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글을 일을 읽다보면 30여년전 열두살 계집아이로 돌아간 듯 착각을 일으킵니다.
제 고향은 경북, 상주랍니다. 여덟 살 때 서울로 올라와 국민학교에 입학했었지요.
여름, 겨울방학을 모두 내려가 지냈다고 해도 그곳에 산 것은 10년남짓인데, 고향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이 설래고 푼수가 되버리니 이상하지요?
님의 고향처럼 상주도 감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가을이면 집집마다 감을 깎아말리느라
분주하였답니다. 이집 저집의 뜨락에는 곶감을 말리는 모습이 마치 붉은 발을 친 것 같이 예뻤구요. 할머닌 손주들 주려고 감을 납작하게 썰어 채반에 말리시기도 했는데, '감또개'라고 불렀지요. 호박씨, 고구마와 같이 겨울밤 간식거리로 그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곳 사투리, 무시, 배차, 정구지등 참 정겹게 느껴지는군요. 그러고 보니솥뚜껑 엎어놓고 적 부쳐먹기 좋은 채소들이네요. 며칠전 친정에서 제사준비를 거들며 배추적, 무적을 부치는 어머니께 왜 그 옛날 맛이 안날까 물어보았습니다. 옛날에는모든 게 귀해서 배추적 한 줄기 얻어먹으면 입에서 녹는 듯 했거든요. 동네 누구집 제삿날이면 잠 안자고 기다렸던 기억도 납니다.
님의 글들에서 조각난 저의 기억들이 꿰맞추어지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좋은 글, 많이 올려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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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들께 오랬만에 인사 올립니다
엄마의 이
지각할라 퍼떡 가거라 어서! 어머니는 부찌깽이를 손에 쥔체로 대문 밖까지 나왔지요. 송장도 일어난다는 바쁜 일철에 일 때문에 조퇴하거나 결석한 기억이 없는 것은 아버님께서 항상 자식들에게 농사보다는 공부해서 대처에서 열심히 살기를 바랬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래논 안서마지기 집뒤논 집우논 강변논 웅덩보논 나래비논 텃밭 . . .
가을은 이 텃밭에 있는 감이 익는 것으로 시작되지요. 따깨 감, 십자 감, 일본 당감, 이 일본 당감은 우리동네 유일한 당 감으로 씨가 많은 것이 흠이지만 속이 새까만 설탕 같은 당 감으로 동네 아이들한테 인기가 억수로있어 부러움의 대상이었지요. 아부지는 매년 접을 붙인다. 묘목을 심는다고 그루터기를 늘려보려 했지만 정작수확은 없었지요. 텃밭에는 감 외에도 풍게 앵두 고치 배차 정구지 이름 모를 약초 등 우리의 식탁을 빛낼 것들로 가득했지요. 십자 감이 노랗게 벌 붙어 익기 시작하면 홍시를 따기 위해 감나무를 타고 오르지요. 엄마는 그저 우움타고 걱정 서런 눈빛이고요. 그날은 학교를 댕겨오니 어머니께서 머리에 하얀 수건을 쓰고 홀로 밭을 메고 계셨지요. 저는 얼런 당 감나무로 가서 크고 잘 익은 놈으로 골라 바지에 썩썩 문질러 옴마 한테 쑥 내밀었지요.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하던 일을 멈추시곤 감을 한입 베었지요. 아! 그러나 감은 그대로고 버든니의 엄마 이빨만 두 개가 입 밖으로 쑥 나왔지요. 그때의 황당함은 말로할수 없었습니다. 효도를 하려다 옴마 이빨만 뽑았지요. 어문이는 어이없는 웃음만 계속 지어셨지요.
학교가 파하면 소풀 베러가서는 반네기는 안베고 잡풀만 수북히 베어갔다가 아버지께서 못지(단단함?,좋은 )못한 풀을 베어왔다고 나무람 듣고, 게으름이 나서 꾀를 내어 망테에 부풀려서 담아오다 망신도사고, 가정생활(농번기 방학) 3~4일은 정말 즐거웠지요. 학교에 안 가서 좋지만 점심때 학교의 종소리를 듣고 학교로 가면 급식 빵을 듬북 주지요. 학생들이 방학이라 없고 학교 주위에서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학생들만 지급하고 정상등교시에는 받은 만큼 빼지만 그 빵으로 부모님 중참(간식)으로 할 수 있다는 즐거움이 있었지요.
가을 타작을 할 때는 신이 났지요. 홀치기로 타작하여 햅쌀로 제사를 지내고, 탈곡기를 밟거나 짚단을 던지는 기분은 신이 났지요. 그러다 어느 핸가 형님이 손끝을 탈곡기에 다치기도 했지요. 잘 익은 농촌의 들녘은 황금 물결로 출렁이고 아침 이슬 맞으며 고래 논에 가시면 아침 식사하시라고 동생과 합창으로 크게 아부지를 불렀지요. 짧은 하루해에 일은 끝나지 않고 호야등(대한등)을 들고 아버님 마중을 나가면, 세월의 무게만큼 지게에 가득 나락(볏짐)을 지신 힘겨운 아버지의 묵묵한 모습을 보면서 든든함과 쓸쓸함과 안타까움이 마구 겹치기도 했지요. 그 가을의 풍요도 빛 좋은 개살구로 7자식들 제각각 힘닿는 데로 공부시키고 키우시느라 빌어 쓴 빚을 갚고 나면 두지(곡간)는 텅 비고 양식 도 철 넘기기 빠듯하여 고기한번 넉넉히 사 드시지 못하셨으니, 탈곡한 나락 섬을 허망하게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어립니다.
이렇게 가을은 우리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지만 풍요 속에 빈곤과 또 다른 걱정으로 겨울을 맞지요. 예나 지금이나 결실의 계절 가을이 돌아오건만 우리의 마음엔 가을이 없고 오직 어제와 같은 오늘만 있으니 자연이 내뿜는 아름다움과 풍요의 즐거움을 모른 체 세월을 죽이니 우리의 이 뜨거운 가슴의 정한을 내 자식들에게 어떻게 올곧게 전할까 고민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