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매물, 급급매물… 서초서도 전세 9억 ‘뚝’
서울 강남권의 대표 고가(高價) 아파트 중 하나인 서초구 반포동 ‘반포자이’ 84㎡(이하 전용면적)는 지난달 14억원에 전세 계약이 체결됐다. 지금은 호가(呼價) 13억원짜리 전세 매물이 여러 개다. 올해 6월만 해도 역대 최고가인 22억원에 전세 거래가 됐는데, 5개월 사이 전세 시세가 40%가량 내린 것이다.
작년 하반기부터 이어진 기준금리 인상 여파로 전세대출 금리가 7%대에 육박하면서 서울 최고 부촌으로 꼽히는 서초구 전세 시장이 출렁이고 있다. 늘어난 이자 부담에 전셋집을 찾는 사람은 없는 반면, 세입자를 구해야 하는 집주인들 간 경쟁으로 인해 호가가 급격히 내리고 있다. 서울 외곽 지역 아파트나 빌라 시장에서나 볼 수 있던 ‘역전세’가 강남 아파트촌에서도 확산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전세 대란 대신 역전세 공포 엄습한 서초
반포자이 인근 다른 단지 상황도 비슷하다.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을 사이에 두고 반포자이와 마주 보는 ‘래미안퍼스티지’ 84㎡는 올해 23억원에 전세로 거래됐지만, 최근 호가는 14억5000만원까지 내렸다. ‘반포리체’, ‘반포써밋’ 등 다른 아파트 단지들도 올해 최고가 대비 7억~8억원씩 전세 호가가 떨어졌다. 한국부동산원 주간 조사에서 서초구 아파트 전셋값 변동률은 9월 말 -0.11%에서 지난주엔 -0.36%까지 하락 폭이 커졌다.
서초구에서 영업 중인 한 공인중개사는 “주변 주요 재건축 단지의 이주가 마무리된 데다가 대출 금리가 가파르게 올라 전셋집을 찾는 사람 자체가 없다”고 말했다. 김제경 투미부동산컨설팅 소장은 “금리가 오르면서 현금을 보유하려는 심리가 강해졌기 때문에 자금 여력이 있더라도 전세 보증금으로 목돈이 묶이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서초구의 전셋값 하락을 두고 토지거래허가구역 규제의 ‘부메랑’이란 해석도 나온다. 2020년 6월 청담·대치·삼성동 등 강남구 인기 주거지역이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묶이면서 전세 끼고 집을 사는 ‘갭 투자’ 수요가 서초구로 몰렸고, 이들의 계약 만료 시점과 전세 시장 침체기가 겹친 탓에 전셋값 하락 폭이 커졌다는 논리다. 비슷한 시기 송파구 잠실동이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묶이면서 갭 투자가 몰렸던 가락동 ‘헬리오시티’ 84㎡도 지난 6월 15억8000만원(실거래가)에서 최근 8억원대(호가)로 전세 시세가 거의 반 토막 났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2020년 8월 주택임대차법 개정 여파로 전셋값이 단기간에 급등하면서 갭 투자 수요가 늘어난 것도 최근 전세 시장의 수급 불균형과 전셋값 급락이라는 후유증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과천·성남도 급락…“퇴거자금 대출 부활해야”
인기 주거지에서의 역전세 우려 확산은 서울 강남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경기도에서 가장 거주 수요가 많은 지역도 최근 전셋값이 가파르게 떨어지는 중이다. 과천 ‘센트럴파크푸르지오써밋’(84㎡)은 작년 12억8000만원에 거래됐던 전세가 지금은 7억5000만원에 매물로 나와있고, 성남 ‘산성역포레스티아’도 전세 실거래 최고가(9억5000만원)와 최근 호가의 격차가 4억원이 넘는다. 과천과 성남은 최근 신축 아파트 입주도 많아 전셋값 하락 속도가 더욱 가파르다.
전문가들은 “전셋값 안정은 반가운 일이지만, 역전세가 확산하면 세입자들이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피해를 볼 수 있으므로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특히 2019년 12월부터 금지된 시세 15억원 초과 주택에 대한 전세퇴거자금 대출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의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 27일 15억 초과 주택에 대해 금지됐던 주택담보대출을 내년부터 1주택자에 한해 집값의 50%까지 허용하겠다고 밝혔지만, 전세퇴거자금 대출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이상우 인베이드투자자문 대표는 “지금 상황에서 역전세로 인한 세입자 피해를 막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퇴거자금 대출을 최대한 빨리 부활시키는 것”이라며 “보다 많은 세입자를 보호하려면 퇴거자금 대출에 한해 다주택자나 법인에까지 규제를 풀어주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