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왕직(「가톨릭 교회 교리서」 894~896, 908~913항)
다스리는 직무, 왕직
남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섬김으로 다스리는 직무 ‘왕직’
극기와 거룩한 생활 전제돼야
윌리엄 다이스의 ‘착한 목자’. 왕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녀가 순종할 때까지 자녀를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이기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극기와 거룩한 생활이 전제돼야 한다
부모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 홀로 남겨진 남매가 있었습니다. 동생은 부모 사고의 충격으로 갑자기 말을 못 하게 되었습니다. 남매는 큰아버지에게 맡겨졌는데 폭력과 학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고민하던 누나는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선생님은 먼 지방에서 밤새 차를 몰고 와 아이들을 직접 키우기로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남매에게 자신을 그냥 “엄마!”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누나는 금방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동생의 입에서는 차마 엄마란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동생은 조금씩 비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고 중국집 배달원을 하겠다고 집을 나갔습니다.
선생님은 매일 학교가 끝나는 대로 중국집으로 찾아가 아이를 기다렸습니다. 아이는 짜증을 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선생님이 중국집으로 가던 길에 교통사고를 당하여 생명이 위태롭게 됩니다. 선생님은 석 달 동안 입원해야 했습니다. 동생은 선생님을 극진히 간호하였습니다. 선생님은 동생에게 “도와줘서 고마워”라고 말했습니다. 동생이 그때, “엄마는 아들한테 미안한 게 왜 그렇게 많으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동생이 처음으로 뱉은 “엄마!”란 말에 선생님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누나는 커서 공무원이 되었고 동생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엄마가 피붙이도 아닌 자신들을 위해 천사가 되어주었듯, 두 남매도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작은 영혼들에게 촛불을 밝혀주는 작은 천사가 되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MBC 라디오 ‘여성시대’ 애청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선생님은 자신이 낳지 않은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주었습니다. 그 아이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아깝지 않게 자신을 내어주었습니다. 결국, 아이들은 선생님 뜻에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다스리고 길들이는 직무를 ‘왕직’이라고 합니다. 세속적인 왕직이 아니라 발을 씻어주는 봉사로써 누군가를 길들이는 직무입니다.
참다운 왕직은 자신을 다스리는 것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다스리지 않고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육체를 복종시키고 격정에 휩쓸리지 않고 영혼을 다스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주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다스릴 능력이 있기 때문에 왕이라고 불릴 만합니다.”(908) 자신을 이기지 못하면 죄에 떨어집니다. 죄의 노예는 참 자유인이 될 수 없기에 왕직을 수행할 능력을 잃습니다. 왕직은 우선 자기 자신의 왕이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제자들에게 왕다운 자유의 선물을 주시어 제자들이 ‘극기와 거룩한 생활로 자기 자신 안에서 죄의 나라를 완전히 쳐 이기게 하셨습니다.’”(908)
왕직을 주교들이 수행할 때는 ‘착한 목자’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습니다. “주교는 ‘무지하여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896) 이런 왕직이 평신도들에 의해 보여질 때는 위 예시처럼 ‘어머니’ 모습을 보입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세상에 피를 쏟아 그들을 길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녀가 순종할 때까지 자녀를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이기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극기와 거룩한 생활”(908)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왕직은 세상 창조 때부터 아담에게 주어진 임무였습니다.(창세 1,28 참조) 아담에게 자녀를 많이 낳으란 명령은 가르치고 길들이는 왕이 되라는 명령과 같습니다. 또 아담에게 동물처럼 사는 이들을 새로 태어나게 하여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는 일을 시키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창세 2,19 참조) 예수님께서 새 아담으로서 당신 피로 마리아 막달레나의 죄를 씻어주시고 그녀의 왕이 되셨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알아봅니다.(요한 20,15) 이는 예수님께서 이름을 지어주시는 에덴동산 새 아담이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죄의 종으로서 동물과 다름없었던 그녀를 “마리아야!”(요한 20,16)라고 부르십니다.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 전파의 새로운 소명을 주십니다.(요한 20,17 참조)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그들을 당신 신하로 만드셨듯이, 우리도 이웃들의 발을 씻어주며 더 많은 자녀를 거느린 왕이 되어야 합니다.(루카 19,11-27 참조)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가톨릭신문, 2020년 09월 20일자]
88. 봉헌생활(「가톨릭 교회 교리서」 914~945항)
수도자들은 순결한 그리스도 신부로서 교회의 모델
욕망으로 빚은 절망서 벗어나 청빈·정결·순명 복음삼덕 통해 그리스도 증거자로 사는 것
수도자들은 ‘청빈, 정결, 순명’을 서원합니다. 이 서원이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실 수 있습니다. ‘청빈’은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세상 재물이나 명예에 대한 욕심이 없습니다. ‘정결’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행복만으로 충분하다는 마음’입니다. 정결하지 않은 이들은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쾌락에 빠집니다. ‘순명’은 ‘하느님만을 주님으로 섬기고 순종하려는 마음’입니다. 수도회 장상은 물론이요. 주님 뜻을 전해주는 모든 이에게 순종합니다.
그런데 이 ‘청빈, 정결, 순명’은 ‘순결한 신부’ 덕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혼인했음에도 배우자에게 충실하지 못한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배우자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결하지 못합니다. 배우자에게서 오는 행복으로 충분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배우자 뜻이 하느님 뜻일 수 있음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청빈, 정결, 순명’의 ‘복음삼덕’(福音三德)은 ‘순결한 신부가 되기 위한 덕’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 위한 덕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옆구리에서 나온 성사로 태어난 새 하와입니다. 특별히 수도자들은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 모델을 보여줍니다. 수도자들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 위해 복음삼덕이 왜 중요한지 삶으로 증거합니다. 사람들은 수도자들을 보면 어려운 삶을 산다고 생각하지만,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사랑하는 참 행복을 누립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복음삼덕을 닦는 만큼 커집니다.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고성수도원 수도자들이 시간전례 기도를 바친 뒤 퇴장하고 있다. 수도자들은 청빈, 정결, 순명의 복음삼덕을 삶으로 증거하면서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 모델을 보여준다.
물론 복음삼덕을 서원했다고 바로 청빈해지고, 정결해지고, 순종적일 수는 없습니다. 오랜 본성이 변화하는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아기가 결심했다고 두 발로 바로 걸을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수도자들도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가 되기를 방해하는 옛 본성인 ‘소유욕, 육욕, 교만’과 죽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이를 전통적으로 ‘삼구’(三仇: 세 가지 원수)라 부릅니다.(377항 참조) 이 세 욕망은 마치 외도하는 배우자처럼 그리스도인을 타락시킵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에 속아 이 세 욕망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삼구를 이기지 못하는 상태로 태어나는 데 이것은 원죄 때문입니다.
삼구를 이기고 ‘원초적인 거룩함’(375항)과 ‘원초적인 의로움’(376항)을 다시 회복하려면 무기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친히 광야에서 40일 동안 유혹받으시며 삼구를 이길 세 무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삼덕’입니다. 복음삼덕은 육체 욕망을 이기는 ‘정결’, 재물 욕구를 이기는 ‘청빈’, 그리고 교만 욕구를 이기는 ‘순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1베드 1,4)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복음삼덕으로 삼구를 이기는 이들을 당신 신부로 맞아들이십니다.
수도자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과 싸웁니다. “세속으로부터 더욱 철저하게 격리되어 고독의 침묵과 줄기찬 기도와 참회 고행”(920)을 하는 ‘은수 생활’이 있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표징이 되기 위한 봉헌의 삶을 사는 ‘동정녀들과 과부들’(923 참조)도 있습니다. 복음삼덕을 서원하고 공동생활을 하며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일치의 증거”(925)로 “스스로 구세주의 신부임을 인정”하며 사는 ‘수도자들’이 있고, 세상 속 자신 삶의 자리에서 복음적 권고를 적용하며 살아가는 ‘재속회’(929 참조)도 있습니다. 물론 정식적인 “수도 서원 없이 그 단체에 고유한 사도적 목적을 추구하고 고유한 생활 방식에 따라 형제적 공동생활을 하면서 회헌을 준수”(930)하는 ‘사도 생활단’도 있습니다.
봉헌생활 형태가 이렇듯 다양하지만, 그 공통된 목적은 ‘복음삼덕으로 자기 자신을 이겨 순결한 그리스도의 신부요 증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 모델로 자신을 봉헌한 수도자들은 “선교 활동에 특별히 열중할 의무가 있습니다.”(931) 수도자들이 복음삼덕을 서원할 때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혼인 반지’를 받습니다. 그 혼인 반지를 끼고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얼굴을 찡그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가톨릭신문, 2020년 09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