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락장송(落落長松)을 바라보며
임병식rbs@daum.net
나라가 망조라도 들것 같은 우울한 시국에 매천 황현선생의 순국지(殉國地)인 구례 매천사(梅泉祠)를 찾았다. 이런 날은 무거운 발걸음답게 좀 날씨도 추워야 하는데 외려 기온이 영상으로 치달아 떨쳐나선 탐방객의 마음을 면구스럽게 만들었다.
경각심을 느끼고 무언가 칼칼한 기운을 얻자면 추 위가 살을 에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좀 쌀쌀해야 하거늘 그렇지 못했다. 더하여 찾아간 날은 주말이어선지 하필 사당의 문까지 굳게 닫혀있었다. 아쉬움에 문을 두드려보고 전화를 넣어보았지만 응답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사당 앞에서 추모의 묵념을 올리는 것으로 예를 표하고 현황판을 둘러본 것으로 방문한 걸 가름 했다.
알다시피 조선이 망해가던 1910년, 마침내 한일병탄이 되자 선생은 가차 없이 목숨을 끊어버렸다. 나라로부터 벼슬을 받은 신분도 아니었고 녹봉 받는 공직자도 아니었지만 지탱하는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다. 나라가 세워져 선비를 양성한지 500년이 되었지만 나라가 망하는 마당에 어느 선비하나 나서서 죽은 자가 없을 것을 보고 슬픔을 느끼고 결행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크게 세상을 깨우쳤다. 그때가 향년 55세였다.
선생은 죽기 전 그간 써온 ‘매천야록(梅泉野錄)’ 원고를 남기면서 “좋은 세상이 올 때까지 내 글을 세상에 내놓지 마라”라고 유언했다. 나중에 보니 여기에는 조선이 망할 수밖에 없는 썩고 악취 나는 부조리와 비위의 채록이 가득했다. 비록 몸은 야인으로 머물었지만 눈을 크게 부릅떠 살피고 귀를 활짝 열어 견문을 모았다. 후세에 교훈을 남기고자 함이 분명했다.
아니, 선생자신이 바로 억울한 피해자였다. 과거시험을 치러 당당히 장원급제를 했으나 발표된 명단에는 이등으로 둔갑이 되어 있었다.
선생은 단호히 출사를 포기했다. 조정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시골에 은거하며 집필에 몰두했다. 선생의 자료 수집은 광범위하고도 자세했다. 조선말 3대천재로 일컬어 질만큼 뛰어난 두뇌를 활용하여 관찰한 것을 기억하여 기술해 놓았다. 이것을 제자와 지인들이 사후에 책자로 편찬했다.
여기에는 특히 조선말 매관매직의 실태와 과거시험의 부정한 사례를 낱낱이 기술해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가령, 벼슬아치의 부정은 민비척족의 발호로 봇물을 이뤘는데 어느 인사가 줄을 대어 관찰사로 내려오면 다음 뇌물을 바친 후임자가 과천을 거쳐 내려오는 실태를 고발했다.
뿐만 아니라 시험부정도, 사서삼경을 도포자락에 넣어서 가지고 들어가는 것은 다반사고, 문제를 미리 알으켜 주거나 심지어는 대리시험에 답안지 바꾸어 치기도 번번했음을 기술해 놓았다. 이것을 보면 나라가 썩을 대로 썩어서 앞당겨 망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그것을 고발해 놓았기에 우리는 살상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얼마나 반면교사로 삼는데 귀중한 책자인가.
그렇지만 사당 참배를 못한 아쉬운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처럼 떨쳐나선 탐방 길이 아닌가. 그리고 지금의 시국은 얼마나 엄중한 것인가. 어느 교수는 말하고 있다. “우리 역사는 순간마다 위기였고 격동기가 아닌 적이 없었다”며 “그것을 어떻게 슬기롭게 대처하는가는 지도자의 판단사항인데, 남의 말을 듣기 거부하는 지도자에겐 약이 없다”는 것이다. 얼마나 답답해서 하는 말인가.
그 말을 상기하면서 인근 천은사에 낙낙장송이 있다는 풍문이 생각나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사찰입구에는 300년도 넘어 보이는 몸통이 구부정하고 가지가 늘어뜨려진 노송이 청청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나무를 마주하니 성삼문선생의 절명시가 생각났다. 아마도 시에 ‘낙낙장송’이란 어휘가 들어있어서인지 몰랐다. 선생의 시에 보면 ‘(전략)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하리라’는 시구가 있다.
제일 높은 봉우리에 우뚝솟은 소나무가 되어서 흰눈이 온 세상을 뒤덮을 때 혼자서라도 푸른 빛을 발하리라고 다짐하는 말이다.아니나 다를까, 노송은 그런 생각이 들도록 위의가 대단했다. 마치 거기에 선생의 강철같은 기개가 스며 있는듯 했다.
선생의 가족는 참절비절했다. 선생 본인을 비롯하여 부친과 세 명의 형제, 그리고 네 명의 아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당시 살아남은 혈손은 딸 ‘호옥’이 있을 뿐이었다.
선생이 수레에 실려 떠나자 딸이 울며불며 매달렸다. 이를 본 선생은 다음과 같이 달랬다.
“사내 자식은 다 죽을 것이나 너는 딸이라 살 것이다.” 이로 미루어 딸은 살아남았을 것 같은데, 선생은 뒤이어 종이 따라주는 술 한 잔을 몸을 굽혀 마시고서 생을 마감했다. 그것도 비참하기 그지없는 거열형을 당한 것이었다.
한데, 여기서 생각나는 것이 있다. 왜 지금은 의인이 없는 것일까.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의 말은 큰 목소리에 묻히고 상식적이지 않는 허튼 말을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왜 유난히 큰 것일까.
작금의 우리나라 실상을 보고 외신들이 걱정을 한다. 아니, 외국인들이 걱정하는 말을 외신들이 실시간으로 전송하고 있다. 전하는 말을 종합하건대 대한민국이 망조가 들었다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대책없이 망하게 될 것 같다고 한다.
죄를 지은 대통령은 관저에 들어박혀 꿈쩍도 하지 않는 가운데 공수처와 대통령경호부대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할 정도로 극한 대치하여 위기가 증폭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을 맞아 우리가 걱정할 것을 외신이 걱정을 해주고 있다. 그것도 자존심이 상한데 정신 좀 차려야 하지 않나 싶다.
그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것만 판단하면 된다. 한 달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명분과 이유야 따져볼 수는 있겠지만 무장한 계엄군을 민의전당인 국회와 선거관리위연회에 난입하게 만든 건 엄연한 불법이다.
한데, 대통령은 태연히 겁만 주려 했다고 한다. 출동하는 과정에서 건물이 파손되고 인신을 구금할 수 있는 용품과 살탄 5만 여발까지 지급했는데 그게 어디 겁만 주려는 행동이었는가. 거기다 계엄조건을 갖추려면 당연히 회의록을 작성해야 하는데 결여했다.
그밖에도 불법적인 정황들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런 터에 일부 인사는 내란행위를 두둔하고 피의자를 감싸는 발언을 하고 있어 어안이 벙벙하다.
이런 분별없는 짓으로 나라 경제가 망치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진영논리에 기댄 양비론의 시각으로 접근하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이런 때야 말로 양식 있는 지식인들이 나서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성삼문 선생이나 황현선생처럼 홀연히 목숨을 버릴 결기는 아니더라도 많이 배우고 나라의 은덕과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침묵을 깨고 앞장서 나서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일촉즉발의 충돌이 예상되는 시국에 청청한 낙낙장송을 바라보며 노송이 뿜어내는 의기의 기운에 기대어 외쳐본다.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자고. 한갓 이름 없는 한사(寒士)가 지부상소(持斧上疏) 하는 심정으로 외쳐본다. (2025)
첫댓글 글을 보니 이 시국을 아주 적절히 표현하셨네요. 때 맞춰 황현선생 사당을 찾았고, 천은사 소나무는 얼마나 장관이었습니까!
소나무를 보니 저도 만고 충신 성삼문이 그리워졌습니다. 성삼문 같은 충신이 사뭇 생각남니다. 단종 복위를 위하여 아들 손자가 다 처형당하고 혈손이라고는 '호옥'이 뿐이었으니 이 보다 처참한 비극이 어디있겠습니까! 나라가 윤가 놈 한 놈 때문에 망해 가는데, 공부 잘 했다는 놈들은 반란자를 호사무위하고 있으니 참으로 참담합니다. 나라가 위란지세 인데 성삼문, 황현은 같은 분은 나타나지 않으니 참으로 우울 해 집니다. 황현이나 성삼문이 그리워지고, 안중근의사 김재규장군이 환생하길 기도해 봅니다. 하다 못해 김구선생을 죽인 놈 안두희를 정의봉으로 쳐 죽인 제2의 박기서님이 나오길 기대해 봅니다.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아주 시의 적절한 명문입니다. 고맙습니다. ^^♡
우울한 마당에 황현선생의 자결지인 사당을 둘러보고 천은사의 낙낙장송을 보면서 마음에 이는 소회를 풀어보았습니다.
어쩌다가 이 나라가 외신들이 걱정해주는 꼴이 되었는가 한심스럽습니다.
지금이라도 많이 배우고 나라의 혜택을 누구보다도 많이 받은 지식인들이 나라를 지켜내는데 힘을 보태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격정이 일어 밤도와 글을 써서 올려놓았습니다.
망국의 조선을 자결로 함께한 매천 선생의
절의를 다시 한번 새겨봅니다
낙락장송과 성삼문의 절개는 우리 대한민국의 오늘에도 절실한 것같습니다 배운 자들과 권세 있는 자들의 패륜에 나라가 거덜날 판국이고 국민은 기가 막혀 죽을 지경이군요 아 저런 물건일 줄이야
진실로 씨 받을까 두려운 물건이네요
작금의 우리나라는 외신들이 걱정을 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한심스러우면 그럴까요.
배웠다는 자들, 국가의 배려로 잘 먹고 사는 인사들은 이런 시국의
불안정한 상태를 보고 무엇을 느끼는지 모르겠습니다.
황현선생처럼 나라의 운명을 한탄하고 자결까지는 못하더라도,
바른 길을 걸으며 온가족이 도륙을 당하고 자신마져도 거혈형에
처해진 성삼문같은 위인을 닮지는 못해도 목소리는 좀 내야 하지
않을까요. 이기주의, 보신주의, 기회주의에 빠져있는 사회지도층,
먹물든 인사들의 침묵이 참으로 가증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