 차이로 볼 수밖에 없다. 또한 이념의 차이는 남북한사이에만 현격한 것이 아니다. 남한에도 진보와 보수의 차이는 남남갈등을 야기할 정도로 심각하다. 중국의 해외공관에서 삶과 죽음을 놓고 절규하고 있는 북한 여성탈북자의 운명에는 무관심하고 아시안게임과 축구예선전에 참가한 북한미녀 응원단을 보고 ‘남남북녀’라는 사실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일반적으로 감성적 진보주의자의 한 모습이다. 또한 미선․효순이의 죽음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면서도 미국과의 동맹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보수주의자라면, 미선․효순이를 위해 촛불시위를 하면서도 서해교전에서 전사한 6명의 군인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이 진보주의자이다. 이처럼 이념이란 사람들이 정치․사회․경제현상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인식적 틀’과 같은 것이다. 가톨릭에서는 신을 ‘하늘님’에서 유래한 ‘하느님’으로 부르는 반면, 기독교에서는 신을 ‘하나’라는 뜻에서 나온 ‘하나님’으로 부르듯이, 진보와 보수는 서로 다른 세계관과 미래의 비전을 표방하고 있다. 물론 방향적 의미의 ‘좌우’에서 기원을 갖는 진보와 보수의 개념은 프랑스의 혁명공회 당시 의장자리를 기준으로 과격파, 온건파, 보수파 등이 좌석을 차지한 사실에서 기인한 우발적인 것이긴 하나,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다른 ‘사회공학적 함의’를 갖게되었고 이점은 한국사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해방이후의 좌우갈등을 방불케 할만큼 국가의 주요 기념일마다 보수와 진보가 각기 따로따로 적대적인 대규모 집회를 갖는걸 보면, 보혁갈등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화된 것이라는 반증이며, 그만큼 ‘탈이데올로기론’은 무력해지는 셈이다. 이념차이와 이념갈등이 현실이라면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현명할까. 이념차이가 없는 듯이 행동하고 침묵하는 것이 공동체 결속에 도움이 되며 상책일까. 그보다는 오히려 양자의 차이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며 “불일치하기로 합의하는(agree to disagree)” 방안을 찾는 것이 공동체의 균열을 최소화하는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이 점은 질병 치유법과 비교할 수 있다. 일단 암에 걸린 환자에게 걸리지 않은 것처럼 “편히 쉬라”고 조언하면서 병에 대처할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전통적 치유방법이었다. 하지만 최근 암에 걸린 환자에게 오히려 암에 걸린 사실을 확실히 알려줌으로써 삶에 대한 적극적 의지를 북돋을 수 있고, 혹은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흔히 사람들은 이념문제를 꺼내면 ‘색깔론’이라고 공박하는 경우가 많은데, 흥미로운 것은 그런 경우일수록 ‘역색깔론’ 공세인 경우도 적지않다는 사실이다. 보수는 진보와 ‘색(色)다르다’. 색깔이 다르면 다르다고 공언하는 것이 정도(正道)인데, ‘색다르다’는 사실자체를 지적한걸 놓고 ‘메카시즘’으로 매도해서는 ‘역매카시즘’이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정적을 잡기 위하여 없는 색깔을 씌우는 것은 문제지만, 자신의 분명한 색깔이 있음에도 표의 극대화에 불리할까봐 색깔을 감추는 것은 유권자를 기만하는 위선적 태도이다. 이념적 성향을 분명히 밝히고 구분하는 것은 개개인이 서로서로 이념적 공간에서 어디에 서있는가를 알게되고 알려주는데 중요하다. 경계해야할 것은 카멜레온처럼 자신의 본색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얼버무리려는 경향이다. 혹은 득표극대화를 위해 보수와 진보를 적당히 ‘휴전화(fusionization)’하려는 태도가 문제다. 신자들이 자신이 믿는 종교를 말할 때 ‘휴전화’하고 얼버무리지 않는 것처럼, 이념을 말할 때 정직하고 투명해질 필요가 있다. 본 발표자는 정통적 가치정립과 관련하여 우왕좌왕(右往左往)하는 시대상황에서 이념적 좌표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으며, 이 정신적 혼돈과 ‘다원적 소수파’시대에 진보의 이념보다는 보수의 이념이 또한 구모델의 보수보다는 신모델의 보수가 선진화를 위한 이념적 향도(嚮導)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Ⅳ. 간직해야할 ‘국가의 추억’ 왜 진보보다 보수에서 정통의 단초를 찾는가. 우리가 ‘아노미’와 ‘아나키’ 상태에 이른 것은 국가공동체의 추억과 전통을 사랑하거나 혹은 존경할만한 것으로 보지 않고 경시하거나 냉소적으로 본 데서 기인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는 이점에서 ‘국가의 추억’가운데 존경할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과연 해방이후의 헌정사에서 우리에게 존경스럽고 기억할만한 민주공동체의 전통이 있는가. 민주전통과 관련하여 유별나게 자기채찍질(self-flagellation)을 하려는 견해가 진보주의자들에게서 현저하다. 물론 자기 것이라고 하여 무조건 감싸고 돈다면, 쇼비니즘이나 합리적 비판정신의 결여일 터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구고 가꾼 역사에 대하여 과잉비판과 과도한 비관주의로 일관하는 것은 ‘정치적 매저키즘(political masochism)’의 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과도한 ‘정치적 매저키즘’이야말로 팽배하고 있는 ‘아노미’와 ‘아나키’ 현상의 한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의 거울에 비추어본 우리의 자화상이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우리의 역사, 특히 근대사를 보면 두 번에 걸친 ‘대실패(grand failure)’가 있었다. 근대화를 받아들이는 데 게으르고 더뎠기 때문에 19세기말 나라를 빼앗기는 민족적 비극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이 첫 번째의 ‘대실패’이다. 두 번째의 ‘대실패’는 해방 후 통일된 국가공동체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무위로 그친 일이고 그것은 6․25전쟁이라는 미증유의 동족상잔을 불러왔다. 그밖에도 헌정사에 있어 실패와 결함으로 볼 수 있는 요소들이 적지 않다. 이승만 정권의 건국독재,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 그 후에 이어진 군부독재, 이에 대한 시민들의 항거, 김영삼 정부임기 중 발생한 IMF구제금융사태, 김대중 정부시절의 각종 비리‘게이트’ 들이 아픔과 고통의 기억들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간직해야할 ‘국가의 추억’은 억압과 분열, 실패에 대한 기억밖에 없는가. 대한민국의 역사에는 민중들의 눈물과 슬픔만이 전부인가. 우리가 가지고 있을만한 ‘시민적 기억(civic memory)’은 그보다는 복합적이라고 생각한다. 재작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카네만(D. Kahnemann)과 트벨스키(A. Tversky 1973)교수는 ‘틀짜기(framing)’라는 개념을 내놓았다. 사물과 현상을 파악하는 데 사람들은 그 본질에 의하여 접근하기 보다 ‘틀짜기’, 즉 포장에 의해서 접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예를 들면 ‘반 잔의 물’을 볼 때, ‘한잔이 안 되는 물’로 비하할 수도 있고, 혹은 ‘빈잔이 아닌 반잔이나 되는 물’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낮에 나온 ‘반달’도 마찬가지이다. 보름달이 아닌 ‘반쪽밖에 안되는 달’로 부정적으로 볼 수 있고, 초생달이 아닌 ‘반쪽이나 되는 달’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우리의 근대사나 혹은 국가공동체의 역사도 이처럼 두 가지 범주로 조망할 수 있다. 근대사에서 정부수립이후의 역사를 어떻게 ‘틀짜기’ 할 것인가. 두 동강이 난 한반도, 분열된 두 개의 국가, 분열세력에 의한 정부수립, 정치적 권위주의, 정경유착 등으로 비관적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긍정적으로 ‘틀짜기’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 단정(單政)수립이 반길만한 일은 아니나, 그나마 반쪽인 남한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했기 때문에 반쪽이나마 삶의 질은 윤택해지고 좋아졌다. 한민족의 우수성을 내외에 과시할 수 있었던 것도 그나마 대한민국이 반쪽이나마 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적으로 우리의 시장질서가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으나, 그래도 자본주의를 했기 때문에 국민소득 20,000불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상기의 지적이 의미가 있다면, 우리의 전통과 관련하여 ‘시민적 기억(civic memory)’의 대상으로 남을 수 있는 존경할만한 가치와 역사를 발굴하고 보존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 된다. 국가지도자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식의 ‘국가의 신화’까지 가질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가 피땀흘려 가꾸고 이룩한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질만한 ‘국가의 추억’에 대한 소재는 충분하다. 우리는 대실패나 좌절만을 거듭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부수립을 했고 국가건설과 산업화를 이룩했으며 평화적인 민주화에도 성공했다. 특히 국가건설이나 산업화에서 분명 희망과 열정이 있었다면, 간직해도 좋은 ‘국가의 추억’이 아닐 수 없다. 하나의 국가공동체가 ‘희망을 거스려’ 희망을 가졌던 역사적 사실만큼이나 멋진 ‘국가의 추억’이 과연 있을 수 있겠는가. 그 절망적이던 50-60년대에서도 우리는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오늘날 산업화에 매진했던 50대와 60대는 그 시대를 자부심을 가지고 기억한다. 그런 자부심을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이라고 단죄할 수 있을 것인가. 본 논의에서 보수주의에서 희망의 단초를 찾는 것도 이런 기억할만한 전통이 우리공동체 내에 내재해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Ⅴ. 진보주의자들의 ‘마이너리티 콤플렉스’ ‘개혁적 신보수’의 관점에서 진보주의자들의 가장 큰 공로는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80년대 진보주의자들의 적극적 시민불복종운동이나 법불복종행위가 없었다면 우리 정치공동체가 헌팅톤(S. Huntington 1991)이 말하는 ‘민주화의 제3의 물결’에 동참할 수 없었고, 민주주의 공고화(consolidation of democracy)과정에 진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주의자들의 근본적 한계는 일련의 콤플렉스를 떨쳐버리고 있지 못하다는 점인데, ‘저항콤플렉스’나 ‘색깔콤플렉스’ 및 ‘약자콤플렉스’ 등이 그것이다. 특히 이들 ‘콤플렉스 신드롬’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마이너리티 콤플렉스’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마이너리티 콤플렉스 신드롬’은 과거 이들이 권위주의적 보수정권에 의해서 박해를 받았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그후 민주화가 급진전되어 진보주의자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만큼 성장했고 두 번에 걸친 대선에서 보수주의자들과 겨루어 승리를 쟁취하여 정부의 주도세력이 된 다음에도 이 ‘마이너리티 콤플렉스’를 씻어버리고 있지 못한 현실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이 ‘마이너리티 콤플렉스’의 공통된 문제점은 권위주의에 대한 청산의지가 강한 나머지 ‘권위’와 ‘권위주의’를 구분하지 못하여 모든 기성권위를 부도덕한 것이라고 터부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부터 나오는 논리적 귀결은 모든 기성권위와 ‘이스테빌리쉬먼트’를 판갈이하는 것이고 또한 이것을 진보적 개혁의 핵심적 어젠다로 설정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모든 기성권위를 부도덕한 것이라고 치부하고 청산대상으로 삼는 진보주의자들의 ‘적대적 개혁’이나 ‘투쟁적 개혁’은 정치공동체의 기본 질서를 해체시키고 오직 ‘아노미’와 ‘아나키’ 현상만을 유발시킨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아이를 목욕시킨 후 목욕물만 버리지 않고 아이까지 버리는 우둔함과 비교될 수 있다.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진보주의자들의 ‘마이너리티 콤플렉스’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점검해보자. ‘마이너리티 콤플렉스’의 첫 번째 형태는 과거에 대한 철저한 부정으로 우리의 근대사, 대한민국 건국사, 그 동안의 헌정사를 모두 지양(Aufhebung)의 대상으로 본다는 점에 있다. 신탁통치반대도 잘못되었고, 대한민국정부수립도 잘못되었으며, 친일파를 숙청하지 못한 것도 잘못되었고, 6․25자체가 실패한 통일시도이며, 6․25의 발발에 대해서도 남쪽의 내재적 모순이 크고, 한미동맹이나 한일국교정상화도 잘못되었고, 대외지향적 경제개발도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에 계속해서 잘못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특히 단정수립, 친일파 숙청실패 등 ‘원죄론’을 내세우고 있고 그 연장선상에서 미국종속론을 주장하고 있다. 즉 우리헌정사는 실패의 역사고 소외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국가공동체를 세우려면 이 모든 모순들을 일거에 척결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 대안으로 동맹에 의한 안보보다 자력에 의한 안보, 이념보다 민족이 선행하는 공동체, 친일파나 친미파가 득세하지 못하는 민족자존의 나라를 새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진보주의자들은 ‘반잔의 물’에 대해 “왜 한잔의 물이 못되느냐”고 푸념을 하고 있는 셈이다. 정말 우리의 과거는 ‘통째로’ 잘못된 것일까. 전적인 ‘판갈이’이외에 점진적인 개혁만으로는 고칠 수 없을 정도로 근본적으로 왜곡된 것일까. 그러나 그렇다고 단언한다면, ‘오버’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UN 선거감시위원단 감시하의 자유선거, UN에서 정부승인을 받기 위해 동분서주한 노고들, 6․25 당시 북한공산주의자들을 격퇴하기 위해 흘린 피, 미국과 동맹하여 조국의 안보를 지킨 노력, 60년대 국내와 해외에서 일하면서 흘린 땀방울이 잘못된 것일까. 이 모든 것들이 통째로 잘못되었다면, 대한민국의 존재이유도 찾기 어렵고 지금 우리의 정체성도 잘못되었다는 말이 된다. 우리는 원천적으로 소외된 존재로서 ‘도로(徒勞)’로만 일관한 셈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죄많은 나라에 태어난 죄인’에 불과할 뿐이다. 둘째, 진보주의자들의 ‘마이너리티 콤플렉스’는 끝없는 ‘피해의식’이나 ‘저항의식’으로 이어진다. 한국사회가 그 동안 민주화를 거듭하여 인권이나 사상의 자유 문제에서 과거에 비해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루었는데도 불구하고 ‘피해의식’이나 ‘저항의식’, ‘반골의식’은 좀처럼 변하지 않고 있다. 특히 대통령선거에서 승자가 되어도 ‘반통령(半統領)’이라고 자조하며 ‘마이너리티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리더로서의 포용력이나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언론의 건강한 비판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히려 기성언론이나 ‘이스테빌리쉬먼트’에 ‘피해자’나 ‘약자’로 자처하는 기이한 태도를 보일 뿐이다. 그러나 ‘저항의식’이나 ‘반골의식’은 문제를 제기하는 수준이지, 문제를 풀어가는 수준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진보주의자들의 ‘피해의식’이나 ‘반골의식’은 과거 억압적 보수주의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았다는데서 기인한다. 그들이 받은 박해에는 분명히 억울하고 불공정한 점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처해있었던 시대상황과 지정학적 위치가 우리에게 강요한 측면이 있음을 알아야한다. 정부수립당시의 격렬한 좌우익 대결, 6․25전쟁의 비극, 그 후에도 계속된 북한의 도발행위 등은 북아일랜드의 신․구교분쟁처럼 한국사회를 어쩔 수 없이 ‘불관용의 사회’로 몰고 간 것이다. 이제 시대정신이 바뀌었고 국가공동체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으면서도 과거 억압에 대한 회한으로 가득차 저항의식으로 일관한다면 ‘선진화’를 위한 주류는 될 수 없다. 주류의식은 스스로 주인의식을 갖고 책임감을 통감하며 비판과 파괴, 청산 등 적대적 태도보다 비판의 수용, 통합, 관용 등 건설적인 접근을 취할 때 가능하다. 모든 것이 절망적일 정도로 잘못되었으면 평화적인 민주화가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이점에서 민주화는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가하는, 근원에 관한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민주화는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산업화의 성공으로 절대적 빈곤을 벗어나 삶의 여유가 생긴 기반위에서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실질적으로(de facto)’ 권위주의 체제라고 해도 ‘법적으로는(de jure)’ 민주헌법을 가지고 있던 자유민주주의국가였기 때문에 민주화를 주도한 불복종주의자들은 헌법정신에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민주헌법과 민주화, 혹은 산업화와 민주화사이에는 ‘단절’보다는 ‘이어달리기’의 성격이 현저하다. 산업화와 민주화사이에 존재하는 불연속적 성격을 갖는 연속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민주화는 절름발이 이념일 뿐, 주류이념이 될 수 없다. 세 번째로 진보주의자들의 ‘마이너리티 콤플렉스’는 자구적 의미에서 ‘진보성’보다는 ‘수구성’, ‘전향성’보다는 ‘회고성’으로 이어지는 역설을 야기한다는 점이다. 진보주의자들을 수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진보주의자들이 독자적으로 지금보다 무엇을 잘할 수 있는가하는 미래의 비전을 통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보다는 과거의 보수주의자들이 저질렀던 과오나 실패, 비리에 중점을 두면서 정당성의 논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른바 ‘반사이익’의 논리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이 ‘과거에’ 잘못했다는 점과 그렇기 때문에 진보주의자들이 ‘미래에’ 잘할 것이라는 점은 전혀 독립적인 별개의 논리로 흄(D. Hume)이 말한 “이것 다음에 그러므로 이것 때문에(post hoc ergo propter hoc)”의 오류를 상기시킬 만큼 그 인과성은 당연한 것으로 입증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정경유착이나 부정부패의 경우처럼 보수주의자들이 잘못한 영역에서 진보주의자들도 역시 크게 실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진보주의자들의 태도는 마치 과거의 사회주의자들이 원용했던 방법, 즉 ‘현실적인 자본주의’와 ‘현실적인 사회주의’를 비교하지 않고 ‘현실적인 자본주의’와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대비하면서 사회주의 우월성을 강조했던 방식을 상기시킨다. 진보주의라면 앞을 향한 비전을 제시하며 사회를 주도할 태세를 갖추어야 하는데, “과거에 무엇을 했느냐”, “과거에 어디 있었느냐” 하는 문제 등에 지나치게 집착하고있는 모습이 진보주의 상(像)에 걸맞지 않는 ‘모순어법’으로 보인다. 네 번째로 진보주의자들이 내세우는 미래 비전에 관한 한 감성적 ‘마이너리티 콤플렉스’가 짙게 배어있다는 점이다. 진보주의자들이 내세우는 대안적 비전은 무엇인가. “다 바꿔”하고 소리친 다음에 세우자고 내세우는 목표는 무엇인가. 부자는 없고 평균적인 부만 존재하는 정의로운 사회인가, 북한과의 통일국가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힘으로 안전을 도모하는 자주국가인가. 결국 이들이 ‘닫힌 민족주의’ ‘대안없는 반미주의’ 나 ‘감성적 반미주의’ 이상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국가공동체의 미래를 ‘과잉감성’으로 조망하는 나머지 ‘이성결핍’의 접근법을 원용하기 때문이다. 즉 ‘의존’보다는 ‘자주’가 좋고 ‘외세’보다는 ‘민족’이 좋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우리의 주적국가는 북한인가 아니면 미국인가”하는 문제에 이성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통일지상주의’나 ‘감성적 민족주의’로 접근하는 한, ‘자폐성의 비전’이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다섯 번째로 ‘마이너리티 콤플렉스’에서 나오는 또 다른 문제점은 지적으로 색맹이거나 정직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진보주의자들은 한국사회의 모순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정체성을 삼았고 한편 그를 통하여 공동체의 질을 개선하는데 기여했다. 물론 비판자체가 옳은 경우는 많으나, 비판적 태도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공정하고 보편성을 띠며 균형이 잡혀 있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판은 편파적이 되기 쉽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과연 그들의 비판의식이 공정한가. 진보주의자들의 비판이 균형감각을 결여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현저한 사례는 인권문제이다. 한국의 인권문제에 대해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고 과거의 인권문제까지 샅샅히 거론하면서도 북한의 인권문제에는 침묵한다. 모른다는 이유로 말이다. 진보주의자들이 그토록 인권을 중시하고 남한정부의 반인권사태와 인권침해문제를 강조하는 반면, 북한의 반인권적 정책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성명서 한 장 발표한 적이 없다면, 위선적 태도이며 인권에 대한 그들의 신념을 의심케 한다. 같은 민족이지만 북한이야말로 세계에서도 유래가 없을 정도로 반인권적 국가이다. 사회주의를 한다는 미명하에 또한 주체사상을 고수한다는 명분하에 왕조국가보다 훨씬 가혹한 전체주의적 정치질서를 정당화하고 죽음의 수용소를 운영하고 있는 국가에 대해 보수주의자들보다 훨씬 강한 ‘인권감수성’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진보주의자들이 비판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비판이 ‘표적비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셈이다. 또 진보주의자들은 오랫동안 “반핵․반전”을 외쳐왔다. 그런데 북한의 핵문제가 불거지고 이라크 파병문제가 제기되자 “반핵” 구호는 슬그머니 빠졌다. 이러한 태도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과거 해방후 좌익들이 처음에는 우익의 ‘반탁’에 가담했다가 하루아침에 ‘찬탁’으로 돌아선 사례를 상기시킬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반핵․반전” 그 자체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기 보다는 미국과 이라크전 파병을 반대하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반전”만을 부각시키고 있을 뿐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Ⅵ. 보수주의자들의 ‘왕년 콤플렉스’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의 절망감과 불만이 대단하다. 정치공동체에 대하여 보수주의자들이 토로하는 불만은 오늘날 경제영역에서 활동하는 50, 60세대가 갖는 불만과 유사하다. 기성세대들은 지금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라는 코드로 직장과 생산영역에서 내몰리고 있다. 이 ‘사오정’이나 ‘오륙도’의 현상에 직면하면서 기성직장인들은 “회사에 들어와 밤샘 작업해가며 열심히 일해 이만큼 키워놓았더니 이제는 필요 없으니 나가라”고 한다며 배신감을 토로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보수주의자들은 정치적 의미의 ‘삼팔선 신드롬’과 ‘사오정 신드롬’에 고통받고있다. 좌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세우고 6․25때 나라를 위해 피흘려 싸웠고 월남까지 가서 싸우고 중동의 열사도 마다하지 않고 산업화를 일으켜 ‘한강의 기적’을 성취하는 데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큰데, 이제 건설현장에서 삽하나 들어본 적 없는 민주화세력에 의해 ‘기득권세력’ 혹은 ‘수구세력’이라고 매도당하니 허탈감마져 떨칠 수 없다. 현재 보수주의자들은 국가공동체에 대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감탄고토(甘呑苦吐)’ 준칙의 매정함을 체감하고 있다. 과거에 열심히 피땀 흘려 일해 국가를 이 정도 키워놓았더니 이제 보상과 존경은커녕, 감옥에 가본 적이 없다고 하여 수구세력으로 몰리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보수세력에게 억울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다. 과거의 실적과 명예에 취한 나머지 ‘자기계발’ ‘자기혁신’ 및 ‘자기초월’ 노력을 등한시했던 것이 화근이다. 뒤늦게 ‘감탄고토(甘呑苦吐)’라고 한탄만 하지말고 일찍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하는 보수가 되었어야 했는데, 그 동안 이루어 놓은 것에 대해서 너무 자만했고 그러다 보니 기득권의 범주에 매몰되어 존경받지 못하는 보수가 되었다. 또한 자신들이 이루어 놓은 질서체계나 가치체계가 개선이나 개혁의 노력없이도 저절로 굴러갈 것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한 것도 잘못이다. 사실 80년대의 시대상황이 그러한 태도를 부추긴 측면이 있다. 동구와 소련이 망하고 했으니 저절로 한반도에도 자유민주주의적 통일이 성취될 것이라고 낙관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는 보수주의자들의 희망사항대로 되지는 않았다. 북한은 변하기보다 핵무기를 개발하며 ‘우리식 사회주의’를 고수하겠다고 나왔다. 또한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남한의 진보주의자들, 디지털 감성세대, 감성적 포퓰리즘의 도전 앞에서 정치의 주도권을 내주고 갑자기 ‘풀죽은 보수’로 전락했다. 자기혁신을 하지 못해 ‘정신적 앙시엔 레짐’, 혹은 ‘이념적 구세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공동체에 심각한 짐이 되고 있는 국가적 악과 불행에 대해 구보수주의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면 세 가지다. 첫 번째는 권위주의다. 보수주의자들은 진보주의자들과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질서’와 ‘권위’를 ‘권위주의’와 동일시했다. 질서와 권위는 공동체에 필요한 주요 가치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분별력없이 모든 영역에서 자발성과 자율의 아름다움을 무시하고 위로부터의 명령과 지시에 의한 권위로 일관할 때 권위주의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녀에 대한 부모의 권위는 필요하지만, 가족이 외식하러 나갈 때 외식장소에 대해서까지 부모가 ‘권위’로 밀어 부친다면 ‘권위주의’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억압적 보수주의 정부는 모든 걸 ‘권위’로 밀어부쳤다. 사상문제, 삶의 스타일문제, 부의 배분 문제 등 모든 영역에서 일사분란하고 질서정연한 공동체를 세우기를 원한 것이다.
하지만 하이에크(F. A. Hayek 1997)의 통찰을 원용한다면 질서에는 ‘인위적인 질서(artificial order)’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질서(spontaneous order)’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 흠이다. 구 모델의 보수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인위적인 질서’ 즉 ‘조직(organization)’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약수터 앞에서 줄이란 경찰이 없어도 만들어진다. 사람들 스스로 줄을 서는 것이 편리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금모으기 운동, 월드컵 응원, 구세군 남비, 자원봉사활동, 불우이웃돕기, 장기기증, 헌혈 등과 같은 수많은 유형의 자발적인 행위들도 공동체질서 형성에 중요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위적 질서보다 훨씬 가치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경시하고 ‘인위적 질서’만을 강조하다보니 자기결정, 자율, 자유방임보다는 지시와 강압, 상명하복, 감시등의 개념과 매커니즘으로 어우러진 권위주의적 질서가 공동체의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가 되고 말았다. 그 권위주의는 정치적 권위주의, 관료적 권위주의, 가정권위주의, 기업권위주의로 나타났다. 물론 권위주의가 공동체에 필요한 질서유지에 단기적으로 효과적인 측면도 있으나, 그 위압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권태감과 피로감을 누적시키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심각하고 엄숙한 것, 육중한 것과 동일시되는 권위주의 질서에 대해 감성적 신세대들은 기겁을 하고 “껍데기는 가라” 하며 외치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자발성과 창의성, 자기주장을 억압하는 ‘권위주의’를 당연시함으로써 ‘권위’의 개념을 왜곡하고 기성 가치들에 대한 염증을 부채질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두 번째로 3류정치의 원흉인 부정부패를 오랫동안 하나의 ‘필요악’, 혹은 자연스러운 ‘관행’으로 치부해 온 것이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의 문제이다. 부정부패를 행하거나 적어도 그 행위를 눈감아줄 때 그것이 그 자체로(ipso facto) 악으로서 결국은 불특정다수를 포함하여 남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불의’이며 동시에 종국적으로는 국가경쟁력을 앗아가는 ‘비효율’임을 깨닫지 못했다. 뇌물, 보험료, 촌지, 정치자금, 부조, 찬조금 등, 각종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검은 돈’이나 부정부패의 관행을 기성질서의 당연한 한 축으로 치부했을 뿐, 척결되어야 할 ‘적극적 악’으로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또한 이들 불의한 행위들은 발각되면 수치스러운 일이긴 하나, 발각되지않는 이상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이것은 『국화와 칼』에서 나오는 베네딕트(R. Benedict 1999)의 통찰을 빌릴 필요도 없이 한국의 지도층에 있었던 보수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서구에서 유행해온 ‘죄책감의 문화(culture of guilt)’와는 다른 ‘수치의 문화(culture of shame)’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 결과 기성의 권위는 부패한 권위의 상징이 되고 도덕적 정당성을 상실한 ‘불모의 권위’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에게는 관용의 정신이 부족했다. 자신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개진되는 의견과 가치관에 대해서 너무나 쉽게 이단시하고 매도했다. ‘동이불화(同而不和)’만을 주장했을 뿐,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준칙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사회의 규범적 특징이라면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끼리 평화스럽게 살수 있다는 점을 보장함으로써 ‘악마의 대변자(devil's advocate)’역을 하는 의견도 수용할 만큼의 포용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사회주의’나 ‘사민주의’라는 말만 들어도 펄쩍 뛰었다. 이러한 태도는 6․25의 참상과 그 후에도 끊임없이 지속되어온 북한의 공격적 도발행위를 체험하고, 월남패망을 목격한 보수주의자들에게 자연스러운 자기방어메커니즘의 발산이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준칙을 상기시킬 만큼 과민 반응이었던 만큼, 보수주의자와는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진보주의자들에게는 너무나 불공정하고 가혹한 처사였다.
Ⅶ. ‘개혁적 신보수’의 정체성 신보수주의자의 핵심적 가치인 ‘보수(保守)’는 보존해야 할 것이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보수(補修)해야할 것’이 있다는 점을 당위적 전제로 삼고있다. ‘신보수주의’에서 ‘보존(保存)’과 ‘보수(補修)’를 뺀다면 “머리털을 깎인 삼손”처럼 무력해진다. 소중한 가치를 보존해야한다는 뜻을 담고있는 ‘보수’는 언제부터인가 ‘수구(守舊)’와 동일시돼 오래된 것에 대한 거부감을 유발시켰다. 반대로 좌파적 성향은 ‘진보(進步)’라는 말로 표현됨으로써 좋은 감정의 영역을 선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계에서 북한을 제외하고 지금은 사라진 ‘국가사회주의’ 사회를 보고 ‘진보’라고 말한다면, 그보다 더 큰 부조리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퇴행적 진보’나 ‘수구적 진보’, 즉 ‘퇴보’라고 말해야 온당한 것이 아닐까. 일제시대에 조선인을 뜻하는 ‘조센진’도 사실은 중립적 개념이었지만, 일본 사람들이 비하의 의미로 썼기 때문에 나쁜 감정의 말이 되었다. 또 우리의 국화인 ‘무궁화’도 일제는 학생들에게 학교 화장실 근처에 심도록 함으로써 천한 꽃이라는 나쁜 감정을 유발시키고자 하였다. 우리의 전통적 식단인 ‘된장’도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말인데, 도박장에서는 천 원을 걸고 도박하는 ‘통작은’ 사람을 냉소적으로 지칭하는 비어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비하의 의미가 된 ‘보수(保守)’의 개념을 ‘보수‘(補修)’를 통하여 복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에게 보존해야 할 것이 있는가. 구 진보주의자들은 우리에게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별로 없다고 단언한다. 국가공동체가 모순덩어리로 가득찼고 ‘반칙사회’의 전형이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물론 모순과 반칙으로 가득찼다면, 유기할지언정, 보존할만한 전통은 없을 것이다. 이점은 기존의 공동체가 보수(補修)해야할 것에 대하여 비교적 무관심했던 구 보수주의자들에 대한 중요한 비판이며 반성의 소재이기도 하다. 본 논의에서도 이 비판에 대하여 전적으로 부정할 의도는 없다. 그러나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국가적 모순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태생적으로(ab ovo)’ 우리의 운명은 모순이었다. 미혼모에서 태어난 아이의 운명이 ‘축복’보다는 ‘저주’로 규정될 정도로 모순이듯이,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가 힘이 없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서 빼앗긴 것은 모순이었고 또한 해방후 미․소가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하여 남북을 양분한 것도 모순이었다. 또한 한민족인데도 불구하고 북한이 남쪽에 대하여 총부리를 들이대 동족상잔의 비극을 유발한 것이 모순이며, 그 결과 파괴와 절대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 또한 모순이었다. 이 ‘중첩적 모순’ 속에서 비약을 하는데 또 다른 모순과 반칙이 없을 수 없었다. 전쟁의 참화를 겪은 분단국의 상황에서 생존과 발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무리가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 개인도 가난한 삶에서 여러 대에 걸쳐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당대에 부자가 되려면 다른 사람들에게 인색한 깍쟁이가 되고 밥도 수없이 굶는 고통을 거듭하듯이 많은 무리가 따르는 법이다. 빈털털이였던 우리공동체도 국가수립과 압축성장을 하는 과정에서 비슷한 운명의 길을 피할 수 없었다. 단정수립, 정치적 권위주의, 정경유착 등은 이러한 의미에서 무리수였다. 하지만 ‘적극적 선’은 아니지만 ‘필요악’처럼 ‘어쩔 수 없는 모순“ 혹은 ”이해할 수 있는 반칙’이라고 할 수는 없을까. 요즈음 범죄자들이 자신들의 범죄에 대하여 카드빚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카드에 대하여 스스럼없이 비난하는 것처럼, 진보주의자들도 반공주의로부터 모든 악의 근원을 찾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하지도 않은 냉전체제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반공(反共)덕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를 반대한다는 것이 도덕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다. 동구와 소련의 경험은 이 반대의 도덕적 정당성을 보여주었다. 다만 반공을 국교처럼 공권력에 의하여 사람들에게 강요한 것이 잘못일 뿐이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십자군전쟁을 일으켜 이슬람사람들을 학살한 것이 잘못일 뿐, 그렇다고 기독교 자체를 나쁜 것으로 단정지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또한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특혜’보다는 ‘짐’으로 느끼기 시작한 진보주의자들이 많아졌지만, 그 동안 한국의 안보가 유지된 것을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빼어놓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북한에 대한 포용정책도 사실은 우리에게 힘과 여유가 있고 또 북한자체가 우리의 선의를 받아들이겠다는 의도가 있는 한에서 유효할 뿐, 북한이 UN동시가입을 반대할 때처럼 또 남한과의 대화를 거부한다면 실효성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나 중국이 한국안보의 수호천사가 될 수 있겠는가. 공동체주의자인 샌델(M. Sandel 1982)의 ‘구성적 공동체(constitutive community)’나 ‘연고적 자아(encumbered self)’의 개념이 시사해주는 것처럼, 공동체의 과거는 바로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요소이다. 어른이 되어 중․고교 졸업앨범을 보면서 학창시절을 그리워하는 것도 바로 그 학창시절이 개인에게 하나의 정체성을 형성한 요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동체의 과거 정당성자체를 부정하면 우리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셈이다. 그것은 결국 국가정체성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왜 우리가 일본의 독도망언을 규탄하고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시도에 대하여 항의하는가. 다케시마가 아닌 독도, 과거 고구려의 영화, 이들이 우리에게 국가정체성의 일부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준칙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물론 모든 과거가 보존해야 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정말 일제강점과 같은 과거는 우리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치욕의 과거다. 그래도 “잊지는 말자”는 준칙이 의미가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보존해야 할 과거는 무엇일까. 우리 공동체에서 ‘시민적 기억’ 혹은 집단적 ‘아남네시스(anamnesis)’의 대상이 되어야 할 추억거리는 무엇일까. 첫째로 대한민국 건국과 수호의 역사라고 생각된다. 대한민국이 단정의 형태라도 건국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또한 6․25 당시 우리 스스로를 지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북한에 의해서 통일은 되었겠지만, 우리의 삶의 질은 노예생활과 비슷하게 되지 않았을까. 두 번째로 집단으로 기억해야할 과거는 한미동맹이다. 한미동맹은 우리의 자주와 주권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역할을 해왔다. 한미동맹이 없었으면 우리의 산업화가 어떻게 가능하고 민주화가 가능했을까. 안보동맹으로 한국의 안보가 보장되는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에 전념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세 번째로 4․19나 5․18과 같은 시민적 저항과 불복종행위도 보존해야할 전통이다. 독재와 억압적 권위주의 등, ‘참을 수 없는 불의’에 대해서 항거함으로써 우리 자유민주주의 공동체의 품위를 최소한으로 보장할 수 있는 한계가 무엇인가를 정해준 것이다. 아무리 절대권력이라도 이러한 한계선을 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대규모의 집단적 불복종운동이 보여준 것이다. 네 번째로 산업화의 열망도 ‘시민적 기억’의 대상이다. 60-70년대의 산업화는 한국을 중진국의 대열에 올려놓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젊음을 국내의 열악한 일터와 외국의 공사장에서 불살랐고 이 열망은 압축적인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들은 물론 자신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었으나,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처럼 엄청난 국가의 부를 창출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결과를 산출했다.
Ⅷ. 공동체의 무엇을 ‘보수’해야 할 것인가 한국 공동체의 질을 높이기 위해, 또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소속감을 높이기 위해 신보수주의자들이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부정부패 등 당연시되어온 낡고 부조리한 관행과 결별해야 한다. 감성적 신세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판갈이’나 ‘물갈이’가 되어야한다고 역설하는 주장에는 ‘시대의 정신(Zeitgeist)’과 같은 것이 들어있는데, 부정부패 관행 때문이다. 우리 정치공동체의 정상적 구성원이라면 다음과 같은 일련의 의문들을 제기한다. 정치를 하는데 웬 돈이 그렇게 많이 들며, 또 사업을 하는데 사업비용말고 공무원에게 갖다주는 돈은 왜 그렇게 많은가. 왜 대가성 뇌물이나 보험성 뇌물없이 이 사회에서 사업을 할 수 없고 살아갈 수 없는가. 같은 공사를 같은 회사가 해도 국내에서 하기보다 해외에서 하는 것이 더 쉽고 더 튼튼한 공사를 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점들을 잠재우려면 이른바 지도층 인사들은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어야 한다는 공리주의자 밀(J. S. Mill)의 준칙을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치인들이나 공직자나 혹은 기업인들에게 항상 황희 정승처럼 ‘배고픈 소크라테스’로 살아가라고 요구할 의도는 없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는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결코 ‘배부른 돼지’로 자처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런가하면 두 번째로 우리는 ‘무감동의 3류공동체’를 ‘감동의 1류공동체’로 만들어야한다. 모르는 이웃에게 장기이식을 하고 장애인 아이를 입양해야만 ‘감동스러운 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나 기업은 그런 일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 일회성 깜짝쇼가 아닌 자기희생, 헌신, 진정성, 용기, 정직성 등으로 국정에 임하는 정치인, 인기가 떨어지고 재선이 어렵더라도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나라를 위해 필마단기로 나서는 정치인, 또 잘못했으면 사법당국에 의해 죄값을 받기 전에 바이블에 나오는 ‘돌아온 탕아’처럼 국민앞에 잘못했다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정치인이 감동을 준다. 유권자들로부터 인기가 오르지 않는다고 눈물흘리고 혹은 선거에서 졌다고 눈물을 흘린 정치인은 있을지언정, 기업으로부터 ‘검은 돈’을 받은 것이 잘못됐다고 ‘참회의 눈물’을 흘린 정치인이 있는가. ‘참회의 눈물’을 흘린 정치인들이 있었다면 ‘감동의 정치’가 뿌리를 내렸을 텐데 아쉽기 짝이 없다. 또한 부실한 경영으로 국민의 혈세인 공적자금을 쓰게 만든 기업인이 국민들 앞에 사죄의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가. 그런 이유로 눈물을 흘렸다면, 감동의 기업이 생겼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그런 사례가 없었다. 불의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거짓말부터 하고 나중에 유죄판결을 받으면, 다른 사람들도 다 부정한 일을 저질렀는데, 자신만이 정치적 보복이나 표적사정의 대상이 되었다고 강변한다. 그 결과 우리공동체는 감동이 없는 ‘황량한 공동체’가 되고 말았다. 세 번째로 기성의 지도층인사나 공직자들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이 너무나 부족하다. 어떤 사회든 직책과 사회적 위치에 따른 특권이 있다. 귀족이면 평민에 대해서 특권이 있는 법이고 민주사회에서 고위공직자는 일반 시민들에 대해서 명령과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이것은 분명 특권이다. 특권에는 중차대한 결정권이 포함되어있다. 하지만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더 많이 누리기보다 더 많이 베풀어야 한다. 특권을 가졌다는 것은 리더십을 가진 것임을 뜻하는데, 이 리더십은 명령과 지시를 내리고 복종을 요구하는 ‘군림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밑의 사람들의 발을 씻기는 이른바 ‘봉사하는 리더십’이어야 한다. ‘봉사하는 리더십’은 반드시 기부금을 많이 내고 자선을 많이 베푸는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들이 화랑 관창을 아들로 둔 관흠장군이나 전쟁에 패한 아들을 끝까지 용서치 않은 김유신 장군처럼 ‘멸사봉공(滅私奉公)’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선공후사(先公後私)’는 할 수 있어야한다. 즉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의 주변사람들과 관련하여 병역이나 납세 등 적어도 ‘국민의 의무’에 대해서 솔선수범하고 의무불이행에 대한 의혹조차 없어야 한다. 그러나 국회의원이나 공직자들의 병역의무 이행율이 평균보다 낮다는 사실을 접하거나 혹은 평생 세금한푼 내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이른바 ‘배팅’을 잘했다는 이유로 청와대에 비서관으로 어느 날 의기양양하게 입성하는 걸 보면서 이들은 ‘우선승차자’인 ‘퍼스트 라이더’(first rider)가 아니라 ‘무임승차자’인 ‘프리라이더(free rider)’라는 의혹을 떨칠 수 없다. 요즈음 우리는 새로운 의미의 봉사의 개념에 접하고 있는데, 자원봉사가 그것이다. 병원이나 자선단체에도 자원봉사자들이 있지만, 시민단체에도 자원봉사자들이 있다. 그렇다면 공직을 자원봉사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은 어떨까. 공직을 ‘가문의 영광’이나 ‘출세가도’, 혹은 ‘지대추구행위’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이다. 그래서 고위공직을 지낸 사람이나 대통령 혹은 그 측근들이 사법처리 대상이 되고 ‘검은 돈’이 천문학적 숫자에 달하는 걸 알게되면, 법이 공평하고 법집행이 엄정해졌다는 긍정적 평가보다는 ‘권불오년(權不五年)’이라는 냉소주의나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겼다”는 허탈감을 떨칠 수 없다. 정책에 관한 쟁점에서 진보성향이나 보수성향을 따질 수는 있겠지만, 부정부패나 비리‘게이트’에 대한 공분(公憤)에는 보수와 진보가 따로 있을 수 없다. Ⅸ. ‘개혁적 신보수’가 지향하는 ‘선진화’의 가치들 우리에겐 지향해야 할 가치가 있다. 국가공동체가 항해하는 배라면 항구에 도달한다는 목적의식없이 무작정 항해만 계속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혹은 항구의 개념이 불확실하고 모호하다면, 혹은 합의가 되어 있지 못한 상황이라면, 적어도 대한민국호(號)가 왼쪽으로 가는지 오른쪽으로 가는지를 알려주는 북극성의 역할을 하는 가치정도는 확실해야 할 것이다. 한 정치공동체라는 배가 항해해야 할 길을 알려주고 그 방향을 비추어주는 향도성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선진화’의 비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공동체는 ‘원칙의 공동체(community of principles)’이지 편의상 우연히 만들어진 ‘임기응변의 공동체(community of conventions)’는 아니다. 지금 유감스럽게도 ‘원칙의 공동체’를 지탱해온 그 가치들이 희미해지거나 무너지고 있는 실정이다. 한때 산업화의 가치가 향도성(嚮導星)이었지만, 지금은 빛이 많이 바래졌다. 그렇다면 민주화가 향도적 가치가 될 수 있을까. 민주화가 ‘자기 몫 주장하기’와 ‘중구난방(衆口難防)’으로 통합이나 화합보다 분열과 갈등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역설이라면 역설이다. 본 논의에서는 ‘산업화’나 ‘민주화’를 넘어서서 ‘선진화’를 미래의 비전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산업화’나 ‘민주화’는 ‘선진화’보다는 ‘중진화’의 가치였다. ‘선진화’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아우르면서도 그들을 한 단계 뛰어넘는 가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있었던 억압과 민주화과정에서 발생하는 집단과 개인들 사이의 갈등을 넘어서서 자유․자율․다양성 속에서 수월성(excellence)을 도모하는 것이 ‘선진화’의 개념이다. 이 ‘선진화’를 추구하는데 필수적인 것이 있다. ‘선진화’의 준거가 되는 일련의 ‘오르도독스’를 세우는 일이다. ‘오르도독스’를 바로 세울 때 사회의 ‘원심력’이 ‘구심력’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정치공동체에는 과거에는 생각조차 못했던 과잉 감성적 사고가 팽배하는 등, ‘오르도독스’가 붕괴하고 있다는 조짐이 현저하다. 대통령이 ‘약자’고 언론이 ‘강자’라는 발언, 북한이 아니라 미국이 주적 국가라는 주장, 동맹이 부담스러운 자주국가론, 6․25가 실패한 통일시도라는 주장 등은 과거의 ‘오르도독스’가 무너지고 적어도 새로운 ‘오르도독스’가 출현하지 못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다. 예로부터 ‘오르도독스’에 대한 집착이 유달리 강한 것이 우리사회였다. 요즈음도 길을 걷다가 어느 동네에라도 들어가면 “원조…음식점” “정통…음식점” 이라는 간판이 쉽게 눈에 띈다. 정통은 다른 잡것과 섞이지 않고 순수하면서도 기본적인 가치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뼈대있는 가문’을 좋아했고 또한 족보를 챙긴 것이 아닐까. 한 가문에도 가훈(家訓)이 있고 정통이 있다면, 한 정치 공동체에 바뀌어서는 안될 정통이나 국시(國是)와 같은 것들이 있어야 당연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진화를 위해 세우거나 혹은 새롭게 해야할 정통적 이념이나 가치는 어떤 것일까. 첫 번째로 ‘방어적 자유민주주의’야말로 선진화를 위해 지향해야 할 우선적 가치이다. 물론 자유민주주의에서 관용은 주요덕목이다. 이 점에 착안하여 다원적 민주주의 사회를 꽃피우려면 모든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보주의자들이 있다. 모든 걸 ‘관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관용한다면, ‘자유의 역설(paradox of freedom)’처럼 ‘관용의 역설(paradox of tolerance)’에 직면한다는 점이 문제이다. 모든 사람이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면, 누구도 자유를 누릴 수 없게 되는 상황이 ‘자유의 역설’이라면, 관용을 반대하는 사람의 의견까지도 관용하면 그런 사람들이 정부의 주도세력이 되었을 때 불관용의 사회가 된다는 ‘관용의 역설’에 우리는 직면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모든 걸 허용하는 ‘무제한적인 다원주의’는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서구사회에서 나타난 네오․나치나 바이마르공화국의 비극이야말로 무제한적인 다원주의의 ‘병폐’를 말하는 것이지, 무제한적 다원주의의 ‘강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공동체는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적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의견까지 존중하는 나머지 자신의 무덤을 판 바이마르 공화국의 전철을 밟을 수는 없는 일이며 자기 방어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두 번째로 선진화를 위한 핵심적 가치로는 ‘합리적 시장주의’를 들 수 있다. 현 시점에서 시장경제 이외에는 대안이 없기 때문에 진보와 보수주의자가운데 반시장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시장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정부가 결정권을 행사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이것은 ‘시장의 실패’를 빌미로 정부의 과잉규제까지 정당화하려는 사고방식이다. 즉 말로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존중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우화에서 나오는 ‘보이지 않는 옷’처럼 간주하는 발상이다. 임금님의 옷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옷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시장의 손’이 보이지 않는 것도 실제로 손이 없기 때문이라고 암암리에 상정하면서 국가의 ‘보이는 팔’을 더욱 신봉하는 사람은 결국 사이비 시장주의자인 셈이다. 특히 ‘합리적 시장주의자’라면 누군가 부자이기 때문에 내가 궁핍해지고, 누군가 성공했기 때문에 내가 실패하며 누군가 직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실업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식의 ‘제로섬(zero-sum) 사고’를 거부한다. 밤하늘의 별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만 빛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도 빛나는 것처럼, 누군가 부자라도 나 역시 부자가 될 수 있으며, 누군가 성공했더라도 나 역시 성공할 수 있고 누군가 직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 역시 취업할 수 있다는 ‘포시티브 섬(positive sum)’의 발상을 한다. 결국 시장이든 국가든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준칙을 금과옥조로 삼을 때 비로소 합리적 시장주의가 꽃필 수 있다. 세 번째로 ‘평범성(mediocrity)’이 아닌 ‘수월성(excellence)’의 추구야말로 선진화를 위해 요구되는 가치이다. ‘선진화’ 사회는 ‘로컬 스탠다드’보다 ‘글로벌 스탠다드’가 통용되고 ‘아마추어리즘’보다 ‘프로페셔낼리즘’이 존중되며 경륜과 중량감이 미숙과 가벼움을 선도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수월성의 가치가 개혁에 대하여 지니는 함의는 명백하다. 수월성을 위한 개혁은 단순한 ‘평준화’나 ‘중진화’가 아니라 ‘선진화’를 목표로 하는 개혁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단순한 평준화는 하향적 평준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라서 능력이 더 많은 사람이 능력이 적은 사람보다, 봉사정신이 더 투철한 사람이 덜 투철한 사람보다, 혹은 더 많은 공익정신을 가진 사람이 더 적은 공익정신을 가진 사람보다, 정치나 사회의 주요 직책을 맡게되는 제도적 개혁이 수월성을 위한 개혁이다. ‘개혁코드’라는 애매모호한 기준을 만들어 적대적 물갈이의 잣대로 쓴다든지, 혹은 아마추어냐 프로냐를 가리지 않고 감성적 이미지만으로 일관한다든지 혹은 책임 있는 전문가들보다 일반대중들에게 호소하는 포퓰리즘에 의존하는 개혁은 수월성을 위한 개혁은 아니다. 개혁에 대한 열정은 인정할 수 있으나, 개혁의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는 선진화를 위한 중요한 가치라면 ‘합리적 개혁주의’이다. 개혁이 21세기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화두며 또한 절박한 화두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문제는 바꾸는 것이 필요하고 반드시 바꾸어야 할 부분이 있지만, 개혁의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려면 ‘점진적인 개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국가공동체란 플라톤 시대부터 항해하는 배로 비유해왔다. 그리스어의 ‘kuvernetes’에서 비롯된 라틴어 ‘gubernaculum’은 원래 ‘키’를 의미한다. 배가 항해할 때 ‘키’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우리는 지금 ‘키’의 개념이 영어 ‘government’로 표시되는 정부의 원형이 되었음을 알고 있다. 배가 항해하다 보면 문제가 없을 수 없다. 기관에 고장이 나기도 하고 부품도 갈아주어야 하고 또한 물이 새면 노후된 기관을 교체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항해하고 있는 배를 고칠 때는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를 고치는 것처럼 배를 통째로 완전히 뒤집어 놓고 고칠 수 없다. 항해하고 있는 배라는 사실을 고려하여 점진적으로 손을 써야 하지 않는가. 바로 이것이 ‘점진적인 사회공학(piecemeal social engineering)’의 방식이다. 그렇지 않고 문제가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바꾸겠다고 하면 배는 침몰할 수밖에 없다. 국가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 같이 역동성과 생명력을 갖고 있는 것이 국가공동체다. 이 점과 관련하여 ‘대규모의 사회공학적 방식(grand scale social engineering)’을 함의하는 ‘판갈이’나 ‘물갈이 방식’에 찬성할 수는 없고 존중할만한 전통과 과거를 감안하면서 점진적으로 개선하는 ‘이어달리기’의 방식을 선호한다. 대규모 ‘판갈이’에서는 개혁의 결과가 개혁의 의도와 상치되는 ‘개혁의 역설’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개혁의 목표가 공감대를 이루어야 할 뿐 아니라 개혁의 방식이 ‘판갈이’보다 ‘이어달리기’의 형태 일 때 신보수주의자들은 이를 ‘합리적 개혁’과 ‘합리적 개혁주의’라고 말한다. 여섯 번째로 ‘닫힌 민족주의’나 ‘감성적 민족주의’보다는 ‘열린 민족주의’나 ‘이성적 민족주의’야말로 우리 공동체가 지향하는 선진화의 가치가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민족주의가 없었다면 지금까지 국가공동체로서 존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반도가 중국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동화되지 않은 것도 바로 강렬한 민족주의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민족주의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닫힌 민족주의’이고 또 하나는 ‘열린 민족주의’이다. 혹은 ‘감성적 민족주의’이고 또 하나는 ‘이성적 민족주의’이다. 백의민족, 단일민족은 민족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더할 나위없이 좋으나, 그것에 내재되어 있는 자폐성, 배타성이 문제이다. 이 자폐성과 배타성은 유태민족의 ‘선민의식’과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 한국의 경우 이러한 배타적 민족주의는 쇄국정치로 나타나기도 했다. 요즈음 우리의 폐쇄적 민족주의는 특히 동남아 노동자들에 대한 거친 태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선진화는 당연히 자주와 자결, 자치를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우리가 처해있는 지정학적인 위치는 ‘닫힌 민족주의’나 ‘감성적 민족주의’로는 선진화의 활로가 열리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자주와 동맹을 ‘모순’보다는 ‘보완’의 관계로 접근하는 ‘열린 민족주의’나 ‘이성적 민족주의’가 미래의 이념적 대안이 되어야 한다. Ⅹ. 결어 자유민주주의 공동체에서 정치․사회․경제 현안문제에 대한 목소리는 다양할 수밖에 없고 ‘다양한 소수파’의 존재도 존중되어야한다. 다원적 민주공동체의 건강성이나 질적 성숙을 드러내주는 표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원적 가치나 다양성, 혹은 ‘좋은 삶(good life)’의 복합성이 존중된다고 하여 국가공동체에서 구성원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메인스트림’이 필요없다거나 ‘오르도독스’가 무가치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공동체는 ‘우연의 공동체’가 아닌 ‘원칙의 공동체’이다. 대한민국정부수립을 위해 자유민주주의 가치가 함유된 헌법을 만들고 많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부족하나마 그 헌법정신에 기초해서 국가를 가꾸어 왔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가치들이 ‘오르도독스’가 될 수 없다면, 정통이 갖는 배타성과 선별성은 성급하게 흑과 백을 구분하고 정통과 이단을 임의적으로 구분하는 억압의 잣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치공동체가 망망대해에서 항해를 하는 것이라면 적어도 항구나 방향에 대해서 단 하나의 비전은 아니라 하더라도 일정한 범주의 비전 혹은 하나의 정통적 가치는 아니라도 일정한 범주나 범위의 정통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다원적 소수’의 존재로 인하여 단 하나의 항구, 단 하나의 방향은 말할 수 없겠지만,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이나 북극성과 같은 것들은 요구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야말로 본 논의를 통하여 ‘무제한적 다원주의’를 거부하고 ‘제한적 다원주의’나 ‘합리적 다원주의’를 제창한 이유이다. 이점에서 ‘개혁적 신보수주의’가 내세우는 ‘선진화’의 비전이야말로 정통적 가치와 이념의 정립에 유력한 후보가 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선진화’는 ‘산업화’나 ‘민주화’를 아우르면서도 그들을 넘어가는 가치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산업화’나 ‘민주화’는 ‘중진화’의 가치였지, ‘선진화’의 가치는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진보주의는 우리공동체에서 선진화를 위한 ‘메인스트림’이 되기에는 너무나 많은 콤플렉스 신드롬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존중할만한 전통을 가지고 있음을 거부하는 ‘마이너리티 콤플렉스’, ‘약자 콤플렉스’, ‘색깔 콤플렉스’ ‘자주 콤플렉스’ 등은 우리공동체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건강한 비판의 수준을 넘어 ‘정치적 매저키즘’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과잉부정이며 ‘오버’하는 것이다. 진보주의자들은 ‘민주화의 추억’과 ‘시민불복종의 추억’은 소중히 할지언정, ‘건국의 추억’이나 ‘한미동맹의 추억’ 혹은 ‘산업화의 추억’은 사정없이 평가절하한다. 따라서 이들은 선거를 통해서 승자가 되어도 이 ‘다층적 콤플렉스’에서 헤어날줄 모른다.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에 올라도 스스로 눈물을 흘릴지언정, 소리없이 눈물을 흘린다든지 혹은 남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하는 위치에 올랐다는 중차대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마이너리티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감성과잉의 진보주의가 이성결핍의 진보주의로 이어진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있는 진보, 즉 ‘합리적 진보’도 있다. 개혁적 신보수주의자는 구태의 진보주의를 껴안을 수는 없지만 ‘합리적 진보주의자’와는 더불어 공존하고 선의의 경쟁을 벌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가하면 ‘개혁적 신보수’가 내세우는 선진화는 보수주의 구 모델과 일정한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구보수주의자들은 보존할만한 좋은 전통을 피와 땀을 흘리며 세웠고 또한 이 나라를 품위있고 경쟁력있는 코리아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으면서도 자기 스스로를 가꾸고 ‘일신우일신’하며 변신할 용기와 혜안을 갖지 못했다. 즉 끊임없이 보수(補修)하고 개혁할 부지런함과 대범함을 갖추지 못했던 까닭에 구보수는 권위주의와 부정부패 혹은 기득권과 동일시되는 치욕을 겪었다. 오랫동안 과거의 성취에 취해 있었고 기득권에 안주했으며 너무나도 낡고 부조리한 관행의 사악함을 보지 못하는 맹인으로 남아 있었다. 낡고 부패한 관행의 시대가 끝났다는 신호가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리나 연고주의 및 주군(主君)에 대한 가신의 맹목적 충성이 아닌 정직성과 봉사성, 투명성, 청렴성, 경쟁력 등이 새로운 정치적 덕목이 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삼팔선’ ‘사오정’같은 구호가 사방에 요란하게 나붙고 ‘판갈이론’이 대세가 될 때까지 신선놀음 아니면 이전투구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보수(補修)하지 못한 보수(保守)는 ‘앙시안 레짐’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개혁적 신보수’는 선진화를 위한 개혁의 당위성과 절박성을 인정하면서도 진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판 갈아엎기’보다는 릴레이 경주처럼 ‘바톤터치’나 ‘이어달리기’를 원한다. ‘건국의 추억’과 ‘동맹의 추억’, ‘산업화의 추억’을 소중한 것으로 간직하면서도 ‘민주화의 추억’과 ‘불복종행위’의 추억도 함께 기리고자 한다. 민족주의의 열망을 간직하면서도 ‘닫힌 민족주의’가 아닌 ‘열린 민족주의’를 선호하고 공동체 수월성을 위한 개혁과 부정부패척결을 위한 개혁을 소망한다. 이런 점에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야말로 선진화를 지향하는 개혁적 신보수의 핵심적 가치이며 화두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보수(保守)를 보수(補修)할 용의를 갖고 또 한편으로 ‘합리적 진보’와 공존하고 선의의 경쟁을 할 용의를 가진 ‘개혁적 신보수’의 선진화비전이야말로 ‘아노미’와 ‘아나키’로 점철된 우리공동체가 다시 한번 일어서는데 동력과 활력을 제공할 수 있는 이념적 단초가 될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첫댓글 넘길어 차한잔 마시고 천천히 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