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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9일
말씀: 눅4:18-19
제목: 예배(9)
제가 수요일에도 말씀드렸지만 계속해서 예배에 대한 회복을 설교하면서 ‘성도들이 예배가 회복되면 부흥되겠지’하는 기대를 가지고 설교를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조건을 가지고 의식적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예배가 목적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예배가 되지 못하고 의식만 잘 드리면 내게 유익된 것으로 채워주시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예배인도자로만 섰다는 것이 참 부끄럽습니다. 내가 예배 자가 되어야하는데 예배자의 모습을 사라지고 예배인도자로서만 예배를 인도했을 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번 주의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한 번 더 나누고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저번 주에 예수님의 사역 중에 전인적인 치유사역은 예수님이 감당하신 사역 , 혹은 구속사역의 한 핵심적인 사역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치유의 단어만 보아도 확인될 수 있습니다. 원래 ‘구원하다’는 헬라어로 ‘소조’(σώζω, sozo) 입니다. 소테리아(σωτηρια, soteria)와 함께 사용되는 언어인데요, 소조는 전인적인 치유로서의 구원이라는 단어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소조 106회, 명사 소테리아 45회, 명사 소테리온 4회, 형용사 소테리오스 1회, 명사 소텔 24회 등으로 나오고 있는데 전인적인 치유로서의 구원인 소조가 106회나 나오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사람들을 치유하신 것을 두고도 똑 같은 단어인 ‘소죠’를 사용하는 횟수가 이렇게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마9: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 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여기서 ‘구원’은 육신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22절도 동일하게 구원은 치유를 의미합니다. 막5:23 ‘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여기서도 구원은 치유를 말합니다. 막10: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여기서도 ‘구원’은 치유를 말합니다. 눅7: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구원해 주시기를’ 똑같은 치유의 단어입니다. 눅17: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여기 ‘구원’도 영혼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치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치유의 단어를 영혼구원에 대한 단어와 똑 같이 사용해서 표현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말씀하신 구원은 전인적인 구원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예수님이 감당하신 성령사역, 전인적인 치유사역이 예수님의 사역에 한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즉 육신적인 차원이나, 정신적인 차원이나, 영적인 차원이나 동일하게 예수그리스도가 모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영적, 정신적, 육체적인 아픔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복음의 놀라운 소식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치유가 일어났고 또한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지금도 성령께서 그 일을 위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 증거가 지금도 치유가 일어나고 심령이 변화되고 그리고 삶이 변화되고 계속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대상이 여러분들이고 또한 성도들의 간증에서 찾아볼 수 있지요. 성령님께서 이런 영적, 정신적, 육체적 병든 자들을 하나님이 열망하시는 회복가운데로 돌아오게 하기위해서 치유가 계속 일어나야하고 이 일을 위해 성령님이 지금도 일하십니다. 일하신다는 것은 동일하게 지금도 예수그리스도의 전인적인 치유사역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런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이 현재 어디로 옮겨졌습니까? 바로 교회로 옮겨졌습니다. 교회가 각자 받은 지체의 기능과 은사로 병든 자를 섬기며 그들이 회복되도록 도우는 일을 해야 하는데 그 일을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을 해야 하는데 ,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의 정신을 우리가 그대로 답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병든 자를 위해 의원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성령사역 우리가 감당해야할 성령사역과 관련해서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할 중요한 자세가 예수님이 병든 자를 위해 의원으로 오신 분이라는 것을 사실입니다. 마9:11-12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여기 죄인은 누구를 말합니까? 바리새인들이 죄인 취급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무엇에 철저했느냐면 종교적인 규례 법칙을 외부적으로 지키는데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 율법 613가지 중에 365가지는 하지 말라는 것이고, 나머지는 하라는 것인데 어떤 경우는 소규정이 또 있어서 합하면 2000가지 정도 된답니다. 그들은 그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알지도 못하고 지키지 못한 일반사람들을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죄인들이라고 그런 것입니다. 율법도 모르고 율법도 지킬 줄 모르는 자들을 죄인들이라고 규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과는 절대로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귀신들린 자와 똑 같이 취급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다는 자체가 더러움이 오염된 것으로 관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인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종도 하지 않았지요. 이런 자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를 부르시고 마태가 세리들을 몽땅 모아서 예수님을 초청해서 예수님이 마태의 집에 가지요. 이것을 두고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핍박하고 손가락질 하며 위협했는지 모릅니다. 그 때 답변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쓸데 있느니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도 가만히 보면 문제없는 사람과 어울리기 좋아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자랑삼지요, 세상에서 보면 인정받을 만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친 하려고 애를 씁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고 울이 되고 배경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교회성작학자들 중에서도 교회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야 교회가 성장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경제력, 학별 세상에서 지위 이런 것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야 부담도 적고 교제도 잘 되고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바리새인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알고 그 규정을 잘 지키는 사람들, 소위 전통이나 그 당시 종교사회에 맞도록 그 규정을 잘 지키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또 바리새인들의 규정이나 규칙에 어긋나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분리시며 자신들로부터 격리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오신 목적을 말씀하시면서 병든 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여기서 병든 자들은 육신의 병든 자들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태 집에 모인 자들이 그런 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병든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죄 가운데 사는 사람, 눌리고 억압가운데 있는 사람,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 육신적으로 병든 사람, 영적으로 병든 사람, 귀신에 억압으로 병든 사람, 관계에서 병든 사람, 환경적으로 병든 사람, 사회적으로 병든 사람 이렇게 총체적으로 병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자들이 예수님이 절실히 필요한 자들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필요한 자들 속으로 예수님을 들어가셔서 함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치유하시며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들과 교제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믿음이 좋은 자들과 교제해야합니다. 그래야 좋은 영향력을 받습니다. 권장해야할 일이지요. 그러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명적 삶은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제자를 ‘팔로’(follower)라는 단어를 씁니다. ‘따르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병든 자를 위해 의원으로 오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교회가 그대로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인데 이 사명을 추구하고 계십니까? 같은 맥락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어부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어부의 사명이란’ 취미로 고기 잡는 사람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취미로 고기잡이 하는 사람들 중에 고기를 잡으면 놓아주더라고요, 놓아줄 고기를 왜 밤새도록 잡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월을 낚는다나 뭐래나, 그래서 고기 잡으나 안 잡으나, 잡으면 좋고 안 잡으면 또 오면 되고, 그렇게 여유가 있지만, 전문 고기잡이인 어부들은 고기 못 잡으면 가족이 굶어죽어요.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어부들은 고기를 잡을 때 취미 생활하는 사람들처럼 하지는 않습니다. 못 잡을 때도 있지만 최선을 다해서 고기를 잡습니다. 우리는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저들을 향해 가야합니다. 왜냐하면 이 길이 생명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요, 영광의 길이요, 축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하되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세계로 금난교회 영상)
사실은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지요. 전도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까?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회복시켜는 데는 성령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 분이 하셔야합니다. 그 분이 하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니 결국 하나님이 하신 것인데 우리가 한다고 돼,’ 그러면서 시간날 때, 마음 내킬 때, 1인1명 전도대회 때나 하는, 즉 취미생활로 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주님이 병든 자들을 위해 오셨기에 우리가 그 병든 자들을 위해 나가서 그들을 불려내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자세로 해야 합니까? 긍휼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령사역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긍휼이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감당해야할 성령사역에 있어서도 반드시 있어야할 것 중의 하나가 긍휼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전인적인 치유의 역사는 하나님의 긍휼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감당해야할 성령사역, 혹은 전인적인 치유사역 배경에는 긍휼이 있었습니다. 막1:41절에서 문둥병환자를 향해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러니까 치유의 근본적인 원인은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마14:14 ‘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 4000명을 먹이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15:3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예수님은 기적을 베풀 때 자기를 들어내기 위해서나 자기를 인정받기 위해서 하신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 긍휼이 여기는 마음으로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사역을 마냥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자기를 인정받기위해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예수님을 따르는데 사흘 동안 먹지 않고 쫓아다녔습니다. 그들은 사흘 동안 먹지도 않고 걸어서 따라다녔는데 그들이 허기져서 쓰려질까봐 불쌍히 여겨 이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 기적을 베푸신 배후에는 긍휼이 있었습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세상을 향해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 긍휼한 마음, 불쌍한 마음으로 이 땅에 오셨고 또 한 치유하셨고 복음을 전하셨고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성령사역의 배후에는 긍휼이 있었습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이 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웃을 향한 긍휼의 가장 핵심적인 것의 하나는 전인적인 치유사역을 통한 회복입니다. 바리새인을 향해 주님께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또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 다는 뜻을 너희가 알라고 이야기하신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외부적인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데는 탁월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이 긍휼이 없었습니다. 예배를 규례대로 철저히 드리고 규정대로 금식하고 십일조를 정확하게 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도 없었고 이웃을 향한 긍휼도 없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병든 자를 향한 긍휼이 없었습니다. 요즘 능력이 나타나고 또 교회가 부흥되고 전도가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하면 강사로 많이 불려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세미나에 참석하는 목사님들의 목적이 기술을 배우거나 방법을 배워하면 실패합니다. 그 분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성도를 향한 긍휼을 배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능력과 기적이 나타나서 교회가 성장한다할지라도 그 속에 긍휼이 없으면 예수님의 심정이 없는 것이고 그러면 예수님께서 ‘도무지 너를 모른다.’ 이런 말을 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사람 뒤에 하나님이 회복하시고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발견할 수있어야합니다. 그래야 분별력이 세워집니다. 예를 들어서 성령의 역사는 베드로나, 바울이 행한 기적과 구원과 치유의 역사가 베드로나 바울의 믿음으로 행해졌다고 하지만 그 뒤에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불려 모어기 위해 그들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이것을 알면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또한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만 우리가 헌신을 하지만 그러나 그 뒤에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와 같이 병자를 위해 오셔서 긍휼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될 줄 믿습니다.
긍휼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문둥병자사건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치유하셨습니까?' ‘손을 대시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당시에는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는 것이 종교적인 전통으로 금해져 있었습니다. 레위기 11:40 ‘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되어있습니다. 레위기 13:46 ‘문둥병자도 부정하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럼으로 문둥병자에게 손을 데는 것은 부정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율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시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예수님이 손으로 만졌을 때 치유되었기 때문이요, 긍휼의 한 표현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결론을 내리기에 너무 멀리 온 것 같습니다. 말씀을 정리하자면 예수님의 성령사역인 전인적인 치유사역은 구속사역의 한 핵심적인 사역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을 오늘날 교회를 통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구원을 이루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명령으로 주신 사역이고 그것을 우리가 교회를 통해 이루어가야 할 책임이며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령을 통해 그대로 예수님의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전인적인 치유사역을 위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비정상적인 삶, 고통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치유하며 회복하느냐하는 문제는 예배로 초청하고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을 교회로 불러서 어떻게 치유해 낼 것이냐하는 과정이 예배란 말입니다. 말씀이 선포되고 기도와 찬양을 통해 성령님이 운행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움직이시고 역사하셔서 그들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은혜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롬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영적예배는 헬라어 원문에는 ‘로기켄 라트레이아’입니다. 이 말은 합당한 섬김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섬기는 것이 바로 이들을 예배로 초청하는 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전인적인 치유가 예배로의 초청을 통해 날마다 이루어지는 복된 교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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