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배들은 행위로 효과가 얻어진다.
올바른 지식을 숭배라고 표현한 뒤, 신은 올바른 지식을 찬미하기 위해 다른 종류의 숭배들을 계속하여 열거한다.
25. 어떤 요기들은 데바(하위의 신)들에게 물질적 공물들을 바치기를 선호한다. 소수의 사람들은 나의 은총으로 절대자인 신의 불에 그들 자신을 바친다.
행위에 헌신하는 어떤 요기들은 데바들에게만 헌신으로 오로지 숭배 의식을 행한다.
반면에, 절대자인 신을 아는 다른 사람들은 나(아트만)에 의해 나(아트만)를 신의 불 속에 숭배 공물로 바친다.
후자의 숭배 의식에서 공물은 나(아트만)이다.
왜냐하면 ‘숭배’는 나(아트만)의 동의어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나(아트만)는 실제로는 신과 하나이지만, 그에게 덧씌워지는 모든 속성들을 가진 조건들에 의해 제한된다.
나(아트만)의 이 공물은 나(아트만)에 의해 신(여기에서는 그 공물이 바쳐지는 장소인 불로 표현되었다) 속으로 바쳐진다.
다음 구절에서 그것을 묘사한다.
“신은 실재이며, 의식이고, 무한이다.” (타잇티. 우. 2-1)
“신은 의식이고, 희열이다.” (브리. 우. 5-9-28)
“신은 모든 존재들에 의해 즉시 인식되며, 모든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나(아트만)이다.” (브리. 우. 3-2-1)
신은 배고픔과 목마름 같은 세상적인 존재의 특성이 전혀 없으며, 경전에서 “그것은 그와 같지 않으며, 그것은 그와 같지 않다.”(브리. 우. 4-4-27)라고 가르친 것처럼 어떤 특정한 형태로 상상할 수가 없다.
제한된 나(아트만)가 절대적인 신과 하나라는 것을 아는 것은 나(아트만)를 신 안에 숭배의 공물로 바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행위들을 포기하고서 나(아트만)가 신과 하나라는 지식에 언제나 확고부동한 사람들이 행하는 숭배의 행위이다.
제4장 24절에서 묘사된 이런 지식의 숭배는 그것을 찬미하기 위하여(제4장 33절) 여기에서 데바들의 숭배 및 다른 것들과 함께 언급되었다.
26. 어떤 요가 수행자들은 듣기와 같은 감각들을 제어의 불들 속에 있게 하여, 감각 대상들과의 접촉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 역시 숭배의 행위이다. 또 어떤 이들은 순수하고 금지되지 않은 감각 대상들에게만 향하게 한다.
어떤 요가 수행자들은 듣기와 그 밖의 감각들을 제어의 불들 속에 바친다.
그들은 항상 감각들을 제어하는 데 열중한다.
반면에, 다른 이들은 감각의 대상들을 감각의 불들 속에 숭배 공물로 바친다.
다시 말해, 그들은 감각들을 오로지 금지되지 않은 감각 대상들에게만 향하도록 하는 것을 숭배 행위로 간주한다.
27. 어떤 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신 즉 나(아트만)에 집중할 때, 감각들과 호흡은 기능하기를 그친다. 감각들과 호흡은 그것들의 원인 안으로 흡수된다.
각자의 몸 안에 있는 프라나 즉 생명의 공기의 작용은 팽창과 수축 등이다.
감각들과 생명의 공기는 요가 수행자가 마음을 나에 집중하는 동안 완전히 해체된다.
28. 어떤 이들은 자선으로 물질적 부를 나누고, 어떤 이들은 고행들을 하고, 어떤 이들은 라자 요가 수행을 하고, 어떤 이들은 경전들을 공부하여 지식을 기른다.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가치 있는 물질을 포기함으로써 숭배한다.
어떤 사람들은 고행하여 숭배하고, 어떤 사람들은 프라나(생명의 힘)의 조절과 외부 대상으로부터 마음을 거두어들임(프리티야하라)과 같은 훈련들을 포함하는 요가 수행을 숭배로 바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리그 베다와 같은 베다 원문들을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숭배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경전들의 내용을 연구함으로써 숭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