酒朋 /윤행원
술꾼을 만나면 술을 마시게 된다. 사람마다 주량(酒量)이 다르고 마시는 태도가 다르다. 술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의 주량대로 마시고 얼마큼 자제를 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전연 마시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술을 대하는 사람의 양태(樣態)는 가지가지다.
개인적으로 나는 술을 적당히 좋아하는 편이다. 술 마시는 분위기를 즐기고 동석한 붕우(朋友)와 취기(醉氣)와 友情을 즐긴다. 젊었을 때에는 과음을 하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약간 얼큰할 정도로 마시고는 스스로를 자제하는 편이다.
어쩌다 분위기 좋은 친구를 만나면 취하도록 마시지만 그 정도로 그만둔다. 옆에서 아무리 권해도 더는 마시지 않는다. 그걸 보고 어떤 사람은 강단(剛斷)이 대단하다고 비난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내가 정한 주도(酒度)를 지킨다. 평소에도 술을 꼭 먹고 싶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한 달을 안 먹어도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을 때도 있다.
구태여 술 생각이 없는 걸 보면 애주가(愛酒家)는 아닌 모양이다. 술을 매개로 친구와 담소를 하고 흥을 돋우며 인생을 아름답게 가꾸고 싶을 뿐이다. 즐기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귀중한 시간이다.
요즘에는 그런 일을 볼 수 없지만 옛날 초기 관광여행 붐이 일었을 때다. 야유회를 갈 때, 아침 일찍부터 곤드레만드레 로 마시는 사람을 볼 때가 있다. 이런 사람은 초장(初場)에 기분을 너무 많이 내다가 초과하여 자기 몸을 감당 못하고 나머지 시간을 줄곧 괴로워하면서 동행한 사람을 안타깝게 할 때가 있었다.
주로 자기 기분을 억제 못하는 사람들 중에서 그런 사고가 생긴다. 한두 번 그런 억울하고 쓰라린 경험을 가진 사람은 그 다음부터는 그런 난처한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 어느 날, 文筆家의 모임이 명동 근처에서 있었다. 일부 식이 끝나면 이부엔 회식 자리가 된다. 음식과 술이 펼쳐진다.
어느 愛酒家는 그날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모양이다. 처음엔 사람이 술을 마시고 그 다음 부터는 술이 사람을 마신 모양이다. 그리고 주는 대로 있는 대로 꿀꺽꿀꺽 마신 모양이다. 이런 사람은 대게 마음이 여리고 분위기에 어울리는 도취(陶醉)속도가 빠르다. 술 기분에 빨리 익숙해진다. 나는 같은 테이블에 앉지 않아서 그날 그 사람이 마신 술의 양을 헤아릴 수는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의 사연이 용케도 꼬인 것 같다.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은지라 둘이는 전철을 타러 지하로 내려가는데 마침 맞은편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다른 주객(酒客) 일행을 만나게 된다. 그 쪽에선 손짓 몸짓으로 같이 가자고 유혹을 한다. 모처럼 주붕(酒朋)을 만났으니 한 잔 더해야 한다는 광고를 한다.
다섯 사람은 명동 골목으로 들어섰다. 민속촌이라는 주점이 있어 일행은 좁은 주점으로 우르르 들어섰다. 시원한 막걸리를 마시면서 노래도 뽑고 질펀한 문학 이야기와 웃기는 농담도 했다. 어느덧 귀가 시간이 되어 우리는 술집을 나왔다. 지하철을 타러 지하로 내려오니 나는 소변이 급했다. 일행에게 화장실 간다고 하고 이리저리 찾다가 보니 어지간히 걸어왔는데도 불구하고 '화장실 160 미터'라는 싸인이 보인다. 어지간히 멀기도 하다. 가까스로 볼 일을 마치고 같은 방향으로 가는 두 사람을 찾았다.
한 사람은 연락이 되는데 조금 과음을 한 사람은 찾을 수가 없었다. 밤 10시가 가까운 지라 먼 데까지 가는 귀가시간이 촉박했다.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을 찾아서 같이 전철을 타라고 하고는 마침 도착한 전철을 탔다. 그 사람으로 부터 (다른) 그 사람을 찾지 못했다고 전화가 왔다. 전철 안에서 전화를 여러 번 했지만 그 이상 연락이 되지 않다가 수원역에서 어떤 젊은 사람이 그 분의 전화를 대신받으며 여기 술이 너무 취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xx역까지 같이 가서 역무원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했다. 이미 평택에 온 몸이라 시간상 어찌 해 볼 방도가 없었다. 집으로 전화를 해서 그의 부인에게 이런 사정을 이야기 했다. 약 이주일쯤 후, 문득 그 사람이 생각이 나서 같이 식사를 하면서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그 사람이 산다는 전철역으로 가서 전화를 했다.
“oo 선생님, 오늘은 술은 하지 말고 같이 밥이나 먹읍시다. 집에 있습니까 아니면 이 근처에 있습니까?” 하고 운을 뗐다. 그 쪽에서 엉뚱한 대답이 나온다. “여기는 병원입니다.” 하는 소리다. 허허 이럴 수가....뜻밖이다. 그 곳에서 멀지않은 병원으로 버스를 타고 갔다. 문제의 사나이는 병상에서 윗몸을 일으키며 껄껄 웃기부터 한다.
그날 만취하여 집 근처 전철역 계단을 내려오다 넘어져서 대퇴골이 부러져 119 엠버런스 차를 타고 그 길로 병원으로 와서 큰 수술을 받았다는 것이다. 얼굴은 멀쩡했고 대화도 멀끔하다. 다만 “흐흐흐...”하면서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따지기가 힘들 뿐이다. 나는 놀라고 어이가 없었다.
술을 얼마나 마셨기에 그날 기억 필름이 끓어지고 어떻게 온 줄도 모른다는 것인가. 내친김에 겪은 주난사(酒難事)를 철없는 얼굴로 이야기 하는데 들어보니... 모두 술 때문은 아니지만, 자기 일생에 죽을 고비를 네 번이나 겪었다고 한다. 환자복을 걷어붙이고 마치 무용담처럼 설명을 한다. 다리가 부러질 뻔한 적도 있고, 정강이를 다치기도 하고, 어깨쇄골이 금이 가고, 한 번은 과음을 하고 바깥에서 자는 바람에 저체온으로 죽음 직전까지 간 적도 있다는 것이다.
주난사(酒難史)로는 너무 화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술은 이제 다시는 먹을 일이 없다는 것이다. 다행이다. 그런 결심이라도 하고 있으니... 어디까지나 낙천적인 그는 어쩌면 이 정도가 천만다행일지도 모른다면서 다시 껄껄 웃는다. 죽을 수도 있는 일인데 대퇴부가 깨진 것으로 액땜을 했다는 논리다. 전화위복이 될지 누가 알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기왕 일어난 일을 빨리 체념하고 스스로를 좋게 위로하는 것이 달관이 된 듯 했다. 이상한 논리도 있다면서 나는 “흐흐흐...이것 참..흐흐흐..” 신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 지르기만 했다. (2009년4월) 석계 윤행원 ..................................................................................................................
윤행원09-04-06 13:09 임재문 전 회장님이 마침 그날 이후의 마음을 솔직하게 피력하였기에 그날의 자초지종을 보고도 할 겸 여기에 올려둡니다. 술 먹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일어날 수 있는 文壇野話입니다. 앞으로 임재문 전 회장님은 술을 끓겠다고 철석같이 맹서를 하였으니 우리 모두가 증인이 될 것입니다...하하하하...임재문 회장님, 친애하는 마음으로 깊은 友情을 보냅니다.
임병식 09-04-06 13:42 전에 어느 문학평론가가 문단에서 일어난 일화를 월간문학에 재미있게 연재한 일이 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며 앞으로 우리 작가회원의 문단이면사의 에피소드도 나중 모아서 책을 내면 이 또한 재미있는 읽을 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보면 임재문선생님께서는 두번에 걸친 역사적인 (?) 에피소드를 만들어 내신 셈이군요. 어찌됐던 그만 하기 천만다행이입니다. 무슨 일을 당할때 이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한데, 더 나쁜일을 당하지 않은걸 다행으로 여기시는 마음이 본받을만 합니다. 석계선생님도 책임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은데, 나중 이지만 병문안 까지 다녀오셨다니 그 마음 또한 훈훈합니다. 재미있게 쓰신글 잘 앍었습니다.
임재문 09-04-06 18:18 석계 윤행원 이사님께서 먼저 이글을 올리면, 저에대한 이미지가 너무나 소용돌이속에 파묻힐거 같아 선수를 쳤지요. 변명아닌 변명으로... ...어떻든 이제 두차례수술도 무사히 끝이 났고, 정말 수술날짜 받아놓고는 너무나 마음이 괴로웠던 생각을 합니다. 이제 회복단계니 저는 다치기도 잘하지만, 회복도 남보담 더 빠릅니다. 앞으로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또 한번 우리 한국수필작가회가 깜짝 놀라도록 변신해 보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임병식회장님 염려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앞으로는 더욱 더 좋은 에피소드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가 합니다. 이렇게 비극적인 것 말고요. 화려한 변신 이런것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윤행원 09-04-06 19:03 임재문 전 회장님, 아무튼 회복이 빠르다니 매우 다행입니다. 그날은 過飮도 원인이 있었지만 일진이 어찌 그렇게 공교롭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을 해 보니 꼬이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일을 피할 수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앞으로 禁酒를 하신다면 다시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轉禍爲福이라고 한 말씀은 바른 해석으로 치부해도 좋을 것입니다. 먼 훗날 ‘임재문작가의 酒遊天下’의 이야기로 명 작품으로 탄생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나저나 -욥과 그의 아내-는 명 수필입니다..
임재문 09-04-08 03:30 윤행원 이사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욥의 아내가 명수필이라니요. 병상에서 썼으니 병수필입니다. 명수필은 명동이야기를 쓰신 윤행원 이사님의 수필이 명수필입니다.. 최복희 09-04-07 14:23 술로서 또 이렇게 명작을 줄줄이 내놓으시는군요.ㅎㅎ 우리 곁지기도 술을 좋아해 '술과 인생'이란 글을 써서 어느 카페에 올리더니 넷상에서 인기가 대단했습니다.ㅋㅋ 적당히 술을 즐기는 윤선생님 참 멋지세요. 오늘 남편에게 바가지(?) 긁을 일이 생겼네요.ㅎ 윤작가님 같은 분을 닮으라고.....
윤행원 09-04-08 10:54 최복희 선생님, 언제 뵈어도 반갑습니다. 그리고 깔끔한 性情과 이웃에 대한 따스한 마음씀씀이가 일품입니다. 임재문 전 회장님 덕택(...)에 어쩌다 저의 술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됐읍니다만 면목이 없습니다. 임 회장님은 가끔 술로 인한 에피소드를 만들지만 인간적인 매력은 참으로 대단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한국수필작가회 文友로서 튼실한 友情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원명화 09-04-11 11:09 술의 마력은 오래전부터 많은 이들을 통해 전해내려오는 보양식(?)이라 했던가요. 유유자적 술과 인생을 즐기시는 윤행원 선생님의 모습을 글 속에서 느껴봅니다. 물론 저야 술,아니 알콜이라고는 입에도 대지 못하는 잼병이지만 가끔은 그 묘한 마력속에 빠져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도 한답니다.
윤행원 09-04-13 15:32 박원명화 사무국장님, 감사합니다. 술을 전연 못하는 잼병이라는 말에 아쉬운 마음입니다. 언제 같은 좌석에 앉게되면 술 한 잔을 권하려고 했는데... 그런 마음을 아예 접어야겠습니다...하하하...댓글 고맙습니다.
한동희 09-04-16 01:17 지금은 새벽 1시10분, 감기 몸살로 온몸이 아픈데 왜 이리 잠은 안오는지... 술을 좀 마시면 잠이 올라나...? 윤행원 선생님, 다음 모임때 2차가면 저도 데려가 주세요. 저도 한때는 술맛 좀 알았는데, 건강 때문에 딱 끊었습니다. 그래도 술마시고 찔끔댈 때가 좋았는데... 남자들은 술 마시면 무슨 얘기들을 하나요?
윤행원 09-04-16 11:39 . 한동희 선생님, 감기를 아직도 쫓아버리지 않고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니 예수님이 따로 없습니다..하하.. 그놈의 감기를 미련 없이 쫓아버리고 이다음 기회가 되면 술좌석에 同席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文友들의 술 放談은 문학이야기와 文壇 돌아가는 이야기 그리고 개구쟁이 유머를 주로 합니다. 모두들 점잖은 선생님들이라 여자이야기는 거의하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설명이 됐습니까?..ㅠㅠ...
일만성철용 09-05-21 05:34 ilman의 이름도 나오나 아슬아슬하게 보았습니다. 이제야 그 글을 읽네요. 술은 내게 아픔을 주었지만 많은 글을 쓰게도 하였습니다. 음주 음전으로 면허가 취소 되어 개화산을 넘어 출근하다가 '개화산'으로 등단을 하였고, 노숙자, 가난한 이웃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 홀로 먼 산을 다니면서 각종 에피소드가 ilman에게는 넘치는 이야기입니다. 그 중 가장 안타까운 이야기는 물건을 잃고 다니는 것이지요. 카메라, 의치, 등산도구 등 흘리고 다니는 것이 적지 않거든요. 언젠가 의사가 금주를 권하게 된다면 소장하고 있는 나의 고가의 양주를 한 잔 한 잔하며 생을 마감하겠다는 것이 술꾼 나와의 약속이지요. 임 회장 건은 생각할 수록 미안하기 그지 없는 일입니다.
윤행원 09-05-22 11:01 일만 선생님, 한 말씀 하셨군요. 그날 명동에서 가진 酒席은 참 재미있고 友情넘치는 잔치였습니다. 나중에 임재문 전 회장님의 사고만 없었드라면 말입니다. 일만선생님과의 청진동 구름창고에서의 추억이 새롭습니다. 일만선생님의 화려한 시조암송에 興이 나게 술을 마셨습니다. 나는 그때 어슬픈 英詩를 읊조리고 일만선생은 시조를 연달아 낭송을 했습니다. 文士의 酒興으로선 운치가 대단했습니다. 다음에 또 그런 기회를 만들고싶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