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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양파 공동체☆]의 앞표지(우)와 뒤표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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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 공동체]
제3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시집 손미 시집 / 민음사(2013.12.20)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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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 공동체
손미
그러니 이제 열쇠를 다오. 조금만 견디면 그곳에 도착한다. 마중 나오는 싹을 얇게 저며 얼굴에 쌓고, 그 아래 열쇠를 숨겨 두길 바란다.
부화하는 열쇠에게 비밀을 말하는 건 올바른가?
이제 들여보내 다오. 나는 쪼개지고 부서지고 얇아지는 양파를 쥐고 기도했다. 도착하면 뒷문을 열어야지. 뒷문을 열면 비탈진 숲, 숲을 지나면 시냇물. 굴러떨어진 양파는 첨벙첨벙 건너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사라질 수 있겠다.
나는 때때로 양파에 입을 그린 뒤 얼싸안고 울고 싶다. 흰 방들이 꽉꽉 차 있는 양파를.
문 열면 무수한 미로들.
오랫동안 문 앞에 앉아 양파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때때로 쪼개고 열어 흰 방에 내리는 조용한 비를 지켜보았다. 내 비밀을 이 속에 감추는 건 올바른가. 꽉꽉 찬 보따리를 양손에 쥐고
조금만 참으면 도착할 수 있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내 집.
작아지는 양파를 발로 차며 속으로, 속으로만 가는 것은 올바른가. 입을 다문 채 이 자리에서 투명하게 변해 가는 것은 올바른가.
컵의 회화
손미
한 번씩 스푼을 저으면
내 피가 돌고
그런 날, 안 보이는 테두리가 된다
토요일마다 투명한 동물로
씻어 엎으면
달의 이빨이 발등에 쏟아지고
난간을 따라 걷자
깊은 곳에서
녹색 방울이 튀어 오른다
살을 파고
모양을 그리면서
백지 위 젖은 발자국은
문고리가 된다
다른 몸으로 나갈 수 있겠다
후박나무 토끼
손미
매일 커지는 무덤과
같은 방향으로 뻗은
후박나무를 끌고
이상한 나라로 가지 않는
후박나무 토끼야
숲에서 비석을 산책시키는
후박나무 토끼야
날 입장시키지 않는
후박나무에 사는
후박나무 토끼야
우리, 언젠가 만난 적 있지?
이 무덤 속에서?
발신자 번호를 지운 전화가
가끔, 아주 가끔, 오는 것은
후박나무 뿌리가 전하는
잠깐의 기척
나무를 알몸으로 통과하는
빗물의 통증
깃털을 잃은 후박나무 토끼야
우린 오래전에 만난 적 있지?
후박나무가 미처
후박나무이기 전에
후박나무 토끼가
후박나무 토끼이기 전에
나의 머리가
너의 머리이기 전에
언젠가 본 적이 있지?
검게 뜯긴 후박나무
나를 입장시키지 않는
후박나무에는
시끄러운 피가 흐르고
책상
손미
책상다리를 끌고 왔어
웅크리고 앉아 흰 과일을 빗질하는 밤
나무 책상과 내가 마주 본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 잡아먹히게 될 거야
책상이 걸어 와
내 귀퉁이를 핥는다
그래, 이토록 그리웠던 맛
나를 읽는
책상 이빨
내 몸에서 과즙이 흘러 우리는
맨 몸으로 뒤엉킨다
네 위에 엎드리면
우리는 하나 또는 둘이었지
나무 책상과 내가 응시한다
딱딱한 다리를 끌고
우리는 같은 곳에서 온 것
같다
상자가 되고 싶은 나무를 회전하는 기차
손미
에밀리는 기차에서 이방의 골목을 팔고, 다른 살을 팔고, 아름다운 피 모양을 판다. 나는 창 밑에 숨어 있다가 플랫폼에 서 있는 존 레논을 쐈다. 내가 그랬다. 세상은 속았다. 세상을 속이는 법을 에밀리에게 샀다.
기차엔 많은 골목들, 모두 한 방향의 수수께끼로, 아무데도 도착하지 않는 기차에서 절름발이 에밀리가 골목을 밀며 온다.
상자가 되고 싶은 나무를 회전하는 기차
승객들의 가방은 텅 비어있고 나는 객차에 앉은 선생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나를 속였던, 버렸던 선생을 쐈다. 세상은 속았다. 세상을 속이는 법을 에밀리에게 샀다.
소문
손미
네가 내 얘기를 한다고 들었다 내가 쓰는 것과 읽는 것에 대하여 너의 발목을 타고 흐르는 나의 목소리에 관하여 하나뿐인 나의 라디오에 대하여 까마귀처럼 너희는 모여 앉아 얘기한다고 들었다
우리가 마주쳤을 때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내 얘기를 한다고 들었다 내가 혼자 타는 버스에 관하여 한 사람을 버리느라 보낸 오랜 시간에 관하여 빨간 베개 위로 지나던 밤들에 관하여 형광등을 켜고 자는 이유에 관해서까지
읽지 않은 책이 쌓인 책장에 대하여 그 책들을 모조리 팔아 버린 나의 엄마에 대하여 얘기한다고 들었다 내가 메고 있는 커다란 가방, 가방 속에 구겨져 있는 영화표에 대하여 하루 한 번 휴대폰에 개 같은 년이라고 찍히던 문자에 대하여
그리고 끝없이 내 얘기를 한다고 들었다 페이지를 건너 내가 가려는 곳에 대하여 도착할 수 없는 곳으로 보내는 전갈에 대하여 내가 저녁마다 두드리는 탁자를 너는 알고 있다고 들었다
너는 아직도 내 얘기를 한다고 들었다 내가 쥐새끼처럼 숨어서 흉보는 사람에 대하여 나를 배신자라고 수군거리는 소리에 대하여 아무도 밥을 먹어 주지 않던 여고생에 대하여 날마다 담을 넘던 초록 교복에 대해서까지
내 입가에 들끓는 거짓말과 내가 깨물던 선악과의 여러날 가지 않은 교회에 대하여 너희는 까마귀처럼 모여 앉아 얘기한다고 들었다
우리가 마주쳤을 때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계속 내 얘기를 한다고 들었다 내가 쫓겨난 집에 대해 끊어 던진 목걸이와 밤을 긁어먹고 자라는 나의 목에 대해 차라리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라디오에 속삭이는 것에 대하여 너의 발목으로 흐르는 내 작은 목소리에 대하여
네가 내 얘기를 한다고 들었다 초록 교복을 입고 담장에 선 네가 내 얘기를 한다고 들었다 나와 같은 머리통을 달고 네가 내 얘기를 한다고 들었다
내가 오랫동안 서 있던 담장에 대하여
뛰어내려도 깨지지 않는 나에 대하여 내가 아직 살아있는 것에 대하여 그럼에도 아직 살아 있는 것에 대하여 조망하기 좋은 곳에 앉아 너는 아직 내 얘기를 한다고 들었다
비핀나티피덤필로덴드론*의 고백
손미
사람이 되는 꿈을 꾸었어.
사과에 찔리는 꿈.
둥글게 서서 공놀이를 할 때 한 번도 공이 오지 않는 아이처럼
한자리에 씨처럼 박혀 있는
이 손톱으로 딱 세 명만 죽였으면……
끊어진 면이 속삭이는 소리
사람이 되는 꿈을 꿨어. 나를 쓸어 쓰레기통에 버리는 꿈. 쓰레기 옆에 서 있다가 한 무더기 사과에 맞아 죽는 꿈.
허리에서 한 무더기 잎이 떨어지는
꿈.
* 엽흔을 남기는 나무, 잎이 지면 몸통 전체에 눈알이 생긴다
Rule
손미
숙주는 궁상했다
묶여 있는 개와 나는
같은 하늘을 썼다
오래 걸어도
줄은 안 끊어졌다
미끄럼틀
손미
좀, 앉을게
구둣발로 들어왔다
여기에 좀 있을게
네 속에
창백한 애인이 피아노를 친다
어쩌면 이것이 절정일 수 있겠다
고개 돌리면 입 댈 수 있는 거리
우린 몰래 무릎을 열고
긴 관 속을 헤매고 다녔지
조용히 바라보았어
떠다니는 해파리들
망토를 걸치고 뛰어내려
다른 곳으로
다른 곳으로
몸을 말아 넣으면
미끄러운 것에 눌리는 꿈을 꾼다
천천히 굴러떨어져
손잡이도 없는
네 속에
그만 좀, 앉을게
이제
나도 너의 살점인데
젤리
손미
왜 이 모양을 아무도 안 좋아하나
내가 떨어뜨린
이 뿔을
이 살을
검은 세가 몸속을 종단할 때
지구 밖까지 손톱이 자란다
내 무게의 절반은 내가 아니고
때때로 새를 토하며 생각한다
왜 내 위에는 아무도 안 올라오나
몸을 뒤집으면 다른 모양을 가질 수 있나
우산 위로 식칼이 떨어진다
이제 우리는 부서져 섞일 수 있겠다
떨어진 조각들은 귀소歸巢하려
투명해지는 아를 찾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나는 긴 손톱을 들어
지나가는 유령을 자르며 논다
굿
손미
어서 와요 들어와
외투는 이리 주고 거기
목 없는 의자에 앉아요
식구들은 죽은 삼촌을 달래러 유원지에 갔죠
삼촌은 아가씨를
기다리느라화가 나 있지
한 번씩 집을 핥는,
달팽이를 먹으려도
삼촌이 입을 다물 때
머리카락은 뚝뚝 끊어져요
어서 앉아요
지붕을 찌르면 줄줄이 엮이는
이, 집을 오래 삶았죠
지붕이 녹아내려도
옷은 벗지 말아요
그 속에 있는 건 진짜가 아니죠
질긴 집을 씹으면
뜨거워
모두 말이 없어지고
만난 족 없는 삼촌이
지붕에서 헤엄을 치는 소리가 들려요
어서 와요 거기
없어지는 의자가 앉아
깨끗하게 먹어 줘요
오래 삶았는데도
아직 꼬리 흔드는
죽은 말은 다시 사용할 수 없다
손미
너를 태우려 만반의 준비를 끝냈고 너를 태우려 너를 찾아다녔고 마지막으로 네 얼굴을 만지려 네 손을 잡으려 너를 태우려 출구를 봉쇄하고 너는 속죄해야 하므로 너를 잃으려 너를 태워 버리려
너를 긁어모아 너를 옮기려 살코기에서 마른 생선으로 마른 생선에서 산딸기 열매로 너를 옮기려 너를 찾아다녔지 네 목에 불이 붙으면 흥취가 오르겠고 막 도착한 손님들은 네가 타는 것을 보겠다 아무도 애걸하지 않는 그 집에서 흑백처럼 너를 채우고
너를 태우려 땔감을 모았다 땔감은 계속 태어났고 너를 태울 때 너는 가장 따뜻할 것이다. 태워도 태어나는 너를 태우려 나를 쪼아 먹고 매일 커지는 너를 찾으려 타지 않는 너를 태우려, 날마다 살가죽을 벗기는 너를 찾으려
방문자들
손미
외가에선
개를 던지며 놀았다
도망가는 개를 잡아 모아 놓고선
개도 안 물어갈 년
매일 늙는 호박이 말을 걸었다
암캐들은 날마다 아름다워졌고
나는 개를 더 멀리 던졌지
개장수를 따라간 엄마는 어디 있을까
외가의 하늘엔
파란 해와 몇 개의 꼬리가
떠 있었고
강에 던지려고 개를 만진다
개의 관자놀이가 뛰고 있다
컵의 회화 2
손미
컵을 타고 내려가면
비바람과 폭풍
암초를 타고 사라지는 사람
나는 여기서
지느러미가
손과 발이 되어 돋아나는 것을 본다
손과 발,
손과 발은 물처럼 뚝뚝 흘러
귀퉁이 터진 식물 하나가
나를 찾아온다
축 처진 그 속으로 기어 들어가
머리 위로 배 한 턱 떠가고
빨려 들어간다
공중 그네
손미
그네의 목표는 끊는 것, 끊어 버리는 것.
우리는 그네에 한 개씩 낭ㅈ았다.
엉덩이에 밧줄을 매단 우아함과 관계있고 싶다. 목에 줄을 감고 공중에 매달린 고상한 사람들과 말을 하고 싶다.
아무도 오지 않는 찻잔 속
불쑥불쑥 나타나 다오. 귀신이라도.
뛰어내릴 수 없다면 목에 꼭 맞는 밧줄이라도…… 내 머리 위에 꼬리라도, 신선한 밧줄이라도……
내내 괴롭다. 그네를 타기 전에 그네의 의사를 묻지 않은 것이. 바지를 입기 전에 바지의 의사를 묻지 않은 것이. 차를 마시기 전에 찻잔의 의사를 묻지 않은 것이.
그네의 목표는 희미해지는 것., 찻잔에 들어가 목만 내밀고 있다. 오랫동안 나를 우려냈는데 왜 아무도 오지 않는 걸까.
우리의 목표는 희미해지는 것, 그리고 끝내 희미해지는 것.
누가 있다
손미
거울에 손을 넣고
부드러운 것을 만지다 놓쳤다
번개 치는 날
거울에서 한 번씩 손이 나왔다
분홍 타이즈를 신은 아이가 제물대에 올라가고
어머니 신전에 있는 거울이
한순간에 꺼지는 날
저기
흑백의 코끼리가
거울 속 자기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볼 때
우리는 한 번쯤 부드러운 지구로 여행을 가자
그곳에 박제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는
누가 있다
번개가 치면 내가 아닌 것들이 내린다
어디선가 만난 적 있는
낯선 폭우
짐을 싸는 방법
손미
너의 가방과 같은 자리에 누워
양털이 자라는 소리를 듣는다.
침묵하며 자라고 있다. 가방에선 쥐와 시든 사과 냄새.
뒤통수를 맞대고 키스한다.
혀로 더듬으면 태초의 암소가 있던 자리,
빈 젖의 맛.
가방이 차가워지는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덧니를 핥는다. 여기 새 뒤통수가 자랐으면……
여기 너처럼 완벽한 뒤통수가 자랐으면……
너의 가장 속에 누워 있는 나를 늙은 암소가 핥는다. 나는 흐물흐물 녹아 이렇게 액체로 있다. 액체는 기내 반입할 수 없으므로 너는 나를 취소할 것이다.
나는 아무도 이주해 오지 않는 가방 속에서, 너의 머리카락이 얼마나 자랐을까 생각한다.
바구니 속 우유병처럼 차분히.
못
손미
목에 걸렸다
뛰어넘다가
목에 걸린 못 때문에
여기까지
키가 자라면
저걸 뽑아야지
박힌 자리를 더듬더듬 기억하며
저것만 빼면 살 것 같다
다시 만나자
사람들은 작별을 고하며 갔다
목에 걸린 못 때문에
나는 여기에 있고
너를 사랑한다
점점 피 냄새가
없어지고
속을 파내면서
발버둥 칠 때
툭-
목이 뜯기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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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自序
우리 언젠가 만난 적 있지?
이 무덤 속에서
2013년 가을
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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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 詩集 [※양파 공동체※]
[ 작품해설 ] -
사랑의 경로와 마이너스 우주
권 혁 웅(시인, 문학평론가)
0. 음수陰數의 존재론
우리는 양수(陽數)의 세계에서 산다. 우주를 이루는 물질(matter)이 양의 실체이므로, 우리도 양의 존재자들이다. 그러나 우주에는 전하의 부호가 반대인 반물질(antimatter)이 있다. 물질과 반물질이 만나면 감마선을 방출하면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빅뱅을 통해서 우주가 출현했을 때 물질과 반물질의 양이 같았다면 우주에는 물질도 없고 따라서 우리도 없었을 것이다. 현재의 우리 우주가 양(陽)의 물질로 가득 차 있는 것은 태초에 반물질보다 물질의 양이 조금 더 많았기 때문이다. 우주가 태어난 지 10-³⁴초가 흐른 후, “물질과 반물질은 서로 충돌하면서 모두 소멸되었지만, 물질의 초과분(전체 양의 10억분의 1 정도)이 남아 장차 만들어질 천체의 원료가 되었다.” 물질, 실체, 존재자들이 모두 양수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우리 우주의 존재론도 양수의 존재론이 되었다.
음수(陰數)의 존재론을 상상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있음’(plus)과 ‘없음’(zero)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다르게, 가짜로, 반대로, 이상하게 있음’(minus)을 상상할 수는 없다. 우리가 그것을 상상할 때마다 그것은 ‘무’(nothing)로 편입되어 버릴 뿐이다. 우리는 무를 경계로 한 사건 지평선 너머로 가지 못한다. 사건 지평선(event horizon)이란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이 외부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경계면을 말한다. 블랙홀의 표면(밖에서 안으로 진입할 수 있으나 중력이 너무 강하여 빛을 포함한 모든 것이 탈출할 수 없는 경계면)이나 우주의 가장자기(공간의 팽창 속도가 빛보다 빨라서 그 너머로 나아갈 수 없는 경계면)처럼 무 역시 반우주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드는 사건 지평선이다. 그러나 사건 지평선 너머는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관찰하거나 도달할 수 없을 뿐, 그곳은 이곳과 다르게, 가짜로, 반대로, 이상하게, 있다, 저 마이너스 존재론, 음수로 이루어진 우주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런 우주에 사는 존재자들이란 어떤 모습일까? 손미의 시가 형상화하는 기묘하고 무섭고 아름다운 세계가 바로 그런 마이너스 우주의 세계인 것처럼 보인다.
- 1. 나는 바깥이다
음수로 이루어진 세계를 형상화하기 위해서는 역설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세계의 언어가 실체를 표현하는 양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실체(substance)란 여러 현상들 곧 성질, 크기, 상황, 작용, 관계의 변화 저변에 놓여 있는 항구적이고 지속적인 근원을 말한다. 모든 현상을 낳되 자신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 실체로서, 이것의 형이상(形而上) 버전이 신이고 형이하(形二下) 버전이 물질이다. 어느 쪽이든 실체는 플러스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인자다. 음의 존재자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 실체를 뒤집어 반(反)실체를 얻어 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한 번 씩 스푼을 저으면
내 피가 돌고
그런 날, 안 보이는 테두리가 된다
토요일마다 투명한 동물로
씻어 엎으면
달의 이빨이 발등에 쏟아지고
난간을 따라 걷자
깊은 곳에서
녹색 방울이 튀어 오른다
살을 파고
모양을 그리면서
백지 위 젖은 발자국은
문고리가 된다
다른 몸으로 나갈 수 있겠다
-「컵의 회화」전문
서시에서 손미가 든 반실체의 형상은 ‘컵’이다. ① 그것의 내면은 ‘휘저음’이고, ② 그것은 윤곽은 “안 보이는 테두리”이며, ③평소에 그것은 엎어진 채로 놓여 있다. ①보라, 컵의 내면은 텅 비어 있어서 그것은 어떤 물질로도 자신을 구성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다만 휘저어질 뿐인데, 그런 생생지변(生生之變)만이 그의 내면을 구성한다. 불변자(不變者), 부동자로서의 항구적 존재인 실체는 휘발되어 버렸다. 무(無)너머에서, 이름 붙일 수 없는 가변자(可變者), 운동자가 출현했다. ②컵과 다른 존재자를 구별해 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윤곽이다. 윤곽마저도 실체는 아닌데, 외면이나 내면이 ‘없는 것, 실체가 아닌 것’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이나 공기를가르는 경계선이나 절단면이 없듯(생기자마자 사라지듯) 없는 내면과 없는 외면을 경계 짓는 윤곽도 없다. 내가 “토요일마다 투명한 동물”이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평일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간신히 구별되겠지만, 외출하지 않는 토요일이 되면 나를 사물이나 사람과 구분 짓는 윤곽은 아예 사라져 버린다. ③컵에는 무언가가 담긴다. 하지만 “씻어 엎으면” 그마저도 불가능해진다. 엎어 놓은 컵은 아무것도 담지 못한다. 컵으로 표현되는 이 음수의 존재자는 어떤 기능으로도 환원되지 않으며, 양수의 존재자와의 관계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컵의 “안 보이는 테두리”는 “난간”으로 변형되었다가 끝내 “문고리”가 된다. 사라져 가는 윤곽은 무가 되어 가는 동물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존재자로 넘어가는 문턱이거나 문고리다. 컵은 텅 비고 다른 사물과 구별되지 않고 뒤집힘으로써, 실체와 존재와 기능에서 놓여나며 마침내 무한한 변화를 야기하는 무규정자가 된다. 시의 주체는 말한다. 이제 “다른 몸으로 나갈 수 있겠다.”라고. 이 시집은 그런 음수의 몸들에 관한 이야기다.
컵을 타고 내려가면
비바람과 폭풍
암초를 타고 사라지는 사람
나는 여기서
지느러미가
손과 발로 돋아나는 것을 본다
-「컵의 회화 2」부분
저 “비바람과 폭풍”이야말로 “스푼”을 저은 결과로 생겨난 무수한 생성과 변화를 뜻하는 것이며, 그 너머에는 노자가 말한 현빈(玄牝)과 같은 반(反)실체가 있다. 자신은 허공 속에 고요히 자리 잡았으면서도(곧 텅 비었으면서도) 무한한 생성을 낳는 이름 말이다. 폭풍우가 출현했으니 이쪽 우주의 존재자는 부서졌을 것이며(“암초를 타고 사라지는”), 그로써 그는 저쪽 우주에서 “지느러미가/손과 발로 돋아”난 다른 몸을 갖게 된다. 시집의 곳곳에서 우리는 이 다른 몸을 만난다.
이제 들여보내 다오. 나는 쪼개지고 부서지고 얇아지는 양파를 쥐고 기도했다. 도착하면 뒷문을 열어야지. 뒷문을 열면 비탈진 숲, 숲을 지나면 시냇물, 굴러떨어진 양파는 첨벙첨벙 건너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사라질 수 있겠다
나는 때때로 양파에 입을 그린 뒤 얼싸안고 울고 싶다. 흰방들이 꽉꽉 차 있는 양파를
문 열면 무수한 미로들
-「양파 공동체」부분
여기서도 “뒷문”으로 사라지는 일은 “흰 방들이 꽉꽉 차 있는 양파”의 세계로 진입하는 일이다. 이쪽 세계의 우리는 그것을 “무수한 미로들”로 체험할 수밖에 없다. 벗겨도 벗겨도 벗겨지기만 할 뿐 실체와 만날 수 없는 양파는 그 자체가 미지인 마이너스 우주의 존재자다. 겹으로 싸인 우주에서 살고 있는 “마트로시카”는 그 자체가 미로를 체현한 또 다른 양파들이며(「마트로시카」), “한 칸 한 칸, 나를 밀어”내고는 사라진 이들이 모여 있는 방도 양파의 방이다.(「체스」)
그러니 안을 열고 들어가도 나는 여전히 바깥이다. 나는 안팎의 경계를 끊임없이 지우는 경계의 존재이며, 모든 기능과 실질에서 놓여난 투명한 존재다. 이를테면 나는 모퉁이에서 나무 의자에 앉아 “사방무늬를 그리는 아가씨”(「달력의 거리」)인데, 창녀에 빗대어진 이 아가씨는 우리가 잡는 순간 사라지는 시간의 주인이기도 하다.
짐승 같은 귀퉁이를 돌면 또 다른 귀퉁이, 돌면 또 다른 귀퉁이
이제 나는 쫓는 길인지 쫓기는 길인지 잊었다네 아가씨여
-「달력의 거리」부분
추적이 실패로 끝나는 순간,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불현듯 안과 밖의 변증법에서 놓여난 존재가 된다. “문밖에서 우주가 울고 있다.”(「달콤한 문」) 뒤집어 말하면 나는 우주에서 배제되어 있다. 이곳이 바로 마이너스 우주다.
- 2. 나는 가짜다
이 반(反)세계, 마이너스 우주의 이미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거울 이미지다. 거울 이미지는 이 세계의 반전이면서도 실상이 아닌 허상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안팎의 변증법에서 놓여나 좌우 변증법의 세계로 들어간다. 모든 게 맞짝을 품고 있는 세계로, “모든 것을 그 거울상으로 대신해도 되는 것을 반사 대칭성(reflection symmetry) 또는 홀짝 대칭성(parity symmetry)이라고 한다.……반사 대칭성의 경우 그것은 만약 왼손 장갑이 존재한다면 오른손 장갑도 존재한다는 것 즉 좌선당이 존재한다면 우선당도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마이너스 우주는 플러스 우주의 필연적이고 논리적인 귀결이다. 플러스 우주가 실상이라면 마이너스 우주는 허상인데, 중요한 점은 그것이 이 우주의 이미지를 복제함으로써 얻어진다는 점이다.
이 징그러운 것 좀 뽑아 줘
오이가 입을 벌린다 그런 날
아빠를 훔친 여자의
거울을 닦으면
뒤편에 고이는
내 모양
나는 사선으로 잘리며 다짐한다
이담에 커서 오이가 될 거야
-「칠레로 가는 기차」부분
그런데 실제로 “반사 대칭성은 엄밀하게 성립하는 대칭성이 아니다. 그것은 깨진 대칭성의 한 예이다. 무엇인가가 중성미자의 거울상에 해당하는 것을 실체보다 훨씬 더 무겁게 만들었다. 이것은 다른 입자들에도 아주 작지만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마치 자연의 거울이 유원지의 도깨비집에 있는, 모습을 왜곡시켜 보여 주는 거울처럼 약간 일그러진 것과 같다.” 이 시의 거울상도 그렇다. 치통 때문에 치과에 갔다. “이 징그러운 것 좀 뽑아 줘” 무지막지한 통증을 불러오는 이것 좀 뽑아 버려. “징그러운”에서 “고이는
” 이, 다시 “고이”에서 “오이”가 나왔다. 이빨을 뽑고 대신 물린 거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저 오이야말로 현재를 왜곡에서 비춰 주는 거울상이다. 나는 오이처럼 잘리며 오이가 될 거라고 다짐했다. 그 사이로 “아빠를 훔친 여자의/거울” 하나가 출현한다. ①아빠의 마음을 훔친(닦아준) 여자라면 엄마일 것이고, ②훔친(도둑질한) 여자라면 다른 여자일 것이다. 거울 “뒤편”에 내가 있었다면 나는 ①엄마를 닮았거나 ②다른 이의 남자를 빼앗은 그 다른 여자의 운명을 따라갔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나는 여자의 거울상이다.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의 거울상, 곧 저쪽 세계의 도플갱어가 출현한다.
문을 닫자 이곳은 암전이다 우린 재채기로 서로를 알아봤다
새벽 네 시, 당신을 찾으려 냉장고 속으로
들어갔다
당신이 데리러 오지 않았으므로
나는 알몸으로
한 칸씩 부서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한 움큼 집어 갔다
추락한 후 우리는 딱 한 번 만나 시계를 똑같이 맞추고 헤어졌다
당신은 정전된 과일을 밟으며 갔다
당신이 조립한 마지막 칸
그 방에 걸려 있는 그림 속
쌓이 사탕 더미에서
오렌지 주스가 흐르는 새벽 네 시
나는 야채 칸 모양으로
오랫동안 녹아 있었다
우리의 고향은 아주 먼 곳이지만
당신과 나는 딱 한 번 만나 발목에 찬 시계를 똑같이 맞추고 헤어졌다
문을 닫으면 북반구의 어둠이 시작되고
이제 당신은 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도플갱어」전문
연인과 헤어졌다. 서로에게 포함된 시간이 있었으나, 지금 나는 재채기로나 상대가 있다는 걸 알아챌 만큼 캄캄한 어둠에 속해 있다. 이곳은 냉장고 속과 같아서 나는 칸칸이 구획된 채 얼어 있거나 오렌지 주스처럼 녹아 있다. 왜 아니겠는가? 내가 당신의 도플갱이인데, 사랑하는 이를 놓친 후 나는 당신의 반쪽으로 살아간다. 그 삶은 유폐된 삶, 동결과 해빙을 반복하는 삶, 캄캄한 삶이다. 거울 속 세계는 그렇게 갇혀 있고 굳어 있고 어둡다. 당신은 끝내 도플갱어인 “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도플갱어는 잃어버린 사랑의 논리적 귀결이 될 것이다. 사정은 거울 이편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저기
흑백의 코끼리가
거울 속 자기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볼 때
우리는 한 번쯤 부드러운 지구로 여행을 가자
그곳에 박제된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는
누가 있다
번개가 치면 내가 아닌 것들이 내린다
어디선가 만난 적 있는
낯선 폭우
-「누가 있다」부분
플러스 우주 역시 마이너스 우주의 거울상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도 지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만난 적이 있다. 저 “낯선 폭우” 속에서, 모든 것이 휘저어진 혼돈의 시간에, 시집의 곳곳에서 우리는 이 도플갱어를 만난다.
숙주는 궁상했다//묶여 있는 개와 나는/같은 하늘을 썼다
-「Rule」부분
우린 각각, 반대편 행성에서 쓰레빠를 신고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물개위성」뷰뷴
내 무게의 절반은 내가 아니고/때때로 새를 토하며 생각한다
-「젤리」부분
도플갱어는 그리움의 표현(나는 나의 반쪽인 그를 생각한다)이자 회상의 형식(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만났어야 한다)이지만, 미래에의 얘기는 아니다. 그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도플갱어를 만난 사람은 죽음을 맞는다고 한다. 두 명의 내가 동일한 우주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대칭성은 모든 입자를 그 반입자로 대체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면 양전하를 띤 것, 예를 들어 양성자는 음전하를 띤 입자, 즉 반양성자로 바뀐다. 비슷하게 양전자가 보통의 음전하를 띤 전자를 대신한다. 수소 원자들은 양전자와 반양성자로 이루어진 반수소 원자로 대체된다. 그러한 반원자들은 사실은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적이 있다. 아주 약간, 반분자를 만들기에는 모자랐지만 말이다. 하지만 반분자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반인간도 가능하지만 그들에게 ‘반음식’을 주어야 한다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 사실 당신은 반인간들을 멀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질이 반물질을 만나면 광자를 방출하며 폭발해 소멸할 것이다. 당신이 무심코 반인간과 만나 악수를 할 때 생기는 폭발은 핵폭탄과 맞먹는다.” 그것은 두 세계의 소멸을 의미한다. 만남을 갈망하지만 만날 수는 없는 운명이 도플갱어와 나 사이에 가로놓여 있다.
- 3. 나는 귀신이다
정말 그를 만날 수는 없는 것일까? 다른 세계와의 접촉면이 전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것일까? 아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둘이 만나서 죽을 수밖에 없다면, 죽어서 만나면 된다. 귀신이나 유령이 되어 그와 만나는 거다. 양수의 우주인 이승을 맴도는 마이너스 존재들은 그런 의미에서 모두 귀신이거나 유령이다.
그네의 목표는 끊는 것, 끊어 버리는 것
우리는 그네에 한 개씩 앉았다
엉덩이에 밧줄을 매단 이런 우아함과 관계있고 싶다. 목에 줄을 감고 공중에 매달린 고상한 사람들과 말을 하고 싶다
아무도 오지 않는 찻잔 속
불쑥불쑥 나타나 다오, 귀신이라도
뛰어내릴 수 없다면 목에 꼭 맞는 밧줄이라도……내 머리 위에 꼬리라도, 신선한 밧줄이라도……
내내 괴롭다, 그네를 타기 전에 그네의 의사를 묻지 않은 것이, 바지를 입기 전에 바지의 의사를 묻지 않은 것이, 차를 마시기 전에 찻잔의 의사를 묻지 않은 것이
그네의 목표는 희미해지는 것, 찻잔에 들어가 목만 내밀고 있다. 오랫동안 나를 우려냈는데 왜 아무도 오지 않는 걸까
우리의 목표는 희미해지는 것, 그리고 끝내 희미해지는 것
-「공중그네」전문
그네의 전후 운동은 줄에서 벗어나려는 그네의 몸부림이기도 하다. 그네는 내내 자신의 전 존재를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데 바친다. 하지만 줄이 끊어지면 그네는 더 이상 그네가 아닐 것이다. 그네는 엉덩이에 밧줄을 맨 존재지만 그 줄을 목에 맨다면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목에 줄을 감고 공중에 매달린 고상한 사람들”은 죽어서 그네처럼 흔들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네 저편에서 나타나는 이가 “귀신”이라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마이너스 우주의 존재자들이 우리의 플러스 우주에 나타나는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그네를 맨 저 줄이야말로 두 개의 우주를 관통하는 초끈 같은 것이 아닐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열린 끈의 양끝이 브레인을 이탈할 수 없기 때문에 여분의 차원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는 점이다. 실에 꿰인 채 움직이는 구슬은 실을 이탈할 수 없는 것처럼, 광자는 우리가 속해 있는 3-브레인, 즉 3차원 공간을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광자는 전자기력을 매개하는 입자이므로 결국 전자기력 자체가 3차원 공간 안에 갇혀 있는 셈이다.…… 약력과 강력도 전자기처럼 3-브레인을 이탈할 수 없다.…… 그러나 중력을 고려하면 사정은 조금 달라진다.…… 이들은 브레인을 이탈하여 다른 차원의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우리는 중력을 통해 여분의 차원과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 끈 역시 이 세계(3차원 브레인)에 비끄러매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없다. 광자(빛), 약력(원자 크기에서 모든 종류의 붕괴에 관여하는 힘), 강력(쿼크 사이에 작용하는 힘)이 모두 그렇다. 하지만 중력만큼은 다르다.(질량이 0이고 스핀이 2인) 중력자만큼은 다른 차원으로 자유롭게 진입할 수 있다. 그네야말로 중력에서 벗어나 다른 차원으로 진입하는 도구가 아닌가? 우리가 그네를 타고 다른 차원으로 갈 수 있다면, 도플갱어가 그네를 타고 다른 차원에서 우리 세계로 올 수도 있으리라. 이들의 이름이 귀신인 셈이다.
동생이 방문을 열었다
주인집 애가 떨어졌대
오랫동안 옥상에 서 있다가
니가 말했지
주인집 여자가 내 머리채를 잡았다
붉은 소파가 부들부들 떠는데
자매님들은 성경을 읽었다
튼튼한 귀신이 되는 꿈
주인집에서 빌린 테이프
그 속에 녹음된 말을
나는 동생에게만 했다
-「내림」전문
“애”가 떨어졌다고 했으니 낙태를 이르는 말이다. “주인집 애”는 중력의 영향을 받아서 그네를 타듯 다른 세상으로 갔다. “주인집 여자”는 내가 소문을 냈다고 여겨 “내 머리채를 잡았다.” 나 또한 그네처럼 흔들렸으리라. 소파가 우리 대신 부들부들 떨었다. 성경 속에서도 “귀신”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는 죽은 애의 거듭된 출현. 테이프에 녹음된 망자의 목소리처럼 낯선 그 출현과 관련된다. 시의 제목이 말하듯 귀신과의 만남은 신 내림. 곧 빙의다. 다른 차원끼리의 이종 교합이 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귀신은 그네를 타고 온다.
흔들린다//줄을 당겨 다른 곳으로 가려는 시도/아무도 없어?//나는 벽을 짚고/손에 묻은 비밀을 빨아먹었다
-「고층 아파트 유리를 닦는 사람」부분
이렇게 매일/나를 살해하는 건 누구인가?
-「체크 메이트」부분
식구들은 죽은 삼촌을 달래러 유원지에 갔죠/삼촌은 아가씨를/기다리느라 화가 나 있지
-「굿」부분
나는 긴 손톱을 들어/지나가는 유령을 자르며 논다
-「젤리」부분
이제 신들림의 형식을 빌려 저쪽 세계의 낯선 존재자들이 우리를 찾아온다. 그들은 저 바깥에서 우리 비밀을 엿듣고, 우리는 제사의 형식으로 그들을 살해하거나(그들이 죽었음을 확인한다는 얘기다) 달랜다.(그들은 우리가 찾아오지 않으면 화를 낸다) 그들은 젤리처럼 무형의 존재다.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네모반듯하게 잘라서 그릇에 담아야 한다. 정례화된 빙의의 자리가 있으니, 우리는 이를 제사라 부른다.
- 4. 나는 살이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으로 제사를 지내야 한다. 즉 우리는 시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이 봉헌 제물이기 때문이다. 본래 제사를 지낼 대 조상신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시(尸)라고 불렀다. 나는 나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쳐야 하며, 그래서 시동(尸童, 제사를 지낼 때 신위 대신 앉히던 아이)이 되어야 한다.
네가 지나가고 붉은 달이 지나갔다 우주에서 수백억 개의
일식이 시작되고 끝났다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멸종된 새 한 마리가 지나갔다. 뚜껑 닫힌 상자가 지나갔다 상자 속에서 구겨져 있던 개가 느리게 지나갔다 개장수가 따라갔다 엉덩이를 흔들며 걸어가는 여자들은 아름답다 여자들이 허리를 숙여 들여다보는 새장, 새장마다 문을 열어젖혔다 검은 자동차가 지나갔고 마지막 기차가 지나갔다 나는 늘 여기서 기차를 본다 저기, 12층 베란다에서 창문을 열고 내가 두 팔을 벌린다 다정한 연인이 들어 있는 검은 자동차, 그 지붕에 떨어지는 나를, 너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모두 지나갔다」전문
“네가 지나가고” 나서 모든 것이 지나갔다. 사람들도 동물들도 사물들도 갔다. “수백억 개의 일식”으로 대표되는 우주도 지나갔다. 마지막 기차도 그랬다. 그러나 아직 하나가 남았다. 그 모든 종말을 보아 온 나 역시 지나가야 한다. 이 시의 파국은 죽음으로써 헤어진 연인에게 마지막 말을 건네는 표독한 복수극이 아니다. 이 파국은 죽음으로써 상대의 행복을 완성하는 일, 자신을 그 행복에 봉헌하는 일에 가깝다. 이제 나는 귀신, 유령에서 시체로 변환되는데, 이것은 마이너스 존재자들의 출현을 불가역적인 것으로 바꾸는 변신담의 최종 국면이다. 이제 나는 육체를 얻었으며, 육체로만 대표되는 플러스 우주의 구성원이 되었다.
머리도 이름도 없는 나의 짐승에게/향기로운 제물이 필요했다는 것
-「초록 냉장고」부분
그만 좀, 앉을게/이제/나도 너의 살점인데
-「미끄럼틀」부분
장례식장에서 숟가락을 휘저으면/육개장 살코기는 너의 살 같았어
-「셋업」부분
너의 가방 속에 누워 있는 나를 늙은 암소가 핥는다. 나는 흐물흐물 녹아 이렇게 액체로 있다. 액체는 기내 반입할 수 없으므로 너는 나를 취소할 것이다
-「짐을 싸는 방법」부분
시체라는 것, 살코기로만 남았다는 것, 끔찍해 보이지만 사실 이것만큼 간절한 사랑이 다시 있을까? 간절한 그리움이 육체를 얻은 것이기에, 여기에는 그리움이 만들어 낸 창조 사역이 있다. “에너지의 격동이 심해지면, 아무것도 없는 진공 속에서 전자와 양전자(positron, 전자의 반물질에 해당되는 입자)가 갑자기 생겨날 수도 있다. 물론 빌려 온 에너지는 빠른 시간 내에 되돌려줘야 하기 때문에 진공 중에서 느닷없이 탄생한 전자와 양전자는 곧바로 합쳐지면서 소멸된다. 이런 현상은 에너지와 운동량이 취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물리량에 대하여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격렬한 에너지가 진공 속에서 물질과 반물질을 만든다. 저 에너지를 사랑이라 부르자. 그러면 우리가 지나왔던 경로가 곧 사랑의 경로임이, 마이너스 존재자들이 사랑에 빠진 자들임이 드러난다. 나는 바깥에서 태어난 마이너스 우주의 거주민이다. 사랑이야말로 짝-운동인데, 내 탄생에는 부가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도플갱이다. 우리에게 주어졌던 필연적인 만남 이래(사랑이란 회상의 형식이다) 나는 당신의 부정태, 마이너스 존재자로 살았다. 나는 간절했으나 당신을 만날 수 없었다. 소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었으므로, 그래서 나는 소멸된 존재로 당신을 만났다. 나는 귀신이자 유령이다. 빙의, 신 내림의 형식으로 나는 당신 몸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살이 되었다. 살(flesh)은 육체다. 영혼이 저 세상(플러스 우주)의 존재 형식이다. 이 세상이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에 봉헌된 제물이 되었다. 나는 시체다. 당신의 가방 속에서 나는 흐물흐물 녹아 있다. 간절한 슬픔으로, 손미가 우리에게 소개한 마이너스 존재론은 기묘하고(저 세계는 불가지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고(귀신과 시체의 존재론이기 때문이다) 아름답다(간절함이 얻어 낸 형상이기 때문이다) 없는 자들마저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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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조용하고 깨끗한 풍경 속에서 사물이 영혼이 되어 흐르는 이야기, 그 영혼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또 다른 이야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시적 언술을 증발시키는 방법이 남달랐다. 시들에 깃든 영혼의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도 조용하고 고독한 육체의 흐릿한 행동 하나가 눈앞에 고요히 떠올랐다. 거꾸로 그 흐릿한 몸짓 하나를 따라가면 문을 지나 숲, 숲을 지나 시냇물, 시냇물을 지나 사라지는 미로 속의 영혼이 하나 열리는 경험이 있었다. 욕심 없이 가는 선으로 그은 묘사가 머나먼 은유를 불러와 사물의 공간을 드넓게 만들었다. - 김혜순(시인)
앙파 하나가 쪼개지는 사건 속에서 우주를 보여 주는 시인이다. 세상과 인간의 마음을 통과하는 무시무시한 동요(動搖)가 유리의 실금과도 같은 식물의 결 속에서 섬세하게 그려진다. 구체적인 사물들이 우리의 넋을 떠맡은 채 녹거나 무너지거나 세상의 어떤 알 수 없는 날카로운 조각들에 찔리는 모습을 훌륭하게 포착하는 것이 손미의 시 세계이다.
- 서동욱(시인, 문학평론가)
체스판의 규칙이나 달력의 한 칸 한 칸처럼 정해진 방향으로 언제나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밀려가는 와중이었는데, 예상할 수 없었다. 그가 ‘양파’를 한 겹 벗길 때, 우리의 ‘무의식’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나와 타인들이 어떻게 비밀의 공동체를 이루는지. 그가 다시 ‘양파’의 흰 살을 벗기려고 하고 익히려고 한다. 나는 예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무한 ‘양파 공동체’에서는 당신의 살점도 뜯기고 당신의 살코기도 함께 익고 있다. - 김행숙(시인)
음수陰數의 존재론을 상상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있음’(plus)과 ‘없음’(zero)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다르게, 가짜로, 반대로, 이상하게 있음’(minus)을 상상할 수는 없다. 우리가 그것을 상상할 때마다 그것은 ‘무’(nothing)로 편입되어 버릴 뿐이다. 우리가 관찰하거나 도달할 수 없을 뿐, 그곳은 이곳과 다르게, 가짜로, 반대로, 이상하게, 있다. 저 마이너스 존재론, 음수로 이루어진 우주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런 우주에 사는 존재자들이란 어떤 모습일까? 손미의 시가 형상화하는 기묘하고 무섭고 아름다운 세계가 바로 그런 마이너스 우주의 세계인 것처럼 보인다. 손미가 우리에게 소개한 마이너스 존재론은 기묘하고(저 세계는 불가지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고(귀신과 시체의 존재론이기 때문이다.) 아름답다.(간절함이 얻어 낸 형상이기 때문이다.) 없는 자들마저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고 있다.
― 권혁웅(시인, 문학평론가) | 작품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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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 시인∥
∙ 1982년 대전에서 태어낫다
∙ 2009년《문학사상》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 시집『양파 공동체』로 제32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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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소감
올해로 32회를 맞는 ‘김수영 문학상’에 손미(31·사진) 시인의 ‘양파 공동체’ 외 49편이 선정됐다. 그는 지난 2009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나의 목표는 살아 있기입니다.
지금까지 흐지부지 그만둔 일이 많습니다. 기타를 배울 땐 손가락이 아파서 그만뒀고, 희곡은 신춘문예에서 떨어진 후 다시 쓰지 않았고, 대학원도 그만뒀고, 다니던 직장은 2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만뒀고, 애인들은 적당히 만나다 헤어졌습니다. 돌아보니 중간에 그만두지 않은 것은 시 쓰는 일밖에 없습니다.
얼마 전 두 달 동안《대전일보》에 칼럼을 쓴 적이 있는데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네가 그렇게 잘났어?”라는 말과 “앞으로 글을 발표할 땐 회사의 허락을 받아라.”는 말을 듣고 사유서를 제출했지요. 내가 등단한 문학잡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왜 신춘문예에 도전하지 않느냐고 훈수를 두고 부모님은 주말 드라마를 보며 우리 딸도 저런 거 하나 써 봐라 말씀하십니다. 회사 동료들과 술을 먹다가 나는 시인이다 소리치며 펑펑 울기도 했고 일개 에디터가 의사의 문장을 다듬었다는 이유로 한바탕 난리를 겪었습니다. 그런 밤들에 나는 시를 썼습니다. 시를 쓸 땐 죽었던 심장과 눈동자와 입술과 손가락에 다시 생기가 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그 순간만큼 나는 고체가 아닌 생체가 됩니다. 시간과 공간은 사라지고 먼지 한 톨까지 내게 귀를 기울여 줍니다.
불안한 날들에 용기를 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어머니께 감사드립니다. 귀신같은 나를 견뎌 준 가족들에게도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제, 다시 방으로 들어가 책상 앞에 앉겠습니다. 그리고 나를 마주 보겠습니다. 버틸 수 있는 용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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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리뷰
2013년 제3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양파 공동체』가 출간되었다. 2009년《문학사상》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손미 시인은 최근 활동하는 젊은 시인 가운데 놀랍고 신선한 자신만의 언어를 가진 시인으로 주목을 받아 왔다. “조용하고 깨끗한 풍경 속에서 사물이 영혼이 되어 흐르는 이야기, 그 영혼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또 다른 이야기라 부를 만큼 시적 언술을 증발시키는 방법이 남다른”『양파 공동체』는 “영혼 안에 생기는, 요란스럽지는 않으나, 작으면서도 무시무시한 동요動搖를 가시화하는, 유리의 실금과도 같은 세계를 잘 구현”하고 있으며, “한 개의 길을 찾으려고 했는데 무수한 미로들”이 나타나고, “한 개의 열쇠를 찾으려고 했을 뿐인데 열쇠들은 무한 변용되고 증식”하는 시 세계를 보여 준다. 이번 시집은 1986년 고은의『전원시편』을 시작으로 28년간 한국 시단을 이끌어 온 [민음의 시] 200번째 시집이어서 그 의미가 더욱 깊다. [민음의 시]와 [김수영 문학상]의 정신이 오롯이 녹아 있는 이 시집 안에는 섬뜩하고 생경한 이미지, 놀랍고 신선한 언어들이 꽉 찬 양파 속처럼 단단히 들어차 있다.
양파 하나가 쪼개지는 사건 속에서 우주를 보여 주는 시인 손미의 첫 시집
사물이 영혼이 되어 흐르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마이너스 우주의 세계
2013년 제32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양파 공동체』가 출간되었다. 2009년 《문학사상》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한 손미 시인은 최근 활동하는 젊은 시인 가운데 놀랍고 신선한 자신만의 언어를 가진 시인으로 주목을 받아 왔다. “조용하고 깨끗한 풍경 속에서 사물이 영혼이 되어 흐르는 이야기, 그 영혼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또 다른 이야기라 부를 만큼 시적 언술을 증발시키는 방법이 남다른” 『양파 공동체』는 “영혼 안에 생기는, 요란스럽지는 않으나, 작으면서도 무시무시한 동요動搖를 가시화하는, 유리의 실금과도 같은 세계를 잘 구현”하고 있으며, “한 개의 길을 찾으려고 했는데 무수한 미로들”이 나타나고, “한 개의 열쇠를 찾으려고 했을 뿐인데 열쇠들은 무한 변용되고 증식”하는 시 세계를 보여 준다. 이번 시집은 1986년 고은의『전원시편』을 시작으로 28년간 한국 시단을 이끌어 온 [민음의 시] 200번째 시집이어서 그 의미가 더욱 깊다. [민음의 시]와 [김수영 문학상]의 정신이 오롯이 녹아 있는 이 시집 안에는 섬뜩하고 생경한 이미지, 놀랍고 신선한 언어들이 꽉 찬 양파 속처럼 단단히 들어차 있다.
살아서는 만날 수 없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 소멸하는 존재들의 세계
32번째 김수영이 탄생했다. 2013년 제32회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손미 시인은 2007년『검은 표범 여인』의 문혜진 시인 이후 6년 만에 여자 시인의 수상이라 더욱 반갑다.
손미 시인의 낮과 밤은 다르다. 낮에는 직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시를 쓴다. 얼마 전 한 신문에 칼럼을 연재했는데, 다니는 직장에서 그 사실을 알고는 “네가 그렇게 잘났어?”라는 말과 함께 앞으로 글을 발표할 땐 회사의 허락을 받으라며 사유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회사 동료들과 술을 먹다가 “나는 시인이다.” 소리치며 펑펑 울기도 했다. 그런 밤들에 손미 시인은 시를 썼다.
“시를 쓸 땐 죽었던 심장과 눈동자와 입술과 손가락에 다시 생기가 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그 순간만큼 나는 고체가 아닌 생체가 됩니다. 시간과 공간은 사라지고 먼지 한 톨까지 내게 귀를 기울여 줍니다.”([김수영 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양파는 ‘공허’로 꽉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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