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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28일(월) 주일설교 마태복음 2:13~23 ‘하나님의 인도하심' 새찬송가 384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어디를 갈 때에 누군가가 나를 인도해 주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특히 낯선 나라에 갈 때에 나를 인도해주고 안내해 주는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그곳의 언어와 풍습을 잘 알고 지리도 잘 아는 사람이 있으면 참 안심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 해방되어 출애굽한 것은 참으로 특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를 지나야 했습니다. 광야는 보기에 척박하고, ‘낯설고’, ‘험해 보이고’,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아무도 그곳의 지리를 잘 알거나 요소 요소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곳이었습니다. 이 광야에서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도자’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도자’는 누구였을까요? 물론 모세가 그 백성을 끌고 나오는 지도자였지만 진정한 의미의 ‘인도자’는 아니였습니다. 왜냐하면 모세 자신도 그 광야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참 된 인도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왜 인도하실까요? 민수기 15:41에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하여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바로 내 하나님이 되시고 싶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택하기도 전에 만유의 주이시고 만왕의 왕이신 우리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고 싶어서 나를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왠 은혜입니까? 우리 주변을 보세요 아무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도 오늘도 내일도 저와 여러분을 인도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고 싶으셔서 그러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실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구원 계획에 의해 인도하십니다(13~15절)
13절에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베들레헴이 온 동방박사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헤롯왕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한다는 계획을 알려주시고 애굽으로 피할 것까지도 알려 주십니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13절) 하나님은 요셉의 가정을 인도하십니다. 요셉의 가정에는 하나님의 인류 구원계획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헤롯왕의 살해 위협에 하나님께서 위기감을 느끼시고 피할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아기 예수님이 만일 헤롯왕에게 살해를 당했다면, 온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잘 드러난 구절은 요한복음 3:16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어, 누구든지 구원시키려고 한 것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거슬러 올라가 보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이었습니다. "너와 네 후손에게 복을 주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구원계획을 지금까지 변치않고 이루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이 한국 땅에도 들어와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결국 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신앙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첫단계는 소문으로 듣고 있는 신앙입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더라는 것이죠. 둘째단계는 지식으로만 배운 신앙입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 성경을 많이 배워 안다는 것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마지막 단계는 실제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체험한 신앙입니다. 신앙이 자기체험에서 우러나올 때 비로소 참 신앙의 단계에 이릅니다. 욥은 자신이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후에 고백하기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으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은 시편 34편 8절에서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그랬습니다. 그리고 10절에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맛본다”는 말의 성경 원어는 “타암”인데, 이 말은 ‘먹을 목적으로 먼저 맛이 적당한 지를 혀로 시험하거나 평가하다’는 뜻입니다. 대개 우리가 음식의 간이나 맛을 볼 때 숟가락이나 국자로 조금 떠서 먹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경우에 쓰는 말이 “맛본다”라는 것이죠. 이 ‘맛본다’, ‘먹는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은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맛을 볼 수 있는 현실적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은 조금이라도 맛보면 금방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맛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보호하심’, ‘하나님의 선하심’, 그리고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음”을 맛보아 아시기를 바라며,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복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복들을 맛보아 알고 체험하며 간증하는 그런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적용) 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 속에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지난 날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아 안 체험이 있다면 함께 나누어 볼까요?
둘째로 하나님은 말씀으로 인도하십니다(16~18절, 23절)
마태복음 2장 본문에서만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이루려 하심이라가 세 번 나옵니다. 16절은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분노하여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두 살 부터 그 아래로 다 죽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7,18절은 예레미야 31장 15절 말씀을 인용하며 이 사건으로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십니다. 예레미야 31:15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오늘 본문 15절에도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 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 백성이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면서 섬겼던 죄와 우상숭배로 깊이 물든 곳입니다. 유대인의 탈무드를 보면 세계 우상의 90프로가 애굽에 있고 나머지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애굽의 세력이 무섭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세력이니까 노예 생활을 해도 애굽이 좋은 겁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돈과 출세가 좋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애굽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내가 여전히 돈도 학벌도 외모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에서 불러내셨습니다. 내 힘으로는 애굽에서 나올 수 없어서 세상 애굽에서 나를 불러내신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또한 23절 말씀에도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민수기 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분명한 말씀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배것들에게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며,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보호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어렵고 힘들다하여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욥을 통해 이렇게 고백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입니다. 결국 우리의 구원자 되신 주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말씀하신 자리까지 가게 하십니다. 바울이 로마에 죄수가 되어 배를 타고 항해하여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도 주님은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행27:24)고 하시며 그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유라굴로의 광풍 속에서 바울을 살려주시고, 바울과 함께 한 사람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그리고 결국그 자리에 서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가는 저희들을 보호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3:1~3절 말씀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야훼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이사야 41:10 말씀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시편 23편의 목자되신 하나님은 다윗을 포함한 하나님의 자녀가 이렇게 고백하게 하십니다. 6절 말씀입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적용) 하나님은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고 있습니까? 내가 믿고 의지하는 말씀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셋째, 하나님은 낮은 곳으로 인도하십니다(19~23절).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의 꿈에 나타나 이제 아기와 마리아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19,20절). 그 때에도 요셉이 순종하여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는 데, 요셉은 헤롯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합니다(22절). 그러자 다시 요셉의 꿈에 나타나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이란 동네로 요셉의 가족을 인도하십니다(23절). 그래서 요셉의 가정이 나사렛에 정착함으로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 사람으로 칭함을 받게 하십니다. 요셉과 예수님이 정착하신 나사렛은 전통적으로 빈민촌으로 사람들에게 별 볼일 없는 장소처럼 여겨졌습니다. 나사렛은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서 이방인의 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 이 나사렛이란 용어는 분명히 어떤 사람을 비난하기 위한 표현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달리셨던 십자가에 있었던 판에 쓴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에 이 표현을 왜 넣었는가를 잘 설명해줍니다. 그것은 조롱을 위한 죄명입니다. 그런 곳에서도 예수님은 그 분의 사역을 잘 감당하십니다. 그 당시 가장 오지요, 가장 못살던 동네에서도 구원의 사역을 이루기 위해서 잘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비천함을 경험하셨기에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낮고 무시받은 환경을 핑계 삼아 사명을 외면하지 않고 순종하심으로 사역을 감당하십니다. 무시받은 환경으로 내세울 것 없는 처지로 내려가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거기서 내가 주님을 의지하여 나의 책임을 다할 때 그곳이 말씀이 성취되는 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높은 곳을 향하여 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권리도 주장하지 않으셨다. 어떻게 낮아 지셨나요?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은 권리를 다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 권리를 주장할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권리를 주장을 반으로 줄이기만 한다면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권리를 다 버리셨습니다. 자기를 완전히 비우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아예 권리를 버리셨습니다.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버리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 오셨습니다. 사람의 입장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옛 사람 나는 죽었다.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신다. 그래서 당연히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정상이다.
[류원용의 시]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 주여! 사람들이 말합니다. 당신은 낮은 곳에 임하셨던 분이시라고.. 주여! 이시간 저는 여쭙니다. “낮은 곳에 길이 있사옵니까?” 주여! 사람들이 또 말합니다. 길은 낮은 곳에 있는 것이라고.. 주여! 모두가 알고 있는 말 저는 또 여쭙니다. “낮은 곳엔 고난도 기다리는 것 아닌지요?” 주여! 낮은 곳으로 임하셨다는 주님 말씀 “할 수 있으시다면 이 잔을 피해가게,,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라면” 주여! 낮은 곳이라는 심중의 碑銘(비명) 안고, 오늘도 외는 “할 수 있으시다면 이 잔을 피해가게,, 그러나 당신의 뜻이라면”
우리가 낮은 곳, 비천한 곳으로 인도되어서 스스로 비참함이나 열등감에 빠지지 말고 ‘깊은 고통 중에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내 삶을 변화시키실 건가’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이타적인 삶을 살도록 주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적용) 예수님을 비천한 갈릴리 나사렛 사람으로 칭함 받게 하신 것도 말씀을 이루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것을 믿습니다. 어떤 비천함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내가 경험한 비천함과 낮아짐을 통해 이타적인 삶을 살고 계십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려면?
1.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려면? 첫째,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모셔야 합니다(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라고 고백하려면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4영리의 영접기도문입니다. “주 예수님, 나는 주님을 믿고 싶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 값을 담당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나를 다스려 주시고, 나를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려면? 둘째,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마25:13).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면 세상과 타협하며 죄짓는 육적인 삶을 살아가도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여 지극히 세상적이고 육적인 죄된 삶을 반복하게 됩니다. 도리어 어리석고 미련한 삶을 회개하고 떠나기보다 그것을 합리화하고 죄된 삶이 자신의 삶을 잠식하도록 방관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영혼이 메마르고 피폐해지며, 병들고 죽어가게 되는데 이것은 영혼 뿐만아니라 삶 또한 함께 피폐해지고 병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으면 세상의 환란과 어둠의 권세 앞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둠의 권세가 우리들 영혼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두려워하며 줄행랑치게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 있을 수 있게 되는 것일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으로 충만하게 무장되어 있는 것을 뜻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늘 영적으로 깨어 어둠과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별된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찾고 구하며 끊임없는 믿음의 노력과 경주를 온전히 행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려면? 셋째, 즉시 순종해야 합니다(14절). 요셉은 주의 사자가 꿈에 나타나 애굽으로 피하라는 명령에 ‘즉시 순종’합니다. 이스라엘과 애굽 사이에는 큰 사막지대가 있어 밤에 갓난아기와 산모를 데리고 여행하기를 위험했기 때문에 더욱 순종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요셉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살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즉시 순종하는 사람과 나중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하는 사람들입니다. “즉시 순종”하는 성경의 인물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의 대부분은 즉시 순종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12:1)고 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생각해 볼께요, 기도해 볼께요…하지 않고 즉시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습니다.(창12:4) 또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할 때도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했습니다(창22:2). 즉시 순종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순종은 내 뜻을 접어야 하고 내 생각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즉각적으로 순종할 때,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나를 지켜주십니다.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순종합니다. 용서하지 않겠다고 버티지만, 결국은 용서합니다.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지만, 결국은 사랑합니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즉시 순종은 풍랑이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순종은 풍랑이 있습니다. 즉시 순종은 요나와 같이 물고기 뱃속을 거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 순종은 물고기 뱃속을 거치게 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우리를 향하신 구원계획을 따라 이루어집니다. 매일 매일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는 때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인도하십니다. 나를 애굽에 두신 것도 애굽에서 불러 내신 것도 말씀이 내 삶에 이루어지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낮은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갈릴리 나사렛처럼 무시받는 환경이라도 거기서 주님을 의지하며 나의 책임을 감당할 때 그것이 말씀이 성취되는 곳이 됩니다.
기도 주의 말씀에 즉시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해주옵소서. 늘 두려움 가운데 있더라도 날마다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아 훈련을 잘 통과하고 말씀을 이루는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두려움 가운데 있는 자들과 함께 낮고 천한 자리라 할지라도 그 곳에 머물며 말씀대로 믿고 살고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