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재세시, 한 비구가 병이 들었다. 스님은 식사를 할 수도 없었고, 옷에 오물까지 묻힐 정도로 거동할 수 없는 상태였다. 몸을 제대로 가늘 수 없었던 스님은 매우 힘겨운 시간을 보내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처님께서 그 사실을 알고 병든 스님을 찾아가 목욕시키고 옷을 갈아입히며, 미음을 준비해 병자에게 먹였다. 여러 제자들이 그 사실을 알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부처님 뵙기를 송구스럽게 여겼다. 이때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모이게 한 뒤,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함께 수행하는 도반들끼리 서로 도와주며, 세심히 보살펴 주어라.”
정각자인 부처님께서 병든 제자의 오물 묻은 옷을 빨아주고 보살펴 주는 장면은 추억의 영상처럼 늘 내 마음 한자락에 머물러 있다. 미얀마(Myanmar)의 밍군 삼장법사도 이런 보살행을 실천하였다(미얀마는 1948년 이래 경률론 삼장 법사 시험을 행하고 있다. 삼장을 모두 암기해야 하고, 이 시험을 통과해야 공식적으로 삼장법사 칭호를 받는데, 지금까지 13명이 배출됨).
삼장법사인 밍곤 사야도가 머물고 있는 인근 지역에 연세가 많은 노스님 한분이 한밤중에 배탈이 나서 고생하고 있었다. 사야도는 그 사실을 알고 병자를 찾아가 직접 오물을 치우고 배탈 난 노스님을 씻겨드린 뒤 가사를 깨끗이 빨아주었다.
부처님이나 사야도의 작은 언행은 진정한 보살행을 보여준 실례라고 본다. 수행의 종교, 실천의 종교인 불교는 수행자가 ‘어떻게 보살의 길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참 종교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살(菩薩)은 보리살타(菩提薩, bodhisattva)의 준말이다.
보리는 깨달음, 살타는 중생으로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이다. 초기불교에서 ‘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전생에 선업(善業)을 닦았던 행자를 지칭했지만, 대승불교에 와서는 자신의 깨달음을 추구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이타(利他)의 수행자로 변화되었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이 과거 전생에 공덕을 쌓아서 금생에 해탈하였듯, 어느 누구나 보리심을 발하고 이타를 실천하는 수행자를 보살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대승불교의 특징 중 하나가 보현보살의 10대원이나 법장비구의 48대원, 약사여래의 12원 등 어떻게 중생을 구원할 것인가(곧, 서원)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역사 속에서 보살의 길을 실천한 몇 분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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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나라 때의 윤주(潤州) 지암(智巖, 577~654)은 선종의 한 일파인 우두종(4조 도신의 제자인 우두법융이 개산한 선종)의 2세이다. 지암은 어린 시절, 또래의 아이들과는 남다르게 사색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소싯적에 이런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현상만을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이 어떻게 삶과 죽음을 알 수 있겠는가?’ 지암은 20세에 무인(武人)의 길을 걸었다. 전쟁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40세에 중랑장(中郞將)이라는 지위까지 올랐다. 어느 해 그는 전투에 참가했다가 전쟁의 참혹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출가를 결심하였다.
당시 지암은 40세가 넘은 나이로 서주 완공산 보월 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출가 후 그는 산 속에서 은둔 생활을 하며 극심한 고행을 하였다. 어느 기록에 의하면, ‘그가 수행하고 있는 곳에는 언제나 호랑이와 늑대가 수호신처럼 따랐다’는 내용이 전한다. 이렇게 지암이 출가해 수행하고 있는 동안 종종 동료들이 깊은 산속까지 찾아와 이런 말을 하였다.
“미쳤느냐, 자네가 뭐가 아쉬워서 이런 산 속에서 고행을 한다 말인가. 그대가 다시 무인의 길을 걷는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다시 세속에 나아가자.”
수차례 찾아오는 벗들이 있었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만년에 지암은 석두성(石頭城) 나인방(癩人坊)에 머물렀다. 하늘이 저주해 내렸다고 하는 나병 환자들과 생활하며 그들에게 진리를 설해주고, 고름을 빨아주었다.
또 병자들이 죽으면 시체를 거두어 화장까지 해주고 성대히 염까지 해주었다. 이렇게 스님은 그들의 버팀목 역할을 하다 78세에 그 곳에서 입적하였다. 입적한 뒤에 스님의 안색은 생전과 똑같았고, 육신도 살아있는 사람처럼 평상시와 같았으며, 머물던 방에는 기이한 향기가 머물렀다고 한다. 또 지암처럼 불교사 한 모퉁이에서 묵묵히 보살의 길을 따른 스님이 있다. 바로 구한말 경허 선사의 제자인 수월(水月, 1855~1928) 스님이다.
수월은 경허 선사의 제자, 삼월(三月, 수월은 상현달, 혜월은 하현달, 만공은 보름달이라고 함)가운데 한 분이다. 스님은 충남 홍성인으로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다가 우연히 탁발승과의 인연으로 29세 되던 1884년 충남 서산군 천장암으로 출가하였다.
이곳은 당시 경허 선사의 속가 형인 태허스님이 상주하던 곳이다. 수월은 출가 이후에도 재가에서 살았던 것처럼 부목이나 다름없이 일만 하였다. 수월스님은 글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경전을 공부한다거나 경전 독송이 쉽지 않았다.
스님이 절에 들어온 지 3년 무렵부터 법당에서 흘러나오는 <천수경> 독송 소리를 듣고 <천수경>을 염하기 시작했다. 수월은 나무할 때나, 밥 먹을 때, 방아 찧는 일을 할 때에도 천수다라니만을 지송하였다. 한번은 얼마나 염송에 몰두했는지 몇 번이나 밥을 태웠다고 한다.
수월이 절에 들어 온지 4년이 지난 무렵, 한밤중에 천장암 주지 스님이 방앗간을 바라보니, 방앗간에서는 불빛이 새어나오고 물이 세차게 물레방아에 떨어지고 있는데 방앗공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방앗간으로 들어가 보니 물레방아 공이 금방이라도 내리찍을 듯이 허공에 매달려 있는데 수월은 돌확 속에 머리를 박고 잠이 들어 있었다. 이 일이 있은 뒤, 수월은 태허를 은사로 음관(音觀)이라는 법명을 얻어 수계를 받았다.
이후, 용맹정진에 들어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면서 천수다라니만을 염했다. 7일째 되는 날 밤, 수월의 몸에서 빛이 얼마나 광열하게 내뿜었던지 아랫마을 사람들이 천장암에 불이 났다고 뛰어 올라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천수다라니 삼매를 증득하였다.
초기불교 보살은 부처님 전생…‘선업’ 닦던 행자
대승불교선 깨달음·중생구제 ‘이타행’ 수행자로
보현보살10대원·법장비구48대원·약사여래12원 등
“어떻게 중생을 구원할 것인가” 서원에 초점 맞춰져
스님과 관련해 몇 가지 전설이 전한다. 하나는 병색이 짙은 병자가 스님을 한번 뵈면 병을 고쳤고, 또 하나는 간도 지방의 포악한 성격을 가진 만주 개가 사람이 지나가면 매섭게 짖는데, 수월스님이 지나가면 짖는 소리를 멈추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실 때, 축생류의 중생까지 법문을 들었던 것처럼 포악한 동물들이 성인의 모습에 감화를 받았다는 점에 있어서는 수월이나 지암에게서 일치한다.
수월은 만년에 중국 간도지방인 왕청현 나자구에 화엄사(華嚴寺)란 작은 암자에 주석하였다. 화엄사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고갯마루 위에 있었다. 스님은 아침 일찍 일어나 짚신을 수십 켤레 삼아 집 앞 처마에 매달아 두면 지나가는 나그네가 짚신을 갈아 신고 갔다.
또한 수월이 나그네를 위해 주먹밥을 만들어 집 앞 샘터에 놓아두면 지나가던 길손이 허기진 배를 채웠다고 한다. 스님은 화엄사에서 보살행을 하다 이곳에서 열반했다.
지암이나 수월은 불교사 전면에 드러나는 분들이 아니다. 민초처럼 살다가 중생과 더불어 보살의 길을 걸은 동사섭(同事攝)의 실천자요, 세속의 영욕을 버리고 진심으로 출가해 정각을 얻은 뒤 중생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제도했다.
즉 화광동진(和光同塵)이요, 십우도에서 마지막 열 번째 그림인 입전수수(入纏垂手)요, 전수(展手, 조동종의 사상중 하나인 동산삼로·洞山三路 중 세 번째, 향상일로·向上一路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중생교화에 힘씀)의 귀감이다.
송나라 때 운문종 승려 자각종색(慈覺宗)은 <좌선의(坐禪儀)> 첫머리에 이런 말을 했다. “무릇 반야를 배우는 보살은 우선 대비심을 일으켜 큰 서원을 세우고 정교하게 삼매를 닦되 중생을 제도해야 할 것이요, 자기 한 몸만을 위해서 해탈을 구하지 말지니라.”
대승불교에서 지향하는 보살의 길은 이렇게 자신의 수행을 완성한 뒤 그 정각을 중생들에게 회향하는 일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중생을 제도하고도 제도하였다는 상(相)에 머물지 않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공사상의 보살행을 강조했다.
불교사에는 지암과 수월 이외에도 보살행자가 무수하다. 신라 때 원효가 무애박을 두드리며 중생 편에 서서 하층민에게 불교를 전했고, 쌍계사를 개산한 진감(773~850) 국사는 당나라에서 귀국한 뒤 상주 장백사에 주석하며 병자들을 치료하였다.
또한 신라 때 진표 율사는 사람들에게 계를 설해주며 중생들의 고통을 구제하는 자비심으로 일관된 수행을 하였다. 진표스님의 법력은 중국에 까지 알려져 <송고승전>에 일화가 전할 정도이다.
현재 대만의 성운 대사가 개창한 불광산도 그러하지만 증엄 법사가 이끄는 자제공덕회(慈濟功德會)는 의료 행위를 중심으로 세계 곳곳에서 재난이 발생하면 자비의 발길을 현장으로 옮기고 있다. 이들의 활동은 한국불자들도 지향해야할 보살행의 본보기라고 본다.
보살의 길을 현대적으로 상징하는 달라이라마의 일화도 있다. <선이야기> 중에서 대원사의 현장스님이 인도 다람살라에서 달라이라마를 만나 “종교란 무엇입니까” 질문에 대한 달라이라마의 대답이 그것이다.
“종교의 핵심은 친절입니다.
지금 당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베푸십시오. 그것이 종교입니다.
깨달음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깨달음이 너무 강조되어서는 안됩니다. 먼저 필요한 것은 자비입니다.
자비를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깨달음은 약속되어 있습니다.”
■ 정운스님은 …
운문승가대학을 졸업하고 동국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년간 미얀마 판디타라마 명상센터와 쉐우민 명상센터에서 위빠사나를 수행했으며, 현재 조계종 교육아사리로 동국대 서울·경주캠퍼스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붓다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 <맨발의 붓다> <환희-중국사찰기행 1> <구법-선의 원류를 찾아서> <허운-중국 근현대불교의 선지식> <경전숲길> <동아시아선의 르네상스를 찾아서 명상> <명상, 마음치유의 길> 등이 있다.
[불교신문3007호(봉축특집호)/2014년5월3일자]
첫댓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부처님감사합니다.
성취하시여 이루어지이다.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네.스님, 감사합니다. 아미타불_()_
보살행과 자비가 먼저되어야...감사합니다. 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