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빼앗은 정권인데! 앞으로 30년은 절대로 넘겨줄 수 없어!” 이렇게 다짐하는 저들에게 노무현은 크나 큰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내심 미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앞으로 저들은 북의 지령과 격려에 고무되고 풍부한 자금을 풀어 앞으로 격렬한 시위들을 벌일 것입니다. 송두율을 세계적인 학자요 민주화투사라고 방송할만큼 삐둘어진 방송들은 이를 반복해서 확대 보도할 것입니다. 이런 행위들이 당분간은 무식한 대중에게 먹혀들지 모릅니다. 그러나 도가 지나치면 그런 악착같은 행위들이 오히려 역풍을 맞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저들과 맞서서 물리적으로 싸우기보다는 좌익이 누구이며 좌익이 이 나라를 어떻게 몰고 가는지를 많은 국민에게 알려야 합니다. 방송사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도 자료를 제공해야 합니다. 아마도 방송사를 지배하는 사람들은 소수의 불순분자들일지 모릅니다. 나머지는 몰라서 저들에게 속을 수 있습니다.
6.25를 상기해 보십시오. 인민군이 창동에까지 들어왔고, 포 소리가 더욱 더 크게 들려왔습니다. 애국지사들이 피난짐을 싸들고 한강 나루터에 나와 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좌익으로 넘어가버린 방송들이 '국군이 용감하게 적을 무찌르며 북진하고 있으니 애국시민 여러분은 즉시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방송했습니다. 그 말만 믿고 집으로 돌아온 애국지사들은 서울이 완전 점령됐던 6.28일부터 아무런 재판 없이 비참하게 찔려죽고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대한민국으로 전향하겠다고 전향각서를 쓴 좌익들(보도연맹)이 세상 만났다며 붉은 완장을 차고 인민군 앞에 서서 “저놈 죽여라” 하고 손가락질을 해 주었습니다. 애국지사가 비참하게 죽기 직전, 인민재판이 열렸습니다. 모두가 박수를 치며 “죽여라” 함성을 질렀습니다. 이게 좌익이요 방송의 실체입니다.
국군도 좌익이 지휘했습니다. 6.25 직전 1-2주 전에 모든 부대를 재배치했습니다. 동에 있던 부대가 서로 가고, 후방부대가 전방으로 갔습니다. 지휘관 모두에 대한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6.25때에는 부하가 누구인지 상관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지형도 낯설었습니다. 6.24일 0시를 기해 50%의 병사에게 휴가를 주었습니다. 6.25일 밤에 모든 지휘관들을 육군회관으로 불러 댄스파티를 열어주며 술을 마시게 했습니다. 새벽 4시 남침 정보를 보고하자 참모총장 부관이 이를 묵살했습니다. 국군이 서울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단 하나 있던 한강다리를 폭파했고, 입을 막기 위해 폭파명령을 수행한 공병 최대령을 비공개로 사형했습니다. 이게 좌익들입니다.
한국사람들, 눈물과 정에 약합니다. 저들은 광주사태, 4.3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둔갑시킬 때 눈물에 호소햇습니다. [찢겨진 깃발"이라는 선동 유인물을 만들어 대학가에 살포했습니다. 진압군은 야수의 살인마로 부각시키고, 피해를 당한 시민들을 학대받는 천사로 미화했습니다.
4.3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격상시킨 추미애 역시 눈물작전의 선두주자였습니다. "대량양민학살을 외치면서 희생자들의 원통함을 알길 없는 표선 백사장에는 오늘도 무심한 갈매기만 날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제주의 대명사격인 정방폭포 그러나 시원스레 떨어지는 정방폭포의 물살 아래에는 아직도 저 세상으로 가지 못한 원혼들이 폭포살을 맞으며 시신을 부대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를 외면하도록 배워온 우리는 무심하게도 그 원혼들 앞에서 여행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미선이 효순이 역시 눈물 자아내는 방편으로 악용됐습니다. 한 집당 2억 이상씩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60만원이 웬말이냐며 거짓말을 하면서, 국민을 흥분시켰습니다. 여중생들이 치어죽은 도로는 커브길이며 폭이 6.3m였습니다. 공병장갑차는 매우 높고 창이 작아 시야가 거의 없었습니다. 공병장갑차의 폭은 3.7m, 두 대가 서로 커브길에서 교차했습니다. 두 대의 차폭을 합치면 7.4m, 도로폭은 겨우 6.3m였습니다. 한쪽은 낭떠러지, 다른 쪽은 산이었습니다. 산쪽에서 운행하던 장갑차가 차를 산쪽으로 바짝 부치는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장갑차가 앞으로 가면서 아이들을 뭉개고 뒤로 가면서 뭉개는 식으로 악랄하게 죽였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 거짓말에 국민 모두가 속은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한국 방송의 실체입니다.
그런데! 여중생이 다니던 학교의 졸업식 날, 북한 평양의 모 중학교로부터 미선이-효순이에게 졸업장을 보냈답니다. 북한에서는 한 달간 미선이-효순이에 대한 사진전이 열렸다 합니다. 이런 여기가 과연 대한민국인지 묻고 싶습니다. 귀순한 탈북동포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가 평양인지, 서울인지 구분이 안 간다”는 말입니다. 정부기관이 김정일을 위해 일하는 것 같다고 합니다.
이런 글을 쪽지에 실어 방송사 직원들에 알려야 합니다. 국민에게도 알려야 합니다. "언론 수단 없이는 안돼!" 이런 말은 용기를 죽이는 말입니다. 저는 이런 글을 만들어 1,500명 회원들에게 보냅니다. 여러분들 역시 국민계몽에 나서주시기 바랍니다. 제게 연락을 주십시오(02-462-2563). 저에겐 총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쏘는 총이 부족합니다. 총이 되어 주십시오.
전교조가 어린 학생들에게 “눈물나게” 호소합니다. 동두천에서 미군에게 무참히 살해된 여인의 나체사진을 본 학생들은 미군에 분노합니다. 전쟁의 참혹성을 보여주는 비디오를 보는 학생들 역시 미국을 저주합니다. 영화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들도 이런 전교조 교육과 무관치 않습니다. "전쟁은 참혹하다. 이 세상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나라는 오직 미국 뿐이다. 미국은 인류의 적이고 우리의 적이다. 그 다음의 적은 미국을 추종하는 기득권 냉전세력이다".
전교조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통일교육을 어떻게 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의식화교육지침서(이 겨레 살리는 통일: 2001.6.9)를 발간-배포한지 오래입니다. 표지에서부터 책 속 여러 곳에 인민군이 활짝 웃는 사진이 들어 있고 한국군의 모습은 전혀 없습니다. 특히 1,2,3부 및 보론을 여는 페이지마다 수록된 사진에는 '남한인'의 얼굴들이 오밀조밀 몰려있고, 그 한 가운데 인민군 병사가 주연 배우처럼 크게 등장해 활짝 웃고 있습니다. '인민군 중심의 통일 사회'가 영상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남북한 체제 우열을 비교하지 마라, 남북한 경제를 비교하지 마라, 경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평화]라는 것을 가르쳐라. 북한을 남한 입장에서 보지 말고 북한 입장에서 보는 방법을 반복 교육하라. 통일반, 통일연구반, 통일시사반, 통일사랑방, 민족사랑방 등 다양한 통일 클럽을 만들어 토론을 시켜라. 통일연극반을 만들고 공연하며 감상문을 쓰게 하라”.
“놀이방법을 개발하라, 176쪽에 윷놀이 판이 제시돼 있다. "화해"와 "평화"에는 "한번 더"를, "냉전의식"에는 "한번 쉼"을, "외세"에는 "처음부터"로 룰을 정하라. 운동장에 선을 그어 두 편으로 나눠라, 공격팀은 "통일"이고, 수비팀은 "외세"로 하라. "통일사랑방", "통일캠프, "통일수련회"를 열어 통일에 대해 능숙하게 말할 수 있도록 발표력을 길러 주라”.
“이승복 사건은 조작된 것일 수 있으며 이승복을 이용하는 교육은 통일교육에 어긋난다. 6.25는 미군이 유도했을 수도 있다. 북침이라는 설도 유력하다. 그러니까 6.25를 누가 일으켰는가를 따지지 말도록 교육하라. 단지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참혹한가를 눈물나게 호소하라. 그런 전쟁을 일으키는 나라는 오직 미국이다. 미국은 인류의 적이자 바로 우리의 주적이다. 제2의 적은 미국을 숭배하는 남한 내의 반통일-보수-수구-기득권 세력이다. 북한은 우리가 감싸야 할 동포다“.
"국가안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안보(개인안보)다. 국가안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의 질'이다.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생명과 인권이 짓밟힌다면 국가안보가 국민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보도연맹, 노근리, 매향리, 국가보안법 등은 개인의 삶의 질을 파괴했다".
2. 파월장병 격하를 위한 눈물작전(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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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가을, 한겨레21은 이름도 없는 베트남 유학생 구수정이라는 여인이 쓴 가공 소설을 진실인양 보도하면서 주월한국군 전체를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이라고 매도했습니다. 그 결과 월남참전 용사의 가족들은 가장의 파월 경력을 남에게 숨기며 정신적인 고통을 당해왔습니다.
한겨레 21 제273호에 실린 글입니다. "먹빛 얼굴을 하고 땅을 굽어보고 있던 하늘은 바람을 앞세워 나무의 머리채를 흔들었다. 빗방울은 제 몸을 차창에 던지며 투두둑 눈물을 떨군다".
"젖먹이까지 죽이고도 모자라 무덤조차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갈기갈기 찢겨져 흩어진 살점과 뼛조각을 주우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 . . 하늘도 눈이 멀던 그날에".
"아이들의 머리를 깨트리거나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거나 사지를 절단해 불어 던져 넣었다", "여성들은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빠져나올 때가지 군화발로 짓밟았다", 주민들을 마을의 땅굴로 몰아넣고 독가스를 분사해 질식사 시켰다", "한국군의 대량학살이 자행된 곳에는 캔디나 케이크가 물려있었다. 노인들의 입에는 담배가 물려 있었다. 아마도 마을사람들을 안심시키면서 한 곳으로 모으는 한 수단이었는 듯 하다", "어린이, 임산부, 70세 이상의 노인까지 50명을 한곳에 몰아넣고 죽였다". "주민을 몰아넣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 주민들을 한 집에 몰아넣고 기관총으로 난사한 후 죽은 자와 산 자를 통 채로 불태운다".(한겨레21 1999.5.6일자).
그녀의 이와 같이 허무맹랑한 악의적 소설에 강정구, 한홍구, 고경태기자가 매달려 거짓말을 더욱 부풀렸습니다. 32만5천의 파월장병들은 이 한 여인의 말장난에 자식들에게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구수정 통신원은 "월남전"을 "민족해방전쟁"이라고 정의했고, 미군, 한국군 ,월남군 그리고 다른 6개 참전국들을 반역세력으로 몰았습니다. 국가의 부름을 받고 나가 희생당한 젊은이들을 "미군보다 잔인했던 용병"으로 규정하고, 월남에서 "친절한 따이한"의 명성을 세웠던 주월한국군을 [반역세력]이라고 못박습니다.
3. 제주4.3사건을 뒤집기 위한 추미애의 눈물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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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 재조명에 선두에 선 추미애 의원의 국회연설문입니다.
"대량양민학살"을 외치면서 "희생자들의 원통함을 알길 없는 표선 백사장에는 오늘도 무심한 갈매기만 날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제주의 대명사격인 정방폭포 그러나 시원스레 떨어지는 정방폭포의 물살 아래에는 아직도 저 세상으로 가지 못한 원혼들이 폭포살을 맞으며 시신을 부대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사를 외면하도록 배워온 우리는 무심하게도 그 원혼들 앞에서 여행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다음은 헌변이 추의원에게 던진 글입니다.
추의원은 4.3사태를 "미군과 한국의 군.경에 의한 무차별양민학살과 인권유린"사건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추의원이 대표발의자의 한 사람으로 되어 있는 "제주 4.3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이하 특별법이라 한다) 제 2조 (정의) 제 1호에 의하면 "제주 4.3 사건은 [무장유격대]와 "토벌대"사이에 빚어진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위 규정에 의하면 첫째로 위 법의 주인공은 무장유격대와 토벌대에 의해서 희생된 모든 제주도 양민입니다. 둘째로 무장유격대와 토벌대는 모두다, 양민대량학살의 가해자이고 그 사이에 선, 악과 정, 부정의 우열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둘째 쟁점, 즉 추의원이 군과 경찰을 통한 국가권력의 집행과 이에 대한 무장유격대의 폭력적 저항을 동일한 수준에 놓고 평가하는 가치관에 대해서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가권력에 대한 폭력적 저항과 그 폭력적 저항에 대한 군.경의 진압행위를 동일하게 보는 것은 공산주의 폭력혁명론의 출발점이 되고 있습니다.
국가권력이 국가의 안보에 대한 수호자로서의 권위를 가지는 한 혁명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국가권력을 격하시켜서 이를 단순한 물리적 폭력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이 혁명논리의 기초적 요건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위 법안이 "무장유격대"와 "토벌대"를, 마치 국경선에서의 양국군대의 총격사건처럼, "무장충돌"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추의원의 논리를 분석해보면 선량한 제주도민의 증오를 받아 마땅한 것은 무장유격대가 아닌 잔인무도한 토벌대입니다. 추의원이 "오히려 대부분의 희생자가 우리 군과 경찰로 구성된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점에서 그 책임이 우리 정부의 것이기에 더욱 더 간과해서는 안될 중대한 인권유린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추의원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제주 4.3 사태"를 "미국과 한국의 군,경에 의한 무차별양민학살사건"으로 단정하고 있습니다. 추의원은 그 "양민대학살"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부연설명을 달고 있습니다. "장장 7년동안 피흘림이 계속되었던 제주 4.3 사건은 과연 그 희생자 수가 얼마나 될까요?
당시의 제주 인구 약 27만명중 적게는 3만명 이상, 많게는 7-8만명 수준에 이르렀으리라 추정됩니다. 사건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제주 4.3 을 이렇게 어림짐작밖에 할 수 없는 현실은 바로 살아남은 우리들의 나태와 비굴함을 반증하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추의원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3만명 내지 7,8만명에 이르는 제주 4.3 사태 피해자 모두가 "양민"인가 하는 것이 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 저는 추미애 의원이 좌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4. 광주사태를 정당화하기 위한 눈물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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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겨진 깃발]의 눈물
(1) 1989년11월에 발간된 단행본 [통일의 조건-발상의 전환을 위하여]의 158-165쪽에 있는 내용입니다. 저자는 이명영(李命英), 출판사는 (주)종로서적출판.
“광주사태 직후에 일본의 언론 및 교회 계통에 [찢어진 깃발]이라는 팜프렛이 널리 살포됐다. 이 팜프렛은 [목격자의 증언]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필자도 발행처도 없었다”.
“그 내용은 실로 험악했다. 특전대 대원이 총검으로 임신부의 배를 째서 태아를 꺼나 그 어미에게 던졌다, 특전대원들이 여대생 셋을 발가벗겨 놓고 뛰어가라 했는데 앉아버리니까, 총검으로 등을 찌르고 가슴을 열십자로 째서 청소차에 집어던져 버렸다, 도청 앞 광장에 475구의 시체가 전시돼 있었다는 등이 [증언]들이 실려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거짓이었다”.
“외국 특파원들이 5.19일부터 취재를 했지만 이런 내용들은 없었다. 그 후 광주 시민의 그 누구도 이런 증언을 한 사람은 없었다. 단지 도청 앞에 50여 구의 시체가 전시됐던 것은 사실이었다”.
“누군가가 사태의 악화를 노려 유언비어를 퍼트려 놓고, 이를 다시 [찢어진 깃발]로 확대하여 해외에 유포시킴으로써 세계적인 반한-여론을 일으키려 한 대남공작이었음이 분명했다. 누구의 소행이겠는가. 한국의 전복을 노리는 혁명세력이 아니고서야 어찌 감히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겠는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광주사태는 남한에 배치된 북한의 지하당 소행으로 보는 것이다”.
(2) 일본 서기서방에서 발간한 “일본오해의 심연”(1992.8.5 저자: 니시오까)
『사건직후인 같은 해 6월 5일 [일본가톨릭정의]와 [평화협의회]가 가지회견을 갖고『찢겨진 깃발-한 기독교인의 목격증언』이라는 제목의 문장을 발표했다. 현지에서 보내졌다는 이 [깃발]이라는 문서(이하『깃발』)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깃발]은 광주사건을 목격한 한 기독교인이 자신이 본 것을 증언하는 형식으로 쓴 것들이다. 이 중인(?)은『깃발』의 사건이 시작된 다음날인 5월 19일에 광주에 들어가서 24일에 걸어서 광주를 탈출했다고 쓰고 있다. 그『목격증언』속에서 특히 주목이 되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점이다.(이하 인용문은『한국통신』제56호에서)
첫째로 데모진압에 투입된 계엄군이 노인이나 여학생들을 무차별로 학살한 장면을 목격했다고 전하고 있는 점이다.
[남녀 노소 학생 일반 시민의 구별 없이 닥치는 대로 얻어맞고 찔리고 때려 눕혔다.(생략) 이때 나의 눈은 무서운 현장을 잡았다. 미쳐 도피하지 못한 70세 정도의 노인의 머리위로 공수부대병의 철퇴가 내려쳐진 것이다. 노인의 입과 머리에서 분수 같은 피가 분출했고, 노인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그대로 툭 쓰러졌다].
『공수부대원 두 사람에게 개처럼 끌려온 한 여인은 산월이 임박한 임산부였다. 이 여자 봉지 속에 든 것이 뭐야? 나는 무엇을 묻고 있는지 몰라 그 여자의 손을 봤지만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뭔가 넣을 수 있는 봉지도 안보였다』
『이 여자, 아무것도 모르나? 남아야, 여아야?』옆에 있는 자가 재촉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비로소 무얼 말하고 있는지를 알았다. 여자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이 여자도 뭔가 잘 못 알아듣겠다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럼 내가 알려주지』
순간 여인이 반항할 틈도 없이 옷을 붙잡아 잡아당겨 찢었다. 여인의 원피스가 찢기고 살이 보였다. 공수병은 대검으로 이 여인의 배를 푹 찔렀다. 대검을 찌를 때 돌려가면서 찔렀는지 곧 장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다시 여인의 아랫배를 찢어 태아를 꺼내서 신음하고 있는 여인에게 그 태아를 던졌다.
도저히 믿을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한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외면을 하고 전율하며 이를 갈았다. 나는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온 몸에 경련이 일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사체도 병사도 그 자리에서 없어졌다. 옆에 서있던 아저씨 말에 따르면 마치 오물을 치우듯이 푸대 속에 쳐 넣어 청소차에 던졌다는 것이다.
어느 뒷골목을 빠져나가 큰 길 앞에서 나는 발길을 멈추고 말았다. 거의 반사적으로 쓰레기통 뒤에 몸을 숨겼다.(생략) 여대생으로 보이는 3명의 처녀들이 공정대 병사 등에 의해 옷을 벗기우고 있었다. 브라자와 팬티까지 모두 찢고 그들 공정대 병사들 중 가장 악랄해 보이는 병사가 군화로 처녀들을 걷어차면서『빨리 꺼져! 이년들 지금이 어느 시절인데 데모 따위를 하고 있는 것인가』화가 난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처녀는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모두 가슴을 가리고 길가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그녀들이 빨리 도망칠 것을 얼마나 바랬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과는 반대로 처녀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때 한 병사가 외쳤다.
『이년들, 살기가 싫어. 살기가 싫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방법이 없다』
그 순간 처녀들의 등에는 대검이 동시에 꽂혔으며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넘어진 처녀들의 가슴이 대검으로 X자를 쓰고 생사의 확인도 없이 청소차에 던져 넣고 말았다. 암매장을 하는 것인지 화장을 하는 것인지 그것을 알 방법이 없다.
두 번째는 사망자수에 관해 당국이 발표한 1백93명을 훨씬 상회하는 시체를 목격했다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계엄군이 철수한 도청은 폐허의 도시, 살벌한 패전의 도시 모습을 들어내고 있었다. 시민들은 도청의 지하실에서 시체를 꺼내 광장에 쌓기 시작했다.
도청의 지하실에는 얼굴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화염방사기의 불길에 그을리고 탄 시체가 4백75구나 방치되어 있는 것을 목격한 시민들은 재삼 보니 이를 갈았다.
인용하고 있는 것만으로 가슴이 아파질 것 같은 내용이다.
84년 5월 서울 연세대학 도서관 앞에『깃발』이 전문 대자보가 되어 계시되어 있었다. 비에 젖지 않도록 모조리 위에 투명한 비닐이 씌워져 있었다. 도청 앞에 4백75구의 시체가 나란히 눕혀져 있었다고 하는 문제의 부분을 보니 그 비닐 위에 만년필로『거짓말이다! 그때 나는 그곳에 있었지만 시체는 리어커 3대분 밖에 되지 않았다』고 쓰여져 있었다.
제주 4.3을 다룬 장시〈한라산〉으로 옥고를 치렀던 이산하 시인은 〈두 소녀의 죽음〉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들꽃 같은 두 소녀의 잔인한 죽음을 냉정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탱크의 궤도자국, 골수와 창자, 피의 난무 속에서 주인의 발을 잃고 떨어져 나와 있는 미선이의 하얀 운동화 두 짝은 사고 당시의 참경을 오히려 선명하게 말해준다. 시인은 6월13일 사고 당시 월드컵의 열기에 묻혀 미처 관심을 쏟지 못했던 국민들을 대신해 우리들은 어디에 있었던가 자책하면서 이제 우리는 대형 현수막을 다시 펼쳐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민족 자존과, 그를 위한 미국 반대의 현수막을.
전주 모악산 기슭에 깃들여 사는 박남준 시인 역시 〈흰 접시꽃 두 송이, 미선이와 효순이에게〉라는 추모시를 발표했다. 미군의 궤도차량에 난도질처럼 으깨어진 흰 접시꽃 두 송이로 희생된 여중생들을 파악하는 데에서는 역시 자연의 시인다운 면모가 보인다. 박 시인도 내가 너희들을 죽였구나라며 스스로를 책망하지만, 그 자책은 소극적 부정적인 것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다시 피어나리라 깃발이 되어 휘날리리라는 결의와 각오로 승화한다.
안찬수 시인의 〈촛불〉은 2002년 12월 14일 주권회복의 날에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모두 112행에 이르는 긴 분량의 이 시에서 시인은 촛불이 눈물과 슬픔에서 평화와 통일로 형질변화하는 양상을 추적한다. 똑같은 촛불이 이처럼 극단적으로 성격을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은 뜨거운 연대와 투쟁의지이다. 산 자들의 몫일 그것들을 통해 촛불은 꿈과 희망이라는 옷을 입고, 마침내는 역설적인 진실에 도달한다.진정 너희들의 죽음이 이 땅에 사는 이들의 가슴에/밝디밝은 촛불이 되었구나/크디큰 화염이 되었구나.(최재봉 기자)
(3) [한 겨 레] 2002-12-16 기획.연재 35면
함께 읽어요 / 그리운 매화향기, 장주식, 한겨레아이들
효순이 미선이도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대한민국을 연호하며 월드컵을 보면서 애국심이란 걸 느끼게 됐어요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게 자랑스러워요라고 씩씩하게 말했을 텐데, 그때 같이 월드컵 승리에 눈물을 흘리며 손에 손을 잡고 노래부르며 대한민국을 소리치던 그 많은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미군의 여중생 성폭행 사건으로 온 나라가 들끓고 일어나 결국 미국 대통령이 나서서 사과를 했다는데, 우리 대한민국에는 침묵하라는 어른들이 있으니 참 부끄러운 일이다.
다시 자유를 찾는다는 것은, 다시 주권을 찾는다는 것은 뿌리처럼 자기정체성을 다시 찾는 일이다. 〈그리운 매화향기〉는 바로 그런 마음, 그래야 하는 까닭을 절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린이문학협의회에서 주관하는 제2회 어린이문학상 수상작인 이 작품은 어린이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교단에 세운 초등학교 교사가 매향리 미군사격장 반대투쟁 현장을 직접 찾아가 보면서 구상해서 쓴 글이다.
평화롭게 살던 매향리, 매화나무가 많아 매화 향기가 감돌던 마을에 미군 사격장이 들어서면서 폭탄 소리와 화약 냄새가 가득 찬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잃게 되고, 아이들은 자유로운 놀이터를 잃게 된다. 그것을 너무나 당연한 애국이라고 강제당하고, 그 강제 논리에 항의 한마디 못하고 고향을 떠났던 수많은 사람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떠날 수 없다면서 고향을 다시 평화로운 마을로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들어주지 않던 말에 온 나라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게 만드는 과정을 잘 그려냈다.
(4) “민족이란 이름의 두 얼굴”(한겨레신문)
눈앞에 전쟁의 위협에 시달리는 이라크 시민들의 절규와 공포가 떠오른다. 오늘도 굶고 있을 북한의 아이들을 생각하면 숨쉬는 것도 죄스러울 때가 있다. 효순이와 미선이 이전에 수많은 죽음이 미군에 의해 자행되었던 것처럼 바로 지금, 세계 곳곳에서 자기 민족의 이익과 다른 민족에 대한 경멸을 앞세운, 수없는 살상과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
(5) 조선일보
“반복해서 외쳐지는 살인미군 처단하라!는 구호를 들었을 때 나는 20년 전의 나를 생각해 보았다. 미국문화원에 불을 지른 나의 행위를 누군가 살인방화라고 했을 때 받았던 마음의 상처를 생각했던 것이다. 한 시민연사가 무대에 올라와 미군이 한국에 올 때는 모두 살인면허증을 받는다고 말할 때는 참으로 난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