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김 유훈 (밴쿠버 문협)
세월이 흐르고 내가 나이가 들게 되니 옛날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리고 "지금 그 사람은 무엇을 하며 지내고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는 만나고 싶고 소식이라도 알고 싶다.
그 분은 다름이 아닌 내 어린 시절 우리집 가정교사였던 '하문성'이다. 내가 중학생 때 우리집에서 2년간 함께 지내며 형과 나를 가르쳤을 때 나는 그에게 푹 빠져서 그의 추종자가 되었다. 그의 행동, 언어, 그리고 사상과 인생관까지 그를 닮아갔다.
예를 들면 음악도 클래식과 외국 팝송을, 영화도 중앙극장에서 하는 외국 영화를 많이 보았다. 그러나 다행히 문학은 한국과 서양 모두를 잘 알아야 한다 하여 문학 전집을 거의 읽게 하였다. 왜냐하면 학교와 입학시험을 위해서 그리고 교양에도 꼭 필요하다고 하였다.
내가 어린 중학생 시절 그를 그렇게 따른 이유는 나를 동생처럼 잘 대해 주고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언젠가 성공해서 내가 찿아가면 "글쎄, 너는 날 만나기 힘들걸, 아마 내 비서를 통해서도 겨우 만날 수 있을까?" 하는 허세에 어린 내가 넘어가기도 하였지만 나의 충성은 변함 없었다.
마치 돈키호테를 따른 산초처럼... 그 시절, 나의 고등학생 용돈과 재수 때 학원비 절반 가량은 그에게 바쳤다. 학원에 낼 돈을 대신 받은 그는 나에게 서울 사대 도서실로 오라 하여 과외를 시켜주었다. 그러나 해질 무렵 나와 그는 용두동 사대 앞에서 돼지 고기에 막걸리 마시며 젊음과 인생을 열심히 토로하였고 그 비용은 내가 내야 했다.
처음에는 '선생님'으로 만났지만 그가 우리집을 나간 후부터 '형'이라 부르라 해서 그 후 나는 "문성이 형" 하며 그를 따랐다. 서울 사대 수학과 학생인 그는 여러 곳에서 가정교사로 전전하기도 하였고 갈 곳이 없을 때는 사대 연극부 연습실에서 살았다. 그때 그와 함께 있던 연극부 후배 중 한 명이 김명곤 전 문공부 장관이다. 그리고 그가 먹을 것이 없다고 나에게 연락 오면 나는 돈과 먹을 것을 갖다 주곤 하였다.
그가 등록금이 없을 때 배제고 후배들의 연락처를 알려주면 그곳까지 찾아가서 돈을 얻어다 주었다. 또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에게 여러번 찿아가서 돈을 받아오기도 하였다. 당시 그의 여동생은 중량교에 있는 큰 목제소 하는 부잣집으로 시집갔는 데 내가 찿아가면 "우리 오빠 왜 그렇게 살아, 참 알 수 없는 오빠야!" 하는 말과 함께 돈을 나에게 주며 눈시울을 적셨다.
일찌기 아버지는 외지로 떠나 소식도 모르고 홀 어머님은 우리집에도 몇 번 오신 적이 있다. 그러나 얼마 후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 오직 둘만 남은 남매여서 동생이 의지하고 바라는 오빠 모습이 달라 늘 실망하는 빛이었다.
이렇게 가정사를 잘 알고 있기에 돈 심부름을 하는 나 자신도 할 말이 없었다.
그 '문성 형'은 성격이 괴팍하고 삶의 방식이 보통사람들과 달라 이해하기는 힘들었어도 그의 배제고 후배들 특히 기계 체조부 출신들도 나처럼 그를 잘 따랐고 물심양면의 도움을 주었다. 그가 사대를 졸업할 무렵 그가 취직한 곳은 고등학교 수학 선생이 아니라 무교동에 있는 비밀요정 주방이였다.
내가 어느날 그를 만나러 찿아간 곳은 방이 여럿 있는 요정이었다. 그곳에는 십여 명의 아가씨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는 요정 뒷쪽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문성이 형'을 기다리는 동안 방에 있었다.
그때 그곳에는 어느 잘생긴 애기 엄마가 아기를 데리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이대 출신의 이혼녀로 애기를 데리고 와서 일하고 있는 직업 여성이었다. 애기 보던 그녀는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들로 인해 애를 안고 당황하였고 애기는 엄마 팔에서 안 떨어지려 더 크게우는 모습을 보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애기를 맡아 밤 늦도록 달래 주었다.
밤이 늦어 엄마가 왔는데 술에 취해 들어와서 애기를 안고 엉엉 우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함께 슬퍼한 적이 있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문성이 형'의 대학 졸업식 날이 왔다. 그러나 그는 나를 부르더니 자신은 졸업식에 못 가겠노라 하며 나를 대신 보냈다. 나는 박 대통령이 참석한 문리대 졸업식장에 가서 그의 졸업장을 찿아와 간 곳은 그가 새로 취직한 일터, 무교동에서 제일 큰 한식당 주방이었다.
그는 이 주방에서 음식 기술을 잘 배워 성공하겠다 다짐하였다. 당시 식당 주방 안에는 10명이 서서 음식을 만들고 있었는데 그는 맨 끝에 서 있었다. 주방장 위치까지 가려면 약 15년 정도 걸린다고 말하였지만 그는 그 곳에서 주방장과 자주 싸움을 하였다. 주방장에게 잘 보여도 배울까 말까 한 기술인데 그를 향해 "못 배워 무식한 놈들!" 하였으니 그는 곧 그곳에서 잘린 후 딴 곳으로 갔다. 그가 다시 간 곳은 마포에 있는 중국집이었다. 그리고 중국집에서 기술 하나 잘 배우면 먹고 사는 데 지장은 없다 하였다. 나는 그 덕에 자장면, 짬뽕, 그리고 볶음밥 정도 만드는 방법을 어깨너머로 배울 수 있었다.
그 즈음 그의 여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급히 한 번 만나고 싶다..."고. 내가 그녀의 연락을 받고 찿아간 곳은 이문 시장 가운데 있는 허름한 여관이었다. 그때 그녀는 6살짜리 어린애와 함께 여관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 큰 목제소가 부도가 났고 남편은 감옥에, 자신은 이렇게 길거리로 나앉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오빠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으나 나를 통해 들은 소식에 절망하였다.
나 역시 크게 도움은 안 되었어도 힘 있는 대로 그녀를 도왔다. 그 후 석 달이 지나 그녀에게서 또 급한 연락이 왔다. 내가 찾아간 곳은 창신동에 있는 여관이었다.
내가 그녀를 보는 순간 그녀는 이미 죽음을 앞둔 사람이었다. 급성 폐결핵으로 병원도 못 가고 여관에 누워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며 그녀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 그녀는 "나는 곧 죽을거야... 우리 오빠에게 꼭 소식 좀 전해 줘!..." 하며 울고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할 말을 잃은 나에게 "걱정마, 사람은 언젠가 모두 죽는 거야!... 그리고 유훈아, 너무 고맙다... 너에게 이 말 꼭 해 주고 싶었어...
내가 죽더라도 너는 못잊어... 너를 어떻게 잊겠니? ...그리고 너는 어쩌면 이렇게 인정이 많을 수 있니? ...너는 앞으로 잘될 거야! 하며 유언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나에게 남겨 주고 그 누나는 며칠 못 되어 세상을 떠났다.
벌써 40년이 훨씬 지난 이야기지만 아직도 내 가슴 속에 찡하게 남아 있는 그 누나의 마지막 모습, 그리고 그녀가 애타게 찾고 보고 싶어 했던 그녀의 오빠 '하문성' 형은 그 후 어떻게 살았을까 궁금하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과를 졸업하고 요정, 한식당 그리고 중국집에서 음식 만드는 기술을 배우겠다고 하였던 그 사람 지금은 칠순이 넘었겠지만 그때 그는 학교에서 숫자와 이론을 가르치는 것보다 먼저 배고픔을 달래야 했던 우리들의 지난 6-70년대 가슴 아픈 시절의 젊은이었다고 생각해 본다.
한국 곳곳에서 이곳으로 이민 온 사람들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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