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오피니언 입력 2021-05-03 03:00
꿈인가, 현실인가? 메타버스의 세상[정우성의 미래과학 엿보기]
정우성 포스텍 산업경영공학과 교수
20여 년 전 한 여배우가 등장하는 광고를 모아서 하루의 삶을 재현하는 놀이가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비누로 세수하고 샴푸로 머리를 감는다. 정수기로 시원한 물을 마시고 컴퓨터로 영어 공부도 한다. 신용카드로 쇼핑하고 돌아온 최첨단 아파트에서 야경을 즐긴다. 워낙 많은 광고에 나왔기에, 출연했던 광고만으로도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모든 생활을 만들어냈다. 중국의 장자는 꿈에서 나비가 되어서 즐겁게 놀다가 깨어나서는, 본인이 나비의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었는지 알기 어렵다며 ‘호접지몽’이라는 말을 남겼다. 무엇이 꿈이고 현실인지, 어디까지가 광고이고 실제 삶인지 알기 어려운 모호함이다. 요즘 떠들썩한 ‘메타버스’는 무언가를 초월한다는 의미의 메타와 현실 세상을 일컫는 유니버스를 합친 말이다. 즉 현실을 초월한 세상, 모호한 세상이 메타버스이다. 이 말은 소설에 가장 먼저 등장한다. 1992년 발표된 소설 ‘스노우 크래쉬’에서 메타버스라 불리는 가상의 세상에 들어가기 위해 ‘아바타’라는 가상의 신체를 빌린다. 현실에서의 메타버스와 아바타는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0년 무렵 등장한 여러 인터넷 서비스 중 싸이월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미니홈피’ 덕분이다. ‘싸이월드’에서는 인터넷 속에 자신만의 방을 꾸밀 수 있었다. 예쁜 가구를 배치하거나 화사한 벽지로 장식한다. 거기에 인터넷에서의 자신인 아바타에도 마음에 드는 옷을 입히고, 현실에서는 차마 해보지 못했던 헤어스타일을 시도할 수 있다. 그리고 싸이월드에서만 통용되는 ‘도토리’라는 가상화폐를 구입했다. 투박한 침대는 도토리 몇 개만 줘도 살 수 있었지만, 화려한 가구는 꽤 많은 도토리가 필요하다. 생일을 맞은 친구에게 케이크를 선물하거나 명절날 세뱃돈을 주지 않고, 도토리를 선물로 주고받기도 했다.
기술이 발전하고 인터넷에 익숙해지면서 미니홈피와 같은 가상 세계도 발전을 거듭한다. 영화 ‘터미네이터’를 보면 로봇인 주인공에게는 눈앞에 있는 상황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곧바로 보인다. 최근에는 로봇이 아니라도 비슷하게 정보를 제공하는 도구가 소개되고 있다. 가령 자동차 앞유리에 속도를 비롯해서 내비게이션 정보를 비춰 주는 것 역시 터미네이터의 기술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구글은 2014년 ‘구글 글라스’라 이름 붙은 안경을 시장에 내놓는다. 구글 글라스는 증강현실(AR·Augmented Reality)을 이용한다. 증강현실은 실제로 존재하는 환경에 가상의 정보를 증강하여 덧입힌다. 그래서 가상의 것들이 원래의 환경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만화영화에서나 보던 포켓몬을 휴대전화로 잡는 ‘포켓몬GO’가 증강현실을 이용한 게임이다. 휴대전화의 카메라로 주변 공원을 비추면 벤치 위에 올라선 포켓몬이 보인다. 휴대전화 화면에 있는 도구를 던져서 포켓몬을 잡는다.
코로나19의 대유행은 많은 것을 바꾸었다. 실제 세상이 가상의 공간으로 옮겨지는 것을 가속화하였다. 인터넷으로 진행되는 화상수업을 넘어, 입학식도 가상으로 이루어진다. 미니홈피처럼 가상의 캠퍼스를 인터넷에 만들고, 학생들의 아바타가 가상의 캠퍼스에서 개최되는 가상 입학식에 참석하는 식이다. 기업에서도 화상회의를 넘어, 가상의 사무실이나 회의실에서 각자의 아바타가 만나는 가상 회의를 한다. 방탄소년단이나 트와이스는 가상공간에서 팬 사인회를 개최하거나 신곡 발표를 한다. 비록 가상공간의 아바타들이긴 하지만, 실제 세상에서 팬과 아이돌이 만나는 것과 같은 만남이 이루어진다.
어린아이들도 닌텐도의 ‘동물의 숲’이나 ‘마인크래프트’와 같은 게임에서 각자의 마을을 만들고 서로를 방문한다. 선물을 주고받고 가상의 공간에 모여 파티를 열기도 한다. 가상현실을 눈앞에 보여주는 안경, VR 헤드셋을 쓰면 마치 전쟁터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게임을 즐길 수 있다. 멀리 가지 않아도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고, 우주정거장 내부를 둘러보는 체험도 소파에 앉아서 할 수 있다.
메타버스에는 증강현실과 빅데이터 등 여러 기술이 담겨 있다. 또한 많은 데이터를 전송하기 위한 통신 기술이 있고, ‘도토리’ 같은 거래를 돕는 블록체인 기술도 필요하다. 메타버스를 꿈꾸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이다. 그간 기술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하여 더디게 발전하기도 했다. 현실 세계에 익숙한 탓에 가상의 세상에 발 들이는 것을 주저한 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의 꿈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휴대전화 헤드셋이 등장한 초기, 길 한가운데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을 보고 놀라곤 했다. 이제 메타버스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VR 헤드셋을 쓰고 홀로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만날 날이 머지않았다.
* 오늘의 묵상 (220730)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허망하고 충격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마태 11,11 참조)이라고 하신 이의 죽음에서 어떠한 영웅적인 모습이 보이지도, 하느님의 극적인 개입이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그저 ‘힘 있는 자들’이 벌인 잔치의 ‘눈요깃감’에 지나지 않는 허무한 죽음으로 지상에서 요한의 삶은 끝이 납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의 죽음에서 불사불멸까지는 아니더라도 특별한 모습이 드러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우리에게 충격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적어도 세상 권력과의 거창한 투쟁 끝에 장렬한 죽음을 맞기를 기대하는 우리에게 그러나 수많은 순교자와 예언자,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에서조차 우리가 찾는 특별함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날 정의와 평화, 진실을 부르짖는 이들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목숨은 오히려 세상을 지배하고, 세상의 구원자로 자처하는 이들이 어쩌면 가장 없애 버리고 싶은 목숨, 가장 하찮게 여기는 목숨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복음의 핵심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그에 따르는 비통함이 아닙니다. 악이 하느님의 사람을 죽이지만, 악의 힘으로는 하느님의 사람도, 하느님의 나라도 결코 끝낼 수 없다는 희망을 선포하는 데에 있습니다. 악에 의해서 결코 끝나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우리의 일상에서부터 체험해 봅시다.
(김인호 루카 신부 대전교구도룡동성당주임)