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嶺南同道會 題名帖
선조 35년(1602) 7월 장악원에서 영남사람으로 당시 내직에 있던 26명이 장악원(掌樂院)에 모여 영남동도회를 하면서 서문을 오봉 이호민이 짓고, 참석자의 관직과 이름. 자. 출신지를 기록하였다. 서천부원군 백곡 정곤수는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첫머리에 기록하였다. 경비는 각자 염출하였다. 참가자 들이 지은 시가 몇 사람의 문집에 보인다.
출신지를 보면 상주 9명. 함창 4명. 군위 3명. 영해 2명. 단성 2명. 안동 1명. 의성 1명. 초계 1명. 예안 1명. 거창 1명. 김산 1명. 고령 1명으로 상주 권 인물이 13명으로 가장 많다.
*題嶺南同道會題名卷幷序 오봉 이호민 찬
我嶺南人宦遊于京者。作同道會于掌樂院新廨。至者二十六人。時萬曆辛丑秋七月也。西川鄭相公以病不克赴。其聞而樂之。則視赴者有加。會已各捐俸。謀所以題名壽跡者。幷錄西川公于首簡。屬余志其事。噫。嶺之士仕于朝者。舊不止此數。而名儒鉅卿茂才者居多。向雖存亡聚散之不常。其存者相愛之情。亦不以聚散而替焉。斯可尙也已。仍係詩以美之。
1.輔國崇祿大夫西川君 鄭崑壽 汝仁 星州. 상주
정곤수(鄭崑壽)1538년(중종 33)∼1602년(선조 35).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규(逵). 자는 여인(汝仁), 호는 백곡(栢谷)·경음(慶陰)·조은(朝隱). 곤수는 명종의 하사명이다.
아버지는 부사맹 사중(思中)이며, 어머니는 부사과 정희수(鄭希壽)의 딸이다.
큰아버지인 대호군 승문(承門)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문인. 동생은 한강(寒岡) 정구(鄭逑)이다
1567년(선조 즉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72년 천거로 의금부도사되고 경력·전생서직장·주부·장례원사평을 역임하였다.
선조(宣祖) 9년(1576) 장원급제하여 1577년에 공주목사로 승진하였다가 곧 상주목사로 옮겼다. 1581년 파주목사, 1583년 부호군 겸 오위장을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때 단종의 능인 영월의 노릉(魯陵)에 사묘(祠廟)를 세우고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
1585년 첨지중추부사·동부승지·우부승지, 1586년 상호군·호조참의·좌부승지·우승지를 역임하고, 1587년에는 여러해 흉년을 겪은 황해도의 관찰사로 특별히 임명되어 진휼사업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1588년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서천군(西川君)에 봉하여졌다.
1589년 도총관을 겸하고 판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충훈부 공신등록을 편찬하고 동지돈령부사 겸 오위장·대사성·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591년 동지의금부사·대사성·한성부좌윤 등을 거쳐 1592년 병조참판이 되었다가 형조참판으로 옮겼으며, 그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선조를 호종하였다.
대사간이 되어서는 명나라에 원병을 청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청병진주사(請兵陳奏使)로 중국에 파견되었다.
1593년 원병을 얻어온 공로로 숭정대부에 오르고 판돈령부사가 되었다. 이즈음 영위사(迎慰使)·접반사(接伴使)를 맡아 명나라 장수와의 교섭을 담당하였다. 같은해 거듭 보국숭록대부에 오르는 상을 받고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595년 도총관·예조판서, 1596년 좌찬성을 역임하고, 1597년 판의금부사·도총관 등을 겸하고 사은 겸 변무진주사(謝恩兼辨誣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 선조를 호종한 원훈으로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녹훈되었다. 일찍이 수령을 지낼 때는 학문을 진흥시키고 사풍(士風)을 진작시키는 데에 힘썼으며, 임진왜란 당시의 대명외교에 큰 역할을 하였다.
사후 인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1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에 추록되었다. 성주의 유계서원(柳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민(忠愍)이었는데 충익(忠翼)으로 바뀌었다.
저서로 《백곡집》이 있다.
2.正憲大夫行同知中樞府事兼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
李好閔 孝彦 軍威
이호민(李好閔)1553년(명종 8)∼1634년(인조 12).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峯)·남곽(南郭)·수와(睡窩).
증조부는 호조판서 연안군(延安君) 숙기(淑琦). 조부는 수찬 세범(世範).
아버지는 현감 국주(國柱). 외조부는 성균관 직강 박여(朴旅)
1579년(선조 12)에 진사가 되고, 1584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5년 사관(史官)으로 발탁되고 계속해서 응교·전한을 역임하였으며, 집의·응교를 겸하였다.
1592년 이조좌랑으로 임진왜란을 만나 의주까지 왕을 호종하였다가 요양(遼陽)으로 가서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나라의 군대를 끌어들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상호군(上護軍)·행사직(行司直)을 거쳐, 1595년 부제학으로 명나라와의 외교문서를 전담하여 초안하였다.
1596년 참찬관(參贊官)을 거쳐 1599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 예조판서로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지문(誌文)을 다시 썼고, 대제학·좌찬성을 지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
그 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가 되고,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즉위를 반대하고 적서의 구별 없이 장자를 옹립하여야 된다는 입장론(立長論)을 주장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고부청시승습사(告訃請諡承襲使)로 명나라에 가서 입장론을 내세웠다. 공을 세운데 대하여 포상하려 하자 〈고부시공로사차 告訃時功勞辭箚〉를 올려 이를 사양하였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옥사에 연루되었고, 1614년 동계 정온(鄭蘊) 등이 영창대군 살해에 대한 항의를 하다가 귀양을 가게 되자, 〈청환수정온보외차 請還收鄭蘊輔外箚〉를 올려 이들의 방면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정인홍(鄭仁弘) 등의 원찬론(遠竄論)에 봉착, 7년간 교외에서 대죄(待罪)하였다. 인조반정 후 구신(舊臣)으로 우대를 받았고, 죽은 뒤 청백리에 올랐다. 지례(知禮)의 도동향사(道東鄕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오봉집》이 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3.推忠奮義平難功臣嘉義大夫戶曹參判 晉興君 姜紳 勉卿 尙州
강신(姜紳)1543년(중종 38)∼1615년(광해군 7).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면경(勉卿), 호는 동고(東皐).
생부는 우의정 사상(士尙)이고 사안(士安)에게 입양되었다.
생모는 임간(任幹: 손자 광絖은 참판으로 시호가 충간(忠簡)이다)의 딸이며, 양모는 윤광운(尹光雲)의 딸이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77년(선조 10)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1589년 문사랑(問事郞)으로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의 처리에 참여하여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책록되고 진흥군(晋興君)에 봉해졌다.
이조낭관·홍문관직을 역임하고, 1592년 승지·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임진왜란을 맞아 함경도순찰사를 거쳐, 1594년 도승지, 1596년 서북면순검사(西北面巡檢使)와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601(선조 34년) 호조참판. 1602년 경기도관찰사, 1609년 우참찬, 다음해 좌참찬을 역임했다. 진흥군(晉興君)에 봉해졌다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시호는 의간(毅簡)이다.
4.折衝將軍行忠佐衛副護軍 姜綖 正卿 尙州
강연(姜綖)1552년(명종 7)∼1614년(광해군 6). 상주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정경(正卿), 호는 청천(菁川).
조부는 의정부 사인 온(溫). 아버지는 충청감사 사필(士弼). 외조부는 정윤수(鄭允壽). 처부는 판결사 정응규(鄭應奎). 참판 강신(姜紳)의 동생
아들 강원감사 도촌(道村) 강홍중(姜弘重)은 여헌 장현광 문인이다.
1590년(선조 23)에 증광문과에 급제, 1593년 봉교(奉敎)가 되었고, 그뒤 정언·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594년에 지평·헌납·필선(弼善), 1595년에 장령·겸문학(兼文學), 1599년에 사성(司成)·군기시정(軍器寺正)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다. 임진왜란 후 복구작업의 시급함을 들어 외방 수령직 가운데 비어 있는 곳은 경관(京官)으로써 우선해서 충원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그뒤 사간·부교리·보덕(輔德)·좌부승지·우승지·좌승지를 거쳐 1603년에 공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인천부사, 1606년에 첨지중추부사, 1609년에 한성부판윤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청천일기》가 있다.
5.通訓大夫軍資監正 尹曄 汝晦 尙州
윤엽(尹曄) 1546(명종 1 병오)~1604(선조 37)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여회(汝晦)
조부는 증 영의정 징(澄). 아버지는 응교 극신(克新). 외조부는 남견손(南堅孫).
처부는 성척(成惕).
동생 윤돈(尹暾)의 호는 죽창(竹窓) 예조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선조(宣祖) 13년(1580)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직강. 선조 24년
사간원 정언(이때 초간 권문해가 司諫이었다). 선조 27년 전라도사. 32년 상의원 정. 34년 군자감 정
선조 37년 서천군수로 재임 중 졸하였다
6.顯信校尉守訓鍊院僉正 朴應立 信甫 寧海
박응립(朴應立) 영해 출신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신보(信甫) 아버지는 경장(敬長)
선조(宣祖) 27년(1594) 무과급제
훈련원 첨정을 지냈다.
7.中直大夫行禮曹正郞知製敎 申之悌 順夫義城
신지제(申之悌) 1562년(명종 17)∼1624년(인조 2). 의성 출신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순보(順甫), 호는 오봉(梧峰)·오재(梧齋).
1589년(선조 22)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1601년 정언·예조좌랑,
이듬해 지평·성균관전적 등을 거쳐 1604년 세자시강원문학·성균관
직강을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창원부사로 나가 백성을 괴롭히던 명화적(明火賊)을 토평하고 민심을 안정시켜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인조반정초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죽었다.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고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유성룡(柳成龍)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예안현감 재직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대를 모집, 적을 토벌하였다. 간관으로 있을 때 직간하였고, 수령재임 때에는 치적을 남겼다. 그의 시문은 문집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의성에서 장대서원(藏待書院)을 세워 지방자제교육에 힘썼고, 죽은 뒤에는 김광수(金光粹)·이민성(李民宬)·신원록(申元祿)과 함께 그 서원에 배향되었다.
8.保功將軍行翊衛司翊衛 姜純 一作紞 文卿 尙州
강담(姜紞) 상주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문경(文卿)
아버지는 우의정 사상(士尙). 좌참찬 진흥군(晉興君) 강신(姜紳)의 동생
음보로 익위사 익위. 군수를 지냈다
9.奉列大夫行蔚山都護府判官 金澤龍 施普 禮安
김택룡(金澤龍) 1547년(명종 2)∼1627년(인조 5). 예안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시보(施普), 호는 와운자(臥雲子).
아버지는 양진(楊震)이다.
선조(宣祖) 9년(1576) 생원시에 합격하여 참봉을 거쳐, 1588년(선조 21)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문학을 역임하였다.
1595년 병조좌랑이 되고, 이어 선조 앞에서 《주역 周易》을 강의하였다. 같은 해 헌납·성균관직강을 거쳐 이듬해 지평·세자시강원 겸 사서를 역임하고, 전라도 광양·운봉에서 적을 무찌른 공으로 공적이 널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성균관 전적 사예를 거쳐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전라도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문집으로 조성당집 (操省堂集)이 있다
10.中直大夫行司憲府監察 權景虎 從卿 咸昌
권경호(權景虎) 1546년(명종 1)~1609영(광해군 1)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종경(從卿). 호는 만오헌(晩悟軒)
교리 동계 권달수 후손. 아버지는 부사 소선(紹選)
음보로 헌릉참봉(獻陵參奉)이 되고 의금부도사. 찰락찰방을 지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검간 조정, 사서 전식과 창의하여 경상도관찰사 학봉 김성일의 휘하에서 소모관을 지냈다. 그후 장성군수로 나가 선치하여 완으로부터 표리를 하사 받았다,
정유재란 때도 창의 하였고 사헌부 감찰, 김산군수를 역임하였고.
호종 훈으로 이조참판이 증직되었다. (입제 정종로가 지은 묘갈명에서)
묘소는 상주 막곡에 있다.
11.宣敎郞省峴道察訪 柳仲龍 汝見 居昌
유중룡(柳仲龍)1558년(명종 13)∼1635년(인조 13). 거창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여현(汝見), 호는 어적산인(漁適散人).
조부는 하(賀). 아버지는 승지 유춘(有春)이며, 어머니는 청주경씨(淸州慶氏)로 부장(部將) 지(祉)의 딸이다.
덕계 오건(吳健)의 문인으로 1582년(선조 15)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대암 박성(朴惺)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김면(金沔)의 진중에서 활약하였고, 다시 의병을 규합하여 우현(牛峴)·상암(箱巖) 등지에서 왜적을 막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郭再祐)휘하에 종군하여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전쟁의 계책을 도왔다.
1600년 병과에 급제, 성환찰방·성현찰방·전적·사예·예조정랑 등을 거쳐 1612년(광해군 4)에 장령을 지내고, 이듬해 금산군수가 되었으나 정치가 점점 문란하여짐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
인조반정 뒤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하여 홍문관수찬이 되었으며, 1626년(인조 4) 교리를 거쳐 다음해 성균관사성이 되어 치사하였다. 문장에 능하였다.
저서로는 어적집(漁適集) 3권이 있다.
12.承議郞重林道察訪 全雨 時化 草溪
전우(全雨) 1548(명종 3)∼1616(광해군 8) 초계
본관은 완산(完山). 자는 시화(時化), 호는 수족당(睡足堂), .
아버지는 치원(致遠)이며, 초계(草溪)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순진하고 효우를 돈독히 하여 문장에도 능했으며 글씨 또한 뛰어났다. 산수를 사랑하여 정자를 짓고 `수족당(睡足堂)`이라 편액하니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초당서수족(草堂書睡足)"이란 글에서 따온 것이다.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 자암(紫巖) 이민성(李民宬), 대암(大庵) 박성(朴惺),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무민당(无悶堂)
박연(朴絪) 등의 명사들과 친교 하였다.
임진란때에 부친을 모시고 의병을 이끌고 적을 무찔렀으며, 이러한
공으로 사축서별제(司畜署別提)와 중림도찰방(重林道察訪)이 되었다.
사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의 증직(贈職)을 받았으며 초계의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수족당집(睡足堂集)이 있다
13.奉正大夫前行黃澗縣監 吳克誠 誠甫 寧海
오극성(吳克成)1559년(명종 14)∼1616년(광해군 8).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성보(誠甫), 호는 문월당(問月堂).
참봉 민수(敏壽)의 아들이다.
1594년(선조 27)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등용되었다. 당시
왜란으로 전선의 소식이 두절되자, 삼남(三南)에 내려가 도원수 권율(權慄)과 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진중을 찾아다니면서 전황장계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 뒤 사복시주부를 거쳐 1596년에 황간현감이 되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병사(兵使)를 도와 전공을 세웠다. 1601년에 훈련원판관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문월당문집》이 있다.
14.奉直郞前行靑山縣監 李弘發 景晦 金山
이홍발(李弘發) 자는 경회(景晦) 김산 출신
임진왜란 때 우병사 김응서의 휘하에서 김응서의 명으로 소서행장을 만났다
청산현감. 경산현감. 설봉현령 연기현감(燕岐縣監) 역임
15.奉直郞行昌寧縣監 朴光先 克懋 高靈
박광선(朴光先)1562(명종 17) 고령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극무(克懋).
조부는 택(澤). 아버지는 정완(廷琬). 외조부는 조몽길(曹夢吉)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
사서(司書)·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1622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서 필선(弼善)·보덕(輔德)으로 왕세자를 모시다가 인조반정으로 은진(恩津)에 유배되었다.
16.宣敎郞前行長鬐縣監 權世仁 景初 丹城
권세인(權世仁) 거: 단성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초(景初)
아버지는 상의원 별제 운(運).
장기현감(長鬐縣監). 해남현감. 군기판관 역임. 아들은 광주목사 준(濬)
조카는 여헌 장현광 문인 충강공(忠康) 동계(東溪) 권도(權濤)
17.承議郞前行司宰監主簿 權淳 和甫 咸昌
권순(權淳) 1564(명종 19)~1622(광해군 14)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화보(和甫). 호는 매오(梅塢)
동계(桐溪) 권달수(權達手) 후손. 아버지는 만오 경호(景虎)이다(앞 10 참고)
1589(선조 22) 생원시에 합격하여 1597(선조 30) 의금부도사. 1599(선조 32)
사재감 주부. 1604(선조 37) 산음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치로 표리를
하사받았다.
그뒤 선공감 주부 우봉현령을 역임하였다. 증직은 이조판서이다
유고: 永嘉世獻/梅塢公遺稿 참고: 현손 침(琛)이 지은 유사
18.進勇校尉龍驤衛副司果 權澍 汝霖 咸昌
권주(權澍) 함창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림(汝霖)
동계(桐溪) 권달수(權達手) 후손.
선조 30년 군자감 주부. 함열현감. 전주판관. 군수
19.秉節校尉忠武衛副司果 金寭 晦仲 尙州
김혜(金寭) 1566(명종 21)~1624(인조 2) 상주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회중(晦仲). 호는 송만(松灣),
아버지는 수길(綏吉)
서애 류성룡 문인. 임진난에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였다. 선조(宣祖) 23년(1590)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4(宣祖 27)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이 되고, 찰방을 거쳐 감찰이 되었다. 1605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호조좌랑(戶曹佐郞),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거쳐 칠도도사(七道都事)를 역임하였다. 광해군 난정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서당과 서원을 창립하고 선비양성에 진력하였다. 풍속을 바로 잡기에 노력하였고, 인조반정 후 이조좌랑을 거쳐 풍기군수가 되었다.
20.承訓郞前行繕工監直長 盧道亨 伯嘉 尙州
노도형(盧道亨) 1571년(선조 4)∼1615년(광해군 7).
본관은 광산(光州). 자는 백가(伯嘉).
조부는 영의정 소재 수신(守愼)이며, 아버지는 군수 대해(大海)이다.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 선공감 직장. 1604년(선조 37) 지례현감(知禮縣監)을 지내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봉되었다. 이조참판을 증직받았다.
21.通仕郞承文館著作 李民宬 寬甫 軍威
이민성(李民宬) 1570년(선조 3)∼1629년(인조 7). 의성 출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관보(寬甫), 호는 경정(敬亭).
조부는 여해(汝諧). 아버지는 관찰사 학동 광준(光俊)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인의(引儀) 권(權)의 딸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문인. 동생 형조참판 자암(紫巖) 민환(民寏)과 아들 충주목사 만옹(漫翁) 정기(廷機)도 여헌 문인이다.
1597년(선조 30)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뽑혔으며, 1601년 승정원주서를 거쳐 그 이듬해 시강원설서에 제수되고 사서로 승진,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출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3년 예조좌랑을 거쳐 병조좌랑에 전임되고, 곧 정랑으로 승진되었다.
1605년 이조정랑에 천거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일당의 반대로 제주점마어사(濟州點馬御史)가 되었다.
그뒤 얼마간 일을 보다가 시사(時事)의 동향이 심상하지 않아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608년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며, 문학(文學)으로 옮겨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 이듬해 옥당(玉堂)에 선입(選入)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귀향, 여묘(廬墓) 3년을 마치고 홍문관수찬에 다시 임명
되었으며, 그뒤 교리·세자시강원겸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정조(鄭造)·윤인(尹訒) 등이 폐모론을 발의하자 윤기(倫紀)에 득죄(得罪)함이 심하다는 내용의 차자(箚子)를 올렸다가
이이첨(李爾瞻) 등의 모함을 받아 삭직되어 그뒤 고향에 내려가서
거의 10년 동안 글씨와 그림으로 소일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 때
사헌부장령에 복직하였다.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 공로로 성균관사성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가자(加資)를 받고, 아울러 전답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그 뒤 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에 승진되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스승인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 장현광(張顯光)의 추천으로 경상좌도의병대장이 되어 전주에까지 진출, 왕세자를 보호하였다.
1629년 형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 그해에 죽었다. 직언을 잘하기로 이름 높았으며, 의리에 강하여 광해군의 난정 때 간당(奸黨)들에게 모함을 받은 한음이덕형(李德馨)· 오리 이원익(李元翼)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출하려고 힘썼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명나라에 갔을 때 그곳의 학사·대부들과
수창(酬唱)한 시는 사람들에게 애송되어 중국사람들이 그를 이적선(李謫仙: 이태백을 이름.)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하는 시는
1천여수에 이른다.
의성의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 경정집 조천록(朝天錄)
22.啓功郞行弘文館著作 權濟 致遠 丹城
권제(權濟) 단성(산청)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원(致遠)
조부는 규(逵). 아버지는 문현(文顯)
임진왜란 때 창의. 선조(宣祖) 24년(1591) 문과급제
선조 37년 공조좌랑. 군수를 역임하였다(여지도서 단성읍지)
23.宣敎郞行繕工監奉事 申景翼 文叔 尙州
신경익(申景翼) 상주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문숙(文叔)
조부는 공헌(公獻) 아버지는 주부 운(雲). 아들은 장령 백원(百源) 석번(碩蕃)
1602(선조 35) 내자시 주부. 고령현감. 단성현감
24.從仕郞前行藝文館檢閱春秋館記事官 李民寏 而壯 軍威
이민환(李民寏)1573년(선조 6)∼1649년(인조 27).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이장(而壯), 호는 자암(紫巖).
아버지는 관찰사 광준(光俊)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선무랑 권(權)의 딸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으로, 1600년 별시문과 급제하였다.
그 뒤 검열·정언·병조좌랑을 거쳐, 1603년 암행어사로 평안도에 가서 수령의 비행과 민정을 살폈으며, 1608년 영천군수로 나갔다.
1618년(광해군 10) 명나라에서 군원을 요청하자, 원수 강홍립(姜弘立)의 막하로 출전하여 부차(富車)싸움에서 패하여 청군의 포로가 되었다.
17개월 동안 청나라의 항복 권유를 물리치고, 1620년에 석방되어
의주에 이르렀을 때 사원을 가진 박엽(朴燁)의 무고를 받아 4년간
평안도에서 은거생활을 하다가 1623년(인조 1)인조반정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이괄(李适)의 난 때와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스승 영남호소사(嶺南號召使) 장현광의 종사관이 되어
출전하였다. 난이 끝난 뒤 군자감정으로 통정계(通政階)에 올랐고,
이어 동래부사가 되어 번거로운 폐단을 근절하였다.
그 뒤 판결사·호조참의·형조참판에 임명되었다가, 1645년에 경주부윤으로 나갔다.
저서로는 《건주견문록 建州見聞錄》·《자암집》이 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25.宣敎郞行廣興倉副奉事 趙靖 安仲 尙州
조정(趙靖) 1555년(명종 10)∼1636년(인조 14).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안중(安中), 호는 검간(黔澗).
광헌(光憲)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홍윤최(洪胤崔)의 따님이다 (홍공은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의 사위, 허백정 홍귀달의 손서이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과 한강(寒岡) 정구(鄭逑) 의 문인으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고, 1596년 왜와의 강화를 배격하는 소를 올렸다. 1599년 천거로 참봉이 되고, 1603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05년 좌랑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까지 호가(扈駕)하였고, 그 뒤 벼슬이 봉상시정에 이르렀다. 또한 경술(經述)과 문장에 뛰어났다.
눌은 이광정(李光庭)이 찬(撰)한 행장에 의하면 선생은 가정훈회(家庭訓誨)를 본받아 문세(文勢)가 조성(早成)하여 18세 때 이미 향시(鄕解)에 합격하였다. 아우 가규공 익(可畦公 翊)과 더불어 조씨가문의 쌍벽이라 일컬어졌다. 한강(寒岡) 정선생(鄭先生)을 사사하여 『소학(小學)』과 『심경(心經)』 등을 수업했으며, 약봉(藥峯) 김극일 선생(金克一先生)의 가문에 장가들고 학봉 김선생(鶴峯 金先生)으로부터 『주자서(朱子書)』를 수학하며 더욱 친자(親炙) 복응(服膺)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경호(權景虎: 자는 從卿), 우복 정경세(鄭經世), 이홍도(李弘道), 채유희(蔡有喜) 등과 의병을 일으켜 왜적의 토벌에 힘쓰고 친명(親命)으로 기원(基遠), 영원(榮遠) 두 아들을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망우당(郭忘憂堂: 재우) 진중(陣中)에 보내 직접 싸우게 하였다. 또 월간(月澗) 이전(李㙉: 창석 이준의 형) 등 동지들과 소를 올려 국왕의 친정(親征)을 청하는데 공이 소를 초(草)하니 사의(辭意)가 엄정 개절(愷切)하여 가히 천애(天哀)를 감동시킴이 있었다.
임란 후 1599년(선조 32)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었다가 160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5년 대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냈다 그 후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예조좌랑(禮曹佐郞), 대구판관(大丘判官), 경조제독관(慶州提督官), 사섬시정(司贍寺正) 등을 거쳐 1627년(인조 5) 봉상시정(奉常寺正)에 제배(除拜)되었다. 상주의 제현들과 더불어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건하여 오현(五賢)을 존사(尊祠)했으며, 성동(城東)과 노곡(魯谷)·단구(丹丘) 등 여러 곳에 향약을 실시하였다.
1642년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고 1730년(영조 6)에는 사림들에 의해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추향되었다. 。
26.宣務郞行濟用監參奉 曺友仁 汝益 咸昌
조우인(曺友仁) 1561년(명종 16)∼1625년(인조 3).예천 출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익(汝益), 호는 매호(梅湖)·이재(頤齋).
증조부는 우부승지 계형(繼衡). 조부는 언홍(彦弘). 아버지는 몽신(夢臣)
외조부는 신주(申澍). 처부는 김산군수 우암(遇岩) 이열도(李閱道)이다
1588년(선조 21)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다가 1616년(광해군 8)에는 함경도 경성판관을 지냈다.
1621년에는 제술관(製述官)으로 있으면서 고궁(故宮)이 황적유폐(荒寂幽閉)함을 보고 감회일장(感懷一章)을 지어 광해군의 잘못을 풍자하였다가 필화를 입어 3년간 옥고를 치르고,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동부승지. 우부승지가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상주의 매호에서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시·서예·음악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묘지명은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지었다
27.通仕郞權知承文館副正字 南復圭 汝容 安東
남복규(南復圭) 1559(명종 14)∼1615(광해군 7). 안동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여용(汝容). 아버지는 호인(好仁)
선조(宣祖) 21년(1588) 생원시에 합격하고, 선조(宣祖) 33년(1600) 문과에 급제
선조 37년 평안 평사(平安評事). 형조좌랑. 예조좌랑. 37년 경상도사. 38년 예조좌랑. 39년 예조정랑. 형조정랑. 40년 사헌부 지평.
형조정랑. 41년 사헌부 장령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영경의 당이라 하여 유배되었다
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 jhy청은
|
첫댓글 귀중한자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