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사(詩史)에는 우리 국토에 대한 사랑, 우리 자신에 대한 자존감과 자부심을 그린 시가 거의 없습니다…
전남 장성군 필암서원에서 오세영 시인(왼쪽)이 독자들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와 문학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 |
버스가 영광읍내에 들어섰을 때 보니 역시나(?) 읍내의 간판들에서는 '영광'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영광슈퍼부터 영광세탁소까지 영광의 간판들을 읽고 있자니 어느 새 차안에서 "여기에 영광도서 지점 하나쯤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스개가 나돌고 있었다. 동보서적이 오래도록 주최하고 여러 모로 후원도 아끼지 않고 있는 이 문학기행에서 영광도서가 이렇게 화제로 떠오른 것도 처음일 테다. 두 서점은 부산을 대표하는 향토 대형서점이다. 웃음을 섞어가며 "이렇게 찾아주시니 영광" "이렇게 불러주셔서 영광" 해가며 영광지역 문학인들과 이번 문학기행 참가자들이 첫 인사를 나눈 곳은 영광읍내 도동리의 조운 선생 생가였다. 조운(1900~1949) 시인은 한국 시조문학의 대가로 꼽히는 영광 출신의 월북 문학인. 소박하지만 어여쁘게 낡아가는 맛이 느껴진 조운 생가에서 문학기행 일행 40여 명은 이곳의 궁중요리전문가 최윤자 씨가 특별히 내놓은 전통다식과 다과를 맛보았다. 현지 안내를 맡아준 영광의 장진기 시인이 주선한 자리였다. 호남의 인심과 예술에 대한 대접은 과연 따뜻하다.
영광·장성 문학기행의 주인공 오세영(66) 시인을 만난 것은 이렇게 마음이 따뜻해진 뒤였다. 영광에 왔으니 영광의 명승지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처음 도착한 자리라는 법성포 근처 백제불교 도래지로 향하는 버스에 오 시인이 함께 올랐다. 천 개 쯤은(?) 되어 보이는 법성포 포구의 굴비상회 간판숲을 벗어나자 법성포의 점잖은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땅도 내 고향도 새롭게 보여"
'한강은 흐른다'를 낭송하는 오세영 시인(오른쪽)과 '환경운동 하는 가수' 이기영 교수. | |
이날 해거름께 이번 문학기행의 마지막 행선지였던 장성의 필암서원에서 오 시인이 들려준 인상 깊은 문학 이야기를 미리 당겨쓰면, 사연은 이렇다. "유복한 지주 집안이던 외가에서 나는 왕자처럼 자랐다. 유복자여서 더욱 아끼고 귀여워해줬을 것이다. 그러나 초등학교 때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좌익에 연루돼있던 외가의 친척들로 인해 집안은 갑자기 몰락한다. 가난과 외로움과 방황이 몰려왔고 그 경험이 나를 시인의 길에 들어서게 한 것 같다."
그러니 그는 시집을 낼 때 '고향'을 기록해야 할 때가 되면 '출생은 영광, 자란 곳은 장성과 전주'로 따로 써낼 정도로 고민을 했다 한다. 하지만 백제 불교도래지에 도착해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해 들려줬다. 그 변화의 고갱이는 '우리 땅'에 대한 생각의 진화였다. 오 시인은 지난 1월 '임을 부르는 물소리 그 물소리'(랜덤하우스)라는 시집을 냈다. 지난해 서울대 국문과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하고 그간 맡아왔던 한국시인협회장 자리도 내놓으면서 새 기분 새 뜻을 담아 내놓은 시집이었다. 그런데 이 시집에 실은 100여 편의 시들은 제목이 모두 우리나라의 지명이다. '백두산' '지리산' '압록강' '마라도' 하는 식이다.
"나이가 드니 우리 산천, 우리 국토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어요. 더욱 사랑하게 된 것이죠. 우리 시사(詩史)에는 우리 국토에 대한 사랑, 우리 자신에 대한 자존감과 자부심을 그린 시가 거의 없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라를 찬양하는 것 자체가 어용으로 몰렸기 때문이겠죠." 그는 "외세 탓에 우리 근·현대사가 불행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허물로 인해 스스로 자초한 면도 있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힘으로 민주화도 이뤘고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경제대국도 됐다. 자존감과 자긍심을 되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국토 시를 쓰게 된 배경을 말했다. 오 시인은 "한편으로는 내 육신이 나이가 드니까 이런 자각이 생기는 것 같다. 젊은 시절엔 몰랐는데 날 길러준 국토에 대한 자각과 애정이 생긴다. 하지만 만시지탄이다. 좀 더 빨리 이런 생각을 했더라면"이라고도 했다.
일찍부터 여행이 취미여서 숱한 장소를 다녔던 그의 국토 시(그는 여행과정의 소감을 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엄밀히 보면 기행시와는 다르다고 밝혔다)의 일단을 새로 들여다보게 된다. '하늘을 사모하는 마음이/얼마나 절절했으면/이토록 죽음까지 불사한단 말이냐./사무친 여름밤엔/태풍 하나 가슴 속 불같이 끌어안고/거친 격랑으로 울부짖기도 하였다.…아, 그러나 지금은 봄/온 산 초록으로 벙벙히 물드는데,/진달래 산벚꽃 앞 다투어 피는데/말로도 몸으로도 감동이 없다면/난 이제 어쩌란 말이냐/다만/먼 하늘을 향해서/배를 갈라 진실을 내 보일 뿐…'('진도 바닷길' 중) 그는 "그러다 보니 내 고향도 이전과 달리 더 사랑스럽게 보인다. 핏줄이 당기는지 이전엔 장성에 애착이 가더니 요즘엔 내가 태어난 영광에 자꾸 끌린다"고 했다.
불갑사에서 열린 '무작정 콘서트'
이번 문학기행에는 귀한 손님이 동참했다. 이기영 씨다. 그의 원래 직업은 대학교수. 현재 호서대 대학원장을 맡고 있다. 식품공학을 전공한 그는 10여 년 전부터 환경·생태운동에 나섰다. 그는 요즘 교수가 아니라 가수로 더 유명하다. 인터넷에 '이기영 교수'라고 치면 한반도 대운하에 반대하는 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음반을 만들고, 칼럼을 쓰고 있는 그의 근황이 죽 뜬다.
그가 대운하에 반대하며 작곡해 부른 '한강은 흐른다'는 인기 가곡사이트 '내 마음의 노래'(www.krsong.com)에서 1위를 달렸다. '노래하는 환경운동가'로 유명해진 그가 널리 알리고 있는 '한강은 흐른다'의 가사가 바로 오세영 시인의 시다.
'이 가수와 오 시인'은 지난 주말 동북아평화재단이 준비하고 있는 환경행사 준비 차 우포늪에 내려왔다가 함께 영광·장성 문학기행에 참가했다. 오세영 시인이 독자를 만난다는 말을 듣고 이기영 씨가 아무 대가 없이 나선 것이다. 가을이 오면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꽃무릇으로 유명한 영광 불갑사 뜰에서 그렇게 해서 '무작정 콘서트'가 열렸다. 오세영 시인이 나서 '한강은 흐른다'를 낭송하자 이기영 씨는 곧장 노래로 만든 '한강은 흐른다'로 받았다. 친숙하고 힘 있는 노래에 참가자들의 환호가 터져나왔고 오 시인도 "앞으로 여러 행사에서 이 씨와 함께 하게 될 것 같다"며 동참의 뜻을 밝혔다. '오세영과 이기영'이 함께 한 절 뜰의 무작정 콘서트가 이번 기행에서 또 하나의 핵심 행사로 떠오른 이유다.
마지막 방문지인 필암서원에 도착했을 때 해는 지고 있었다. 필암서원은 오 시인의 외가 쪽 조상이자 호남 출신의 조선 유학자로는 유일하게 성균관에 배향된 대유학자 하서 김인후를 모신 곳이다. "나는 어릴 때 다람쥐처럼 이곳 필암서원에서 뛰놀았다"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외롭고 힘들고 내성적으로 자랐지만 끊임없이 자존감을 북돋아줬던 외할머니와 외갓집 식구 덕분에 나는 시인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하는 그의 뒷모습에서 고향의 힘이 느껴졌다.
신문학기행 참가 문의=부산문화연구회 (051)441-0485 동보서적 803-8000 www.문학기행.kr
백제불교도래지를 찾은 오 시인. | |
1942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나 외가가 있던 장성과 전주 등지에서 자랐다. 외가는 인촌 김성수 등을 길러낸 울산 김 씨. 월평초(영광) 수창초(광주) 완산초(전주) 등 초등학교만 3번을 전학다녔고 전주 신흥중·고교를 나와 서울대 문리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해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5 그를 오래 눈여겨 봤던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해 1970년 첫 시집 '반란하는 빛'을 시작으로 '무명연시' '불타는 물' '적멸의 불빛' '봄은 전쟁처럼' '임을 부르는 물소리 그 물소리' 등을 펴냈다. 2006년 '한국대표시인 101인선집-오세영'(문학사상사)이 출간됐다. 문학비평과 학술서적도 여러 권 냈다.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만해상' '한국시협상' 등을 받았으며 서울대 국문과 교수와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