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마음의 보물창고 열쇠를 잃고 남보고 열어 달라고
“자기가 자기를 믿지 못하면 마음의 열쇠를 받을 수 없다.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보궁의 열쇠를 맡기겠는가.
내 속에 칠보가 가득 차 있으니 못났다는 생각, 잘났다는 생각,
다 버리고 자기를 믿어라. 자기야말로 안 되는 것도 되게 할 수 있다.
‘되게 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면 돌 위에 세워 놓아도 산다.
자신의 본래 모습인 자아, 주인공을 철저히 믿어라.
절실한 마음으로 주인공을 믿고 거기에 모든 경계를 되돌려 놓아라.
주인공은 어디 있는가?
인격체인가? 텅 빈 것인가? 하는 따위의 생각은 필요 없다.
오로지 간절한 믿음만을 앞세워라.
수억 겁 이전부터 자신을 끌고 다니며 공놀이를 해 온 근본을
어째서 믿지 못하는가?”
자신을 믿으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체로 의아해 한다.
날 믿으라니? 내게 무슨 대단한 능력이 있다고?
이 세상에 잘난 사람 능력 있는 사람도 많겠지만
인간의 능력엔 한계가 있게 마련인데 믿어 봤자지 별 수 있겠나?
그런 생각부터 떠올린다.
그래도 믿을 곳은 자신밖에 없다고 하면
또 ‘제겐 원력이 없어서'하든가
아직 공부가 덜 되어서….'라고 대꾸한다. 일단은 맞는 말이다.
사람의 능력이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뛰어난 사람이라도
그 능력엔 한계가 있다. 멀리 볼 것 없이 자신의 능력으로
제 욕심을 다 채우지 못하는 사실만 보아도 그렇다.
하고 싶은 게 좀 많은가? 하지만 내 힘으로 그걸 다 이룰 수 없으니
자기가 자기를 믿어본들 ‘그게 그것'일 테지.
그러기에 사람들은
‘어디 능력자는 없나?' ‘어디 영험한 곳은 없나?’하고
찾아 헤메게 된다. '도와주십시요.’ ‘살펴주십시요.’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유위법으로 보면 인간능력에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개인적인 차이도 현격하다.
그래서 더 많은 능력을 원하게 마련이고
그것을 키울 방도를 따라 노력도 하게 된다.
나보다 나은 능력자를 찾아 그에게 의지해 보기도 한다.
급기야는 ‘전지전능한 분’에게 매달리고 싶어진다.
하느님! 부처님! 보살님! 하게 되고 여기 저기 찾아다니며
빌어도 보고 갈구도 해본다. 그러니 자기를 믿을 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자기가 자기를 믿지 못하면 마음의 열쇠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은 유위법이 아닌 무위법을 이름이다.
제 육신을 갖고 뛰는 데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달리기를 잘하는 선수라도 육신을 갖고는
1초에 10미터를 뛰기도 어렵다.
하지만 마음으로야 1초에 달나라인들 못 가겠는가.
무위법엔 한계가 없다. 시간의 한계도 없고 거리의 한계도 없다.
그야말로 즉각 이다. 한 생각 일어나는 찰나에
마음은 어디든 갈 수 있다. 걸리는 게 없다.
안 통하는 데가 없다.
그런 마음을 누구나 갖고 있으니 바로 보배를 지니고 있음이요
스스로 무한 능력자인 것이다. 우리 모두가 다 가능성을 갖고
태어났다는 말은 바로 마음 법을 이른 것이다.
일체유심조라고 할 때의 그 마음은 아무런 걸림이 없어
그야말로 무애자재한 마음을 말한다.
그런 마음이니 누구나 다 제 속에 칠보로 가득 찬
보궁이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
보궁은 닫혀있다. 하지만 잠겨있다는 것은 열쇠만 있으면
누구라도 열 수 있다는 뜻이다.
열쇠만 손에 넣으면 무한량의 보배가 내 발 앞에,
내 치마폭에 쏟아져 내리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귀가 닳도록 이치가 그렇다고 말해주어도
믿으려 하질 않는다.
믿질 않고 밖으로 찾아 헤메인다.
동냥 버릇이 몸에 배기라도 했다는 것인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어쩌면 그렇게 헤메려 할 것이다.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을 듣고 온 산천을 헤메다가
지쳐서 돌아왔더니 바로 내 집 뜰 앞에 매화가
벙그러져 있더라는 얘기와 같다.
오늘의 자기를 여기 이렇게 존재하도록 만든 그 주인공.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선 그 주인공을 믿고 봐야지 달리 무엇을 믿겠는가.
예까지 끌고 왔으니 내일도 끌고 갈 것이거늘
그 사실조차도 믿지 못한다면 무얼 믿겠는가.
가서 빌면 청을 들어주고 내 대신 일을 해준다는 확약이라도 받았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건 제 생각으로 제가 그렇게 믿는 것에 불과하다.
거길 믿으면서 자기 자아, 주인공은 왜 못 믿는가?
출처 : 염화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