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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훈대부(通訓大夫) 옹진 현령(甕津縣令) 증 병조 판서 파령군(坡寧君) 윤공(尹公)의 묘갈명
공의 휘(諱)는 정준(廷俊)이요, 자(字)는 수백(秀伯)이다. 성은 윤씨(尹氏)이니, 그 선조는 파평(坡平) 사람이다. 시조(始祖) 신달(莘達)은 고려 태조(太祖)를 도와 통합삼한공신(統合三韓功臣)에 책훈(冊勳)되었다. 그 뒤에 관(瓘)이 삭방(朔方)을 개척하는 큰 공을 세워서 관직이 태보(太保)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주국(上柱國)에 이르렀으며, 이로부터 대대로 현달한 후손들이 나왔다.
7대조 번(璠)은 정희왕후(貞熹王后)의 고(考)로서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에 봉해졌고, 6대조 사균(士均)은 정난 좌익 공신(靖難佐翼功臣)으로 판공조사 보문각 대제학(判工曹事寶文閣大提學)을 지내고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으며, 5대조 보(甫)는 공조 참판으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파릉부원군(坡陵府院君)에 추봉되었다.
고조 휘 여필(汝弼)은 장경왕후(章敬王后)의 고(考)요 정국 공신(靖國功臣)으로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를 지내고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증조 휘 임(任)은 의정부 좌찬성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조부 휘 흥인(興仁)은 무과에 급제하여 정랑으로 있었는데,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당해 좌찬성 부자가 함께 죽었다가 그 뒤에 신설(伸雪)되었으나 나라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억울하게 여기고 있다.
고(考) 휘 경(瓊)은 동지중추부사이고, 비(妣) 이씨(李氏)는 종실(宗室) 명송수(明松守) 운(芸)의 딸이다. 공은 동지(同知)의 모제(母弟)인 휘 발(
)의 아들로 태어나서 동지의 후사로 들어갔는데, 생모인 유씨(柳氏)는 생원 황(璜)의 딸이다. 공은 신장이 9척이요 상모(狀貌)가 괴위(魁偉)하여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장부(丈夫)임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을 사랑하되 간사한 아첨꾼은 미워하였으며, 술 마시기를 좋아하되 시끄럽게 떠드는 것은 싫어하였다. 함께 노닌 사람들 모두가 호협(豪俠)하고 기절(氣節)이 있는 인사들이었는데, 특히 장군 김응하(金應河)와 풍천(豐川) 박영신(朴榮臣)을 가장 친애하면서 서로 기개(氣槪)로 허여하였다.
무신년(1608, 선조 41)의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 당시에 박승종(朴承宗) 부자(父子)가 대대로 이어 온 교분이 있다고 칭하면서 공을 초청하자 혹 경하(慶賀)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공은 말하기를 “나는 집안이 화를 당한 뒤로 항상 공구(恐懼)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지금 박상(朴相)의 권세가 극성하니, 내가 어떻게 감히 그 집 문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끝내 가지 않았다. 그 뒤 임기가 만료되어 다른 관직으로 승진되어야 할 때에 박(朴)이 병조 판서로 있으면서 공에게 실직(實職)을 부여하지 않고 사과(司果)에 부직(付職)하였다.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 ) 이 상공(李相公)이 북쪽으로 유배당할 적에 임금을 잊지 못하는 내용으로 악가(樂歌) 10여 장(章)을 지었는데, 공이 그 노래를 써서 전하여 비첩(婢妾)에게 부르게 하고 혹 자기가 노래 부르기도 하였다.
공의 족형(族兄)인 안검(安儉)은 이이첨(李爾瞻)의 문객(門客)이었는데, 회음(會飮)하다가 그 노래를 듣고는 말하기를 “자네가 어떻게 감히 이런 노래를 부르라고 아이들에게 시킨단 말인가.”라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형은 광창(廣昌 이이첨의 봉호)을 알고 나는 오성(鰲城)을 흠모하니, 각자 자기의 뜻을 따를 뿐이오.”라고 하면서 또 그 노래를 부르라고 명하니, 안검이 노하여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공이 정도(正道)를 지키면서 화복(禍福)에 동요되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병진년(1616, 광해군 8)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무오년(1618)에 벽동 군수(碧潼郡守)에 임명되었다. 이때 중국 조정에서 군대를 요청하였으므로 공도 여기에 끼어서 가게 되었으나, 요하(遼河)를 건너 군량 수송의 임무를 맡으면서 뒤에 있었기 때문에 패전의 책임은 면하였다.
고을을 다스릴 적에 염근(廉勤)하고 인애(仁愛)하여 온 경내의 칭송을 받았으나, 박엽(朴燁)의 미움을 받아 폄직(貶職)되어 돌아왔다. 이 일이 있고 나서 호서(湖西)의 농장으로 돌아온 뒤로는 도성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것이 몇 년이나 되었다.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 1)의 반정(反正) 뒤에 옹진 현령(甕津縣令)에 제수되었다. 갑자년(1624) 정월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공이 변란 소식을 듣고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순찰사에게 달려가서 평산산성(平山山城)의 군영에 소속되었다. 부원수(副元帥) 이수일(李守一)이 공을 중영장(中營將)으로 삼고는 풍천 부사(豐川府使) 박영신(朴榮臣)과 함께 마탄(馬灘)을 지키게 하였다.
그때 평산 부사(平山府使) 이확(李廓)이 좌영장(左營將)의 신분으로 기탄(岐灘)에 왔다가 공에게 군대를 합치자고 요구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마탄의 수심(水深)이 가장 얕으니 적이 반드시 이곳으로 건너올 것이다. 이곳이 가장 중요한 요충(要衝)이니 떠날 수가 없다.”라고 하면서 왕복하기를 두세 차례나 하였으나, 이확이 성을 내면서 자꾸만 강요하였다.
공이 변란을 당하여 아군끼리 서로 갈등을 빚는 것을 싫어한 나머지 자기 의견을 고수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박영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에게는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고는, 서로 손을 잡고 맹세를 하고서 떠나갔다. 그 이튿날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적이 마탄으로 건너와서 엄습하였다. 이때 중군(衆軍)은 바야흐로 전투 장비를 설치하고 있었는데, 이확이 느닷없이 징을 치면서 달아나자 군중(軍中)이 무너지면서 혼란에 빠졌다.
그리하여 좌방어사(左防禦使) 이중로(李重老)는 물에 뛰어들어 죽었고, 우방어사(右防禦使) 이성부(李聖符)와 이사주(李師朱)ㆍ권호원(權浩源) 등 제장(諸將)이 모두 적의 칼날에 목숨을 잃었다. 공은 박영신과 함께 적에게 붙잡혀 적진(賊陣)으로 끌려갔는데, 이괄이 한명련(韓明璉)과 호상(胡床)에 걸터앉아서 말하기를,
“네가 고립된 군대를 가지고 감히 나를 막겠다는 것이냐.
내가 너의 목숨을 살려 줄 수도 있는데, 네가 어찌 감히 나를 따르지 않는단 말이냐.”
하자, 공과 박공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대의(大義)가 어디에 있느냐가 문제이지 군사의 많고 적음이야 따질 것이 뭐가 있겠느냐. 우리는 너를 따르지 않을 것이니, 너는 빨리 죽이기나 해라. 군사가 많으면 반역을 하고 세력이 약하면 적에게 항복하는 것이 신자(臣子)의 도리이냐. 그리고 너는 일개 무부(武夫)의 신분으로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은 자이다.
부원수(副元帥)와 부원군(府院君)이 너에게는 부족하더냐. 무슨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단 말이냐.”
하였다. 한명련이 성이 나서 소리를 지르며 말하기를,
“네가 포로가 된 몸으로 감히 이렇게 당돌하게 굴 수가 있느냐.”
라고 하자,
공이 또 큰소리로 말하기를,
“명련아. 너는 문화(文化)의 수군(水軍) 신분으로 지위가 순변사(巡邊使)까지 이르렀으니, 너에게는 최고의 영광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도 감히 나라를 저버린단 말이냐. 내가 대대로 국록을 받은 집안의 후손으로서 차마 역적에게 허리를 굽히겠느냐.”
하였다.
그리고는 공이 바야흐로 계속 말하여 꾸짖으려고 하였는데, 그때 적의 칼날이 그만 공의 오른쪽 팔을 절단하고 말았다. 박공이 이 광경을 보고는 눈을 부릅뜨고 큰소리로 말하기를,
“역적 이괄아. 네가 이미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고는 또 의사(義士)까지 죽인단 말이냐. 창천(蒼天)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데, 어떻게 이와 같이 할 수가 있단 말이냐.”
하였다.
이괄은 이 말을 듣고도 그다지 성내는 기색이 없었다. 그런데 이수백(李守白)과 기익헌(奇益獻)은 모두 평소에 공과 박공을 흠모하던 자들로, 처음에는 두 사람을 얻은 것을 기뻐하다가 두 사람 모두 굴복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한명련과 함께 죽이자고 극력 청하였다. 이에 공과 박공이 노하여 더욱 엄하게 꾸짖었는데, 해를 당할 때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입에서 말을 그치지 않았다.
공의 노복(奴僕)인 결이(玦伊)는 담력이 있어서 공이 사랑하며 언제나 곁에 두곤 하였다. 그런데 결이가 공이 죽는 것을 보자, 공이 타고 다니던 말을 옹진(甕津)의 관인(官人)에게 맡기면서 말하기를 “나에게 이 말이 있으니 내가 도망쳐서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공께서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내가 어떻게 차마 혼자서 살 수가 있겠는가. 돌아가서 이 말을 부인에게 전해 달라.”라고 하고는, 마침내 통곡하며 물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공의 부인은 왕자(王子) 경녕군(敬寧君)의 4세손인 중경(仲慶)의 딸이다. 부인이 옹진에서 공의 시신을 수습하여 경성에 온 뒤에 비국(備局)에 정소(呈訴)하여 공의 사절(死節)을 아뢰니, 병조 참판을 추증하고 파령군(坡寧君)에 봉하였으며, 관원을 보내 제사를 올리게 하고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내리게 하는 한편, 가족을 보살펴 주고 급복(給復)하게 하였다. 이 밖에 옹진의 인사들도 진소(陳疏)하여 공에 대한 사실을 위에 고하였다.
갑술년(甲戌年, 1634, 인조 12) 봄에 방어사 이중로(李重老)의 아들인 문웅(文雄) 형제와 박풍천(朴豐川)의 아들인 지병(之屛) 형제가 도성 안에서 이수백의 목을 베고는 그 머리를 가지고 대궐에 가서 스스로 청죄(請罪)하였다. 부인이 수성(隋城 수원(水原) )에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는 곧장 경성으로 달려가 금오문(金吾門) 밖에 숙소를 정하고 주찬(酒饌)을 마련하여 그들을 대접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풀려 나온 뒤에는 친척처럼 대우하면서 말하기를 “하늘에 맺힌 나의 원통한 심정을 풀어 주었으니, 내가 땅속에 들어갈 때까지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두 집안의 자제들도 마루에 올라가서 마치 부인의 자제처럼 절하며 문후(問候)하였다.
병술년(丙戌年, 1646, 인조 24)에 소후(所後)의 아들 제(隮)를 연산 현감(連山縣監)으로 삼고, 역적을 토벌한 공로를 인정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錄勳)하는 한편, 공에게 병조 판서를 추증하였다. 계사년(癸巳年, 1653, 효종 4) 봄에 연신(筵臣)의 진계(陳啓)에 따라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제(隮)는 3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지헌(之憲)과 지한(之翰)과 지익(之翊)이고, 딸은 진사 김익경(金益炅)에게 출가하였으며, 하나는 어리다. 지헌은 3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공에게 측실 소생의 자식이 있으니, 아들은 승(陞)이고, 딸은 만호(萬戶) 김여준(金汝俊)에게 출가하였다. 승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첨사(僉使) 유환연(柳煥然)이 사위이다.
공이 죽을 때에 나이가 45세였다. 그해 11월 9일에 고양(高陽) 향동(香洞)의 손좌건향(巽坐乾向)의 언덕에 안장하였으니, 이곳은 바로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부인의 묘소 옆이다. 제(隮)는 일찍이 낭료(郞僚)로 서로 알고 지낸 사이였는데, 하루는 참의 김후 익희(金侯益熙)가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비문을 청하였다.
내가 이전에 공을 알지는 못하였지만 그 행장을 보니 나름대로 장하고 의롭게 여겨지기에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삼가 사적(事蹟)을 차례로 적고 명(銘)을 붙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지닌 떳떳한 양심은 / 人有秉彝
태어날 때 하늘에서 받은 것 / 受之於天
그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 原夫厥初
누군들 그런 마음이 없으랴만 / 誰則不然
오직 이익에만 골몰하다 보면 / 惟爲利汨
외물을 좇아 옮겨가기 마련이라 / 從物以遷
그래서 대의의 길을 걷는 사람은 / 故循乎義
자신의 목숨도 버릴 수 있지만 / 身命可捐
오직 이익만 중시하는 사람은 / 唯利是重
시역하는 일도 쉽게 따르나니 / 弑逆從焉
시초는 여기에서 나뉘어서 / 其分在此
결과는 하늘과 땅처럼 되느니라 / 其歸天淵
열렬하였도다 우리 윤공이여 / 烈烈尹公
천성적으로 호걸스러웠나니 / 天挺豪英
생선과 웅장의 취사선택이 / 魚熊取舍
평소부터 매우 분명하였도다 / 素辨甚明
반란 군대가 졸지에 일어나서 / 叛兵卒起
나라가 온통 경악하는 가운데 / 擧國震驚
바람에 쓸리듯 대를 쪼개듯 하여 / 風靡刃迎
그들의 앞길을 막을 수 없었어라 / 兵不留行
공은 일개 현령의 신분으로 / 公一縣吏
거느린 군사도 보잘것없었으니 / 百十殘兵
강약의 형세를 비교해 본다면 / 强弱之勢
맹분과 어린아이였다고나 할까 / 孟賁兒嬰
군중이 무너지며 포로로 잡혀 / 軍潰而止
칼날이 번뜩이는 적진 속에서 / 攢刃雲橫
역적의 죄를 열거하여 꾸짖으며 / 數賊之罪
털처럼 가볍게 죽음을 여겼어라 / 視死毛輕
옛날 당나라 고경은 / 昔唐杲卿
적을 꾸짖다 순국하였는데 / 罵賊身戕
천년토록 역사에 기록되어 / 竹帛千年
꽃다운 향기를 지금도 전하노라 / 咸仰馨香
공의 의지와 절개를 살펴보건대 / 觀公志節
세대는 달라도 지향은 같았나니 / 異世同方
한 번 죽는 것을 감수하고서 / 甘於一死
만고토록 강상을 수립했나니라 / 萬古綱常
관직을 추증하고 정문을 세우는 등 / 贈官表閭
은혜와 영광이 이미 지극하였나니 / 已極恩光
공이 이룩한 사적과 성명은 / 事蹟聲名
천지와 함께 길이 전해지리라 / 天壤俱亡
내가 공의 사람됨을 듣고 나서는 / 我聞其人
공경하고 감탄하며 잊지 못하겠기에 / 敬嘆不忘
공의 묘소 앞에 이 시를 새겨 / 刻詩墓前
영원토록 후세에 보이려 하노매라 / 以示茫茫
[각주]
[주01] 중국 …… 되었으나 :
명나라가 요동(遼東)을 침범한 후금(後金)을 토벌할 때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자,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이 1만 3000의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던 심하(深河)의 전역(戰役)에 종군한 것을 말한다. 당시에 강홍립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전군을 이끌고 후금
에 항복하였다.
[주02] 생선과 웅장의 취사선택이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생선 요리도 내가 원하는 것이요, 곰 발바닥 요리도 내가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를 동시에 얻을
수 없다면, 나는 생선을 버리고 곰 발바닥을 택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것이요, 의리도 내가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를 동시에 얻을 수 없다면, 나는 삶을 버리고 의리를 택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
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03] 맹분(孟賁) : 전국(戰國) 시대 제나라의 유명한 용사인데, 맨손으로 쇠뿔을 뽑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주04] 고경(杲卿) : 당나라의 상산 태수(常山太守) 안고경(顔杲卿)을 가리킨다. 당 현종(唐玄宗)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자 불
리한 상황 속에서도 6일 동안 밤낮으로 격전을 벌이다가 마침내는 식량과 화살이 떨어져 성이 함락되면서 포로로 붙잡혔는데, 갖은
악형(惡刑)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서 혀가 끊어질 때까지 준열하게 꾸짖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新唐書 卷192 顔杲
卿傳》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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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윤정준尹廷俊 墓碣銘[趙翼]
公諱廷俊, 字秀伯, 姓尹氏, 其先坡平人也。 始祖莘達, 佐高麗太祖, 冊統合三韓功臣。 其後瓘有開拓朔方大功, 官至太保、門下侍中、上柱國, 自是世有顯人。 七代祖璠, 貞熹王后考, 坡平府院君: 六代祖士昀, 靖難佐翼功臣、判工曹事、寶文閣大提學、鈴平君: 五代祖甫, 工曹參判、贈領議政、坡陵府院君: 高祖諱汝弼, 章敬王后考, 靖國功臣、領敦寧府事、坡原府院君: 曾祖諱任, 議政府左贊成、贈領議政: 祖諱興仁, 武科, 正郞。 乙巳士禍, 贊成父子俱死, 其後伸雪, 而國人至今冤之。 考諱瓊, 同知中樞府事。 妣李氏, 宗室明松守芸女也。 公以同知母弟諱
之子爲同知後。 妣柳氏, 生員璜女也。
公身長九尺, 狀貌魁偉, 望之知其爲丈夫也。 愛人而疾姦佞, 好飮而不讙譁。 所與遊皆豪俠氣節之士, 金將軍應河、朴豐川榮臣最親愛, 以氣槪相許。 中戊申武科, 拜宣傳官。 時朴承宗父子稱有世分, 招之。 人或慶之, 公曰: “我禍家之後, 心常恐懼。 朴相權勢極盛, 何敢跡於其門?” 終不往。 及仕滿當陞遷, 朴以兵判不與實職而付司果。 鰲城李相公之北遷也, 以戀闕之意, 作歌十餘章, 公書傳之, 使婢妾唱之, 或自歌之。 其族兄安儉, 爾瞻客也。 因會飮聞其歌, 曰: “君何敢敎兒此曲耶?” 公曰: “兄知廣昌, 我慕鰲城, 各其志也。” 又命歌之。 儉怒起去, 其守正不動於禍福如此。 丙辰, 陞通政。 戊午, 拜碧潼郡守。 是時天朝徵兵, 公與往渡遼, 以運芻之任在後, 不及於敗。 居官, 以廉勤、仁愛, 爲一境所頌, 忤朴燁貶歸。 自是因下湖莊, 絶跡都下者累年。
癸亥反正之後, 除瓮津縣令。 甲子正月, 李适叛。 公聞變, 卽領兵赴巡察營平山山城。 副元帥李守一以公爲中營將, 令與豐川府使朴榮臣守馬灘。 平山府使李廓以左營將來岐灘, 要與合兵。 公謂“馬灘最淺流, 賊必由此渡。 此最要害處, 不可去”, 往復再三, 廓怒强之。 公惡臨難相違異, 不能固守己見, 謂榮臣曰: “吾兩人有死而已。” 握手與相誓而往。 其明日未明, 賊由馬灘渡來襲之。 衆軍方設戰備, 廓遽打金走, 軍中潰亂。 左防禦使李重老赴水死, 右防禦使李聖符及諸將李師朱、權浩源等皆死於賊鋒。 公與朴被執至賊陣, 适與韓明璉據胡床, 謂曰: “汝以孤軍敢拒我耶? 吾貸汝命, 汝安敢不從?” 公與朴公大聲曰: “大義所在, 衆寡何論? 吾不從汝, 汝其速殺。 兵多者叛逆, 勢弱者降賊, 臣子道耶? 且汝以武夫受國厚恩, 副元帥、府院君於汝不足耶? 何故叛也?” 明璉厲聲曰: “汝身爲俘虜, 敢爾唐突乎?” 公又大聲曰: “明璉! 文化水軍位至巡邊, 於汝極矣。 敢負國乎? 我以世祿之人, 忍拜逆豎乎?” 公之言方奮於口, 而賊刃已斷右臂矣。 朴公見之, 瞋目大聲曰: “适賊旣負國恩, 又殺義士耶? 蒼天在上, 何若是乎?” 适不甚怒。 而李守白、奇益獻皆素慕二公者, 初則喜得二公也, 及見其不屈, 遂與明璉力請殺之。 二公怒罵愈厲, 至遇害而猶不絶口。 公奴玦伊有膽力, 公愛之, 常不離側。 見公死, 以公所騎馬, 托瓮津官人曰: “吾有此馬, 足以逃生。 而我公至此, 吾何忍獨活? 歸以此馬納于夫人。” 遂痛哭赴水死。
夫人, 王子敬寧君四世孫仲慶女也。 自瓮津收公尸, 至京呈備局, 白其死節, 贈兵曹參判、坡寧君, 遣官賜祭, 賜葬需, 恤家給復。 瓮之人士, 又陳疏以白之。 甲戌春, 李防禦重老之子文雄兄弟、朴豐川之子之屛兄弟, 斬守白於都中, 持其首詣闕, 自請罪。 夫人在隋城聞之, 卽馳至京城, 舍於金吾門外, 備酒饌以供之。 旣出, 待之如親戚, 曰: “雪吾極天之痛, 詎忘入地之前?” 二家子弟升堂拜候如子弟。 丙戌, 所後子隮爲連山縣監。 以討逆功錄原從, 又贈公兵曹判書。 癸巳春, 因筵臣陳啓, 命豎旌門。
隮生三男二女: 之憲, 之翰, 之翊。 女適進士金益炅, 其一幼。 之憲生三男, 皆幼。 公有側室子曰陞。 女適萬戶金汝俊, 有一女, 僉使柳煥然, 其壻也。 公死時, 年四十五。 其年十一月九日, 葬于高陽香洞巽坐乾向之原, 卽坡平府院君夫人墓側也。 隮嘗以郞僚相識, 一日以參議金侯益熙之狀請碑文。 余未及知公, 而觀其狀, 竊壯義之, 不敢辭, 謹次其事, 而係以銘。 銘曰:
人有秉彝, 受之於天。 原夫厥初, 誰則不然? 惟爲利汩, 從物以遷。 故循乎義, 身命可捐。 唯利是重, 弑逆從焉。 其分在此, 其歸天淵。 烈烈尹公, 天挺豪英。 魚熊取舍, 素辨甚明。 叛兵卒起, 擧國震驚。 風靡刃迎, 兵不留行。 公一縣吏, 百十殘兵。 强弱之勢, 孟賁兒嬰。 軍潰而止, 攢刃雲橫。 數賊之罪, 視死毛輕。 昔唐杲卿, 罵賊身戕。 竹帛千年, 咸仰馨香。 觀公志節, 異世同方。 甘於一死, 萬古綱常。 贈官表閭, 已極恩光。 事蹟、聲名, 天壤俱忘。 我聞其人, 敬嘆不忘。 刻詩墓前, 以示茫茫。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