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요4:9,10>
[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해설>
기성교단의 대부격인 어느 지인으로부터 내게 답신 메일이 날아왔는데
그것은 바로 윗글의 내용을 들어 나를 혼쭐내기 위한 교훈이 들어 있었다.
나에 대한 그 분의 교훈인즉,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인습을 초월한 사랑" 을 보이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사랑이 없고 교만하고 독살스럽다는 뜻이었음).
그렇고 말고, 열번 아니, 백번 천번을 듣는다 해도 인습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그 말이 내 귀에도 싫을 리 없고 언뜻 들으면 참으로 감동스런
옳은 말씀으로 들림에는 틀림없다. 그래서일까? 기성교단은 물론이고
모든 기독교계열의 교단들은 아무 의문의 여지없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인습을 초월한 사랑" 이 정답으로 못박혀 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마치 개로 취급하며 경멸하는 게 일반화
되고 상식화되어 있는 터에 예수님은 그것을 뛰어넘어 사마리아인,
그것도 그 당시 아주 하찮게 여겨졌던 여인과의 대화를 아주 길게
30절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볼 때(나는 짧게 9,10절만 올렸음),
그 기독인 지인은 예수님의 인습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자신의 그 정답이
너무나 흡족하고 뿌듯하고 자랑스럽고 스스로 대견해서,
보무도 당당하고 의기양양하고 득의만만하여 벌써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보좌 앞에 마주하고 앉아 있는 꼴이다.
이 때, 하나님은 그런 기독인들에게 뭐라고 하실까? 당연히 No! No! No!
정답이긴 커녕, 빵점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똥으로 여기고 있다고 이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라기 2:3>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이와 유사한 표현들이 또한 얼마든지 있다.
<예례미아 6:10>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에스겔 17:19>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가
내 맹세를 업신여기고 내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그 죄를 그 머리에 돌리되]
1)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과 함께 제함을 당하는 것이
과거 이스라엘이라고 생각지 말라.
2)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긴 자들이
과거 이스라엘이라고 생각지 말라.
3)하나님과의 맹세(언약의 말씀)를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자들이 과거 이스라엘이라고 생각지 말라.
왜냐면 성경에서 이스라엘백성은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 때까지 실상의
기독교인들을 뜻하고 있는 예언 방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제단은 실상이 아니고 실상에 대한 모형/가상/허상임)
그러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인습을 초월한 사랑” 이라고 주장하는 기독인들의 자랑스런 해설이
왜 하나님의 말씀을 똥으로 여긴 것이 되는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여기서 기독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똥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게 됨)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내용을 모두 말하고자 한다면 엄청나게
뜻 깊은 내밀한 비밀이 숨겨져 있으나, 그 점을 다루기엔 너무
길어지므로 생략하고, 다만 그 당시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비천한
사마리아 여자가 어찌하여 예수님이 주목하는 대화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만 밝히기로 한다.
[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본문글 처럼 유대인은 사마리아인들을 저급집단으로 취급하여 상대를
하지 않았다. 그것도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예수님 당시, 여자들은 사람들의 숫자에 계수되지도 못할 정도로
멸시당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만은 예외로 여자들을 도무지 무시하지
아니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예를 다 들기엔 너무 번거로울 정도로
오히려 여자들을 추켜세워 주고 있었던 기록이 즐비하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미리 알고 그것을 위로하는 뜻에서 값 비싼 향유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수종들므로써 사람들의
원성의 비난과 예수님의 격려의 칭찬을 동시에 들었던 자도 여자였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남자들은 두려워서 아무도 따라가지
못했으나 여자들만 울면서 무리지어 따라갔다.
이 때 예수님은 그 여자들에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라고 말씀하신 것도 알다시피 여자들이었으니, 이는 여자들에게 큰 소명이
있음을 시사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처음으로 나타내
보이신 자들도 여자들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과 관련해서 왜? 여자들은 햇볕 찬란하게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가? 본문처럼, 여자들은 누구를 의미하기에 예수님은 여자와, 그것도
사마리아 여자와 뜻 깊은 긴긴 대화를 하신 걸까?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당시의 여자들이 어떤 의미를 뜻
하는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모두 오늘에 대한 비유임을 명심하시기 바람).
성경은 오늘에 대한 비유임은 명백하지만 그렇다고 고정된 비유가 아니고,
여자이든 남자이든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떤 사물이든 문맥 따라
그 단어의 정체를 풀어야 함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런데 여기 예수님과 관련된 여자들은 최소한 한 무리 집단을 뜻하는데
그 집단이 누군가 하면 진리의 성령이 오시는 마지막 때인 오늘날
재림주가 주시는 새노래를 배워 첫 열매로 택함을 받게 되어 있는
144,000을 뜻하고 있다.
남성시대가 절정을 이루었던 성경기록 당시, 여자들은 그 사실적
역사기록과 제도가 증명해 주듯, 참으로 비천한 약자 중에 약자였다.
그 약자들에게 예수님이 다가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처럼 뜻 깊은
내밀한 대화를 하신다거나,
그 약자 여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곁을 지키며 떠나지
않았던 것 등은 그들이 오늘의 생명길인 좁고 협착한 길을 가는
택한 자들을 뜻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게다가 오늘날의 성경은 그것이 마지막 때를 위한 비유임을 누구나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는 지적 사회가 되었다. 따라서 조금만 정직하다면
성경기록 당시에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여자는 오늘날 진리의 말씀을 찾아 목말라서
이 교단 저 제단에 문전걸식하는 영적 거지 나사로 반열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비유라고 수없이 천명되지 아니했던가?
영적 거지 나사로 반열은 전통/정통파라고 으시대는 주류 기성교단에서
미움 받고 출회 당하여 변방을 떠도는 외톨이들이며 외로운 고아와
과부들로 살아가고 있다.
심령이 가난하여 늘 외롭고 가슴치며 애통해 하면서 사람들에게 더러운
누명으로 불리워져도 달게 받으며 살아가는 죄인덩어리 오늘의
창기와 세리가 누구인가?
길 잃고 헤매는 양 한 마리가 누구인가?
예수님은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남겨두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고 있다. 예수님은 잘났다고 고개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는 자칭 의인 바리세인들을 외면하고
죄인이라고 가슴치는 세리와 창기에게 다가 가신다.
부족함 없는 부자의 연회를 즐기는 연회장을 찾지 않으시고
예수님은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겨 손잡아 이끌어 주신다.
이들은 그동안 많은 고뇌와 영혼의 굶주림에 시달리며 영혼의 먹거리인
양식을 찾아 여기 저기 헤매느라 피 흘린 아픈 상처가 많았고,
성찬을 즐기는 부자교회에서 출회를 당하는 등, 말로 다 할 수 없는
파란만장한 사연이 많았다.
길어지므로 대화내용은 일절 언급하지 않으려 했는데 여기서 한 마디만
살짝 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내용에서
예수님은 여자에게 네 남편을 데려오라 했을 때 여자가
나는 남편이 없다고 했다.
예수님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다고 했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다고 했다. 이렇게 여자에겐 남편이 다섯이건 여섯이건
도무지 없다는 말인데, 이게 무슨 뜻인가?
여자는 오늘날 첫 열매로 택함을 받은 자들을 뜻하고 택함을 받을
자들에게는 그 동안 시대마다 섬겨야할 진정한
브랜드 남편(하나님, 참 진리)이 도무지 없었음을 뜻하고 있다.
시대마다 모두
짝퉁이 남편들 뿐(마지막때 참진리가 오기전까지의 비진들뿐)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란
하나님의 참 진리와 우리의 구원문제가 걸린 중차대한, 살려주는 영의
문제로 알알이 박혀 있는 순전한 “영적 대화” 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만유의 창조주 하나님을 드높여서 기쁘게 섬기는 올바른
신앙자세인 것이다.
그런데 주류 기독교단들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아주 대 만족한 정답으로서 달랑 “인습을 초월한 사랑”
이라고 천명하고 있으니 얼마나 기막힌 세속의 단답형 육적 뇌까림인가?
성경이란 우리를 살려주는 영적 말씀이어야 하는데, 왜 잘났다고 하는
그들은 주야장창 육적 이야기로서 회칠한 무덤들을 쌓고 있는가 말이다.
살려주는 모든 하나님의 영적 말씀을 간파하지 못하고 모두
세속의 육적 이야기로 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을 똥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된다.
“인습을 초월한 사랑” 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세속의 사람들도 얼마든지
도덕적으로 행할 수 있고, 또 마땅히 행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육적
한계를 넘지 못한다. 성경은 세상의 도덕 교과서가 아니다.
인습을 초월한 사랑이 아무리 거룩하게 보인다 해도 그것은 영생을 주는
진리가 전혀 아니고, 그것은
세속 사람들의 칭찬거리에 불과함을 왜 모른단 말인가?
사실 말씀의 뜻을 깨닫고자 하는 데는 아무 노력도 없이 오직 교권
쟁탈전에 혈안이 되어 있는 오늘의 부자 바리세파 기독교단들은
모든 성경 말씀을 영적으로 풀지 못하고 육적으로 나불대고 있으면서
스스로 자화자찬에 빠져 있는 망상가들이 되고 있다.
“인습을 초월한 사랑” 이라고 하면 그리도 멋지게 보이는가?
그렇지만 살려주는 풍성한 영적인 고급한 말씀을
저급한 단답형 육적 말씀으로 둔갑시켜 놓고 있다.
가이사의 것(세속의 육적인 것)은 가이사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살려주는 영적인 것)은 하나님께 주라는 말씀도 있건만…
상상력과 추리력이 그리도 메말라 있단 말인가. 어찌 그리 분별력이 없는가.
비진리 가이사의 우물 안에 빠져서, 그것이 참진리 하나님의 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멱을 감고 있는 자칭 의인들이여,
예수님의 초림에서 오늘날 재림까지 2천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상상력이 제로인 사람들이여,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똥으로 여기고 있는 자들이여,
정신 좀 차리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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