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양 최초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
서양 최초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와 함께 하는 명상
1. 아테네 학당]의 헤라클레이토스
16세기 초 교황 율리우스 2세(1443-1513)는 당시의 유명한 화가 라파엘로에게 바티칸 궁전의 방을 장식할 그림을 그리도록 명령했습니다. 여러 가지 그림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 ‘아테네 학당(School of Athens)’라는 유명한 그림이 있지요. 이는 교황의 개인 서재인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이라고 하는 방의 벽에 걸려 있습니다. 벽과 천장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된 프레스코 화법은 당시의 주된 주제였던 철학, 법, 신학, 예술을 주제로 한 것들 이었습니다. 이 ‘서명의 방’에 걸린 ‘아테네 학당’은 철학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서 등장인물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아주 흥미 있는 인물과 소재가 등장합니다.
인문주의가 발달했던 르네상스 시대에 철학의 주된 관심과 대상은 그리스의 고전 철학자들이었지요. 물론 그 중에는 단연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들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지만,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여 고대의 그리스 철학자들이 아테네 학당을 배경으로 대거 동원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진리에 대한 이성적 탐구를 하고 있었는데, 라파엘로는 그들의 사상을 특징별로 제스처나 동작을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테네 학당 정문을 배경으로 한 전체 그림 중앙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계단을 향해 걸어 나오면서, 플라톤은 하늘을 향해 자신의 저서 [티마이오스]를 들고 하늘을 향해 손짓하는데 이는 자신의 관념론적 철학 체계를 반영해 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들고 자연과 그 세계를 탐구하는 뜻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계단 앞쪽 우측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 이는 그 유명한 견유학파(犬儒學派)의 디오게네스이며, 좌측 아래쪽에서 종이위에 글을 쓰다가 한 쪽 턱을 고인 채 뭔가 깊은 사색에 빠져 있는 사람이 헤라클레이토스입니다. 화가 라파엘로는 당대의 현인들을 모델로 삼아 이들 철학자들을 묘사했다고 하는데, 플라톤의 얼굴은 레오날도 다빈치의 모습을 그렸다하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미켈란젤로의 초상을 대신 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여러 철학자들의 인물 가운데서, 특별히 헤라클레이토스를 주목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40?-480?)는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인 소아시아의 에베소 출신으로서, 소크라테스 이전의 주요 철학자로서 세계 만물의 근원을 불이라고 하였고, 또 우주의 대립과 조화의 근거로서의 로고스 사상을 전개한 최초의 철학자입니다. 라파엘로가 그린 또 하나의 걸작인 ‘성체논의(Disputation on the Holy Sacrament)’에 보면, 라파엘은 당대의 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 그들의 제자들에게 혹은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말하고 있는 장면으로 묘사하는데, 유독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면서 우주의 질서인 ‘로고스(Logos)’를 발견해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히 시적이라 할 수 있을만한 철학적인 경구로 가득한 그의 산문을 접할 수 있는데, 과연 그는 세계를 내면의 관점에서 우주의 원리를 찾아낸 서양 최초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른바 “말씀(word)”에서 “세계(world)”로 “감각(sense)”에서 “보편적 법칙(universal law)”으로 확대 해석되는 그의 논지를 우리는 천천히 명상적 관점에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견해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우선 우주의 근원적 법칙으로서 ‘로고스’를 언급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동양 정신의 핵심 원리라고 할 수 있는 ‘도(道)’와 유비적인 관점에서 좀 더 새롭게 그의 사상을 이해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 됩니다. 서양에서 최초로 우주 원리로서의 ‘로고스’를 언급한 이가 헤라클레이토스였다면, 동양의 중국에서는 우주 원리와 삶의 도리로서의 ‘도’를 최초로 언급한 이는 노자였습니다. 이 둘은 시대적으로도 아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서 서양 최초의 로고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을 검토하면서 함께 공부하며 명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보길 원합니다.
2.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로고스라는 개념은 헤라클레이토스의 핵심적인 개념일 뿐만 아니라, 서양 철학사에서도 로고스 개념을 둘러싸고 이리저리 수많은 대화를 통해 논의를 전개해 온 핵심 개념이었습니다. 그 수많은 논쟁 가운데는 헤라클리토스와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기원전 515?-445? )라는 두 인물이 첫 번째로 등장하게 됩니다. 파르메니데스는 헤라클레이토스와 동 시대의 인물로서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69/-399) 이전의 철학자들 가운데 '존재론'에 관한 가장 독창적인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소아시아 지방의 에베소 출신인 헤라클레이토스와는 달리, 이탈리아 남부의 이오니아 인들에 의해 건설된 엘레아 출신이었습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출생 년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플라톤의 저서 [파르메니데스]를 통해, 엘레아학파의 창설자로서 '존재와 사유'에 대해 깊이 탐구한 계몽적인 철학자로 평가 되고 있습니다. 그는 이성(理性)만이 진리이며, 생성 변화하는 다수(多數)에 대한 감각적 인식은 오류의 근원이라고 하였지요. 그래서 그는 "눈과 귀"는 믿을 것이 못되는 것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자연에 대하여]라는 약160행의 시를 남겼는데, 내용의 중심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존재하는 것'은 불생불멸의 '빛'과 같은 진리로서의 이성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어둠'과 같은 오류입니다. 그래서 감각은 이 진리로서의 '빛'과 오류로서의 '어둠'을 합성한데서 생긴 것이라 합니다. 이처럼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와 비존재 그리고 존재와 사유를 깊이 통찰함으로써 후대 서양철학의 존재론과 인식론이라는 양대 줄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최초의 철학자 중에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존재란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식으로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 아니라, 생성과 변화의 감각적 인식 저변에 깔려 있는 변함없이 '있는' '있음 그 자체'로서의 존재 자체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존재에 대해 그리스도교에서는 여호와를 존재론적 관점에서 '스스로 있는 자'라고 인격화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서양 최초의 유물론 학파인 밀레토스 학파의 시조인 탈레스(Thales, 기원전 624~기원전545) 이후의 고대 그리스 자연 철학자들은 이러한 현상계 배후에 존재하면서 현상계를 움직이는 근원을 신으로 보지 않고 어떤 그 무엇의 '원리'나 '원소'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탈레스가 우주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원소를 '물'이라고 한데 비해, 헤라클레이토스는 그 원소를 '불'이라고 보았던 것이지요. 이에 비해 피타고라스는 그 원리를 '수(數)'로 보았지만 여타의 모든 존재론에서 파르메니데스는 모든 원리와 원소를 꿰뚫어 보는 '있음'이라는 존재론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플라톤이 쓴 [파르메니데스]라는 대화편에 보면,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은 장중한 서사시의 형식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 하나의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암말들이 나를 싣고 달린다. 그 마음 이를 수 있는 데까지 충분하게./
데려간다. 그들이 나를 많은 것을 말해주는 길로 이끌며 가고 있기에./
신성한 말들이, 그 길은 온 도시들을 따라 아는 자들을 실어 나른다./
그 길로 나는 실려 갔었다. 그 길로 나를 많은 것을 보여주는 말들이 싣고 달리니,/
마차를 끌며. 소녀들은 그 길을 인도 하였다./"(파르메니데스의 조각글 1, 1-5)
두 개의 장음으로 시작된 첫 행에서, 암말로 비유된 안내자에 따라 '나'라고 하는 인식의 주체가 진리를 향하여 구도를 떠나는 여행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2-3행은 마차가 이끄는 대로 (태양신의)소녀들이 (밤의 집을 떠나 빛을 향해)안정적으로 목적지까지 인도합니다. 이처럼 파르메니데스가 추구한 길은 빛의 길로서의 진리의 길이었습니다. 어둠(비존재)의 길에서 빛(존재)으로 나아가는 그 길을 통과하는 데는 정의와 심판인 디케가 지키고 있지만, 호위하는 소녀들은 달콤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설득하여 쐐기 박힌 빗장을 열고 문을 통과하게 됩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하자 여신은 진리를 찾아 용감하게 걸어 온 '나'를 반갑게 맞이해 줍니다. 이와 같이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의 참된 길을 서사시적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는 "'있음'은 '있지 않음은 있을 수 없다.'"라는 아주 중요한 존재론적 명제를 낳게 되지요. 다시 말해서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은 헤라클레이토스와 어떤 대척점을 이루며 이들의 사유가 오늘 우리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파르메니데스는 사물의 다원성을 부정하고 불변하는 진리로서의 일원성을 강조했다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흐른다."라고 했던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의 과정에 있다고 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른바 '불변'과 '변화'라는 관점에서 서로의 주장을 폈던 것입니다. 앞서 본 밀레토스 학파의 탈레스가 물과 같은 근원적 원소를 통해 모든 사물이 다양하게 전변해 간다고 했던 것에 비해, 엘레아학파의 시조로서 유일신 사상을 전개한 크세노파네스의 제자, 파르메니데스는 우주적 일원성에 근거하여 존재, 곧 '있음'의 논리를 전개 했던 것이지요.
우리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에게서 이미 우주론적 일원론과 다원론 그리고 만물의 근원 자에 대한 깊은 사유가 진행 되고 있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원론 사상은 인도의 [우파니샤드]에서 볼 수 있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과 일면 유사한 맥락을 지니고 있음을 보게 되고, 헤라클레이토스는 일부에서 '서양의 붓다'라고 할 만큼 우주적 전변설을 주장했음을 보게 됩니다. 기원전 6세기경의 이들 사상이 중국의 동시대에 살았던 노자와 공자의 사상과는 어떤 비교가 가능할지도 염두에 두면서, 이제 다음에서 헤라클레이토스와 피타고라스의 관계를 먼저 좀 더 고찰해 보겠습니다.
3. 피타고라스와 헤라클레이토스
피타고라스(Pythagoras, 기원전 570경 ~ 497경)는 그리스 에게 해(海)의 사모스 섬 출신으로 만물의 근원을 수(數)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지요. 서양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탈레스의 제자가 될 만큼 비교적 교육을 잘 받을 수 있었던 그는 이집트에서 23년간이나 되는 오랜 유학 생활을 했지만, 페르시아의 이집트 침략으로 포로가 된 그는 또 다시 바빌론으로 이송되어 12년간 그곳에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라는 인류사 초기의 거대한 두 문명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황하문명과 인더스 문명을 제외한 두 개의 문명을 접했으니, 상인으로서의 아버지를 둔 덕분에 당시로서는 큰 행운아였던 것입니다. 그는 56세에 그가 살았던 남부 이탈리아의 크로톤 섬으로 돌아가서 수도원 겸 철학 연구소를 창립하게 되지요. 이른바 피타고라스의 공동체는 윤회 사상을 믿고 흰옷을 입으며 채식을 하면서 온유와 겸손 그리고 침묵을 중시한 종교 공동체이기도 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록에 의하면, “피타고라스학파는 수학에 몰두했고, 수학의 원리야말로 만물의 원리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탈레스로부터 이어지는 밀레토스 학파의 주장처럼 사물의 근원이 물이나 무한자(아낙시만드로스), 또는 공기(아낙시메네스)와 같은 요소가 아니라, 피타고라스는 사물이 수(數)로 구성 되었다고 하는 독특한 주장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는 영혼을 가장 잘 정화시켜 줄 수 있는 것은 수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분히 종교적인 이유로 출발한 그의 수에 대한 관심은 결국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말해 주듯이 수학학파의 창시자가 된 것이지요. 수야말로 ‘정화’와 ‘불멸’이라는 것을 만족 시켜 줄만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 철학에서 말하는 구조주의와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예컨대 레비스트로스가 [구조인류학]에서 밝히듯이 가족집단의 ‘친소(親疎)’관계나 ‘음양(陰陽)’의 대립구조 같은 것이 어찌 보면 수학적 단면의 한 구조로도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피타고라스도 사물의 대립 현상을 짝수나 홀수, 남자와 여자, 정지와 운동, 심지어 선과 악도 수로 판단 할 수 있다는 것이니까요. 대립하는 두 가지 성질이 결합하여 세상은 조화롭게 이루어진다고 본 것입니다. 수는 무한한 질료에 대한 한계를 지어주면서 사물의 ‘형상(form)'을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피타고라스에게서 수학적 사유는 일상의 번잡한 상념에서 해방시키고 영원하고 질서 있는 수의 세계로 안내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른바 해방 곧 해탈에 이르게 하는 하나의 방편일 것입니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욕심을 극복하는 한 방편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학적 사유의 명상법을 통한 해방은 곧 윤회의 굴레에서부터도 해방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신과의 합일을 통해 불멸성을 획득하는 신비스런 피타고라스 교단의 비의(秘儀)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영혼의 정화와 불멸을 얻는 종교적 비의를 전수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피타고라스학파는 음악이라는 훌륭한 도구를 사용했습니다. 음악은 신경 질환의 치유에 아주 유용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공자가 인간 생활의 조화와 질서를 위해 ‘예악(禮樂)’을 중시했던 것과 유사합니다. 음악이 주는 화음의 효과도 중요했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현(弦)의 길이와 음정의 비례 관계를 정수(定數)로 밝힌 것이지요. 따라서 피타고라스학파는 만물을 음악에 비유 할 수 있었고, 육체 또한 하나의 악기로 간주 했는데, 그 속에는 수들이 충만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온 우주는 일정한 음률을 가지고 노래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음계의 속성과 비율이 수적으로 표현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또한 그들은 만물이 생기나기 이전에 이미 수가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수들은 자연 전체 내에서 최초의 사물로 간주되었고, 천체는 하나의 음계이며 하나의 수라고 생각 되었다.” 결국 이러한 생각이 “만물은 수다”라는 결론을 도출해 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사실 따지고 보면 계곡에서 사철 끊임없이 흐르는 물소리나, 나무에 이는 바람 소리에도 일정한 음률이 있는 것이고 보면, 만물의 배경에는 수가 자리한다는 상상력도 무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수를 인간이 추정한 것이지만 말이지요. 그렇다면 피타고라스가 말하는 우주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수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로고스와 어떤 연관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요? 피타고라스가 코스모스(cosmos)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면서, 만물은 수의 '관계'에 따라 질서 있는 '코스모스(우주)'를 만든다고 했던 것에 주목하면,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우주의 변화와 운동을 지배하는 법칙으로서의 '로고스(logos)'개념과 '수적질서'로서의 코스모스 개념은 흥미로운 비교가 가능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연의 궁극적 요소 보다는 변화의 문제에 주목하면서, 그 변화 속에서도 어떤 근본적인 통일성을 찾았으니, 그 변화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것을 '불'이라고 보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불의 교환이며, 불은 만물의 교환이다."라고 했습니다. 만물은 시시각각 자신들의 '형상'을 교환하면서 계속 존재하는 것이지요. 이때의 '형상'을 피타고라스 식으로 말하자면, '수'가 무한한 질료에 한계를 지어주는 것일 뿐입니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헤라클레스에게서 만물은 '불의 또 다른 형상'이고, 피타고라스에게서는 만물이 '수'의 변형된 '형상'일 뿐인 것이지요.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 속에 불의 원소가 침투해 있기 때문에 -마치 불교에서는 만물에 불성(佛性)이 깃들어 있다하고, 그리스도교에서는 신성(神性)이 깃들어 있다고 한 것처럼- 만물은 이성의 원리(로고스)를 포함한다고 했는데, 이 또한 피타고라스가 만물과 인간의 육체 속에 '수의 원리'가 들어 있다고 한 것과 비교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수'와 '불'의 만남, 혹은 그 대결적 양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헤라클레이토스나 피타고라스 모두 인간의 영혼이 신의 일부라고 보았기에, 그것이 '불'이었던지, 아니면 '수'였던지 모두 불멸의 속성을 지향하며 우주의 근원을 깊이 있게 탐색했던 위대한 선구적 철학자들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4. 로고스의 어원적 의미와 용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는 소아시아의 남부 연안에 위치한 밀레토스 학파의 사람들을 "자연과학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탈레스에서 아낙시만드로스 그리고 아낙시메네스와 같은 밀레토스 출신의 철학자들은 이 세상에서 움직이고 변화하는 현상을 지탱해 주는 어떤 고정된 물질적 "요소"를 자연에서 찾으려고 했던 최초의 자연 관찰자였기 때문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러한 "자연과학자"들의 생각보다 한 차원 더 깊게 들어가서 우주의 질서를 떠받치는 일정한 "규칙"에 대해 생각했던 것인데, 바로 그것이 "로고스"라는 개념이지요.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가 '로고스'라는 단어를 전문적으로 사용하기 이전에, 혹은 그를 전후하여 당시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로고스'에 준하는 용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용례를 살펴보면, 우선 로고스는 '수집하여 두기', '담화와 진술', '계산하여 지불하기', '논증하기', '말하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말하기의 그 이면에 담겨 있는 '사유하기'와 '추론하기'의 뜻이 있고 또한 '쓰기'까지의 용례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원학적으로 볼 때, 로고스(logos)라는 말의 가장 근원적인 뜻은 그리스어의 ‘레게인(legein)'이라는 동사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동사의 첫 번째 뜻은 "집어 들어서 내려놓다"인데, '수집(collect)'의 의미가 있고, 그리하여 "수를 세다", "말을 하다"(돈을 계산한 은행 직원처럼), "상술하다"(설화를 이야기하듯)는 등의 의미로서 설명을 시도하는 것과 관계가 있는 용어였습니다. 이처럼 로고스의 의미는 '말하기'와 관련된 많은 연관성을 지니게 되는데, 특별히 그것은 인간의 생각 그 자체와 생각을 말하는 발화(發話)를 포함하여 인간의 합리성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 되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생각을 강조하기 위한 단어라든가 생각을 표현하는 이야기나 문장, 혹은 설명이나 논쟁 등이 모두 로고스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언어와 로고스는 초기부터 밀전한 연관을 지닌 용어로 출발 했습니다.
그 후 라틴어에서 '이성(理性, reason)'을 뜻 하는 '라티오(ratio)'도 로고스(logos)의 번역이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영어에서 언어를 사용하여 어떤 사건을 진술하는 '말하기(telling)'라든가, 명칭을 부여하거나 기억하는 일까지 로고스라는 단어가 광범위하게 적용되었습니다.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도 한때 로고스를 이러한 뜻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로고스의 가장 중요한 뜻은 관계 속으로 침투하는 '언설(addressing)'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예컨대 로고스는 서로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 진행되는 '말'로 이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언어적 관계의 로고스 개념을 서양 최초의 수학자인 피타고라스는 수학적 함수의 관계로도 설명 할 수 있었겠지요.
헤라클레이토스 이전의 고대 그리스 시인 호머(Homer, 기원전 9세기경)도 그의 서사시 [일리아드]에서 로고스라는 동사의 원래의 뜻인 "수집하기"라는 의미를 "말하기"라는 뜻과 동시에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아킬레스(Achilles)가 '파트로클로스(Patroclos)의 뼈들을 모으자(legomen)',라고 말하자, 그 말(logoi)에, 조금 전에 재난을 당해 쓰러진 그 친절한 사람의 뼈들이 상처 입은 전사를 기쁘게 했다." (Iliad 23,239,25,393) 여기서 '수집'이라는 단어와 '말'이라는 단어가 로고스와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것을 보게 됩니다.
헤라클레이토스 이후에 로고스라는 단어의 용례는 점점 더 늘어났고, 오늘날 유명한 [리델과 스코트의 헬라어-영어 사전](Liddell and Scott's Greek-English Lexicon)에서는 로고스라는 단어의 "논리적(logical)" 용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로고스 앞에 전치사 형태의 접두사를 사용한, '유추(ana-logia)'라든가, 영어에서 접미사 형태로 붙어서 '-학문'이나 '-학(學)'을 뜻하는 '-로기(-logy)'나, 혹은 어떤 학문을 추구하는 '-학자'를 뜻하는 '-로지스트(-logist)' 등입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도 자연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자연과학자들'을 지칭하는 뜻으로 '피지오로고이(physiologoi)' 혹은 '피지코이(physikoi)'라고 불렀지요.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로고스의 용례로는 서로 주고받는 '대화하기'로서 '다이아레게스타이(dia-legesthai)'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상을 계발시키는 문답식의 '변증법(dia-lectic)' 혹은 '논리적 대화'의 뜻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로고스의 개념에 대한 어원적 정의와 그 변천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로고스 개념은 다시 그리스도교에서 또 한 번의 변용을 겪게 됩니다. 이를 테면, 성서에서 사도 요한이 적용한 대로 "하느님(God)으로부터 또 하느님과 함께 한 '말씀(The Word)'인 '아들(The Son)' 에게 로고스라는 개념이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사용한 로고스의 개념을 요한은 인격적인 "말씀"으로 재해석했고, 하느님과 예수에게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어찌 보면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 개념은 수세기를 지나 꽃을 피운 그리스도교의 로고스 개념의 탄생을 위한 선구적 씨앗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러한 개념의 씨앗을 뿌린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 개념을 좀 더 다음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5. “나에게서 듣지 말고 로고스에게서 들어라.”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합니다. “나에게서 듣지 말고 로고스에게서 들어라.
만물이 하나라는 것을 아는 것(인정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ouk emou, alla tou logou akousantas homologein sophon estin hen panta(éinai).(50)
이 말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아주 유명한 그러면서도 교묘한 말인데, 마치 불교에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하는 말과도 흡사합니다. 또한 이 말은 플라톤의 [파이돈](Phaedo)에 나오는 이야기와도 유사
합니다.
"만일... 그대가 소크라테스에게 주의를 덜 기울이고 진리에 귀를 더 기울인다면, 그대는 나에게 틀림없이 동의할 것이다(syn-homo-logesate). 내가 진리를 말한다고 할 것 같으면 말입니다"(91c).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리 자신의 지성이 독단하고 있는 '어떤' 진리보다는 로고스가 말하는 바로 '그' 진리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에게서 듣지 말고 로고스에게서 들어라."라고 한 그의 말을 다시 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나'에게서 듣지 말고 로고스로서의 '말(the Saying)' 그 자체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때 이 '말'은 헤라클레이토스에게 아주 중요한 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컨대, '담화(Speech)'라는 뜻을 지니게 되는데, 이 문장에서는 로고스가 지니는 '발언'의 측면을 말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로고스'가 곧 '말/말씀'이라는 뜻이지요. 로고스로서의 '발언'은 우선 인간이 납득할만한 '지혜의 발언'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때 우리는 '들으라(Hear)'는 말에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 '들어라(akousantas)'라고 한 것은 '듣다', '주목하다'라는 동사의 복수형 분사로서 복수로 취급하자면, '음향효과(acoustics)'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동사형으로서의 '들어라'는 부모가 자식에게 말하는 것과 같은 '순종'을 전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계속 이어지는 문장을 통해 우리는 로고스의 또 다른 측면을 보게 됩니다.
"만물이 하나라는 것을 아는 것(인정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 때, '아는 것(인정하는 것, to agree)'의 뜻으로 사용한 그리스어 원어는 '호모-로게인(homo-logein)'입니다. 이 원어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문장에서 (만물이 하나라고)'말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고스는 '발언'의 의미와 그 발언에 대해 경청함으로써 얻어지는 '동의'의 과정을 모두 내포하는 '담화'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제 위의 문장 가운데서, '현명한 것이다(to sophon)'라는 단어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그리스어에서 이 '현명한 것이다'라고 하는 '토 소폰'은 두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선 '로고스에 순종하는 사람이 현명하다'는 뜻이고, 또 다른 가능한 해석은 인격화된 '말씀' 그 자체의 지혜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본문에서 말하는 현명한 것/자(the Wise Thing, to sophon)은 '지혜의 화신(Wisdom Incarnate)'을 뜻하기도 하지요. 이로써 로고스라는 단어는 ‘담화’와 ‘아는 것’과 ‘지혜’라는 단어로 점점 확장되어 사용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다음 문장인 “만물이 하나다(hen panta).”라는 말을 어원적으로 다시 고찰해 보겠습니다. 여기서 '하나'라고 하는 그리스어의 '헨(hen)'은 중성 단수로서 단일성 혹은 통일성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명사로서의 '토 헨(to hen)'은 단일성을 뜻하는 수의 단어이지요. 그리고 '만물'을 뜻하는 '판타(panta)'는
'모두(all)'를 뜻하는 '판(pan)'의 중성 복수명사로서 '모든 것(all things)'을 의미합니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로고스는 '담화/말씀(a Speech)'일 뿐만 아니라, '화자/말씀하시는 자(a Speaker)'라는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로고스가 우리에게 발언을 통해 이야기로써 혹은 말씀으로서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우리는 다시 이렇게 말 할 수 있게 됩니다.
"나에게서 듣지 말고 '말씀하시는 자'에게서 들어라. '하나가 모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현명한 것(자)'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결론을 통해, 인도 사상의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브라만과 아트만은 하나다'라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사상과 아주 밀접한 연관성을 보게 되며, 불교의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사상과도 일면 통합니다. 동시에 로고스의 인격성으로 보자면 요한이 강조한 그리스도교의 로고스 사상과 통하면서도 신과 인간의 분리라는 측면에서는 또 다른 측면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로고스 개념은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방면으로 의미의 확장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내 자신이 말하고 있는 '그것'이 나의 '로고스'라고 하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파니샤드]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곧 너다(Tat tvam asi)'라는 사실에 도달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의 세계, 언어에 포장되지 않고 언어를 넘어서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이른바 그 '진실'의 세계를 포착하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참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합니다만
, 어쩌면 칸트가 말하는 '물 자체'의 영역이거나 비트겐스타인이 말하는 언어적 표상 그 너머의 '진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도(道)'의 개념과도 상통하리라 보는 것이지요. 이런 문제를 다음에서 더욱 자세히 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6. "만물이 만물에 의해서 진행되는 원리를 아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앞에서 "말하고 있는 (헤라클레이토스)자신에게서 듣지 말고, '말씀(Saying)'하고 있는 "말씀하시는 자(the Speak)'에게서 들어라."고 했었습니다. 이 때 그 "말씀하시는 자"는 일종의 '어떤 지혜의 힘'을 가지고 우리에게 '그 무엇'을 전달해 주는 자입니다. 그 지혜는 바로 우리가 로고스를 따라 말을 하도록 한다는 것이지요. 비유컨대 그리스도교에서 "성령의 지시에 따라 말하게 해 준다."고 하는 신비스런 체험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로고스의 지시는 신비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로고스의 '언어'는 우리의 세계 현실에서 경험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자가 "나의 도는 '하나'로써 꿰뚫는다(吾道一以貫之)"고 했듯이, 로고스의 '언어'에는 모든 '만물'을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통일성'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아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했는데, 이 '현명한 것'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고찰해 보겠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것은 이 '현명한 것(to sophon)'이 바로 로고스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현명한 것을 뜻하는 그리스어의 '토 소폰'은 로고스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인격화된 '말씀' 그 자체를 뜻하기도 했습니다. 요약하자면 '현명한 것' 곧 '참 지혜'가 로고스의 화신(化身)이라는 셈이지요. 이 지혜의 로고스는 만물을 하나의 통일성 속으로 흡입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로고스의 통일적 원리에 의해서 만물이 진행 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만법귀일(萬法歸一)'과도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러한 '귀일(歸一)'의 원리를 주목하고 자신의 내면에서 혹은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세미한 '로고스의 음성'을 깨달음을 통해 계시처럼 들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똑 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마치 무함마드가 신의 음성을 듣고 『코란』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322)가 그의 책 『니코마코스 윤리학』(1146b)에서 헤라클레이토스를 다소 엉뚱한 데가 있는 사람으로 본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신이 '믿은 바(believed)'를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는 마치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know)'을 확신하듯이 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잠시 그의 사상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는 감각적인 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보편적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귀납적인 전제를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같은 초월적 이데아를 인정하지는 않지만 그도 관념론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예컨대 사물이 생성함에 있어서는 생성의 수동적 가능성으로서의 질료(質料, hylē, matter)와 질료에 내재하는 본질로서의 형상(形相, eidos, form)의 결합을 말했는데, 이 형상에 운동이라는 활동성을 부여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 운동에 목적성까지 부여하였고, 운동의 최초의 원인자까지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 운동의 최초의 원인자가 바로 그 유명한 '부동의 동자(不動의 動者, the unmoved mover)'로서 신(神)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훗날 가톨릭의 대 사상가인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지요.
이제 다시 헤라클레이토스의 '현명한 것/자' 개념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물이 만물을 통해서 진행되는(kybernatai) 원리(gnome)를 이해하는 것이 '현명한 것/자'이다." 이 말은 세상 모든 만물의 움직임과 변화의 과정에는 어떤 실제적인 "원리(gnome)"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때, 원리를 뜻하는 그리스어 '그노메'는 '지식'을 뜻하는 '그노시스(gnosis)와 어근을 같이하는 것으로, '지식(knowledge)'이라는 의미 외에도, '판단', '의견' 혹은 '통찰력'과 같은 뜻으로도 사용되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서도 우리가 특별히 주목 할 수 있는 단어는 우리를 알게(to know)하는, 이른바 '지식'으로 이끄는 '지혜의 원리'입니다. 그 원리야말로 만물이 만물에게 관계하는 방식을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하면, 인간은 그러한 통찰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그러한) 통찰력(gnomas)을 지니고 있지 않다. 신(神)은 (그러한 통찰력들을)가진다."(78)
그렇다면 이 '원리'는 신의 지혜는 될 수 있을지언정 '우리의' 지혜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이 점은 뒤에서 좀 더 고찰하기로 하지요. 어쨌거나 '원리'라는 뜻을 가진 '그노메'라는 단어는 '지식' 이외에 "의도(intention)"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설계(design)"의 의미를 지니기도 합니다. 이 원리로서의 '그노메'는 만물이 만물에 관계하는 '방식 그 속에서' 만물이 나아가는 '길(道, way)'을 조종하고 통제하고 지배한다는 것이지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최근 그리스도교의 '창조 과학회'에서 하느님을 '우주의 설계자'라고 표현한 것과 일면 흡사합니다. 이제 헤라클레이토스가 앞서 말한 바, "만물이 만물을 통해서 진행되는 원리"라고 했을 때의 "진행되는(kybernatai)"이라는 단어에 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행하다"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키베르난(kybernan)"은 "지배/통제하다(govern)"라는 뜻으로도 사용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키베르난'은 중간태(中間態)로서 '진행하는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세계는 그 자체가 진행하는 것으로, "자기 진행성(self-steered)"을 가진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자기 진행성'을 가진 로고스는 만물 속에 본래부터 깃든 것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노자가 말하는 도(道)가 자연(自然)의 '스스로 그러함'에 본래부터 내재되어 있다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하면, 만물 속에 '진행되는' 혹은 만물 속에 '진행하는' 원리로서의 로고스는 '지혜'로서 인간과 만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로고스는 인간의 지혜의 영역이 아니라, 신적 지혜의 영역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생각은 마침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한 가지 유일한 '현명한 것/자'는 제우스(Zeus)의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한다."(32)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의 개념은 이제 언어적 ‘담화’의 성격에서부터 시작하여 ‘지식’이나 ‘지혜’의 차원을 넘어 그리스 최고신으로 대표되는 제우스의 이름까지 거명되면서 그 위상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도교(道敎)에서 노자를 도의 화신(化神)으로 생각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로고스의 또 다른 화신(化身)인 '현명한 것/자'는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컨대, 그 '현명한 것'은 만물과 '분리'되어 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 자체가 만물 속에 '내재'되어 작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그 현자(賢者)'는 만물에 대하여 내재적이며 초월적인 셈이지요. 그리스도교에서도 하느님을 내재적 초월자라고 하는 점에서 일면 같은 맥락임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내재적 초월자로서의 '현자'는 만물의 감독자이면서 동시에 구조물이 된다는 것이지요.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던 당대 그리스인들이 최고의 신으로 숭앙하던 제우스에게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만물의 주관자요 감독자라는 수식어를 사용 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제우스(Zeus)의 최고 신명이 후대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데오스(Theos)'라고 부른 것이 '제우스'와 구별된 최고 유일신 개념이었던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노자가 말하는 '도(道)'라는 개념도 내재적이면서 초월적인 두 가지 성질을 띠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도교에서는 이 도의 개념에 인격성을 부여했는데, 이 또한 그리스도교에서 로고스에 인격성을 부여 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현자'는 '하나의 어떤' 신으로서 인격화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는 하나의 '그노메(gnome)', 즉 '지식'으로서 '판단'이나 '목적' 혹은 '의도'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우주적 현자(The cosmic Wise Thing)'로서의 '그노메'는 어떤 목족적인 '의도'를 지닌 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신이 아닌 사람으로서 헤라클레이토스는 과연 어떻게 이러한 사실을 알고 확신하며 주장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남게 됩니다. 그의 논법을 따르면 그는 적어도 '말씀하는 자(Speaker)'인 '로고스(Logos)'가 '나타내는 지혜(Uttered Wisdom)'의 '말(Speech)'을 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왕양명이 그의 심학(心學)에서 말하는 '치양지(致良知)'의 내면적이고 직접적인 지식과도 유사한 것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 개념에 대한 여러 가지 용례의 측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특이한 점은 내재적 초월과 같은 이중적 측면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는 그가 사용한 로고스 개념에는 '지혜 혹은 지혜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더 나아가서 '지혜 그 자체'라는 뜻이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지혜 자'는 만물의 '원리'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실제적인 원리' 그 자체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만물은 하나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지요. 조금 차이는 있지만, 마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하나'라는 신앙고백 같은 것일 수도 있겠지요.
7. 만인 '공통의 지혜/통찰력'으로서의 로고스
헤라클레이토스가 로고스와 관련하여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부분은 '말하는 자(話者)'와 듣는 자(聽者)의 관계였습니다. 예컨대 도대체 "누가 말을 하는 것이며, 무엇을 알아듣는다는 것인가?"하는 문제였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말을 주고받듯이 하는 대화 속에서 화자와 청자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대화의 사이에 벌어지는 주된 논의는 바로 로고스에 대해 인간이 도대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점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들어 볼 만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언어 철학적 저작인 『수사학』(Rhetoric) 가운데 "작문법(composition)"의 첫 문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늘 존재하는 로고스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혹은 이해 할 수 없게 태어났거나 무관심axynetoi하고 있다). 로고스(담화)를 듣기 전이거나 혹은 처음 들었을 때일지라도."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늘 존재하는 로고스에 대해 귀머거리처럼 주의를 돌리지 않거나, 일상생활 중에서도 '무관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로고스의 '말씀'이 들려졌어도 듣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헤라클레이토스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귀머거리처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였다(axynetoi). 격언(格言)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들어도 듣지 못하는) 그들에게 증거가 된다."(34)
로고스를 깨닫지 못하는 인간의 아둔함에 대한 헤라클레스의 이러한 통렬한 비판은 마치 예수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고 했던 말을 연상케 하며, 더 나아가서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했던 말까지 생각나게 하는 강한 어조입니다.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만인에게 주어진)'공통적인 것(the Common, toi xynoi)'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로고스가 '공통적인 것(xynou)'이라고 해도 많은 사람들은 개인적인 지혜/통찰력(phronesin)을 소유한 것처럼 살고 있다.(2)"
여기에서 우리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로고스와 관련하여 동음이의(同音異義)의 말장난 같은 3가지 용어의 사용법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우선 앞서 언급한 '공통적인 것(common)'을 뜻하는 '시노스'(xynos, 이오니아의 그리스어로서 아테네 지방어의 '코이노스koinos'에 해당한다.)는 '지성을 가진 것'(with intellect)을 뜻하는 '신 노이'(xyn noi)와 '확실히 알 수 없는'이라는 뜻의 '앜시네토이'(axynetoi)라는 용어가 서로 공명(共鳴)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른바 '공통'과 '지성'과 '무지'라는 세 개념이 '신(xyn, 共)'이라는 어근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서 이해 가능한 '공통'적 요소를 발견하는 일이야말로 로고스를 이해하는 첩경이 될 것입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로고스라는 '공통'의 요소를 통하여 상호 대립적인 관계를 연결시키는 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양면성과 역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가 사용하는 동음이의의 기법은 다양한 의미의 영역을 하나의 '단어의 공명' 속으로 흡수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말하자면 그의 역설은 반대 되는 요소들까지 하나의 '언어적 주장' 속으로 편입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의 유사한 '음(sound)'을 통해 '지성'과 그 반대 개념인 '무지'를 '공통적인 것(the Common)'과 관련을 지웁니다.
그런데 이 '공통'이라는 것은 다시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우리의 세계와 그 세계를 결속시키는 '현명한 설계자', 즉 로고스가 늘 존재하면서 세계 속에서 작동하며 또 만물을 넘어서 만물에 대해 말하는 "공통 존자"(the Common)입니다.
다른 하나는 로고스의 말을 듣고 주의를 기울이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며, 그들에게 로고스는 공통적'이다'라는 것입니다. 마치 태양 빛이 만물에게 공통적으로 비추듯이 말이지요. 그러나 귀머거리나 혹은 부주의한 자들은 로고스의 메시지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태양보다는 동굴이나 어둠을 더 좋아하는 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의 비유'처럼 빛을 모르고 그림자만 보는 무지 속에 사는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공통적인 것'의 지혜/통찰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지혜(idian phronesin)"를 가진 자들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개인적'이라고 하는 형용사는 그리스어로 '이디오스(idios)'인데 이 단어로부터 우리는 영어의 '이디어트(idiot)' 즉, '바보'라는 뜻이 파생되어 나오지요. 그리하여 이들은 '있으나, 없는' 것 같은 자들이지요. 소위 '공통성의
부재(common-less)'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에게는 로고스가 없는 상태라는 뜻인데, 우리말로 쉽게 말하자면 '얼'이 빠진 상태라고 표현해도 가능할 것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중요한 것은 세계의 주관자가 우주'로 부터' 우주'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현명한 설계(하느님의 창조적 지적 설계 같은)'가 우주 내부에 잠재하고 있어서,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것을 무시하거나 간과해버린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헤라클레이토스의 조언을 따른다면 계속해서 우리는 우주의 메시지인 로고스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8. "사유는 만인 공통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 사유의 한계를 말하면서도 동시에 로고스에 의해 파악 가능한 인간 사유의 적극적 측면을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철학적 사유의 형식은 세속에 있으면서도 세속을 넘어서는 내재와 초월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만인에게 속한 만인 공통의 로고스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주장하듯이 주의 깊게 들을 귀가 있는 사람에게만 들려지는 일종의 우주적 공통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러한 진리로서의 로고스는 가장 일상적인 것 속에서 잘 드러나는 것인데, 그러한 일상성의 이유로 오히려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로고스의 진리는 철학적 사유의 단초가 되는 것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 이후의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는 이러한 진리에 대해 탐문하는 철학적 사유의 단초를 “놀라움”(wonder)이라는 단어로 다음과 같이 표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혜를 사랑하는 자(philosophos)'의 특별한 열망, 곧 '놀라움'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Theatetus 155d) 철학적 사유에 대한 당대의 일반 대중들의 태도에 대해 헤라클레이토스와 소크라테스는 서로 상반된 입장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리의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공통의 것(로고스)'에 대해 인간의 외면과 무지함을 '책망(blame)'했던 것에 비해,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당연시 여겨지고 있는 우리 주변 세계의 본질에 주목할 것을 환기시키면서 어떤 '낯선 것'을 '유도(induce)'하여 일깨워 주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헤라클레이토스가 우주의 본질과 메시지 속으로 뚫고 들어가라고 책망하며 이끄는 철학이라면, 소크라테스는 라파엘의 그림에서 플라톤이 하늘을 향해 손을 치켜들고 있듯이 세상에서 벗어 나오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둘의 철학적 메시지는 모두 우주의 근원적 지식에 귀를 기울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것입니다. 다만 헤라클레이토스가 인간들을 책망하는 이유는 인간들이 무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유능하면서도 '공통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에 이릅니다. "사유는 만인 공통이다."(113)
헤라클레이토스는 '건전한(멀쩡한) 인간 정신의 보편성'을 강조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그들 자신을 알고 또 건전한 정신을 소유하게 되어있다."(116) 바로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 것보다 한 걸음 앞선 격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철학자들이 이러한 격언을 말하게 된 것도 바로 '신적 지혜'의 소산이라고 말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컨대 지적 통찰력이란 도덕상의 미점과 결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의 관심을 내면으로 돌려 우주와 대면하게 하고, 동시에 그 우주의 거울 속에 나타난 ‘자신’에 대해 깊이 탐색할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이 직접적인 관계와 교류는 없었지만 인도의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 사상과 깊은 연관이 있음도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헤라클레이토스가 "사유는 만인 공통이다"라고 했던 말 속에서 훗날, 파스칼이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던 것이나,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던 그 모든 서양철학적 명제의 첫 출발을 보여 준 셈이지요.
9. 헤겔의 로고스 개념 (로고스의 자기운동)
헤겔의 변증법적 철학의 바탕에는 로고스 개념이 근본적입니다. 그의 로고스 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 가운데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 개념과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엔텔레케이아, 근대철학자인 스피노자의 실체와 전일성(All-Einheit) 개념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완성 시켜 갔습니다. 그 가운데서 헤겔은 특히 로고스 개념을 통하여 그의 변증법 사상을 로고스의 변증법으로 전개시키지요. 이때 헤겔에게서 로고스는 “논리적이고-실재적인 것(das Logish-Reale)"입니다. 논리적이라고 하는 것은 로고스의 자기 운동으로서의 변증법적 논리이며, 이 변증법은 존재와 사유와 개념과 역사 현실에 적용되는 변증법적 논리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변증법의 논리는 동일한 로고스의 근원에서 출발하여 다시 그 로고스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자기 동일성과 통일성을 지니는 것입니다. 물론 이 근원에서의 통일성은 사변적(spekulation)인 특성을 지니는 것입니다.
사변적이라고 하는 것은 라틴어의 스펙토(specto)가 말하듯이 ‘비추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변적이라고 하는 것은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과 같은 반성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로고스를 기초로 한 헤겔의 변증법은 그의 책 『정신현상학』에서 밝히고 있듯이, 정신적 본질의 자기운동이며, 개념의 율동이고 진리와 논리의 생(生)입니다. 한편 헤겔의 로고스 철학이 '실재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변증법이 무(無)에서 유(有), 정신에서 물질, 사유에서 대상까지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로고스의 자기운동 개념을 기반으로 하는 헤겔의 변증법은 직관을 통한 사유와 대상적 존재의 변증법적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바로 이때 사유와 존재를 두루 관통하는 것이 로고스의 자기운동으로서의 기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헤겔의 로고스는 논리적 사유 속에서 드러나는 실제적인 존재가 됩니다. 헤겔의 『대논리학』에 의하면, 로고스는 단순한 주관적인 사유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원리로서 절대 지식이며 순수이성을 말합니다. 그 순수이성을 통하여 사유된 것이 개념입니다. 그리하여 헤겔에게서 사유의 결과로서의 개념은 즉자적(卽自的) 혹은 대자적(對自的) 존재의 사상(事象)이며, 로고스이기도 합니다. 결국 로고스는 순수이성이자 개념이며 존재하는 이성으로서의 사상입니다.
이리하여 헤겔의 변증법적 철학의 근원을 이루는 로고스 개념은 사유의 활동 속에서 대상적 존재를 파악하게 되고, 그 존재를 근거로 다시 사유한다는 측면에서 사유와 존재의 변증법은 통일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유와 존재의 변증법적 통일성은 다시 역사와 현실의 변증법으로 전개됩니다. 헤겔에게서 사유의 변증법은 사유와 존재의 분리가 아닌 일치를 전제로 출발합니다. 앞서 헤라클레이토스가 “사유는 만인 공통이다.”라고 했던 그 사유가 헤겔에게 와서는 존재와 사유의 변증법적 종합을 이루게 된 것이지요. 이는 또 헤겔이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유하는 로고스의 자기 운동을 변증법적으로 통일 시킨 것이기도 합니다.
헤겔은 칸트가 말하는 사유의 한계를 넘어선 “물자체”의 개념을 반박하고 오히려 사유의 대상인 사물과 존재를 사유의 과정에서 반성적으로/사변적으로 일치시킴으로써 참된 실재의 무한자/절대자/절대정신/순수이성/로고스를 확인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0. 헤겔의 로고스 개념에 대한 비판적 고찰
헤겔은 고대 희랍의 자연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바 “나에게 귀를 기울이지 말고 로고스에 귀를 기울이라. 로고스에 따라 만물은 하나다(Hen kai Pan)”라는 진술에서 영향을 받아 자신의 로고스 변증법을 발전 시켰습니다. 예컨대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대립을 통일성 속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모순을 해소하는 변증법을 로고스의 자기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했던 것이지요. 자아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전체이자 일자의 전일성으로 귀속됩니다. 그런데 헤겔이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 개념에 약간 변형을 가하는데, 헤겔은 로고스를 “예지의 중심” 혹은 “예지의 지성적 접합 점”으로 해석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성(理性)”으로까지 해석합니다. 이 때의 ‘이성’은 존재와 사유를 관통하는 보편적 원리로서의 이성입니다. 그리하여 헤겔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성(로고스)의 본성에 따라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헤겔은 로고스를 존재하는 모든 것과 절대적인 관계를 가진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지요. 헤겔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가 “논리적이지만 본성상 보편적인 자연의 과정”이라고 해석함으로써, 이 과정이 곧 ‘이성’의 과정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헤겔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 개념을 ‘이성의 자기 전개과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로고스는 “신성을 지닌 질료적 기운” 같은 것으로 존재를 포괄하는 개념이었습
니다. 예컨대 우주를 지배하는 물질적인 힘과 기운으로서, 혹은 신성한 원리와 법칙 그리고 인간의 사고까지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질료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로고스가 인간의 영혼을 포함하여 우주적 신성한 힘으로까지 설명 되었던 것을 헤겔은 자신의 이성적 변증법의 논리로 변형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헤겔은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하는 ‘경청하여 듣는’ 로고스가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으로 사유하는’ 로고스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헤겔이 이처럼 능동적으로 사유하는 로고스를 주장하게 된 것은 그의 후기 사상으로서 [성서]의 요한복음에 나타난 로고스 개념을 수용하는데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의 로고스 개념은 신적인 ‘로고스’의 성육신(成肉身) 사건을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지요. 예컨대 고대 희랍의 로고스 개념은 심오한 신성을 잘 보여주지 못한다고 생각했기에, 헤겔은 요한이 말하고 있듯이 성육신화 된 로고스의 심오한 정신이 절대종교를 넘어선 절대철학으로서의 변증법적 체계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결국 비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헤겔은 고대 희랍의 “파르메니데스의 ‘대상 외면적인 이성의 변증법’과 제논의 ‘대상 내면적인 변증법’, 그리고 헤라클레이토스의 ‘논리 자체의 객관적인 변증법’ 이 세 가지 변증법을 자의적으로 구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앞서 보았듯이 파르메니데스는 유일하고 영원불변하는 존재를 말했는데, 변화하는 지각 대상은 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그리하여 존재는 그에게서 물리적인 세계 너머에 있는 대상 영역이기도 합니다.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을 발전시켜 존재의 속성과, 속성을 지닌 대상을 구분하여, 속성은 이데아처럼 영원하지만 물리적 대상은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하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러한 존재의 개념에 대하여 헤겔은 존재를 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으로 설정하고, 경험적인 존재 개념을 넘어서서는 존재를 말할 수 없다고 함으로써, 존재를 경험 판단의 영역 내부로 끌어 들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전통적 로고스 개념에 대한 헤겔의 변용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13.하이데거의 동양적 사유: 도와 로고스의 철학적 대화
하이데거는 서양 기술 문명의 바탕이 되는 서양 형이상학의 종언과 동시에 새로운 ‘다른 사유’를 요청했다. 새로운 다른 사유는 ‘세계 운명과의 대화’로서 우리를 오히려 침묵으로 이끌 수 있다. 사유는 내면, 그 자체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노자의 ‘無爲’ 개념을 연상시킨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이러한 ‘다른 사유’는 서양 기술 문명에 대해 동양적 사유의 바탕이 되는 유교, 불교, 도가의 사상과의 ‘대결/만남’의 측면에서 이해 해볼 가치가 있다. 하이데거는 새로운 다른 사유를 위해, “그리스 철학 이래로 아직 묻지 않았던 물음을 철저히 사유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사유의 역사적 토대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새로운 다른 사유’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새롭게 구축하는 것이고, 인간의 ‘고유한 존재 경험’을 보존하면서도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과 세계의 왜곡된 관계’를 은폐시키는 것이 아니라, 들추어냄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사유의 근원’으로
돌아가야 함을 한다.
‘사유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은 단순한 방법이 아니라, ‘길’로서의 ‘道’가 요청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유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사유요, 과정적인 途上의 사유다. 하이데거는 이 途上에서 시인이자 사상가인 휠더린을 길의 안내자로 동행하여,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적 사유의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이러한 서양적 사유의 근원으로의 회귀 속에서, 동양적 사유와의 ‘대결’이 시작된다. 대결은 독일어로 ‘Auseinandersetzung’으로 ‘서로 떼어 놓는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이 대결은 “낯선 타자”와의 부딪힘이다. 이 낯선 타자와의 만남은 고향을 생각하게 하는 창조적 대결이요, 고양된 형식의 대화다. 이와 같이 동양적 낯선 타자와의 만남을 통하여 서양적 사유의 근원으로 돌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기독교 전통을 지닌 사람은 불교적 전통을 통해 더욱 자신의 근원적 사유로 돌아가고, 또 그 반대의 경우도 같다. 동서 철학의 대결은 존재의 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우리 존재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 다시 말해서 ‘우리의 역사적 정신적 실존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이데거는 기술적 사유로 왜곡되기 이전의 근원적 존재경험을 가로막는 것은 “우리 언어의 무능력” 때문이라고 본다. 형식화된 정보 언어는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사유하게 하는, 그리하여 ‘존재의 경험’을 서술하는 ‘언어의 본질’을 가로 막는다는 것이다. 사유의 근원적 토대를 회복시켜 주는 언어의 본질을 획득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동양과 서양적 사유의 대결을 시도한 것이다. 그 대결을 통해 자신의 전통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에 있어서 영원한 ‘길’을 탐색하는 것이다. 이 ‘길’로서의 ‘도(道)’는 동양적 사유의 근본 낱말이다.
시인 휠더린이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의 힘도 함께 자란다.”고 말한 것처럼, 사유의 힘은 위험을 위험으로 밝히는 데 있다. 환경오염, 핵무기, 오존층, 생태계 파괴, 등에서 오는 기술의 위험을 존재의 맥락에서 사유하자는 것이 하이데거의 의도다. 따라서 그는 존재의 물음을 유럽의 운명과 결부 짓는다. 이것은 에리히 프롬이 ‘소유냐 존재냐’를 물었던 물음과 같은 맥락이다. 하이데거는 존재 의미의 원천과 함께 고유한 전통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기술의 발달로 인한 고향의 상실에서, 고유한 존재의 회복에 힘써야 한다고 하면서 ‘길’로서의 도(道)를 묻고 문제 삼았던 것이다. 이른바 ‘도’와 ‘로고스’의 만남을 시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