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다듬기(Sharpening My Destiny)'
우리들이 사용하는 관용어 가운데 “고린도인처럼 산다”는 말은 역사적으로 “방탕하게 산다”는 뜻이 되었고, “유다”라는 말은 ‘배신(背信)’으로 통하고, “소돔과 고모라 같다”는 ‘심판 받을 수밖에 없을 만큼 타락(墮落)한 도시(都市)’를 지칭하는 말들입니다. 예수님은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훈계하십니다(눅17:32). 롯의 처의 이름은 ‘화(禍)를 부른 욕심(慾心)’의 의미가 되었습니다. 황우석이란 이름은 ‘실제보다 더 과장(誇張)된 업적’의 의미가 되었습니다.
이제 ‘신정아’라는 이름 석 자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거짓말’입니다.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을 보고 미국사람들은 "lie as though telling the truth"라고 표현합니다. 거짓말을 진실처럼 말하고, 얼굴색 한 번 바뀌지 않고 거짓말한다(lie with a straight face)는 뜻입니다. 그녀는 거짓말로 자신이 원하던 것의 대부분을 얻었으나 이제는 그 거짓말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을 처지에 놓였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사랑마저도 거짓으로 포장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정아씨는 미술작품이나 미술작가 등의 가치를 판단하는 큐레이터라는 직업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의 운명을 가치 있는 보석이나 작품으로 다듬지 않고 위작(僞作)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위작의 인생입니다. 정수근 화백의 작품은 최소 수억을 호가합니다. 어느 전도유망한 젊은 작가는 국전에서 대상까지 수상한 경력이 있지만 예술가로 먹고 살기 힘들다고 박수근 작가의 그림을 위작으로 그려 파는 일로 돈벌이를 삼다가 들통 났습니다. 그 분도 캔바스에 아름다운 그림을 옮겨 그리는 데는 천재였으나 자신의 운명을 진실이라는 캔바스에 그리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가짜는 아무리 똑같이 그려놨어도 가짜입니다. 가수 박상민 씨를 흉내 내던 모방가수가 너무 지나치게 모방하다가 법의 제재를 받았습니다. 노래할 때만 모방한 것이 아니라 박상민이라는 이름으로 실제 행세했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남의 이름으로 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
신정아씨는 출근길에 어느 교회당에 들러 일주일이면 두 세 번씩 기도하고 갔다고 합니다. 그녀는 무엇을 위해서 기도했을까요? 거짓말이 새 나가지 않도록 기도했을까요? 아니면 자기 스스로는 끊어버릴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거짓된 삶의 종지부(終止符)를 찍어달라고 하나님께 부탁드린 것일까요? 그녀가 드린 헌금도 일종의 하나님께서 눈감아 달라는 의미로 드린 뇌물일까요? 아니면 거짓말로 쌓아올린 명성에 대한 감사헌금일까요? 아마도 하나님은 거짓말로 쌓아 올린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신정아씨를 불쌍히 여겨 스스로는 중단할 수 없는 죄를 천하에 드러내는 방법으로 죄악 된 생활을 청산하도록 만드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신정아씨에게서 나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아름답게 보이려고 보석으로 단장하면서도 내면을 진실과 성숙이라는 보석으로 단장하지 않는 아름다움은 결국 경멸받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기에 함부로 살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없다고 해서 거짓과 불법으로 사는 것이 정당화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더 많은 기회와 좋은 환경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방종한 삶을 사는 것이 합법적이 되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이 재수를 하고, 삼수를 해서 안 되었다고 해서 거짓말로 먹고 사는 길을 택하면 망합니다. 거짓말로 쌓은 것은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목회자들도 실제보다 더 경건한 것처럼 보이고, 실제보다 더 많이 성경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실제보다 더 하나님을 잘 아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이 아닌 흉내 내기라면 빨리 그런 모방과 복제의 삶을 청산하고 진실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거짓말의 원조는 아담이고, 거짓말 도사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거짓말로 기근이라는 위기를 모면하려다가 큰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눈앞에 닥친 기근을 해결하고, 얼마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 거짓이라는 방편을 택했지만 그로 인해 믿음의 기근을 맞아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였다가 들통 나자 어느 나라 대통령처럼 항변했습니다.
“내 누이가 맞습니다. 맞고요. 이런 정도는 깜이 아닙니다. 시비깜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종종 전체의 진실은 감춘 채 부분적인 사실만을 강조하여 다른 사람들을 속이거나 부당한 이익을 얻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시 전부의 진실을 감춘 채 하나님과 자신을 속이며 살고 있는 영역은 없습니까?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믿음의 진실성을 테스트 받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신뢰에서 실패하자 믿음의 성실성에서도 실패했습니다. 한 가지 죄가 또 다른 죄를 짓게 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각자의 운명을 가치 있는 작품과 보석으로 잘 그리고 다듬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운명다듬기(Sharpening My Destiny)를 잘해야 합니다. 모방이나 복제가 아닌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다듬어가기 위해 야고보서 3:17의 말씀을 묵상해 봅시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약3:17).
김택수
첫댓글 목사님 귀한 말씀 감사 합니다.
아...........오늘도 뭉게집니다`.아.....목사님..그래도 그분의 말씀은 우리를 드러나게 하지만..고쳐주시기때문에 희망이 있는거지요? 목사님 건강하시죠?
목사님의 말씀은 늘 내 자신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은 그보다 더 강력하게... x-ray를 찍힌 느낌입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늘 말씀으로 깨닫게 해주시는 그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누가 누구를 손가락질하며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내 죄가 태산 같은데 말입니다.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려던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시겠지요. 목사님! 우리 새희망교회 성도들이 여늬 사람들처럼 거짓 가운데 살지 않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돈, 명예, 색에 대해 시험에 이기면 반은 성공한것인가요? 반갑습니다. 종종 귀한 말씀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